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나의 1cm - 너를 안으며 나를 안는 방법에 관하여
김은주 지음, 양현정 그림 / 위즈덤하우스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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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함이 지루함과 동의어는 아니다. 대사를 외울 정도로 여러 번 본 영화라면 분명 당신의 인생영화일 것이다. 그 영화는 다음 장면을 예상할 수 있어도, 결말을 이미 알고 있어도, 언제 보아도 새로운 감동을 전해준다. 마찬가지로, 겨울이 지나고 매번 찾아오는 봄이 지루하지 않고 설레듯, 여행지에서 돌아와 집같이 익숙해진 사람과의 사랑은 언제나 찾아오는 봄같이 따뜻한 설렘을 준다.   p.83

7개국 80만 독자들의 마음을 어루만졌던 '1cm' 시리즈의 김은주 작가가 4년 만에 출간하는 에세이이다. 어쩌다 보니 '1cm' 시리즈를 처음부터 다 읽었는데, 카피라이터 출신의 작가답게 감각적이고, 톡톡 튀는 아이디어와 문구들이 마음을 건드리는 시리즈라서 가볍게 읽기에 참 좋았던 기억이 난다. 그러고보면 처음 《1cm》 라는 책을 만났던 것이 2008년이니 벌써 십 년이 훌쩍 넘었다. 이후로 일센티 플러스, 일센티 아트, 일센티 미니북까지 시리즈들을 만났었고, 작년에는 세계적 포토그래퍼 에밀리 블링코와의 콜라보로 완성한 <기분을 만지다>도 읽었다.

사실 '1cm'라는 수치는 실제 측정되는 크기로 눈금 열 개짜리, 손톱보다도 더 작은 분량이다. 그런데 그 작고도 하찮은 그것만큼의 마음으로 우리는 천국과 지옥을 오갈 수 있다. 아무 것도 아닌 말로 상처 받고, 사소한 행동 하나로 위로 받고, 따뜻한 커피 한 잔으로 행복해지고, 맛없는 점심 한끼로 기분 나빠지고.. 지나고 나면 별 것 도 아닌데 그 당시에는 아무 것도 아닌 게 절대 아닌 그런 일들 말이다. 그래서  '1cm' 시리즈'는 너무 바빠 죽을 것 같을 때 딱 '1cm 만큼의 여유', 도저히 풀리지 않는 난관에 봉착해 있을 때 '1cm 만큼만 생각을 바꿔보는 발상의 전환', 반복되는 일상에 의욕이 사라져 갈 때 잊고 있던 내 어린 시절의 꿈, '1cm 만큼의 설레임'에 대해서 이야기했었다. 기존 시리즈에 비해서 이번 책에서는 좀 더 사람과 사람 사이 관계로 인해 성장하게 되는 여러 가지 감정과 생각들을 세심하게 들여다보고, 1cm 더 사랑하는 만큼 1cm 더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들을 그려내고 있다.

 

낭만적 믿음에, 자주 가는 레스토랑, 자주 가는 옷 가게, 자주 가는 병원에서 얻을 수 있었던 이성적 믿음이 더해진다면, 수많은 경우의 수를 통해 이 사람이 건네는 위로는 따뜻한 수프 같고, 이 사람의 포옹은 바람 부는 날의 스카프같이 포근하며, 힘들거나 아픈 마음을 치유해줄 수 있는 사람, 언제든 기댈 수 있는 사람이라는 진짜 확신이 든다면, 그 사람과의 사랑은 아름다움에 견고함까지 갖춘 건축물이 되는 것이다.   p.142

저자는 말한다. 행복이 가장 싫어하는 세 가지 단어가  지금 말고 그때. 이곳 말고 거기. 당신 말고 그 사람.”이라고. 내가 지금 발 딛고 서 있는 현재,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이 소중하다는 말이다. 앞만 보고 달려 가느라 너무 가까운 곳에 있는 주변의 소중한 것들을 잊고 사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어두운 날도, 사실 어느 정도는 밝은 날이었고, 정말 어두운 날도 그만의 괜찮은 부분이 있는 날이라는 것을, 그렇게 긍정 마인드라는 힐링이 페이지 곳곳에 묻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사랑이라는 것의 가치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유치하거나 평범하지 않고 담백하면서도 따뜻해서 참 좋았다. 사랑은, 평범해도 괜찮다는 위로와 누군가에겐 특별하다는 위안을 동시에 가져다 준다. 늘 이기라고 말하는 세상 속에서 지는 게 억울하지 않다는 기분 또한 사랑만이 가져다 줄 수 있는 평온이다.

내가 일센티 시리즈를 좋아했던 이유는 너무 사랑스러운 그림들도 그렇고, 실려있는 글들이 모두 긍정적이라 책을 다 읽고 나면 어쩐지 내일은 나에게 조금 더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고, 이상하게 걱정 거리들이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고, 부정적인 내가 사라지고 마냥 긍정적인 내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번 책 역시 짧지만 다양한, 깊이 있지만 무겁지 않은 이야기들은 지치고 외로울 때, 언제든 펼쳐서 읽으면 나를 위로해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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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티풀 보이
데이비드 셰프 지음, 황소연 옮김 / 시공사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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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랫동안 닉을 기다려왔다. 닉의 귀가 시간이 지나면 녀석의 차 엔진 소리를 기다렸다. 차가 진입로에 들어와 멈추고 엔진이 웅웅거리다 멈추기를... 어느 때는 전화벨 소리를 기다리기도 했다. “안녕, 아빠. 뭐 하고 있어요?”라고 말하는 닉일 수도 있었고, “셰프 씨, 우리가 댁의 아드님을 데리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경찰일 수도 있었다. 닉이 늦도록 귀가하지 않거나 전화를 하지 않을 때마다 나는 재앙을 떠올렸다. 닉이 죽었다고. 늘 닉이 죽는 생각을 했다.    p.20~21

닉은 야무지고 똑똑하고, 타인에게 싹싹한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그렇게 대단히 영특하고 활달한, 평범한 아이였던 닉은 대체 어떻게 메스에 중독된 것일까. 닉은 10년 이상 간헐적으로 약물을 복용해왔다. 메스는 가장 많이 남용되고 중독성이 강한 마약으로, 그 위력은 헤로인과 코카인을 합친 것보다 더 강력하다고 한다. 닉의 아버지는 아들이 망가지는 걸 막으려고, 아들을 구하기 위해, 돕기 위해 몸부림쳤다. 하지만 아들의 메스 중독을 막으려고 갖은 노력을 기울이는 아버지의 마음과는 상관없이 약물 중독을 통제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스티브 카렐, 티모시 샬라메 주연의 영화 [뷰티풀 보이] 원작 에세이가 개정판으로 출간되었다. 이 책은 마약 중독으로 평범했던 가정이, 부모가, 형제자매가 얼마나 쉽고 빠르게 붕괴되는지를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다. 저널리스트이자 이 책의 저자인 데이비드 셰프는 부모가 해결해줄 수 없는 절망의 세계로 가버린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진솔하게 풀어낸다. 약물중독 문제를 중독자와 그에게 중독되어가는 또 다른 중독자, 가족의 입장에서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들 가족의 이야기는 특별하기도 하지만 매우 보편적이기도 하다. 모든 중독자의 이야기에는 누구나 공감할 면이 있을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내 아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나는 어디서부터 길을 잘못 들었나? 알아넌은 내 잘못이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책임을 통감했다. 그 길고 장황한 가정법을 반복했다. 만약에 내가 한계를 더 엄히 설정했더라면. 만약에 내가 더 일관성이 있었더라면. 만약에 내가 닉을 더 잘 보호했더라면. 만약에 내가 마약을 하지 않았더라면. 만약에 닉의 엄마와 내가 헤어지지 않았더라면. 만약에 이혼 후 우리가 같은 도시에 살았더라면.  p.267

자식에게 나쁜 일이 생기면 대부분의 부모는 죄책감을 가지고 스스로를 자책하게 된다. 이 모든 일이 벌어진 것이 내 잘못은 아니었는지, 혹시 내가 내 자식을 완전히 망쳐버린 것은 아닌지, 만약에 내가 좀더 잘했더라면 이러한 비극을 막을 수 있었던 건 아닌지 끊임없이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끔찍한 폭력이 벌어졌다는 뉴스가 들려오면 사람들은 생각한다. 부모가 아이에게 어떻게 했길래 저런 사람으로 자라났을까, 부모가 무관심하고, 무책임하고, 어쩌면 학대를 한 것은 아닐까. 따뜻한 환경에서 사랑으로 키운 아이는 절대 저런 짓을 하지 않았을 텐데 라고. 자식이 약물 중독이 되었다고 하면 아마도 누구나 이와 비슷하게 생각할 것이다. 가정 환경이 대체 어떠했길래, 부모는 대체 아이가 저 지경이 되도록 뭘 한 거냐고 말이다. 하지만, 평범한 가정에서 사랑 받고 화목하게 지냈다고 하더라도 이런 비극은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다. 누구의 자식도 예외일 수 없다. 누구나 이 작품 속 닉 처럼 될 수 있다.

어떤 부모든 자식에게 좋은 일만 일어나기를 바랄 것이다. 내 아이들이 항상 행복하게, 안전하게 지내기만을 꿈꾸며, 자신의 모든 사랑과 노력과 시간을 쏟아 붓는다. 그리고 자신이 아는 방식 중에 최선의 방법으로 아이를 기른다. 하지만 어느 시점에 다다르면 아이는 부모가 알 수 없는 존재로 성장해버릴 수밖에 없다. 

 

나는 닉의 의기소침함, 분노, 공허함, 닉의 후퇴, 닉의 혼란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너는 누구니? 

 

부모가 된다는 것은 세상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행복이지만, 동시에 가장 치명적인 약점을 끌어 안고 살아야 한다는 굴레와도 같다. 자신의 모든 시간과 노력을 들이고, 많은 것을 포기하고 감수하면서, 아이를 키우는 매 순간 자신이 잘 하고 있는 건지에 대한 의문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저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내가 아이를 망친 걸까? 내가 너무 오냐오냐했을까? 내 관심이 부족했을까? 관심이 너무 지나쳤을까? 만약에 우리가 시골로 이사하지 않았다면. 만약에, 만약에, 만약에.... 후회는 계속된다. 그리고 자신은 물론, 다른 가족들의 삶이 비극으로 치닫는 동안에도 아들의 추락을 방관하지 않는다. 아이는 수없이 거짓말을 하고 재발을 반복하지만 그때마다 저자는 쓰러진 자식을 일으켜 세우고 오직 믿음으로 기다려준다. 그리하여 '아들의 마약 중독을 함께한 아버지가 들려주는 구원의 여정'은 놀라울 정도로 현실적이고, 뭉클하고, 가슴 아프게 펼쳐진다.

책을 읽으면서 내내, 다음 페이지에서 갑작스럽게 닉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오는 건 아닐까 하는 최악의 비극을 떠올렸다. 아마 저자의 삶도 매 순간 그러했을 것이다.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될 까봐 불안했을 것이다. 다행히도 현재 닉은 팔 년째 약을 끊고 지내고 있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장담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간 겪은 일들을 생각하면 가족들은 그 시간과, 닉이 서른여섯 살이란 나이가 기적처럼 느껴진다고. 아직 이들의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음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부모이자, 누군가의 자식이다. 그러므로 현재도 계속되고 있는 위기 속에서도 여전히 희망을 가지고 있는, 최악의 상황을 겪었지만 믿음을 버리지 않았던 부모 자식 간의 관계에 대한 이 이야기는 내 이야기가 될 수도, 당신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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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크니의 무엇이든 그려드립니닷! - 일러스트레이터미네이터 키크니의 주문제작 만화
키크니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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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최초의 '댓글 주문형' 개그 만화다. 별칭 '일러스트레이터미네이터' 키크니가 네티즌들의 요청 댓글을 받아 한 컷의 만화로 답한 것이다. 처음에는 주문제작 만화라니.. 그게 뭐지 싶었다. 그런데 페이지를 넘길 수록 정말 빵빵 터지고, 허를 찌르는 위트와 반전 개그가 색다른 카타르시스를 안겨 주는 책이었다.

큰 덩치에 후드 차림의 왠지 뻔뻔한 듯 친근한 키크니, 그는 9년 동안 일러스트레이터로 일하며 하루 평균 10시간씩 일했더니 어느 순간 번아웃이 왔다고 한다. 그래서 뭐라고 해보려고 시작한 SNS가 반년 만에 20만 명이 넘는 팔로워가 생겼고, 10만 건 이상의 댓글을 받는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독자와 작가가 함께 만든 소통형 콘텐츠의 탄생라는 것도 의미가 있고, 황당한 질문도 진지하게, 가슴 짠한 질문에는 따뜻하게, 유머로 공감을 만들어 내고, 유쾌한 위로를 안겨주는 한 컷의 만화가 주는 힘이란 대단했다.

극한 일상, 격한 소망, 찐한 사랑, 쿨한 농담, 묘한 상상 모두 다 가능하다. 무엇이든 그려드린다는 키크니는 그야말로 어이없는 질문에도 성심성의껏 만화를 그려 낸다. 질문은 이런 식이다. '비 내리는 제 시험지가 무슨 생각하는지 그려주세요.' 라든지 '카페 알바생인데요. 진상 손님들은 무슨 생각하고 사는지 그려주세요.', '카드갑 갚아내고 또 카드 쓰는 저를 혼내주는 그림 좀 그려주세요', '미친듯이 에너지 솓으며 놀다 지쳐 잠든 우리 아기는 무슨 꿈을 꾸는지 그려주세요' 등등.. 누구나 무심코 일상에서 마주하는 순간들이라서 내 얘기 같고, 당신 얘기 같은 그런 사연들이다.

특히 페이지 구성 덕분에 이 책을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도록 되어 있다. 페이지를 펼치면 오른쪽엔 그림, 왼쪽엔 질문이 있다. 그런데 이 그림과 질문이 한 쌍이 아니다. 오른쪽 페이지의 질문 글을 읽고 페이지를 넘겨야 만날 수 있는 만화가 바로 그에 대한 답이다. 그 덕에 댓글로 올라온 질문을 읽고 페이지를 넘기는 잠깐 동안 궁금해할 여지가 생기니 허를 찌르는 개그의 묘미가 더 해지는 느낌이다.

'많이 먹어도 살 안 찌는 제 모습 그려주세요' 라는 질문에 대한 키크니의 답변은 '그릴 수가 없어 주영아' 이다. 이렇게 배꼽 잡고 웃게 만드는 순간들이 너무 많아서 이 밤에 혼자 막 깔깔대며 웃는 중이다. 소소한 일상 속의 바람과 고민, 사연들을 담고 있어서 공감할 수밖에 없는 에피소드들이 가득했다.

이 책은 SNS에서 7개월간 연재한 작품 중 베스트와 미공개 작품을 모은 것이다. ‘일상, 소망, 사랑, 가족, 농담, 상상이라는 여섯 개의 키워드로 나누어 소개한다. 챕터별 4컷 만화, 펼쳐 보는 특별 일러스트훈남 키크니 브로마이드도 수록되어 있다. 그래서 이미 SNS에서 키크니의 만화들을 보아 왔던 독자들이라도 책을 구입해서 봐야 할 이유가 있다. 난 반대로 이 책을 읽고 나서 키크니의 SNS를 찾아서 보게 되었다.

출근하는데 퇴근하고 싶은 세상의 모든 직장인들, 시험공부 잘 안 되는 학생들, 종일 육아에 전쟁 같은 하루를 보낸 엄마들, 데이트하고 싶은데 상대가 없는 솔로들, 함께 사는 강아지와 고양이의 속마음이 궁금한 반려인들... 그 외에도 피곤한 날, 지친 날, 우울한 날 이 책을 만나 보자. 누구라도 오 분도 안 되어 큭큭 대며 웃게 만들어 줄 수 있는 책이니 말이다. '한 컷의 만화가 줄 수 있는 가장 유쾌한 위로'라는 문구처럼, 웃고, 울고, 통쾌하고, 뭉클하기도 하고... 이 책을 보며 아무 생각 없이 일상을 잊어 버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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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세 번째 배심원 스토리콜렉터 72
스티브 캐버나 지음, 서효령 옮김 / 북로드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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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고한 사람들이 범죄로 기소되는 것은 슬픈 사실이다. 우리의 사법 시스템은 그것에 기초하고 있다. 빌어먹게도 그런 일은 매일 일어난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다치게 했다는 혐의로 고발당한 무고한 사람들을 많이 봐왔기에 사람들이 진실을 말할 때와 거짓을 말할 때를 알아볼 수 있었다. 거짓말쟁이들은 갖지 못하는 표정이 있다. 설명하긴 어렵지만. 상실과 고통이 있다. 하지만 다른 것도 있다. 의심할 여지 없이 분노와 두려움. 그리고 마지막으로, 극도로 부당하다는 느낌. 나는 이런 사건들을 아주 많이 겪어왔기에 그것이 눈 한구석에 드러난 불꽃처럼 춤추는 것을 거의 알아볼 수 있었다.    p.63

할리우드의 막 떠오르는 스타, 최고의 영향력 있는 젊은 커플 로버트 솔로몬과 아리엘라 블룸은 막 결혼한 참이었다. 두 사람은 장편 공상과학영화에 주인공으로 낙찰되었고 리얼리티 시리즈 계약에 서명했다. 그들은 너무도 행복한 나날을 보내는 중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리엘라와 경호실장이 나체 상태로 침실에서 처참하게 살해된 채로 발견된다. 그 현장을 목격한 것은 바로 남편인 로버트였고, 경찰 당국은 곧바로 사건 용의자로 로버트 솔로몬을 지목한다. 범인이 남긴 흉기와 표식에서도 로버트의 지문과 DNA가 발견되면서 그가 유죄 판결을 받으리라는 것은 거의 기정사실이었다. 그리고 이제 바로 그 세기의 재판이 다음 주에 시작될 예정이었다.

스타들의 공식 소송자로 유명한 루디가 LA 뒷골목을 떠돌던 사기꾼 출신 변호사 에디의 뛰어난 능력을 눈여겨보고 그를 스카웃하기 위해 제안을 한다. 이 도시 역사상 가장 큰 형사재판에서 차석변호인을 맡을 생각이 있냐고. 하지만 방송에서 본 내용으로 미루어 에디는 로버트가 그들을 죽였다고 생각했고, 자신은 죄인을 위해 일하지 않는다고 거절한다. 루디는 뉴욕 경찰이 그에게 살인범의 누명을 씌운 거라고 자신하고, 실제 의뢰인인 로버트를 만나고 나서 에디도 그가 결백할 거라는 믿음이 생긴다. 하지만 그는 뛰어난 재능의 배우였다. 과연 로버트는 자신의 아내와 경호실장을 충동적으로 살해한 범인일까.

 

"나에 대해 좋은 말을 들었다면 아마 전부 사실이 아닐 겁니다. 나쁜 말을 들었다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 거고요." 내가 말했다.

그는 코로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마치 대기에서 적대감을 빨아 들이듯.

"당신들이 '최고'의 게임을 준비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신사분들. 그게 필요할 거요." 프라이어가 말했다. 그는 바비를 계속 지켜보면서 검사석으로 다시 걸어갔다.   p.238

이야기는 변호사 에디와 천재 연쇄살인마 케인의 시점에서 각각 교차 진행된다. 에디가 재판에 참여하게 되기까지, 그리고 재판이 진행되는 과정을 그리는 것이 한 축이고, 케인이 배심원석에 앉게 되기까지의 치밀하고 계획적인 단계와 실제 재판이 벌어지면서 그가 벌이는 갖은 술수가 나머지 한 축이다. 법정 안팎에서 펼쳐지는 살인범과 변호사의 불꽃 튀는 진검승부를 다루는 작품이야 기존에 많았겠지만, 살인범이 자신이 저지른 사건의 재판에 배심원으로 참석한다는 설정은 그야말로 참신하다 못해 획기적인 아이디어가 아닌가 싶다. 지금도 인권변호사로 활동 중인 작가 스티브 캐버나의 탄탄한 법적 지식을 배경으로 놀라운 상상력과 독창적인 플롯이 만들어진 것이다. 스티브 캐버나가 존 그리샴, 마이클 코넬리의 뒤를 잇는 법정 스릴러계의 다크호스로 주목받고 있다고 하는데, 그야말로 이 장르의 차세대 대표주자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작가가 아닌가 싶다.

케인은 과연 어떻게 철저한 검증을 통해 선정되는 배심원단에 들어갈 수 있엇을까. 왜 그는 로버트에게 누명을 씌우고 법의 심판으로 유죄를 선고받게 하려는 걸까. 에디는 배심원석에 있는 그의 정체를 알아볼 수 있을 까. 너무도 명백하게 유죄로 몰린 로버트는 누명을 벗을 수 잇을까. 페이지를 넘길 수록 궁금증은 늘어만 가고, 한 번 읽기 시작하면 절대 멈출 수 없는 속도를 자랑하는 작품이었다. 마이클 코넬리, 리 차일드, 이언 랜킨 등 전 세계 거장들이 극찬했다는데, 다들 이 작품의 기발함과 독창적인 구성, 영리한 함정과 플롯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만큼 이 작품의 독창성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법정 스릴러물은 웬만큼 읽어 봤다 싶은 사람이라도 이 책을 읽으며 감탄할 수밖에 없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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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묻힌 거짓말 마틴 베너 시리즈
크리스티나 올손 지음, 장여정 옮김 / 북레시피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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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을 내리고 전부 다시 상자에 넣은 후 내 방으로 상자를 들고 갔다. 아마도 일기장에서 손을 못 뗄 것 같다. 잠들 때까지 이걸 읽고 있겠지.

그럼 결국 토요일은 놀기보다 일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스스로 말했듯 나는 결정을 내려야 했으니까.

내가 정말 지금 진지하게 죽은 사람을 변호할 생각을 하고 있는 건가?    p.72~73

 

스톡홀름에 사는 변호사 마틴 베너에게 어느 날 바비라는 남자가 찾아와 도움을 요청한다. 자신의 여동생을 도와달라고, 동생을 구해달라는 것이었다. 바비의 동생은 6개월 전에 죽었고, 나쁜 놈들이 가짜 혐의를 씌워서 동생 인생을 망가뜨렸다고 한다. 그러니 죽은 여동생 사라 텔의 누명을 벗겨달라는 거였다. 게다가 그녀는 바로 다섯 건의 살인을 자백한 후 감독하에 특별 외출을 나갔다가 도주해 공판일 하루 전날 자살한 그 여자, 심각한 범죄 혐의로 기소되었던 사라 텍사스였다. 바비는 당연히 못 하겠다고 두 손을 들어 보인다. 동생분이 무죄라는 증거를 갖고 있다면 경찰서로 가라고. 자신은 변호사지 사건 수사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말이다.

그녀가 죽기 몇 달 전, 신문은 사라 텍사스에 관한 기사로 도배가 됐었다. 인형 같은 얼굴의 매력적인 젊은 여성이 연쇄살인범이었으니 사람들의 관심이 모아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쨌든 그녀는 죽었고, 마틴은 사설탐정이 아니라 변호사였다. 대체 무슨 수로 죽은 여자의 결백을 증명한다는 말인가. 그것도 스스로 자백했고, 무죄 판결이 내려질 가능성이 거의 없었던 사건이었는데 말이다. 그런데 이 사건은 어딘가 이상한 구석이 도사리고 있었다. 대체 왜 아무도 캐묻지 않을 세 건의 살인 범행을 자백한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목격자도 없었고, 지문 등 현장 증거도 없었던 터라 그녀가 혐의를 스스로 인정하고 직접 증거를 제출하지 않았다면 아마 유죄 판결을 받는 일은 없었을 텐데 말이다. 어디서 찾아내야 할진 모르겠지만 뭔가가 있었고, 마틴은 그게 계속 신경이 쓰여 결국 그 사건에 대한 비공식적 조사를 시작하게 된다.

 

 

스스로에게 몇 번이고 되묻는다. 내가 알았어야 했나? 우리가 깨달았어야 했나? 답은 분명하다. 당연히 알았어야 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다른 방법이 있었는지는 지금 돌이켜봐도 모르겠다. 저지르지도 않은 살인 혐의로 기소될 위기에 처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 덫에 빠졌을 때 뒤따르는 결과는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멈추지 않았다. 한치 앞도 모르고. 이미 균열은 조금씩 일어나고 있었고, 나는 그것도 모른 채 폼페이와 같은 운명에 한 발짝씩 다가가고 있었다.   p.345~346

 

스웨덴에서만 25만 부, 전 세계 320만 부 판매를 기록한 "스웨덴 범죄소설의 여왕" 크리스티나 올손의 작품이다.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작가인데, 대체 왜 이제야 출간되었나 싶을 정도로 뛰어난 작품이었다. 북유럽 누아르, 스웨덴 범죄소설의 매력을 고스란히 보여주면서도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못지 않는 스케일과 가독성, 강렬한 스토리의 힘을 가지고 있는 작품이다. 주인공 마틴 베너라는 인물도 꽤나 독특한 캐릭터인데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지만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여자를 꼬여낼 수 있는 바람둥이 흑인 변호사이다. 그는 네 살 난 딸을 키우고 있는데, 동생과 매제가 비행기 사고로 죽고 맡아줄 친척이 없어 위탁아동으로 가게 되자 자신이 키우겠다고 나선 거였다. 시니컬하고 잘나가는 변호사이지만, 알고 보면 가슴 따뜻한 남자이기도 했던 것이다. 바로 이런 마틴의 1인칭 시점으로 스토리가 진행되기 때문에 그가 삶에 대해 생각하는 통찰력이 고스란히 드러나 이야기는 더욱 흥미롭다.

피의자의 자살로 이미 종결된 사건의 전말을 파헤치기 시작하면서 마틴은 점점 더 혼란스럽다. 내가 자처해서 바보가 되는 길을 택한 건지, 알고 보니 결국 실체도 없는 유령을 좇고 있는 건 아닌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한 확신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급기야 그는 범죄 용의자로 몰리게 되고, 그의 삶은 걷잡을 수 없는 혼돈 속으로 빠져 들게 된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스토리도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매혹적이고, 주인공 마틴의 독특한 매력 역시 이 시리즈의 다음 이야기를 고대하게 만들어 준다. 스웨덴 범죄소설 작가들을 유독 좋아하는 편이기도 하지만, 정말 뛰어난 작가들이 많다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마르틴 베크 시리즈의 마이 셰발,페르 발뢰, 밀레니엄 시리즈의 스티그 라르손, 발란데르 시리즈의 헤닝 만켈에 이어 크리스티나 올손도 그러한 명맥을 이어가는 범죄소설계의 거장임에 분명하다. 그녀의 작품들이 더 많이 국내에 출간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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