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책과 세상 - 김훈의 詩이야기
김훈 지음 / 푸른숲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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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잘 쓰는 사람은 되도록 여행을 많이 다녀야 할 것 같다. 그리고는 눈으로 보고 머리로 생각하고 마음으로 느낀 것을 자꾸자꾸 글로 써 주어야 할 것 같다. 글을 잘 쓰지 못하는 아주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여행을 하지 못하는 아주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자신이 가진 재능을 모두에게 나누어주어야겠다는 사명감으로라도.

얼마 전에 이 작가는 '자전거 여행'이라는 책을 펴냈다. 난 그 책 제목만 듣고 이 책을 떠올렸다. 내가 갖고 있는 것은 1989년 초판본이니 벌써 10년이 지난 책이다. 그러나 나는 이 책을 쉽사리 버릴 수 없었다. 몇 번 이사를 하면서, 그 동안 다른 많은 책들을 떠나 보냈으면서도 이 책은 지금까지 가지고 다녔다.

시간의 흐름도 이 책 앞에서는 맥을 못 춘다. 우리 나라 작가들의 작품과 그 작품이 살아 숨쉬는 공간을 이어놓은 여행산문집. 시간이 아무리 흐른들 이 책에 담겨 있는 공간은 여전히 그 모습 그대로 살아있을 수 있는 것이다. 문학 기행 산문집을 다른 사람들도 종종 펴내기는 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내 독서력이 부족해서 그런지 나는 아직까지 이 책만한 것을 만나지는 못했다.

아쉽게도 이 책은 이미 절판이 되어버렸다. 왜 우리 나라 출판사들은 좀 지긋이 기다릴 줄을 모르는지. 문학 작품 하나하나의 속속들이 보는 기쁨과는 또다른 차원의 새로운 즐거움을 이제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나눌 수 없어 안타까울 뿐이다. (y에서 옮김20010127)


[인상깊은구절]
온 산의 낙엽들이 막무가내로 무너져내리고 가을바람이 갈 길을 보채며 돌부처의 엷은 옷자락을 흔드는데 저녁해가 부처의 오른 뺨을 붉게 물들이며 넘어가자 부처의 왼 뺨으로 달이 떠오른다. 지나가버린 수만 번의 가을과 닥쳐올 수만 번의 가을 사이에 낀 단 한번의 그 덧없는 가을날, 가을산에서 깨달은 자의 반쯤 뜬 눈으로 내려다보는 벌판에서, 멸망해버린 왕국의 반월성은 이제는 주춧돌뿐이다. 모든 제국과 모든 견고한 것들이 바람 앞에 무너져 내리고, 덧없음을 확인한 자의 미소가 오히려 영원의 해와 달에 젖을 때, 견고한 것과 덧없는 것 중에서 진실로 어느 편이 헛된 것인지를 그 가을산 돌부처들은 실눈의 눈웃음으로 말할 듯 말 듯 하지만 끝끝내 말하지 않는다.


* 2004년에 개정판이 나왔다. 고마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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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의 갈까마귀 캐드펠 수사 시리즈 12
엘리스 피터스 지음, 손성경 옮김 / 북하우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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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책에서는 성직자를 예시로 보여주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바람직한 리더의 모습에 대해 생각해 보라는 의도를 가진 게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한다. 먼저 수도원의 라둘푸스 원장, 원장이 되고 싶어하는 로버트 부수도원장, 새로 등장한 에일로스 신부. 여기에 내전의 중심에 있는 스티븐 왕과 모드 황후. 스티븐 왕을 따르기로 한 휴 베링어. 왕과 황후를 오가는 헨리 주교 등등. 


실제 역사 속 인물들이 대부분인데 이 사람들만 잘 살펴도 바람직한 리더상을 얻을 수 있을 것만 같다. 해야 할 일을 하고 하지 않았으면 하는 일을 하지 않는 정도만 해도 리더로서는 상당히 성공할 듯한데 이것들의 경계가 복잡오묘하고 까다롭기 짝이 없단 말이지. 


라둘푸스 원장은 헨리 주교의 추천을 받아서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애덤 신부의 자리를 맡을 새로운 신부를 데려온다. 새로 온 에일로스 신부는 능력이 탁월한 사람이었지만 지나친 원칙주의자였던 탓에 짧은 시간 안에 신도들과 갈등을 빚고 만다. 그리고 얼마 안 되어 신부는 시체로 발견된다. 왜 죽었을까? 누가 죽였을까? 누가 죽기를 바랐을까? 사람이 죽고 나면 살았을 때의 인물됨이 드러나게 된다는데 할 말이 없어진다. 잘 살아야 죽고 난 뒤에도 부끄럽지 않을 일이다. 


이번에도 캐드펠 수사는 멋진 활약을 보여준다. 사람 됨됨이도 잘 알아보고 미묘한 차이도 발견하고 증거도 잘 찾아내고. 아, 약도 잘 만들고 게다가 약도 잘 쓴다. 정말 제대로 된 캐릭터다. 많이 친해지고 싶은 사람이다. 아는 사실만으로도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만 같은. 나를 어떻게 봐 주시려나, 이런 상상도 해 보고.


빠지지 않는 젊은이들의 사랑. 이제는 무조건 믿게 되는 건 아닌지. 금방 보고 바로 사랑에 빠지는, 어여쁜 두 남녀가 나온다면 이들은 범인이 아니라는 점. 어떤 시련이 닥친다고 해도 이겨낼 것이라는 점. 캐드펠 수사가 적극적으로 지지할 것이라는 점까지. 다음 편에서 확인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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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보다 : 봄 2024 소설 보다
김채원.이선진.이연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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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봄에 세 편의 소설을 만난다. 나는 이연지의 하와이 사과에 눈을 맞춘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의 이야기. 이 소설 이전에도 더러 보았다. 영화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사람들이 어떤 일을 맡아 어떻게 처리해 나가는 것인지에 대해. 텔레비전 드라마나 연극에 적용해도 크게 달라질 게 없을 만큼의 대략적인 내용에 대해서.

여느 일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영화를 만들겠다는 사람들의 열의나 태도가 소설의 소재로 등장하는 것을 종종 본다. 성공의 수는 지극히 적고 그 길로 가는 이들의 실패담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고. 이제 소설을 쓰는 일조차 사람만이 경쟁의 상대가 아니다. AI가 시나리오를 쓴다고 하니까. 시나리오뿐만 아니겠지. 화면도 만들어 내겠지. 그렇다면 사람은 어디까지 창작의 선을 그어야 하나. 물음만 남고 답은 구하지 못한다.

문제를 문제로 삼고 소설가는 소설을 쓴다. 독자는 소설을 읽고 문제를 확인한다. 문제인 줄 알지만 해결 방법은 남들에게 미뤄 둔 채 그저 관망한다. 어떻게 돌아갈 것인가 궁금하게 여기면서. 나는 장차 AI가 쓴 소설이나 AI가 만든 영화도 보게 될까? 사람 작가와 비교해 가면서?

다른 두 편에 대해서는 딱히 할 말이 없다. (y에서 옮김2024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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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필로소퍼 2018 4호 - Vol 4 : 워라밸의 시대, 잘 논다는 것 뉴필로소퍼 NewPhilosopher 4
뉴필로소퍼 편집부 엮음 / 바다출판사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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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잡지라는 것을 바로 알겠다. 지금의 상황에 적절하지 않는 내용이 많이 실려 있으니까. 코로나 19가 잡지의 생명에도 이렇게 갑작스러운 영향을 미치고 말았구나 싶다. 그렇지만 밖에 나가서 함께 놀라는 내용마저 빛이 바래는 건 아니다. 놀이의 본질만큼은 지금도 살아 있고 더더욱 중요해졌으니.

 

주제가 놀이여서 그런가, 읽는 맛이 앞에 읽었던 책들과 또 좀 달랐다. 슬쩍 풀어진 기분? 느긋한 여유? 글만 읽고 있는데도, 코로나 19 때문에 많은 것을 하지 못하게 되었는데도, 책 속 놀이의 이야기는 그저 재미있다. 이에 더해 이 책에 실린 글의 작가들에게 지금 시기에 맞는 놀이 문화에 대한 생각을 써서 보여 달라고 하고 싶었을 정도다. 몇몇 분은 이미 세상에 없는데, 특히 그분들은 뭐라고 할지, 어떻게 하는 게 더 창의적이면서 건전한 놀이라고 말하는지 듣고 싶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글은 '페더러, 육체적이면서도 그것만은 아닌'이라는 에세이였다. 순전히 페더러에 대한 팬으로서의 열성 때문이다. 이 선수를 이렇게 찬양하는 글은 본 적이 없었으니까. 한때는 이 선수가 참가하는 호주 오픈이나 US 오픈에 가 보겠다는 꿈도 살짝 가져 보았으나 입장권 액수를 보고 바로 포기했더랬다. 그 선수에 대해 이렇게 집중적으로 분석하고 평가해 놓은 글이었으니 이 글만으로도 이 책의 값어치는 충분한 셈이었다.

 

앙드레 다오의 '빵과 서커스', 조지 오웰의 '총성 없는 전쟁', 고재열의 '패배의 미학'은 꽤 긴장하며 읽었다. 놀이가 마냥 낭만적인 게 아니라는 것, 놀이를 강조하는 누군가의 속셈에는 지배욕이라는 위험이 있다는 것을 생생하게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렇지, 우리를 쉽게 놀게 해 줄 리가 없지 않겠는가. 어떤 의도나 음모가 있지 않고서야. 놀이에 담겨 있는 밝고 또 어두운 속성을 모두 헤아려 봐야 한다는 각성을 하도록 해 준 책이었다.

 

잘 놀아야 하는 시대다. 앞으로 더욱 더. (y에서 옮김2020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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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필로소퍼 2025 31호 - Vol 31 : 어차피 어쩔 수 없는 운이라면 뉴필로소퍼 NewPhilosopher 31
뉴필로소퍼 편집부 엮음 / 바다출판사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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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에게서 얻는 문제점은 운이 내게만 와 주었으면 한다는 것. 그것도 행운이나 축복에 한해서만. 불운은 내 쪽이 아닌 남들 쪽으로. 말이 안 되는 노릇이지. 


나는 내가 운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여러 번 자주 한다. 태어난 배경, 부모님, 형제자매, 친구들, 학업과 직업, 수많은 동료 등등. 돌이켜보아 마음에 들지 않았던 점이 없는 것이 아니지만 더 나빴을 수도 있으므로 '어휴, 다행이었다' 싶은 순간들이 훨씬 많다. 무엇보다 나는 뜻밖의 행운을 바라지 않는 편이다. 이 점은 책 속에서 말하는 바, 우연에 기대는 성향이 확실히 적기 때문일 것이다. 


며칠 전 복권을 두 장 샀다. 당첨이 안 되었다. 당연하다는 생각이 바로 든다. 그럼에도 복권을 왜 샀나? 혹시라도? 운이 있을까 하여? 그 막막한 기대로 며칠의 행복한 상상과 바꿀 수 있었으니 그것대로 또 괜찮기는 했다. 운이라는 것은, 좋은 운은 기대하지 않았을 때 막무가내로 오고 대체로는 한참 시간이 지나간 후에 깨닫게 된다는 생각을 한다. 그때 내게 운이 좋았던 것이지, 하면서. 


재미있고 흥미롭게 읽었다. 철학의 가치를 슬그머니 느끼기도 했다. 금방 잊어버리고 말겠지만, 나는 이제 믿는다, 읽고 잊어도 내 안 어딘가에 분위기로 기분으로라도 남게 된다는 것을. 내가 정신을 차려서 생각을 하고 판단을 하고 선택을 해야 한다는 것을 깨우쳐 주리라는 것을. 이만큼 인문학의 가치를 믿고 있는 내가 또 운이 좋다고 여기면서. 


오늘도 운이 좋게도 날씨가 좋다. 내가 하려는 일을 할 수 있게 해주는 모든 요건들에 고마움을 느낀다. 이게 행운이어서 살 맛이 자꾸 생긴다.




특정 시대와 장소에 태어나는 것, 적성에 맞거나 잘 할 수 있는 일을 마음껏 할 수 있는 곳에서 태어나는 것, 심지어 살아남는 것 그 자체도 결국에는 아찔할 만큼 우연에 달렸다. - P32

알고 싶어 하지 않는 마음은 세상이 여전히 부조리하고 불평등하다는 사실을 외면하게 한다. 이와 달리 정의는 운이 우리의 운명을 왜곡할 수 있음을 인정하고, 이를 바로잡으려면 노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 P52

바르고 충만한 삶이 목표인 사람은 인격 수양 훈련이 필요하고, 그러려면 훈련 받을 수단과 기회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훈련, 수단, 기회 중 일부는 타고난 운에 좌우되어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다. - P53

우리는 행운이 오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 바람의 밑바탕에는 삶을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가고 싶다는 통제 욕구가 깔려 있다. 여기에서 행운의 역설에 부딪힌다. 삶에서 더 많은 행운을 끌어당길 수 있지만, 그러려면 처음부터 삶을 통제하고 싶다는 욕구를 내려놓아야 한다. - P68

당신이 자기 행운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통제 집착을 버리고 우연성을 극대화하는 것이다. - P69

장 폴 사르트르는, 인간이 자유로운 존재이지만 자유를 부정하는 것도 개인의 자유라고 주장한다. 인간의 의식은 존재의 자유를 추구하는 동시에 거부한다는 것이다. - P89

도덕이란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하지 말아야 하는 행동 규범과 그것을 선택하는 인격을 의미합니다. 또한 도덕은 안락한 삶보다 가치 있고 뜻깊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됨됨이를 훨씬 높이 평가하는 기준이기도 합니다. - P110

변덕은 혼란이 아닌 경향성(리듬)이다. 순간순간 변화되는 몸과 마음의 변화를 긍정하는 과정에서 발견되는 경향성이다. - P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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