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레오의 고뇌 ㅣ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5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억관 옮김 / 재인 / 2010년 11월
평점 :
절판


유가와 교수의 활약은 계속되고 있다. 5편의 단편소설. 사건의 고리를 물리학적 지식으로 풀어나가는 이야기는 물리학에 대한 지식이 없더라도 흥미있게 읽을 수 있다. 어떤 한 분야에 대해 아는 게 많다면, 그것으로 적용할 줄 아는 능력을 갖고 있다면, 이렇게 좋은 점도 있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내가 가진 세상에 대한 지식은 내 삶에 얼마나 쓸모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보고. 


이런 소설을 연달아 읽고 있으니, 한동안 미국 범죄 드라마를 줄창 보던 기억이 난다. 다른 사람을 해치고 싶다는 동기가 생기는 배경, 우리의 마음 속 선과 악의 정체, 숨기고 싶은 이야기와 캐내고 싶은 의지. 다른 사람이랑 함께 살아야 하는 데에는 많은 조건들이 필요하기는 하다. 사랑도 우정도 중요하겠지만 시기나 질투, 원망도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y에서 옮김2014102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리트머스 ㅣ 문학동네 시집 83
    윤성택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집은 빨리 읽어버릴 수도 있고, 천천히 읽고 또 읽을 수 있다. 무심한 듯,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듯 넘겨 가면서 읽을 수도 있고, 한 줄 한 줄 따지면서 아끼면서 읽을 수도 있다. 시집을 읽고 있으면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바라볼 수 있다. 마음 쓸 데 없을 때는 천천히 흘러가는 시간, 마음 바쁠 때는 후다닥 달아나는 시간. 시집을 잡고 있는 내 손이 책장을 넘기는 것에서 확인하게 된다. 


    이 시집을 읽는 동안 나는 모처럼 한가했다. 책에 나온 프로필 사진으로 보아 젊은 시인인 듯했고, 시 속의 화자를 통해 추측해 보아도 젊은 사람인 듯 보였다. 젊은 시인은 충분히 고민할 줄 안다. 해결점이 보이지 않더라도 고민 그 자체를 사랑할 줄 안다. 어쩌면 고민이 아니라 고뇌라고 말해 주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왜 지금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 자체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것이니 고민보다는 고뇌가 더 어울릴지도. 


    감히 그가 사용한 시어들에 대해 말할 생각은 없다. 신선하다느니, 진부하다느니, 통속적이라는 말까지 그 속에서 내가 사용할 수 있는 말은 없다. 다만 나는 그의 시를 신선하다고 느끼면서 읽었다. 아, 이렇게도 느끼고 이렇게도 표현하는구나. 


    시의 제목들만 보더라도 내가 평소에 생각하고 있는 시의 제목들과는 거리가 좀 있다. 스테이플러, 스트로, 리트머스, 수배전단, 탈수, 러닝머신...이런 것들로도 시를 쓸 수 있다니. 이 시인은 이러한 메마르고 딱딱한 기계 혹은 소모품 속에서도 사람과 삶을 볼 줄 안다. 우리는 이미 너무 깊이 그리고 오랫동안 이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었던 것이다.  


    아직도 시를 읽고 있는 사람들에게, 아직도 시를 꿈꾸고 있는 사람들에게, 조심스럽게 권해 본다. 괜찮으리라고. (y에서 옮김2008012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공정하다는 착각
    마이클 샌델 지음, 함규진 옮김 / 와이즈베리 / 2020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자신이 없다. 책을 읽고 나니 더더욱. 과연 작가가 제시하는 해결책에 우리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까? 그러려는 사람이 있을까? 다들 나는 빼 달라고 말하지 않을까? 나는 빼고 너희들끼리 좀 해 보라고, 나는 눈 앞의 내 이익을 조금만 챙길 테니 너희들이 공동선에 따라는 공동체를 구성해 보라고. 나 한 사람 정도는 빠져도 괜찮지 않겠느냐며. 


    이래서야 시작부터 공정해질 수가 없다. 세상은 공정하지 않다. 조금이라도 공정하도록 해 보려는 의도가 중요할 뿐. 누구도 자신이 마땅히 공정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말하지 않으리라. 심지어 남들이 보기에 지독히 우대를 받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이들조차도 스스로는. 인류의 역사와 문화와 종교와 인간의 본능까지 어울려 몹시도 답을 구하기 어려운 문제다. 


    책은 남의 나라 미국의 사례로 서술되어 있는데 어떻게 우리네 현실과 이토록 닮아 있다는 말인지. 사회의 부정을 저지르는 모습은 국가나 민족과는 관계없이 다들 비슷한 모양인가? 더 가지려고 더 누리려고 더 보호 받으려고 공정과 능력의 개념조차 비틀어 사용하고 있는 기득권자들, 나는 어느 위치에 얼마만큼 발을 들여 놓고 있는 것일까. 내가 갖고 있는 공정 의식도 편협하기 그지 없는데. 


    내내 답답한 마음으로 읽었다. 그러리라 짐작한 만큼 답답하고 서글펐다. 작가의 위대한 통찰력이 글의 흐름에 따라 빛이 날수록 우리네 보잘것없는 의식 수준이 민망해졌다. 작가의 말이 얼마나 많은 사람의 마음을 울렸을까? 잠깐 흔들렸다가 곧 제자리로 돌아가고 말지는 않았을까? 자신은 공정한 편이라는 착각만을 여전히 품고서.     


    이제 적어도 개인의 행과 불행이 개인만의 능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말은 당당히 할 수 있겠다. 그래 봤자 더 나은 실천력은 아직 갖추지도 못한 형편이지만. (y에서 옮김20221202)

    ‘공정한 능력주의 제도를 마련하자’, ‘사회적 위치가 재능과 노력을 반영하게 하자’며 되풀이되는 이야기는 우리가 성공(또는 패배)을 해석하는 방식에 잘못된 영향을 준다. 재능과 노력을 보상하는 체제라고 생각하는 건, 승자들이 승리를 오직 자기 노력의 결과라고, 다 내가 잘나서 성공한 것이라고 여기게끔 한다. 그리고 그보다 운이 나빴던 사람들을 깔보도록 한다.
    능력주의적 오만은 승자들이 자기 성공을 지나치게 뻐기는 한편 그 버팀목이 된 우연과 타고난 행운은 잊어버리는 경향을 반영한다. 정상에 오른 사람은 자신의 운명에 대한 자격이 있는 것이고, 바닥에 있는 사람 역시 그 운명을 겪을 만하다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기술관료적 정치의 도덕적 자세이기도 하다. - P52

    프로테스탄트의 직업윤리는 자본주의 정신을 생겨나게 할 뿐만이 아니다. 자기 구제와 자기 운명에 대한 책임의 윤리, 즉 능력주의적 사고방식에 적합한 윤리를 장려한다. 이런 윤리의식은 큰 부를 축적할 수도 있지만 동시에 책임과 함께, 자수성가의 어두운 면이라 볼 수 있는 ‘불안하면서도 치열한 경쟁’을 초래한다. 은총 앞에서 느끼는 무력감이 주었던 겸손함. 그것은 이제 자기 자신의 능력을 믿는 데서 나오는 오만으로 대체된다. - P76

    만약 가장 잘나가는 사회구성원이 자기 이외의 요인, 가령 행운이나 신의 은총이나 공동체의 지원 덕분에 그 자리에 섰다면 그런 사람이 다른 이들의 운명에 힘을 보태줘야 한다는 도덕적 주장은 힘을 얻는다. 우리 모두가 공동 운명체라는 주장이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 - P128

    학력주의 편견은 능력주의적 오만의 한 증상이라 할 수 있다. 최근 수십 년 동안 능력주의에 더욱 물들게 되면서, 엘리트들은 출세하지 못한 사람들을 깔보는 버릇마저 들었다. 대학에 가서 자신의 조건을 향상시키라고 노동자들에게 골백번 되풀이하는 말은 아무리 의도가 좋을지라도 결국 학력주의를 조장하고 학력 떨어지는 사람들의 사회적 인식과 명망을 훼손한다. - P151

    연구자들은 능력주의적 사회에서 대학 진학이 계속 강조됨으로써 비대졸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강화된다고 본다. "교육이야말로 사회문제 해결의 만병통치약이라는 식의 권고는, 사회경제적으로 낮은 지위의 집단이 더욱 부정적으로 평가되면서 능력주의 이데올로기가 강화될 위험성을 키운다." 이는 사람들이 불평등을 더 선뜻 받아들이게 하며, 성공은 능력 나름이라고 믿기 쉽도록 한다. "교육을 개인 책임이라 여기게 되면 교육 격차에 따른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비판이 줄어들 것이다. 교육 성과는 대체로 개인 하기 나름이라 여겨지게 되고, 그에 따른 사회적 성공 및 실패 또한 그렇게 된다." - P161

    민주사회를 통치하려면 반대 의견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다. 반대에 직면하며 통치하면 어떻게 그런 반대가 나오게 되었는지 알게 되고, 그것을 극복하려면 어떤 공적 목표를 달성해야 할지도 꿰뚫고 있어야 한다. - P172

    정치 이전에 ‘우리 모두는 어떤 기본 사실에 전원 동의해야 하며, 그 이후에 우리 각자의 의견과 신념을 가지고 토론하면 된다’는 생각은 기술관료적 기만이다. 정치 토론은 종종 의제와 연관된 사실을 어떻게 잡아내고 정의할지에 대해 벌어진다. 어느 쪽이든 사실을 프레임화하는 데 일단 성공하면, 그는 장기적으로 그 논쟁에서 이긴 셈이다. 모이니한의 말과는 정반대로 우리의 의견은 우리의 인식을 사로잡는다. 의견이란 것은 사실이 명확히 규명되고 정립된 뒤에 비로소 생겨나는 게 아니다. - P179

    능력주의는 지성과 교육을 고등교육의 상아탑에 온통 몰아넣어 두고서, 누구에게나 그 상아탑에 들어올 공평한 경쟁이 보장되리라고만 약속한다. 그러나 이런 방식의 접근권 배분은 노동의 존엄을 떨어뜨리며 공동선을 오염시킨다. 시민교육은 담쟁이가 넝쿨진 캠퍼스 못지않게 지역사회 대학, 직업훈련소, 노조에서 잘될 수 있다. 향상심 있는 간호사와 배관공들이 야심적인 경영 컨설턴트보다 민주적 논쟁에서 뒤떨어질 까닭은 없다. - P300

    공동선이 오직 우리 동료 시민들이 우리 정치공동체에는 어떤 목적과 수단이 필요한지 숙려하는 데서 비롯된다면, 민주주의는 공동의 삶의 성격에 무관심해질 수 없다. 그것은 완벽한 평등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다만 서로 다른 삶의 영역에서 온 시민들이 서로 공동의 공간과 공공장소에서 만날 것을 요구한다. 이로써 우리는 우리의 다른 의견에 관해 타협하며 우리의 다름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배울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공동선을 기르는 방법이다. - P35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성녀의 구제 ㅣ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4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09년 12월
    평점 :
    절판


    한 사람을 완전히 사랑하는 일과 한 사람을 죽이고 완전범죄를 꿈꾸는 일의 끝이 맞닿아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집착을 어찌 이해할 수 있으랴. 


    사랑도 계획 살인도 결국은 대상을 향한 집념의 한 형태로 나타난다. 그에 대해, 아주 사소한 습관까지도 파악하고 있어야 하고, 파악하고 싶기도 하고, 이렇게 쓰다 보니 두 경우를 하나로 취급하는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아무렴, 사랑과 계획 살인이 비슷하다고 간주해서야 될 일이 아니다.


    그래도 사랑을 잘 하지 못하면, 소설 속이라고는 하지만, 이렇게 살인에 이를 수도 있겠다. 현실에서도 분명히 일어나고 있다고 하고. 왜 그런 상황이 빚어지는 것일까. 못 믿게 되었거나 처음부터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거나, 내가 아니면 사랑하는 사람 둘 중 한쪽에서 어긋난 것이었을 텐데. 다소 어긋나더라도 삐걱대면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이 있겠지만, 그 어긋남을 견디지 못하고 파멸하는 영혼 또한 있다는 것이니까.


    모처럼 범죄자에게 호감을 느끼면서 읽은 책이다. 책 시작부터 범죄를 저질렀음을 암시하면서 어떻게 살인을 하게 된 것인지를 풀어 나가는 서술 방식도 마음에 들었고. 어떤 일도 쉬운 일은 없는 것일까. 고단한 범죄자였지 싶어 쓴웃음이 고였다. (y에서 옮김2014102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공허한 십자가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선희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죄를 지었는데 죗값을 치른다는 것, 면죄부, 죄를 사하여 준다는 것, 이런 것에 대해 나는 꽤 삐딱한 편이다. 우선 죄는 짓지 말아야 하는 것이고, 죄를 지었다면 어떤 식으로든 벌을 받는 게 마땅한 것이며, 벌을 받았다고 해서 그 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입장을 갖고 있다. 완전한 인격체가 아니니, 죄를 짓지 않고 살 수만 있다면 더없이 좋을 것이나 어쩔 수 없이 죄를 지을 수도 있다는 것, 그런 경우에도 죄에 값하는 만큼의 대가를 치르는 게 도리가 아니겠는가 그렇게 믿고 싶은 탓도 있다. 


      문제는 죄의 값을 누가 어떻게 정할 수 있으며, 누가 어떤 방법으로 그 죗값을 치르게 하는가 하는 점이다. 현대 법치국가에서는 법으로 정해 놓고 실행하고 있다지만, 어느 시대든 누구나 인정할 만큼의 공정함을 보여준다고 하기에는 어려운 실정이다. 가해자와 피해자에 따른 입장의 차이가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어느 한 쪽도 억울하거나 섭섭한 심정을 갖지 않도록 하는 법의 판결,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게 아닐까 싶어진다.


      이 작가의 소설이 이 문제를 들여다 보게 한다. 사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는 문제. 그동안은 막연하게도 사형 제도가 없어져야 한다고 여겨왔다. 혹시 모를 희생자가 생기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서라는 의도로. 그런데 새삼스럽게 피해자 혹은 피해자 가족의 입장을 고려해 보게 되었다. 과연 그 상처가 치유될 수 있을 것인지. 범죄자 혹은 가해자가 법의 판결을 통해 어떤 식으로든 마음의 짐을 벗어버릴 수 있다면, 그래서 짐지운 십자가가 공허해져 버리고 만다면, 이건 과연 공평한가 아닌가. 범죄자는 오히려 홀가분해졌는데(사형 선고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피해자의 가족은 아무 보상도 받지 못했다는 상실감밖에 느낀 게 없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죄와 벌의 의미는 제대로 작용하는 것인가 어쩐가. 


      재미는 있었으나 마음은 무겁다. 개인의 의지나 선택에 의한 게 아닌 결과로 인한 불행은 어떤 경우에도 생기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할 뿐이다.  (y에서 옮김2014102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