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경애가 그 '봉인'이라는 말을
얼마나 필사적으로 붙들었는지는 아무도 모를 것이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방식에는 육체 너머의 것이 있다는 것, 어떤 사랑은 멈춰진 기억을 밀고 나가는 것만으로도
계속될 수 있다는 것. 사라진
누군가는 그렇게 기억하는 사람의 인생에서 다시 한번 살게 된다는 것.
팀장 대리라는 어색한 직함을 단 채 회사 생활을 하고 있는 상수.
팀장 대리란 팀장은 팀장인데 팀원이 한 명도 없는 사람을 일컬었다. 반도미싱에서 영업 일을 하는 상수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열심히는 했지만 융통성이 없고, 거래처 사장들과 다투거나, 정치 얘기를 하다가 불화를 만든다거나 하는 등 동료를 비롯해 공장주들에게도 별로 인기가 없었다. 결혼은커녕 연애라도 하는지 알 수
없고, 동료 팀장을 짝사랑하는
한심한 그를 회사에서 어찌 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의 부친이 국회의원을 지낸 정치인인데다, 회장의 재수학원 동기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저렇게 10년을 흘러오던 상수는 팀장 대리라는 직함에 조금
익숙해지자 자신에게 팀원을 배정해달라고 요구한다.
그리고 총무부에 있던 경애가 오게 된다.
경애는 원래 홍보부에 있다가
총무부로, 이번에는 다시
영업부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유는 그녀가 3년 전 농성 때 불법 해고 처단 등을 목 놓아 외쳤던 이력때문이다. 당시에 파업 기간 동안 일어난 성희롱을 노조 측에 항의한 탓에 파업이 흐지부지
되었고, 덕분에 그녀는 여지껏
회사에서 버텨오고 있었다. 물론 그녀도 차라리 회사를 나갈까 싶기도 했지만,
엄마가 유방암 판정을 받고 미용실을 닫고 항암치료를 했던 탓에 도망가지
않고, 마음의 문을 닫고 살아
왔던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삐딱하게 볼 정도로 하고 싶은 말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분명하게 의사 표시를 하는 그녀와 상수는 과연 잘 지낼 수
있을까. 운전하면서 클랙슨도
한번 안 누르고 규칙을 잘 지키는 남자와 운전대만 잡으면 세상의 모든 욕설을 내뱉는 여자가 그렇게 한 팀이 되었다.
상수의 인생에서는 늘 그가 예상하지도 못한 일들이 벌어져 낭패감 속으로 몰아넣었다. 인생의 대부분의 날들이 상수에게 실패라는 결론을
선언하기 위해 준비되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니까 공상수 너 실패, 메뉴 선택 실패, 이메일 보안 실패, 언니로 살기 실패, 짝사랑 실패, 해외파견 실패, 팀장 실패, 아주
다 실패.
이렇게 너무도 달라 보이는 두 사람에겐 사실 그들이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던 삶의 교집합이 있었다. 경애는 고등학교 시절 하이텔 영화동호회 활동을
하며 학창 시절 유일하게 친구들을 사귀었었다.
그런데 호프집에서 화재 사건이 일어났고 무려 56명의 아이들이 그곳에서 죽었다. 마침 그곳에 있던 경애는 잠시 전화를 하러 나온
덕분에 사고 현장에서 살아남았지만, 많은 시간을 함께 했던 친구 E를 사고로 잃고 만다. 상수 역시 같은 사고 현장에서 단 한 명의 소중한 친구를 잃었고,
그 친구가 바로 경애의 친구
E였던 것이다.
그리고 상수는
'언니는 죄가 없다'라는 페이스북 연애상담 페이지를 7년째 운영하고 있었다. 팔로워가 2만명에 이르는 곳으로, 상수는 그 계정에서 언니, 라고 불렸고 그렇게 온라인 상에서 오랫동안 언니로
살았다. 경애는 대학 시절
연인이었던 산주 선배가 결혼을 한 뒤에도 그에 대한 마음을 완전히 접지 못하고, 연애상담 페이지에 편지를 쓰곤 했다. 물론 그에 대한 답장을 하는 '언니'가 상수일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이 작품은 <너무 한낮의 연애>라는 인상적인 이야기로 만났던 김금희 작가의
첫 번째 장편소설이다. 작년
봄부터 겨울까지 계간 「창작과비평」에 연재하며 호평을 받았던 작품이라고 해서 더욱 기대를 했었다. 이야기는 너무도 달라 보이는 두 남녀의 현재
이야기를 따라 가면서 그들 자신을 몰랐지만 한때 공유했던 과거의 시간을 함께 풀어 낸다. 반도 미싱에서 한 팀이 되어 근무하다 베트남에 파견되어 현지에서 일을 하게 되는
상황과 '언죄다' 페이지의
언니들이 상수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 사랑의 여러 유형과 그들의 마음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보여준다. 살다 보면 끝장난 사랑 때문에 마음까지 완전히
파괴되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했던 뭔가를 잃어 버리고 세상의 끝으로 떨어지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할 것이다. 극중 모두의 '언니'는 이렇게 말한다. 마음을 폐기하지 말라고. 마음은 그렇게 어느 부분을 버릴 수 있는 게
아니더라고. 우리는 조금
부스러지기는 했지만 파괴 되지 않았다고 말이다.
슬프기도 하고,
따뜻하기도 하고,
애잔하기도 하고,
뭉클하기도 한 작품이었다.
여러 가지 이야기를 담고 있어 어느 방향으로 보느냐에 따라 다양한 시각에서 읽어낼 수 있는
다채로움도 가지고 있어 더욱 특별했던 작품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