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늙은 여자 - 알래스카 원주민이 들려주는 생존에 대한 이야기
벨마 월리스 지음, 짐 그랜트 그림, 김남주 옮김 / 이봄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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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공평하게 흐르고 모든 걸 시들어가게 만든다.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 늙어가긴 마찬가지이지만, 그 모습은 천차만별이다. 어떤 이들은 '내가 정말 늙어가는구나'라는 생각에 두려워하기도 하고, 늙어 가면서 조금씩 변해가는 모습에 자신이 아닌 것만 같은 기분에 낯설어 하기도 한다. 나이를 먹을 수록 더 성숙해지고 깊이를 더해가는 이들도 있을 것이고, 더이상 젊은 시절처럼 일하기를 그만두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여기 이 두 늙은 여인처럼 말이다.

 

 

"그래, 사람들은 우리에게 죽음을 선고했어! 그들은 우리가 너무 늙어서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고 여기지. 우리 역시 지난날 열심히 일했고 살 권리가 있다는 것을 그들은 잊어 버렸어! 그래서 지금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거야, 친구야. 어차피 죽을 거라면 뭔가 해보고 죽자고. 가만히 앉아서 죽음을 기다릴 게 아니라 말이야."

알래스카 극지방 유목민들은 언제나 먹을 것을 찾아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녔다. 그 해 겨울에는 맹추위가 닥쳐 위협적인 한기만 휘몰아칠 뿐 생명의 흔적을 찾기 어려웠다. 그래서 아무리 애를 써도 많은 여자들과 아이들이 영양실조로 고통 받고 있었고, 그 중 몇 명은 기아로 인해 죽어갔다. 그위친 부족 안에는 사람들이 오랜 세월 돌봐온 늙은 여자 둘이 있었다. 그들은 끊임없이 여기저기가 아프다고 불평을 해댔고, 자신들이 늙고 약하다는 것을 과시했다. 족장은 곧 닥칠 혹독한 날들에 대해, 이 겨울 동안 살아남기 위해 고민했고, 결국 나이든 사람들을 두고 가기로 결정한다. 두 늙은 여자 중에 무리 안에 딸과 손자가 있었던 칙디야크는 자신의 딸이 족장의 결정에 항의하지 않음에 깊은 충격을 받는다. 이윽고 굶주림에 지친 사람들의 커다란 대열이 천천히 멀어져 간다.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두 늙은 여자를 남겨두고.

 

살을 에는 맹추위가 닥친 알래스카, 그 땅에서 늙은 여자 단둘이 남겨져 스스로 삶을 꾸려가야 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여든 살, 일흔 다섯 살이었던 그들은 아직 죽을 때가 되었을 정도는 아니었다. 여전히 걸을 수 있고, 볼 수 있고, 이야기할 수 있었음에도 사람들은 그들에게 죽음을 선고한 것이다. 모욕감과 분노에 휩싸인 칙디야크에게 친구가 말한다. 여기 앉아서 기다리기만 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죽고 말테고, 사람들에게 우리의 무력함을 증명하게 될 거라고. 하지만 우리는 아직 이 세상을 떠나야 할 때가 아니지 않냐고, 어차피 죽을 거라면 뭔가 해보고 죽자고 말이다.

 

"잘못된 건 아무것도 없어, 친구. 요컨대 우리는 제대로 가고 있어. 그저 이 땅이 과거에는 정말 살기 수월한 곳이었는데 이제는 날 원하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 아마 관절이 너무 아파서 이런 불평을 하게 되는 것 같아."

칙디야크가 웃음을 터뜨렸다.

저자인 벨마 월리스는 알래스카의 외딴 마을, 전통적인 아타바스칸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실제로 십여 년 동안 혼자 생활하면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사냥과 덫 놓기 기술을 익히며 살았다. 책 속에서 북극권 사람들의 생존 기술이 생생하게 묘사되고 있는 건 바로 그녀가 자신의 부족에게서 배웠고, 그렇게 살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어머니가 딸들에게 대대로 전해주던 알래스카 인디언의 전설적인 이야기, 바로 두 늙은 여인과 그들의 생존에 대한 이야기를 소설로 써냈다. 이 작품은 젊은 이들의 호의와 보살핌으로 남은 생을 따뜻하고 편안하게 보내려던 두 늙은 여인이 얼어붙은 호수를 걷고, 수없이 눈 위에 넘어지고 또 넘어지며 혹한의 기온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내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손가락 하나도 까딱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그들이 젊은 시절 배운 사냥 기술을 활용하고, 토끼털로 담요도 만들고, 옷가지들도 만들고 힘겨운 겨울을 버텨낸다. 특히나 아타바스칸족 토박이인 짐 그랜트의 삽화들이 두 노인과 동물들, 그리고 알래스카의 풍경들을 보여주며 더욱 이야기에 온도를 더해주고 있다.

냉장고에 넣어둔 과일이나 채소가 색이 변질되고 형태가 망가지는 걸 누구나 한 번쯤은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달콤하고 상쾌하던 것이 갈색 덩어리로 변해서 시큼한 냄새를 풍기는 무엇으로 변해버리는 것이, 어쩌면 우리네 인간이 자연히 나이를 먹어가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영원한 젊음이란 없으니까. 언젠가 나도 남겨질 누군가를 걱정해야 할 만큼, 이제는 어느 날 갑자기 어떻게 되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만큼의 나이라는 걸 스스로 알게 되는 그 순간을 상상해 본 적이 있다. 더 이상 반짝이지 않는 영혼, 육신이 견뎌낼 수 있는 한계는 시간이 갈수록 짧아지면서 느껴지는 노후된 육체. 나이가 든다는 것, 시간이 흐른다는 것은 그렇게 지독하고도 슬픈 것이다. 이 책을 통해 벨마 월리스는 노인이라서 당연히 할 수 없는 일이란 없다고, 삶에서 뭔가를 성취하는 데에는 나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말해준다. '노년의 성장소설'이라는 특별한 방식을 통해서 말이다.

 

나는 멋지게 늙는 것이 오래 전부터 꿈이었다. 그래서 젊음을 추억하지만 그것을 그리워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나에게 늙음이란 무언가를 잃는 것이 아니라 얻는 것이 되기를,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어갈수록 더 성숙해지고 단단해지고 깊이 있어 지기를, 그리하여 십 년 전의 나보다 오늘의 내가 더 포기하지 않고, 생에 맞서 싸우려는 의지를 가질 수 있기를 언제나 바래왔다. 이 작품 속 두 늙은 여인은 나에게 그 오래 전 나의 다짐을 다시 한번 떠올릴 수 있도록 해주었다. 나이가 들어도 끊임없이 움직일 수 있고, 뭔가 이루어낼 수 있고, 자신이 하고자 하는 걸 시도해볼 수만 있다면, 젊음을 부러워할 필요도, 늙음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아주 특별한 알래스카 인디언의 이야기는 그렇게 뭉클했고,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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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의 별 - 제4회 황산벌청년문학상 수상작
강태식 지음 / 은행나무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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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한번은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기대했던 일들이 모두 벽에 부딪히고, 사람들 사이에서 이리저리 부딪히며 시달리고, 다들 내 마음 같지 않아서 오해가 쌓이고, 관계가 엉망이 되고, 풀어야 할 것들은 많은데 당장 처리해야 할 것들이 산재해 있어서 숨이 막혀 버릴 것 같았던 그 때, 세상에 사람이 한 명도 없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정말 그 날은 사람이라는 존재가 지긋지긋해질 때까지 참고 참았던 무언가가 가슴에서 툭 끊어지는 느낌이었는데, 세상에 아무도 없다면 그럼 얼마나 사는 게 편할까 싶었던 거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이렇게 사람들 틈에 있어도 외로운데, 모두가 사라진다면 그 얼마나 고독할까. 싶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마치 양날의 검처럼 한 가지를 포기해야만 다른 한 가지를 겨우 얻을 수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대체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바래야 하는 것일까. 그저 고독을 견디든, 혹은 관계에서 오는 모욕과 분노와 슬픔을 견뎌야만 하는 것인가. 어쩌면 이 책은 아주 오래 전에 가졌던 내 의문에 대한 대답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멀리 있는 건 그게 아무리 대단해 보여도 진짜 인생은 아니니까. 안 그렇수? 모름지기 진짜 인생이라는 건 말이야, 이렇게 두 손으로 단단히 잡은 다음 한입 가득 베어 물고 쩝쩝 소리를 내면서 씹을 수 있어야 해. 이 맥도널드 자이언트 버거처럼 말이우. 아니면 좁고 지저분하고, 어제도 변기가 막혀서 똥물이 넘쳐흘렀지만, 아무튼 쌍욕이 나올 만큼 사람 냄새가 풍기거나. 내가 사는 뉴욕 할렘 가 125번 거리의 낡은 아파트처럼.

51세기 초, 인류는 생명유지장치 없이 돌아다닐 수 있는 최초의 행성, 플랜A를 발견한다. 지구로부터 우주선을 타고 세 시간 오십 분이 소요되는 거리, 지구 질량의 삼분의 이에 해당하는 이 무인 행성은 곧 거대한 유원지로 만들어 진다. 조잡한 호텔 한 채와 싸구려 놀이기구 몇 개를 들여 놓기 시작하면서 유원지 행성으로 새 단장을 한 플랜A는 초창기 관광객들에게 엄청난 붐을 일으켰다. 특히나 행성 고리와 정십자 형태로 맞물려 돌아가는 이만여 대의 행성대관람차는 엄청난 규모를 자랑했고, 덕분에 서비스 로봇이 소화할 수 있는 인원보다 관광객 수는 다섯 배 이상이 많아 구조적 불균형이 계속 증가되고 있었다. 그러다 갑작스럽게 치사율이 백 퍼센트에 이르는 바이러스로 인해 플랜A는 통제가 불가능한 아노미 상태에 빠져 버렸고, 공식적인 무인 행성이 되고 만다.

그리고 아무도 살지 않는 그곳 플랜A에 홀로 남게 된 리, 그는 세상에서 가장 비싼 놀이기구를 수십 년째 타고 있는 늙은 남자이자 그곳의 유일한 인간이다. 그는 무인행성의 궤도를 십오 년, 이십 삼 년, 삼십 여 년째 돌면서 홀로 그 그곳에서 살아 왔다. 놀이기구로 가득 찬 행성에서 혼자 산다는 건 대체 어떤 기분일까. 엄청나게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예전에는 누구나 타고 싶어서 환장했던 행성대관람차였지만, 그처럼 죽을 때까지 타고 싶어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그것도 혼자서 말이다.

 

아무도 없는 나라의 왕이 된 기분은 어떨까. 이용객이 한 명도 없는 거대한 유원지의 유일한 이용객이 된 기분은 또 어떨까. 이 작품은 정말 지독하게 외로운 남자 리가 지구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삶의 쓸쓸함을 견디는 이들과 전화 통화를 하며 나누는 이야기를 옴니버스 형식으로 전개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무려 우주에서 홀로 하나의 행성을 지키며 살아야 하는 그 말도 안 되는 그 철저한 고독만큼이나, 평범하게 지구에서 보통의 일상을 살고 있는 이들 역시 그에 못지 않은 외로움과 쓸쓸함 속에서 삶을 견뎌내고 있었다는 거였다.

 

지난 일주일 동안 당신은 매일 누군가와 전화 통화를 했다. 처음에는 십 분쯤, 그러다 삼십 분이 되고, 한 시간이 되고...... 어떨 땐 두 시간 넘게 통화한 적도 있다. 통화 상대는 늙은 남자고,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비싼 놀이기구를 이십삼 년 동안 타고 있는 늙은 남자라고 소개했다. 또 그는 아주 오래 전에 당신도 한 번 가본 적 있는 행성의 유일한 인간이다. 그는 자기가 신이라고 말했다가 다음 순간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인간일 뿐이라고 말을 바꾸기도 한다.

리는 평생에 걸쳐 오직 전화 통화로 다른 행성에 사는 타인들과 접촉한다.  와 전화 체스를 두는 기무라 다로는 자신의 이름을 딴 기업체를 운영했던 사업가였는데, 현재는 은퇴 후 혼자 지내고 있다. 먼저 떠난 아내, 일 년에 한두 번씩 얼굴을 내미는 자식들, 이제는 컸다고 코빼기도 안 비치는 손자들로 인해 항상 외로움을 느꼈고, 고독이라는 게 얼마나 고약한지 매 순간 체감하고 있었다. 통신판매원 도리스 브라운은 열네 살 때 아버지로부터 성폭행을 당했고, 포만감이 들어야 겨우 잠을 자고, 잊고 싶은 걸 잊을 수 있었기에 계속 뭔가를 먹기 시작한다. 예쁘다는 말을 들으면 소름이 끼쳤기에, 과도한 폭식증은 계속 이어졌고, 결국 몸을 가누기 어려울 정도로 체중이 늘어나고 만다. 스물한 살 때 아버지가 죽고, 그 때부터 통신판매 일을 하면서 먹고 살기 위해 뭐든 닥치는 대로 팔아 치웠다. 그러다 어느 날 우연히 리의 전화를 받게 된다. 그 외에도 교도소에서 출소해 아들을 찾는 로드리게스, 플랜A의 존폐여부를 결정짓기 위해 파견된 행성심사대의 베일리 박사, 그리고 늙어 버린 리가 플랜A에 와서 자신의 자리를 대신 지켜주지 않겠느냐고 부탁하는 알코올중독자 양 웬리까지.. 다양한 인물들의 삶이 그려지고 있다.

특이한 것은 작품의 배경은 우주 탐사며 여행이 자유로운 미래의 어느 시기라서 SF처럼 보이고, 전반적인 분위기는 인간의 고독과 쓸쓸함, 외로움이 주요 정서인데 실제로 등장하는 인물들과 이야기는 매우 유머러스하고 경쾌하다는 것이다. 게다가 플랜A가 만들어지고, 성공하고 결국 사람들에게 버려지는 과정을 통해서 인간의 탐욕이 얼마나 참혹한 결과를 가져오는지 보여주는 과정 또한 독특한 구성을 통해 색다르게 펼쳐지고 있어 매력적이다. 리와 통화를 하게 되는 다섯 인물 각각도 매우 개성이 뚜렷하고, 그들의 삶 또한 너무도 다양한 방식과 모습을 하고 있어 이야기 자체로서의 재미도 뛰어 나다. 나만 외롭지 않다는 공감, 나보다 더 고독한 타인의 그것을 통해 받게 되는 위안, 그들의 고독을 토닥여 주면서 나의 고독을 견디게 되는 아이러니. 그리고 그 모든 고독과 위안의 중심에 분명 어딘가에 존재하지만,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한 남자가 있다.

 

이 세상에 인생이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물건인지 대충이라도 아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어떨 땐 어렴풋이 알 것 같은데 찬찬히 생각해보면 뭐가 뭔지 도통 모르겠는 그것, 가끔은 너무도 잘 아는 사람들이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처럼 낯설게 느껴지기도 하고, 이게 마지막이라는 느낌으로 최선을 다했는데도 아무렇지 않게 사람 뒤통수를 치기도 하는 그것, 그 알 수 없는 것이 바로 인생이 아닐까. 그 속에서 너무도 외로운 존재인 인간이란 사실 아무 것도 아니기도 하고, 그 모든 것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인간을 통해, 당신에게 주어진 평범한 일상과 삶의 행운을 기억하라고 이야기한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인간을 통해 당신이 고독을 견딜 수 있도록 위로해준다. 당신만 그런 것이 아니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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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한 사람이면 어때서
유정아 지음 / 북폴리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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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지금까지 살아 온 모든 순간이 그런 풍경과 같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성공이니 실패니 하는 것들은 그 순간이 지나면 아무것도 아니게 되지만, 그 길을 지나쳐 오며 보고 느낀 것들은 끝에 무엇이 있든 기억에 새겨지니까. 어쩌면 사람은 길의 끝에 놓은 결과가 아니라, 눈에 담은 길가의 풍경들을 곱씹으면서 깊어지는 게 아닐까.

결혼 후 육아에 전념하느라 직장을 그만두고 전업 주부로 살다 보니, 정말 치열하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끔 그런 생각이 든다. 남들은 다 잘나가는데 나만 제자리에 있는 건 아닐까. 아직 직장 생활을 하고 있는 동료들, 친구들의 모습을 보며 뭔가 허전한 기분이 드는 것이다. 오로지 아이에게만 모든 걸 쏟아 붓고 있는 나는 그들처럼 커리어가 쌓이는 것도, 돈을 버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내 젊음이 다 사라져 버리는 건 아닐까 싶었다. 그래서 이 책을 처음 만났을 때, 제목부터 그냥 호감이 가고, 내용을 읽지 않아도 위로되는 느낌이 들었던 것 같다..

저자의 말처럼 '내가 시시할 정도로 흔한 사람이라는 걸 내 입으로 이야기하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졌다'는 그런 기분, '더 이상 애써 무엇이 되려고 안간힘을 쓸 필요가 없고, 굳이 어떤 가능성을 보여 주지 않아도 괜찮다'는 그런 느낌 말이다. 반드시 뭔가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을 내려놓자 되레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지고, 그 실체가 더 잘 보였다는 저자의 말에도 공감 이백퍼센트였다. 조금 시시해지면 뭐 어떻단 말인가. 다들 이루고 얻는 것보다 버리고 포기하는 게 더 많은 시시한 삶을 살고 있을 텐데 말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도 '비로소 내 보잘것없음에 애정을 갖기 시작'한 것 같다.

그 모든 것을 목격한 순간부터 나는젊은이스럽기를 그만두었다. 의지든 패기든 발랄함이든, 딱 내가 버겁지 않을 만큼만 내놓기로 했다. 타고난 게으름이나 소심함 같은 것들도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젊음은 누군가에게 보답해야 하는 선물이 아니라 삶의 한 구간일 뿐이니까. 모든 나이가 그렇듯.

그것만으로도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저자는 마음이 지친 날이면 자기 전 과자를 한 봉지 뜯어 놓고 착한 주인공들과 우스꽝스러운 악당들이 등장하는 어린이용 애니메이션을 본다고 했다. 무슨 일이 벌어지든 결국 해피 엔딩을 맞이하는 이런 작품들을 보다,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나는 '어차피 해피 엔딩이야.'라는 말을 주문처럼 속으로 외우게 되었다고. 이런 만화들처럼 삶의 결말이 해피 엔딩이라는 걸 확신할 수 있다면 지금의 일상이 조금 덜 버겁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시작했다고 하는데, 너무 좋은 방법 같았다. 나도 그녀처럼 내 삶이 해피 엔딩일 것을 믿고 싶어 졌다. 어쨌든 결국 행복해질 거라고. 그 과정이야 얼마나 복잡하고 어렵더라도, 미래의 행복을 믿는다면, 현재의 고통쯤이야 충분히 견딜 수 있지 않을까.

이 책은 그야말로 평범한 30대 초반의 직장인이 할 법한 고민들과 현재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어, 청춘이기를 포기하고 사는 요즘의 젊은 세대들이 공감할 수밖에 없는 에세이이기도 하다. 그녀가 그려내는 '실패로 끝났기에 이야기는커녕 추억으로도 남기지 못했던 내 삶의 가장 찌질하고 구질구질한 순간들'은 우리가 살면서 누구나 경험해봤을 만한 것들이라 그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위로를 안겨 준다. ‘나만 그런 게 아니다라는 생각은 그 어떤 방법으로도 줄 수 없는 커다란 안도감을 주니까 말이다.

 

'소비에 실패할 여유'라는 글로 작년 큰 화제가 됐던 유정아 작가의 첫 번째 에세이는 그렇게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이야기로 가슴 한 가득 위안을 안겨 주고 있다. 그녀의 삶도, 나의 삶도 결국에는 모두 해피 엔딩이 되기를 바래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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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이 있는 집
김진영 지음 / 엘릭시르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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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객관적인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오늘 아침 이전까지 녹화된 영상은 삭제돼 있었다. 나는 나를 믿으면 안 된다. 내가 의논하고 물어볼 수 있는 사람은 남편뿐이다. 근데 남편을 믿어도 될까?

어둠의 방에 혼자 갇힌 듯이 정신이 아득해졌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결혼을 하고 십육 년 동안 가정주부로 여태껏 살아온 주란. 그녀는 친구들과 달리 한 번도 직장 생활을 해본 적이 없다. 하지만 의사 남편에 똑똑한 아들까지 부족한 것 없이 풍족하게 살고 있다고 자부했다. 그녀는 최근에 판교 신도시로 이사를 했는데, 원하는 설계대로 주택을 짓고 정원까지 있는 마당을 가질 수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그런데 마당에서 악취가 나기 시작하면서, 완벽했던 그녀의 생활에 조금씩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백화점 침대 코너에서 일하는 상은은 결혼 사 년 만에 임신을 했지만, 그다지 행복하지 않다. 신혼 초부터 자신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남편과 이혼을 하기 위해 변호사와 상담까지 받았지만, 임신 이후로 남편은 신체적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고, 그와 헤어지기란 점점 더 어려운 일이 되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남편이 저수지에서 밤낚시 약속이 있어 가는 길에 친정에 들른 상은은 다음 날 아침 전화를 한 통 받게 된다. 남편이 시신으로 발견되었으니 병원으로 와서 신원 확인을 해달라는 경찰의 연락이었다.

 

나는 피곤할 따름이었다. 잠이 자고 싶었다. 푹 자고 일어난다고 해서 세상이 달라지지 않을 테고, 내 삶도 그대로일 게 분명했다. 김주란의 말대로 모두가 불행할 테고, 나의 내일도 불행할 거다. 하지만 이상하게 김주란의 말이 위로가 되었다.

'이 세상에 쉬운 삶은 없어요. 자신을 특별히 불행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요. 우린 모두 다 평범하게 불행한 거예요.'

이야기는 완벽했던 일상에 조금씩 스며들기 시작한 의심이 커져 가는 주란과 남편의 폭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기기 시작한 상은의 시점에서 교차 서술된다. 결혼과 함께 모두가 꿈꾸는 집에서 부유한 생활을 하는 여자와 남편과 맞벌이하며 근근이 삶을 살아내는 여자의 삶이란 얼핏 교집합이 존재하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주란의 남편이 일하는 병원에 제약 회사의 영업직원인 상은의 남편이 들락거리던 사이였고, 사고가 나던 날 밤에도 두 사람이 밤낚시 약속이 있었던 참이었다. 주란의 남편은 그날 밤에 마음이 바뀌어 약속에 가지 않았다고 주장했고, 그의 말을 주란이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들이 벌어진다. 하지만 극 초반에 상은이 직접 자신이 남편을 죽인 살인자라고 고백하면서 이야기가 진행되기 때문에, 주란의 의심은 사실상 크게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게다가 주란은 이사오기 전에도 오해로 타인을 의심했던 전력이 있었고, 오래 전 언니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기에 스스로도 자신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

주란의 이야기는 믿을 수 없는 화자로 서술되는 방식이라 심리 서스펜스의 분위기를 띠고 있고, 살인 사건이 벌어지고 그에 대한 완벽한 범죄를 꿈꾸는 상은의 이야기는 미스터리의 분위기를 띠고 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이야기가 교집합을 이루게 되고 주란과 상은이 만나 그들이 협력해서 같은 비밀을 추적하게 되는 순간, 작품은 또 다른 색채를 띠게 된다. 과연 두 주인공의 집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하는 궁금증을 풀어나가는 과정은 영미권에서 한참 인기였던 가정 스릴러로서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면서 극에 긴장감을 부여한다. 가정 폭력에서 비롯된 살인 사건이라는 소재 자체는 그다지 새로울 것도 없지만,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 방식이 매우 흥미로웠던 작품이었다. 소설 집필 경험이 없는 작가의 첫 작품이지만, 영화 연출을 했고, 장편 시나리오를 썼던 작가라 그런지 놀라운 데뷔작을 써낸 것 같다. 다음 작품이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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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애의 마음
김금희 지음 / 창비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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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경애가 그 '봉인'이라는 말을 얼마나 필사적으로 붙들었는지는 아무도 모를 것이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방식에는 육체 너머의 것이 있다는 것, 어떤 사랑은 멈춰진 기억을 밀고 나가는 것만으로도 계속될 수 있다는 것. 사라진 누군가는 그렇게 기억하는 사람의 인생에서 다시 한번 살게 된다는 것.

팀장 대리라는 어색한 직함을 단 채 회사 생활을 하고 있는 상수. 팀장 대리란 팀장은 팀장인데 팀원이 한 명도 없는 사람을 일컬었다. 반도미싱에서 영업 일을 하는 상수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열심히는 했지만 융통성이 없고, 거래처 사장들과 다투거나, 정치 얘기를 하다가 불화를 만든다거나 하는 등 동료를 비롯해 공장주들에게도 별로 인기가 없었다. 결혼은커녕 연애라도 하는지 알 수 없고, 동료 팀장을 짝사랑하는 한심한 그를 회사에서 어찌 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의 부친이 국회의원을 지낸 정치인인데다, 회장의 재수학원 동기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저렇게 10년을 흘러오던 상수는 팀장 대리라는 직함에 조금 익숙해지자 자신에게 팀원을 배정해달라고 요구한다. 그리고 총무부에 있던 경애가 오게 된다.

경애는 원래 홍보부에 있다가 총무부로, 이번에는 다시 영업부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유는 그녀가 3년 전 농성 때 불법 해고 처단 등을 목 놓아 외쳤던 이력때문이다. 당시에 파업 기간 동안 일어난 성희롱을 노조 측에 항의한 탓에 파업이 흐지부지 되었고, 덕분에 그녀는 여지껏 회사에서 버텨오고 있었다. 물론 그녀도 차라리 회사를 나갈까 싶기도 했지만, 엄마가 유방암 판정을 받고 미용실을 닫고 항암치료를 했던 탓에 도망가지 않고, 마음의 문을 닫고 살아 왔던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삐딱하게 볼 정도로 하고 싶은 말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분명하게 의사 표시를 하는 그녀와 상수는 과연 잘 지낼 수 있을까. 운전하면서 클랙슨도 한번 안 누르고 규칙을 잘 지키는 남자와 운전대만 잡으면 세상의 모든 욕설을 내뱉는 여자가 그렇게 한 팀이 되었다.

상수의 인생에서는 늘 그가 예상하지도 못한 일들이 벌어져 낭패감 속으로 몰아넣었다. 인생의 대부분의 날들이 상수에게 실패라는 결론을 선언하기 위해 준비되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니까 공상수 너 실패, 메뉴 선택 실패, 이메일 보안 실패, 언니로 살기 실패, 짝사랑 실패, 해외파견 실패, 팀장 실패, 아주 다 실패.

이렇게 너무도 달라 보이는 두 사람에겐 사실 그들이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던 삶의 교집합이 있었다. 경애는 고등학교 시절 하이텔 영화동호회 활동을 하며 학창 시절 유일하게 친구들을 사귀었었다. 그런데 호프집에서 화재 사건이 일어났고 무려 56명의 아이들이 그곳에서 죽었다. 마침 그곳에 있던 경애는 잠시 전화를 하러 나온 덕분에 사고 현장에서 살아남았지만, 많은 시간을 함께 했던 친구 E를 사고로 잃고 만다. 상수 역시 같은 사고 현장에서 단 한 명의 소중한 친구를 잃었고, 그 친구가 바로 경애의 친구 E였던 것이다. 그리고 상수는 '언니는 죄가 없다'라는 페이스북 연애상담 페이지를 7년째 운영하고 있었다. 팔로워가 2만명에 이르는 곳으로, 상수는 그 계정에서 언니, 라고 불렸고 그렇게 온라인 상에서 오랫동안 언니로 살았다. 경애는 대학 시절 연인이었던 산주 선배가 결혼을 한 뒤에도 그에 대한 마음을 완전히 접지 못하고, 연애상담 페이지에 편지를 쓰곤 했다. 물론 그에 대한 답장을 하는 '언니'가 상수일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이 작품은 <너무 한낮의 연애>라는 인상적인 이야기로 만났던 김금희 작가의 첫 번째 장편소설이다. 작년 봄부터 겨울까지 계간 「창작과비평」에 연재하며 호평을 받았던 작품이라고 해서 더욱 기대를 했었다. 이야기는 너무도 달라 보이는 두 남녀의 현재 이야기를 따라 가면서 그들 자신을 몰랐지만 한때 공유했던 과거의 시간을 함께 풀어 낸다. 반도 미싱에서 한 팀이 되어 근무하다 베트남에 파견되어 현지에서 일을 하게 되는 상황과 '언죄다' 페이지의 언니들이 상수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 사랑의 여러 유형과 그들의 마음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보여준다. 살다 보면 끝장난 사랑 때문에 마음까지 완전히 파괴되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했던 뭔가를 잃어 버리고 세상의 끝으로 떨어지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할 것이다. 극중 모두의 '언니'는 이렇게 말한다. 마음을 폐기하지 말라고. 마음은 그렇게 어느 부분을 버릴 수 있는 게 아니더라고. 우리는 조금 부스러지기는 했지만 파괴 되지 않았다고 말이다. 슬프기도 하고, 따뜻하기도 하고, 애잔하기도 하고, 뭉클하기도 한 작품이었다. 여러 가지 이야기를 담고 있어 어느 방향으로 보느냐에 따라 다양한 시각에서 읽어낼 수 있는 다채로움도 가지고 있어 더욱 특별했던 작품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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