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스가의 살인 - 애거서 크리스티 재단 공식 완역본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37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왕수민 옮김 / 황금가지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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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편의 소설, 흥미롭게 읽었다. 이 책이 나와 있는 작가의 책으로는 마지막으로 구입한 것이다. 출판사는 다르지만 모두 세워 놓고 보니 흐뭇하다. 기억력이 아주 없는 나로서는 아무 책이나 뽑아서 다시 읽어도 다시 새로울 것이다. 저금해 놓은 책이라고 해야겠다.


4편의 소설이 실려 있다. 주인공은 푸아로 경감. 사건은 일어나고 푸아로는 느긋하게 해결해 나가고. 나는 이제 범인에 대해, 범인을 맞혀 보겠다고 하는 이런저런 고민을 전혀 하지 않는다. 그냥 읽는다. 맹하게, 활짝 열린 마음으로. 범인이 누구인들 어떠랴. 푸아로는 잡아낼 것이고, 범인이 희생자를 죽인 이유는 분명히 있을 것이며, 범인의 본성은 나쁜 것이었을 테고, 나는 시원하게 밝혀지는 대로 따라가면 되니까. 게으른 독서의 참맛이라고나 할까.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일이 아니어서 거의 신기한 기분마저 들기는 하는데. 살인이라는 사건은 뭐라고 해야 할까. 일어날 법한? 일어나도 개의치 않는? 사회면 뉴스에서는 흔하든 흔하지 않든 우리 땅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을 매일 보도하고 있고. 그렇다면 멀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일 텐데. 


사람은 어떤 상태가 되면 다른 사람을 죽이게 될까? 소설은 소설로만 그치는 법이 없고, 비슷한 상황에서 일어나는 나쁜 일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늘 우리의 현실의 삶을 지치게 만들고 있는데. 이 또한 설명할 수 없는 우주의 섭리 중 하나일까?


이제 이 작가의 책을 다시 읽게 되면 나는 리뷰를 이어서 쓰게 될까? 그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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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결하는 소설 - 미디어로 만나는 우리 창비교육 테마 소설 시리즈
김애란 외 지음, 배우리.김보경.윤제영 엮음 / 창비교육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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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은 삶에 도움을 주려고 만들어 내는 것이지만 쓰기에 따라 삶을 위협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오죽하면 최고의 기술이 최고의 무기를 만들다가 나오는 것이라는 말까지 생겼을까. 살리기 위한 기술이 누군가를 죽이는 데 쓰이고 있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모순된 일이지만 현실에서는 버젓이 보이고 있고.

미디어도 같은 맥락으로 보인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잘 연결하기 위해 발전시키는 영역으로 봤는데 사람과 사람 사이를 해치는 일이 너무 많이 일어나고 있으니. 소설은 갈등을 다루는 데 익숙한 장르이고 기술의 발전으로 좋아진 쪽보다 나빠진 쪽을 이야기하기에 더 적절하다고도 볼 수 있다. 이 책에 실려 있는 소설들이 도무지 유쾌할 수 없는 배경이다.
 
현실에서 체험하는 것만큼이나 소설 속 가상 세계도 위험하고 아슬아슬하다. 알고도 저지르는 실수나 모른 채 당하는 사기나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어려운 상황을 겪을 수밖에 없는 시절이다. 연결되지 않고 아날로그 형태로만 살겠다고 작정하고 살면 좀 나아질까? 아니, 그럴 수 있기는 할까? 개인 인증조차 핸드폰으로 받아야 하는 때에. 도무지 끊을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을. 그 어떤 일도. 

김보영의 <고요한 시대>에 유독 사로잡혔다. 그러려니 하는 한탄을 넘어 소설 속 상황처럼 이 지경까지 이른다면 정녕 어떻게 살 수 있게 되는 것일까 아득해지기만 한다. 기술의 발전, 미디어의 방향, 사람의 이기심과 욕심이 어디까지 어떻게 나아가게 될지. 

연결이 싫어지려고 한다. 고립이 그리울 정도로. (y에서 옮김2024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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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을 끓이며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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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을 끓이면서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작가밖에 없으리. 라면도 그냥 라면이 아니고, 밥도 그냥 밥이 아닌 사람의 글과 삶. 이 시대에 함께 살아 이 사람의 글을 읽을 수 있다는 게 고맙기만 하다. 이분의 글을 읽는 동안에는 내가 늙어 가는 모습까지 불평 없이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을 듯하다. 나이 드는 게 전혀 아쉽거나 억울하지 않다는 느낌을 글로서 전해 받는다. 


온화하고 부드러운 글은 아니다. 잘 드는 칼을 읽는 느낌이다. 선득선득 잘라내는 거리감, 홀로 깊어졌다 사라지는 소실감. 군더더기 없는 명쾌하고 단호한 문체에 쉬이 빠져 든다. 내게 이런 강인함이 숨겨져 있었던가 착각도 즐길 수 있을 만큼.   


쉬운 삶, 쉬운 밥은 없다는 거다. 어딘가 그런 게 있을지도 모른다고 멀리 있는 것을 자주 그리워하였더니 가차없이 잘라주시는 훈계. 힘들다고 징징대지만, 세상에 나만 힘들게 살아 가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 이게 위로가 되는 게 한편으로는 민망하지만 인정하게 된다. 나는 그리 잘난 것도 그리 못난 것도 아닌 삶을 갖고 있는 것이었더니. 


나이가 들면 나이가 들었다고 더 엄격하게 견주는 잣대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어떨 때는 너그러울 줄도 알았다가 어떤 때는 냉철히 처단할 줄도 알아야 하는 법, 자칫 그 사이에서 이리저리 헤매다가는 사방으로부터 비난을 받게 될 것이다. 나이를 어디로 먹었느냐고, 그런 것도 아직 해결하지 못하느냐고, 아직도 그러고 사는 거냐고, 다른 사람의 시선에 얽매이지 않으면서도 당당할 수 있는 삶의 값, 나는 그 값을 배우고 싶다. 


출간 즈음에 스캔들에 휘말렸을 텐데, 그런 시달림도 가볍게 무시된다. 그냥 글이 좋으면 다른 것들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y에서 옮김2015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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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가 죽으면 달은 누굴 돌지? - 김혜순 죽음 트릴로지 문학과지성 시인선 567
김혜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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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는다는 것, 살아서는 결코 알 수 없는 일. 누구든 일생 한번밖에 경험할 수 없으니 경험담이라는 게 있을 수 없고 그래서 더 멀리하게 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마치 내게는 영영  일어나지 않을 일처럼. 그럼에도 가까운 이의 죽음을 맞았을 때는 더없이 절망하면서. 


실려 있는 시들, 읽기 괜찮지 않다. 자꾸만 걸려 마음이 넘어진다. ‘엄마’라는 말 자체에도 멈칫 하게 되는데 엄마가 죽음을, 아니 죽음이 엄마를 붙잡고 있는 것으로 보이니 제대로 읽을 수가 없다. 이건 좀 괴로운 의무감이다.


게다가 이 시집은 두꺼운 편이다. 시인이 들려 주고 싶은 말이 많았나 보다. 어쩌면 자신이 자신에게 들려 주려는 위로는 아니었을지. 엄마가 아프고 엄마가 죽을 것 같고 엄마는 죽고. 엄마의 자리에 세상 모든 아까운 이름들이 다 들어서도 달라질 게 없어 보이기만 하니 죽음이 이래서 공평하다고 한 것일까.  


나는 이번에도 거리감 딱딱 유지하며 읽었다. 죽음 따위 나와 전혀 관계없는 것처럼. 건방진 내 태도가 불쾌하다며 언제 어떻게 혼내러 올지 모르겠지만 나는 어울리고 싶지 않다. 시에서라고 달라질 것 같지 않다. (y에서 옮김20220730)


그곳에도 눈물 속에 조가비가 자라나요?
바람과 불이 이리저리 뭉쳐 다니나요?
그러면 그것들이 꽃이 되기도 하고 토끼가 되기도 하나요? - P11

모든 낮은 떠나갔지만 여전히 살아 있고
발톱처럼 머리카락처럼
이미 죽었으나 자라는 것들이여
예감의 슬픔이여
끝의 성자여 - P239

왜 우리는 바다와 눈 맞추기를 좋아하나
왜 우리는 산과 등지고 앉기를 좋아하나 - P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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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끝의 온실
김초엽 지음 / 자이언트북스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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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작가가 지어낸 이야기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실제로 일어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누구나 다 안다. 그럼에도 어떤 소설은 읽고 있는 동안 실제 있었던 일처럼 느끼도록 해 준다. 더 나아가서는 그럴 수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실제로 있었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마음을 갖게 하기도 한다. 내가 좋아하는 소설이 가진 큰 특징 중 하나이다.   


김초엽의 소설 ‘지구 끝의 온실’을 읽으면서 이 유쾌한 특징을 만난다. 먼 미래의 이야기, 지금의 이야기도 아닌, 30년이나 뒤에 또 그보다 더 멀리 있는 이야기인데, 이 거리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내가 그 시기 동안 그 모든 독한 ‘더스트’ 상황들을 겪어 낸 뒤 끝내 살아 남아서, 나오미처럼 아마라처럼 그 먼 날에도 다행스럽게 살아 있어서, 아영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듯했다. 우리의 만남이 참으로 축복이라는 듯이.   


이야기가 펼쳐지는 공간적 배경을 상상하는 재미도 특별했다. 먼 미래의 우리나라만 나오는 게 아니다. 에티오피아와 말레이시아가 등장한다. 지구 위 수많은 나라들 중에 작가가 왜 이 두 나라를 골랐을지, 우리나라와 삼각형으로 이어지는 구도에 읽는이는 저마다의 의미를 보탤 수 있을 것 같았다. 예를 들면 지구 위 세상은 더 이상 조각난 게 아니라는, 지금부터 30년이나 50년이나 100년 정도 지나고 나면, 지금의 국가별 싸움이나 대륙별 또는 인종별 갈등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져 사라지고 말 것이라는 작가의 바람을 담은 게 아니었을까 하고.    


삶은 누구에게나 거대하면서 동시에 사소한 의미를 준다. 지상의 한 사람 한 사람이, 아니 생명을 지닌 개체가 모두 다 소중한 생명체이겠지만 한편으로는 또 어느 하나 빠뜨림없이 다들 피었다가 스러지고 마는 존재들이다. 어떤 이는 위대한 업적을 세울 것이고 또 어떤 이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가겠지만. 그러나 그 중에 위대한, 위대하겠다는, 위대하고 싶다는 인간들 몇몇이 저지른 잘못으로 지구 위 생명체들을 온통 위험한 상황에 빠뜨린 일들이 인류 역사상 얼마나 많았던가. 지금도 세상 어딘가에서는 저 잘난 목숨만 믿고, 제 이익만 추구하며 오만하고 그릇된 판단으로 정책을 시행하는 이들이 있을 텐데, 그들로 인해 아무런 이유도 모르고 어떤 의도도 없이 제 삶의 터전을 잃게 될 수많은 생명체들은 어디에 하소연할 수 있을 것인지, 남은 삶에 그럴 시간이나마 주어질 것인지. 생략되어 있으나 짐작하기에 전혀 어렵지 않은 이 모든 경고와 교훈과 위로가 소설 속 인물들의 입을 통해 곳곳에서 울려나오고 있다.    


역사는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사람만 기록하고 기억한다지만 기록되지도 기억되지도  않는 이들의 삶이 이어져 역사가 된다는 것도 우리는 안다. 내가 어쩌다가 이 세상에 태어났으며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는지를 정확하게 모른다고 해도, 우리 모두는 다들 살아 있는 것만으로 이 세상에 기여하는 존재임을, 오직 평범한 삶을 바라고 실천하는 올곧은 의지 하나만으로도 살아가는 충분한 이유가 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게 아닐까. 세상을 구원하는 일 따위에는 관심도 없다며 엔지니어로 제몫을 다하겠다던 지수와 식물 연구자로 충실하며 만족한다던 레이첼이 하고 싶었던 말, 이들을 대신하여 온마음과 정성을 다해 기록물로 전하고자 한 아영의  당부에 이 모든 소망이 담겨 있었던 게 아닌지. 자신을 구원하는 일이 곧 세상을 구원하는 일로 이어질 것이라고,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자만이 이를 믿을 수 있을 것이라는 소망을 가득 담은 글로서. 


작가는 기록하는 사명을 가진 이다. 어떤 모습으로 기록하든 그건 작가의 고유한 영역일 것이고, 과거를 기록하든 현재를 기록하든 아직은 알 수 없는 미래를 기록하든 그 어떤 모습이든 우리 모두가 바라는 바람직한 사회일 것임은 분명하다.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후손들에게 이 세상은 살 만한 곳이라는 생각을 갖도록 하는 일은 앞서 사는 이들의 책임이자 의무다. 이 작가가 이것을 이 책으로 보여주고 있다. (y에서 옮김2021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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