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통신사 1 - 김종광 장편소설
김종광 지음 / 다산책방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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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어르신들, 제가 통신사 이야기를 써보고자 합니다. 이번에 저도 일본 갑니다. 소동으로요. 제가 낱낱이 적겠어요. 본 것, 들은 것, 겪은 것, 여러 어르신의 이야기, 다 사연을 들어볼 겁니다. 높으신 분들 사연도 듣고 역관 나리들 사연도 듣고 격군 아저씨 사연도 듣고.

……중국이든 왜국이든 사신 다녀오면 꼭 일기 같은 걸 남기는 분이 있잖아요. 사행록 말예요. 근데 그건 높으신 분이 한자로 쓰신 거라 아무리 잘 번역을 해도 언문으로는 재미있게 읽을 수가 없잖아요. 그 책들이 안 읽히는 건 한자로 쓰였기 때문이 아니라 재미없기 때문이란 거예요.”

‘조선통신사 기록물 2017 10 31,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고 한다. 1607년부터 1811년까지 12회에 걸쳐 조선에서 일본으로 파견되었던 외교사절단에 관한 자료가세계의 기억으로 그 보존가치를 인정받은 것이다. 한국의 기록자들, 일본인들이 남긴 기록들, 한자로, 언문으로, 심지어는 일본글자 가나로 이러저러하게 끼적거린 글들은 삼백 건이 넘는다. 그런데 이렇게 풍부한 기록물을 가진 조선통신사인데 바로 그 조선통신사의 전모를 실감나고 흥미롭게 담아낸 소설은 거의 없었다. 왜냐하면 조선통신사에는 영웅화할 만한 인물도 없고, 여자가 없어 사랑타령이 어렵고, 당파싸움이나 권모술수도 전쟁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종광 작가는 바로 그 없음에 매료되어 이 작품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그가 진정으로 쓰고 싶었던 역사소설이 바로 왕후장상, 영웅호걸이 나오지 않는 소설이었고, 그런 소설이 가능한 소재가 바로 조선통신사였던 것이다. 그렇게 탄생한 이 작품은 5백만 사내가 3백 일 동안, 1만 리의 여행을 다녀온 일본견문록이 된다. 이 작품의 이야기는 사행록의 한두 줄을 재구성한 것이 반, 순전한 허구가 반에다, 박람강기 저술도 1할쯤 된다. 역사적 기록의 빈틈을 상상력으로 채운 작가의 4년 동안의 집념이 어떻게 펼쳐졌는지 기대가 되었다. 

조선통신사란 조선시대 조선에서 일본의 막부장군에게 파견되었던 공식적인 외교사절을 말한다. 중앙관리 3인 이하로 정사 ·부사 ·서장관을 임명하고 300~500명으로 구성되는 사절단을 편성하였다. 여정은 한양을 출발하여 부산까지는 육로로 간 뒤, 부산에서부터는 대마도주의 안내를 받아 해로를 이용하여 대마도를 거쳐 일본의 각 지역에 상륙하는 경로였다. 실제로 조선통신사였던 500명 가까운 멤버들 가운데, 자신의 생각을 한문이라는 외국어로 적을 수 있었던 것은 양반이나 서얼·중인 같은 지식인 계급의 사람들뿐이었다. 사절단의 절대 다수였던 평민과 노비들은 일본에서 보고 듣고 생각한 바를 남기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 작품 속에서는 사절단의 절대 다수였던 그들이 일기를 쓰고, 책을 읽고, 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덕분에 우리는 조선의 거리에서 활약하던 이야기꾼들, 책벌레들을 만나볼 수 있고, 당시에 유행이었던 책들과 출판 분위기등을 느껴볼 수 있다. 삼국지연의, 수호전, 초한지, 서유기 등등 중국 이야기가 판친 지 이미 수백 년이었고, 그 책들을 모방하고 변형한 조선인이 쓴 중국이야기가 덩달아 판친 지가 백여 년. 게다가 조선의 이야기라는 것도 구전설화를 짜집기 한 게 거의 전부였던 시절, 지금의 시대를 사는 조선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려낸 뎐이 있었냐는 극중 어린 소년의 목소리야 말로 당시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전해주고 있다.

 

임취빈이 우쭐대었다. "소설인데 뭐 어때요?"

"동래에서 너는 사실에 충실할 거라고 그랬어. 이런 황당한 얘기는 소설이 아니라고 했잖아?"

"깨달았어요. 변탁 광광 작가님 말이 맞았어요. 사람들은 사실적인 얘기는 좋아하지 않아요. 권모술수, 전쟁, 비밀, 추리, 살육, 삼각 사각 연애, 강간 등등으로 도배되어야 해요. 오랑캐 대왕 관백 보는 날 아무 일 없이 사배만 하고 나왔다, 이런 얘기를 누가 읽어요?"

"최소한의 개연성, 사실성은 있어야 한다. 이건 너무 없다."

"왜요?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못할 것도 없잖아요?"

조선후기 평범한 사람들의 떼거리 여행을 다루고 있는 이 작품은, 역사 속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그런 조선의 모습을 보여준다. 종놈 삽사리, 격군 김국창, 소동 임취빈 같은 낮은 신분의 사람들도 여행의 기록을 남기고 소설을 지어 돈을 버는 세상, 신분과 상관없이 누구라도 책을 읽고, 일기를 쓰고, 이야기를 만드는 그런 세상 말이다. 통신사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려진 조선의 5백 사내들, 한 번도 주목받지 못했던 오소리잡놈들의 진짜 이야기는 그렇게 실제 역사보다 더욱 그럴듯한 조선의 모습으로 재탄생하고 있다. 특히나 절로 웃음을 자아내게 만드는 대목들이 많았는데,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은 장면들에서 잔잔한 재미들이 넘쳐 흘렀다. 예를 들면 이런 장면이다. 이복선 격군 왕초 노릇을 하는 오연걸이 대체 왜 우리 배에는 놀던 놈 하나가 없냐며, 재담꾼도 없고 가수도 없고, 심심한 놈만 모였다고, 아무거나 좀 해보라고 닦달을 해대자, 이광하가 난데없이 책을 찾는다. 책이 있으면 책을 읽어보겠다고. 그가 심청뎐을 꺼내 읽은 지 담배 한 대 참 만에 이복선 격군은 죄 글썽거리기 시작했고, 임경업뎐을 읽자 다들 임경업장군이 된 것처럼 격정에 휩싸였고, 전우치뎐을 읽자 다들 배꼽을 잡고 날아다니는 듯했으며, 콩쥐밭쥐뎐을 읽자 또 한바탕 울음바다가 된다. 그야말로 공감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 한 장면 덕분에 나도 작가처럼 이 작품 속 찌질한 오백 사내들이 좋아지고 말았다.

이 작품은 특정 사건이나 인물을 내세우지 않는다. 대신 조선통신사가 한양을 출발할 때부터 일본 강호에 갔다가 귀국해 임금 앞에 복명할 때까지의 전 과정을 따라간다. 그들의 희로애락, 그들이 보고 겪었을 별의별 일들을 생생하게 그려낸 여정을 보고 있노라면, 조선후기의 사람들이지만 그들이 현재의 우리와 크게 차이가 없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로 공감대 형성이 되는 부분들이 많았다. 주요 인물들이 중심이 되어 어떤 사건을 겪고, 위기를 벗어나는 식의 구조도 아니었고, 처음부터 여러 등장인물들이 한꺼번에 나와 각자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형식이라 다소 산만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저마다의 사연과 욕망을 지닌 그 수많은 인물들이 머나먼 길을 함께하는 동안 풀어내는 이야기 보따리는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계속 솟아나고 있었고,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서도 끝나지 않고 이어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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