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 문학과지성 시인선 309
허수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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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시가, 혹은 시의 구절이 좋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상황 때문에 그럴 수도 있고 순전히 시 자체의 말맛이 좋아 그럴 수도 있다. 이 작가의 시는 내 마음을 좀 복합적으로 흔든다.


이 시집을 산 것은 꽤 오래 전인데, 그 즈음에 내가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던 것을 보면, 당시에는 무슨 말을 남길 만큼 시가 내게 다가오지 않았던 모양이다. 나 또한 굳이 가고 싶지 않았던 것일 수도 있다. 고고학적 자리라는 둥, 전쟁 속 소용돌이라는 둥, 살짝 물리치고 싶다는 느낌의 기억은 난다.


이번에 서울 가는 길에 다시 집어 들고 펼쳤다. 예전에 내가 몇 군데 줄을 그어 놓은 곳이 있었고, 새삼스럽게 머무르고 싶은 구절을 좀 더 찾아보고 싶었다. 작가의 어떤 말에 내가 끌리고 있는지.


저 구절들이 왜 좋으냐고 누가 묻는다면, 나는 무어라고 답할 수 있을까. ‘그냥’은 분명히 아닌데, 망설이는, 슬픈 모습으로 망설이고 있는 화자 혹은 작가가, 오래 전 캠퍼스에서 봤던 그 젊은 날의 작가의 아담하고 쓸쓸한 모습이 떠오르면서, 도무지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감정의 얕은 회오리 속으로 빨려들어가고만 있는 것 같아서, 내가 그때 그곳으로 돌아가 있는 것만 같아서 좋다고 말하면, 적어도 작가의 시를 다치게 만드는 잘못을 저지르지나 않았으면 좋겠다.


이 작가의 시가 더 낮은 곳으로, 더 어두운 곳으로, 더 험한 곳으로, 더 아픈 곳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내 마음이 속상하다. (y에서 옮김2010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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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식의 아파트 생물학 - 소나무부터 코로나바이러스까지 비인간 생물들과의 기묘한 동거
곽재식 지음 / 북트리거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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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하고 기발하면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어 내가 좋아하는 작가. 우리가 살고 있는 아파트와 밀접하게 관련이 있는 생물들의 세계를 보여 준다고 해서 신청한 책이다. 이번에는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려나. 얼마나 신기하려나. 신기하기는 했다. 이런 생물들의 세계를, 우리가 살고 있는 가까운 환경 안에서 만났으니.


첫 주인공 '소나무'부터 읽어 나가는데, 어째 내가 예상했던 방향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나 혼자 기대했던 게 있었음을 곧 알게 되었다. 소설도 에세이도 아닌, 과학 책이라는 것을, 생물학이라고 책 제목에 딱 내놓았음에도, 내멋대로 내용을 추측하고 말았던 탓. 이렇게 또 의외의 책을 읽게 되기도 한다.


책은 주제에 따라 총 3장으로 나누어져 있고 각 장마다 4종의 생물을 소개하는 형식을 갖추고 있다. 작가는 각 대상에 대해 조사한 것들을 엄청 진지하고 성실하게 서술한다. 소설에서 종종 봤던 발랄한 문체가 보이지 않아 아쉽기는 했지만 이 아쉬움은 이어지는 박학다식에 금방 지워졌다. 아는 게 이렇게도 많다니, 어느 특수한 사항을 조사하기 위해서는 전조사 단계에서 이미 알고 있는 무언가가 있어야 할 것 같은데 그것마저 다 알고 있는 듯해서, 한 사람이 갖고 있는 지식의 영역이 이렇게도 넓을 수 있는 것일까 의심과 감탄을 번갈아가며 했으니.


과학, 생물학에 대해 이야기한다면서 작가가 제시하는 자료들의 종류가 너무도 다양한 것에 내내 놀라워하며 글을 읽었다. 이만큼 다 알고 살다 보면 머릿속이 터지려는 순간이 생기지는 않을까, 평소에는 기억 창고에 푹 넣어 두었다가 필요할 때만 꺼내어 쓰는 건가 하는 내 수준의 쓸데없는 생각도 해 보고. 


정보라는 게 양면의 특성을 갖고 있다. 하나는 살아가는 데 필요해서 당장 꼭 알아야 하는 정보들. 다른 하나는 사는 데에 꼭 필요하지는 않지만 그래서 몰라도 살 수 있지만 알고 나면 이전과는 다르게 보이는 것들이 생겨나도록 해 줌으로써 삶의 수준을 올려 주기도 하는 정보들. 이 책의 정보들은 대체로 후자에 속한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아파트에 사는 이들이 엘리베이터 문을 드나들 때마다 새삼스러운 생각을 해 보도록 기회를 줄 것 같다. 눈에 보이든 보이지 않든 이제는 이 책 속의 생물들에 대해 알고 말았으니 몰랐던 때로 돌아갈 수는 없겠지. 이렇게 알게 된 것들로 때때로 웃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든다. (y에서 옮김20210919)


Y 리뷰어클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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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관의 살인 - 애거서 크리스티 재단 공식 완역본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24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김지현 옮김 / 황금가지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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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가 살고 있는 공간에서 살인이 일어난다. 목사는 어떻게 할 수 있는가 혹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작가의 의도에 하도 많이 속아 와서 이번에는 제목 자체에 의심을 품었는데 그게 또 속히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목사는 정녕 목사다운 인물로 등장했으니까.

 

마플 양이 나온다. 이 작품이 본격적으로 활약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이 작가의 작품을 순서대로 읽는 게 아니라서 내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저 마을 사람들을 내내 지켜보고 자세히 관찰하면서 추리와 추측으로 범인을 찾아내는 마플 양의 활약에 감탄만 해도 충분하다. 실제로 마을에 이런 사람이 있다면, 어쩐지 으스스할 것 같기도 하다. 감추고 싶어도 감출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 테니까.  

 

나이든 여자들의 참견과 호기심은 나라나 시기와 관계없이 발휘되는 일일까. 이 때문에 문제거리가 발생하기도 하지만 이 덕분에 문제를 해결하는 실마리를 얻기도 한다. 우리 사회에서도 나이든 여자들의 무리에서 때때로 크나큰 사건이 일어나곤 하는데, 사람 마음에 대해 탐구하는 작가의 집착이 한편으로는 이해가 된다. 죽이고 싶다는 마음부터 마침내 죽이는 행동을 하게 되기까지의 범인의 심리에 어쩌다가 이렇게나 깊이 빠져들게 되었던 것인지. 이 또한 인간을 이해하는 하나의 방편이라고 해도 평범하지 않은 선택이었을 것이다.  

 

주변 사람을 깊이 관찰하는 일, 어쩌면 퍽 흥미로운 일일 수도 있겠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아니고. (y에서 옮김2019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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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역사
니콜 크라우스 지음, 한은경 옮김 / 민음사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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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 이웃분이 봄날에 읽으면 좋겠다는 말씀에 올 봄날을 이 책으로 열었다. 그분이 말한 시점에서는 2년이 지난 봄이지만 봄은 봄이고, 사랑은 사랑이니, 변하지 않는 것들끼리는 언제든지 어울리는 모양이다.

생각해 보니 내가 꽤 오랜 시간을 '사랑'이라는 이데올로기에 매이지 않고 지내온 것 같다. 그게 뭐라고 지구 위 모든 사람들이 오랜 세월 동안 꿈꾸고 매달리고 시달리는 것인지, 마치 나는 그 감정에 한번도 빠져 본 적 없던 것처럼 냉담하게 무심하게 그렇게. 그것도 젊은 날 한때인 것이지 그런 건방진 생각마저 굴리면서. 이 책, 나를 꽤 깊이 있게 흔들어 놓았다. 오래 모른 척 했던 사랑에게 살짝 미안해진다.

일생을 하나의 사랑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건, 글쎄, 소설에서만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 현실에서도 있다면서 그 증거로 다큐멘터리를 보여 주기도 하는 세상인데. 나는 아직 사랑이 그 정도로 절대적인 힘을 발휘하는 감정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좋기야 하지, 사람과 사람 사이를 부드럽고 황홀하게 해 주기도 하고, 인류와 인류 사이를 폭넓게 품어 안아 주게 하기도 하니. 어디 사람 사이뿐이랴. 동물과도 식물과도 심지어는 사소한 취미 활동 하나에까지도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몰입해 들어가면 이룰 수 없는 일이 없을 것만 같으니 마법 같은 힘을 발휘하는 감정임에는 틀림이 없겠으나 내가 좀 인색하게 굴고 있다는 뜻이다. 사랑이라는 감정에 직접 빠져들기에는 나이도 체력도 관심도 호기심도 열정도 어느 것 하나 갖추고 있는 게 없으니.

그런데 이 소설의 첫 화자인 레오는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일생에 걸쳐 하나의 사랑을 한다. 그럴 수 있을까? 그럴 수 있겠지? 소설은 친절하지 않았다. 자칫 나는 발을 뺄 뻔했다. 레오의 한결같은 사랑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사랑을 찾겠노라고 일생을 거는 일도 무모해 보였고, 알마가 이 알마인지 그 알마인지 헷갈리기 시작했고, 알마의 엄마가 남편을 그리는 일편단심도 헛헛해 보였고. 그러다가 '사랑의 역사'라는 소설책이 이리저리 사람들 사이로 우연인 듯 우연이 아닌 듯 떠도는 과정에 빠져들기 시작하면서 내 마음이 바뀌기 시작했다. 어라? 미셀 뷔시의 <검은 수련>이 떠오르는데? 이름으로 엮어 내는 유사한 구성 방법에다가 어떻게 결말로 이어갈지 긴장감의 강도가 비슷하게 느껴졌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은 한쪽이 죽었다고 해서 사라지는 건 아닌 모양이다. 혹은 다른 사람과 결혼했다고 해서 결혼하지 않은 이와의 사랑이 없어지는 것도 아닌 모양이다. 한 사람을 사랑하고 그를 잃고 또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그 각각의 것도 사랑일까? 사랑은 곧 결혼이라고, 결혼이어야 한다고 믿어 왔던 내 편견은 이 대목에서 또 어찌 하나. 내가 알고 경계지웠던 사랑의 크기가 작고 좁아서 이제까지 내가 사랑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게 되었던 건 아닐지.

간절하면 언젠가는 가 닿는다는 말도 같은 맥락에서 나는 믿지 않았다. 그런데 이 소설을 보니 닿을 것 같다. 심지어는 한쪽이 이 세상 사람이 아니더라도 전해질 것 같다. 또다른 간절함이 이전의 간절함을 이어줄 것 같다. 마치 이 책이 내게 이 간절함의 힘을 깨닫게 해 주는 것처럼. 내가 소설을, 소설을 읽는 것을 좋아하는 이유다. 내가 이전의 내가 아니도록 해 주는 글, 스스로 조금 나아졌다고 격려하도록 해 주는 글, 결코 현실이 아니라면서 현실보다 더 생생하게 와 닿아 마침내 깨우쳐 주는 글.

서점에는 절판이었으나 도서관에서 빌려 볼 수 있어 다행이었고, 봄을 넘기지 않아 더욱 다행이다. 레오의 늙고 지친 눈이 알마를 보고 빛나는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너무 가여웠으나 이 또한 너무 다행이다. (y에서 옮김2019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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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월의 미, 칠월의 솔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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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월의 빗소리는 '미'로 들리다가 칠월의 빗소리는'솔'로 들리는 세상, 그립다. 요즘처럼 뜨겁기만 하고 습기는 잔뜩 뿜고만 있는 채로 머물러 있는 공간에서 버티기가 쉽지 않다. 제습기로 빨아들이고 말 일이다.

김연수의 소설들은 내 마음에 들었다가 안 들었다가 한다. 여전히. 이 책에 실린 소설들도 내 마음의 온기와 냉기를 오간다. 아직은 전적인 지지자가 못 되고 있다. 독자인 나로서는 좀 슬픈 일이다. 모두 마음에 들었으면 읽는 내가 더 행복했을 텐데.

재기발랄하다는 문장은 톡톡 나를 두드려준다. 상쾌해서 좋다. 게다가 거의 함께 보냈다고 해도 좋을 젊은 시절의 어떤 시간 마디들이 동질감을 불러 일으켜 준다. 작가가 그려 놓았듯이 내게도 그런 시절이, 그런 감정이, 그런 설렘이, 그런 후회가 있는 것이다. 지나가 버려서 애써 무시하려고 했지만, 가끔은 불러 보아도 좋을 추억 혹은 회한.

2010년부터 2013년에 이르는 기간들의 작품들. 나도 살아 있었을 텐데, 내 삶의 흔적은 어디에 남아 있을까. 아니, 나는 본래 남기기를 바라는 사람은 아닌데.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이 아주 무거운 추로 자리잡고 있다. 이후로도 오래오래 서글프고 쓸쓸한 우리 역사가 될 것이다.

한국소설이 맥을 못 춘다고 하는데, 이유가 뭔지에 대해 조금만 생각해 보려 한다. 내가 다른 나라 소설에 비해 우리 것을 붙잡지 않으려는 이유와도 통하는 게 있을까. 무엇을 기대하고 있기 때문일까. (y에서 옮김2015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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