밀회
윌리엄 트레버 지음, 김하현 옮김 / 한겨레출판 / 2021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모두 12편의 소설. 각각의 이야기는 글이 끝나자마자 다 잊어버리고, 다음 편을 읽으면 분명히 앞의 글과 다른 이야기인데 마칠 때쯤 앞의 글과 구분도 안 되고, 나는 지금 무엇을 읽고 있나 막연하다 싶은데도 마냥 빠져드는 기분. 하나 읽고 금방 분위기를 바꾸고 싶지 않아 시간을 두었다가 읽어도 내가 겪는 현상은 앞의 독서와 같아진다. 설명하기 쉽지 않은데 계속 머물러 있고 싶은 마음, 나의 아일랜드 현상이다. 


그다지 특별하지 않은 인물들, 달리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의 자잘한 사건들, 어디에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사람과의 관계,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갈등과 다툼과 오해와 절망과 기대들을 담아 놓은 이야기. 좀 슬프고 좀 쓸쓸하고 좀 춥고 좀 고단하고 그런데도 또 내일에는 오늘보다 힘을 내어 살아볼까 기운을 차리게 하는 인물들의 메시지 혹은 작가의 당부. 내가 이 작가의 소설을 계속 읽고 있는 큰 이유다. 


뚜렷하고 명확하지 않은 것들을 아주 좋아하지 편인데 이 작가의 글에서는 다르게 느낀다. 흐려서 희미해서 불투명한데 매혹적이다. 나는 이끌려 들어가고 빠져들고 머문다. 누가 누구인지도 헷갈리는데 어디가 어디인지도 모르겠는데 문장 하나하나에 멈추고 두리번거리고 다시 들여다보고 의도된 무정함에 소스라친다. 삶은 늘 이만큼 떨어져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아무리 매달리며 살고자 해도.


12편의 소설 속 인물 중 어느 한 사람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냥 다 소중하게 여겨진다. 너도 나도 우리 모두는. 내가 알든 모르든 살아 있는 모두는. 전혀 모르는 채로 살아도 나는 기꺼이 빌어 줄 수 있겠다, 그의 평온했으면 하는 생을. 지금 아픈 모든 생명들을 향한 회복을. 


소설에서 '알았다'는 말을 자주 보았다는 기억이 난다. 세어 보지 않았으므로 횟수는 모르겠다. 실제로 얼마나 많은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알았다'는 문장의 마지막 표현이 나올 때마다 나는 안심이 되었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살고 있는 것 같아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너를 기억하는 풍경
손홍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4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가난한 어린 시절, 이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떤 풍경을 떠올릴까 생각하게 된다. 내게는 분명히 있다. 이 말을 할 수 있는 시절도 이 말에 어울리는 풍경도. 그런데 마음이 막 아프지는 않다. 아마도 지금 살고 있는 내 모습에 만족하는 마음이 크고 그 시절이 그리운 풍경의 하나가 된 듯한 기분이 들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소설은 모두 5편. 인물끼리 서로 연결이 되는 구성을 취하고 있지만 긴밀한 것은 아니다. 같은 마을에서 같은 시절에 자란 사람들의 개별적 이야기. 서로가 서로의 삶을 아는 듯 모르는 듯 그렇게 시공을 나눈 이들의 내력. 슬픔인지도 상실인지도 모른 채 흘려 보낸 세월, 남은 기억들과 남은 이야기들. 비슷한 형식을 갖고 있던 소설집(양귀자의 원미동 사람들이나 임철우의 그 섬에 가고 싶다 등)이 몇 권 떠올랐고 살았던 곳이 비슷하지 않았어도 이런 회고담 같은 소설에서는 마음이 절로 풀려 나는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 

책의 크기는 작은 편이고 두께도 만만해서 읽는 데에 부담이 없다. 어린 시절을 아파트라는 공간에서 보내지 않은 세대의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좀더 자세하게 말하자면 초등학교나 중학교는 다소 멀어도 걸어서 등하교를 해야 했던 사람들, 집 안팎에서 개나 소나 닭과 같은 동물과 같이 지냈던 사람들, 전화가 드물어서 우표를 붙인 엽서나 편지로 소식을 주고 받아야 했던 사람들에게. 

우리는 모두 누군가에게 지난 날의 기억 속 풍경의 한 귀퉁이 흔적으로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사람들이다. 지금의 내 속된 모습을 돌아보고 싶다면, 그래서 조금 순화되고 싶다면, 그래서 조금 더 맑은 영혼으로 살아가고 싶다면, 소설 속 인물들의 손을 잡아 주어도 좋으리라. 어린 날의 내 손을 잡을 수도 있을 테니. (y에서 옮김20241123) 

 'Y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여름의 빛
장자크 상페 지음, 양영란 옮김 / 열린책들 / 2024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번 여름을 보내는 나만의 방법, 여름이라는 낱말이 제목으로 쓰인 그림책 찾아 읽기. 글을 읽기에는 더위가 귀찮기도 하고 힘들기도 하고 설렁설렁 그림만으로 긴 날을 달래 본다. 눈을 뜨고 뭔가를 보는 것만으로도 내가 대견해질 정도다. 이래서야 앞으로 맞이할 여름마다 나는 어떤 시도를 해야 할까. 미래가 아득해지기는 하지만.

좋아하는 작가의 그림이 한 권 안에 듬뿍 담겨 있다. 편집의 취지에 따라 왼쪽 페이지가 빈 공간으로 많이 남아 있는데 섭섭하지 않고 시원해서 더 좋다. 여름에는 무엇인가 가득차 있는 것을 보는 일도 힘겨울 정도다. 심지어 얼음조차. 

글은 보이지 않는다. 여름의 장면만 계속 나온다. 모든 장면이 나를 끌어들인다. 여름 바닷가에 가지 않는 나이지만, 그림 속으로는 기꺼이 들어간다. 벌레가 싫어서 아무리 시원하다고 해도 나무 그늘 아래 풀밭에는 앉아 있지도 않는 나이지만, 이 책 그림 속으로는 또 들어간다. 그림 속 인물 옆에 같이 엎드려 볼 수도 있겠다. 상상이지만 흐뭇하다. 나도 이런 장면의 주인공이 되어 보는구나. 

책 속에서 가장 따라해 보고 싶은 사람의 모습을 찾았다. 바닷가 나무 그늘 아래 탁자와 의자를 두고 예쁜 찻잔에 차를 기울여 마시면서 홀로 카드 게임을 하고 노는 것. 담배는 사양하지. 대신 음악이 낮게 흐르고 있어도 좋겠다. Jean Philippe Audin의 첼로곡이라면 더 바랄 게 없을 시간과 공간. 강아지가 있어도 고양이가 있어도 괜찮은.
 

가을이 올 때까지는 계속 들추고 들추어 볼 일이다. (y에서 옮김2024081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간사지 이야기
최시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간사지는 밀물과 썰물이 드나드는 개펄로 규범 표기는 간석지라고 한다.(이렇게 낱말 하나를 익힌다.) 실제 간사지가 고향인 작가가 그곳을 배경으로 쓴 자전적 소설이다. 소설가라면 누구나 해 볼 만한 생각이 아닐까? 자신이 살아왔던 동네 사람들의 이야기를 글로 담아 보는 일. 평범하면 평범한 대로 유난하면 유난한 대로 같은 시대에 같은 공간에서 살았던 가족과 이웃과 주변 사람들의 삶을 기록하는 일. 나는 독자로서 충분히 누릴 수 있어 고맙기만 하고. 

1960-70년대의 삶이다. 읽는 이의 나이에 따라 성장 환경에 따라 받아들이는 결이 많이 다를 듯하다. 그 시절에 초등학교 정도는 다녔어야 제대로 느낄 내용도 많고 바다가 주요 배경이니 어려서 바다를 모르고 살았던 사람들은 꽤나 낯설 것도 같고. 소설이라는 게 내가 모르는 세상의 이야기라도 근원적인 삶에 공감을 할 수 있으니 각자의 재미를 찾을 수 있다면 또 좋을 것이고.

오래 전 작가로부터 수업을 받은 기억이 생생하여 자꾸만 글 사이로 표정과 목소리가 겹쳤다. 좋은 현상인지 어쩐지 분간도 안 되는데 반가운 마음도 들었고 대단하시다는 생각도 했다. 소설과 이야기를 향한 열정을 한결같이, 평생에 걸쳐 쏟고 계시는구나. 삶으로 가르치시는구나 싶었다.

로봇이, AI의 기술과 능력이 아무리 발전한다고 해도 이야기의 원천은 인간의 상상력 안에 있다고 믿는다.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능력이 점점 더 중요한 시대가 될 것이다. 그 바탕에 개인의 환경이 소중하게 자리잡고 있을 것이고. 사라져 가는 동네의 이야기들이 자꾸만 궁금해지겠다. (y에서 옮김20241225)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2026-08-31 17: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6-09-01 12: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탈리아 골목길 드로잉 산책 - 퇴근 후 피렌체를 걷다
    박진호 지음 / 미디어샘 / 202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림을 잘 그리고 글도 잘 쓰는 사람이 여행을 좋아한다면? 좋아하는 곳으로 여행을 가서 본 장면을 그림으로 그리고 듣고 느낀 바를 글로 써 낸다면? 책으로 만들어 내기까지 한다면? 나로서는 못할 일이므로 부러움은 여기까지.

    작가는 해마다 이탈리아의  피렌체로 출장을 다닌 평범한 회사원이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피렌체의 골목길을 다니게 되고 그림으로 글로 기록하게 되고 또 그러다가 이탈리아의 남부까지 다녀오기도 하고 이것도 그림과 글로 보여 주고. 마침내 이 책을 만들게 되고. 

    내게는 그림이 글보다 훨씬 좋았다. 글은, 음, 평범한 여행기였다. 여정, 견문, 감상이 골고루 담겨 있는, 교과서처럼 보일 정도로. 그림은 달랐다. 사진과도 다르고 상상 속 풍경과도 달랐다. 작가가 그려서 보여 주는 라벤나의 카페 그림이 하도 인상적이서 라벤나를 지도로 찾아 보았다. 피렌체와 베네치아의 사이 쯤에 있다고 하면 되는 작은 도시. 이렇게 낯선 외국의 도시 이름 하나를 익힌다. 


    그림으로 그릴 줄 모른들 어떠랴. 글을 잘 쓰지 못한들 또 어떠랴. 사진만 찍고 메모만 해도 여행은 즐거운 과정, 할 수 있다면 가까운 곳이든 먼 곳이든 다녀오면 좋을 일이다. 나이와 상관없이. (y에서 옮김20241004)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2026-08-31 17: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6-09-01 12:0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