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이 있는 집
김진영 지음 / 엘릭시르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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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객관적인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오늘 아침 이전까지 녹화된 영상은 삭제돼 있었다. 나는 나를 믿으면 안 된다. 내가 의논하고 물어볼 수 있는 사람은 남편뿐이다. 근데 남편을 믿어도 될까?

어둠의 방에 혼자 갇힌 듯이 정신이 아득해졌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결혼을 하고 십육 년 동안 가정주부로 여태껏 살아온 주란. 그녀는 친구들과 달리 한 번도 직장 생활을 해본 적이 없다. 하지만 의사 남편에 똑똑한 아들까지 부족한 것 없이 풍족하게 살고 있다고 자부했다. 그녀는 최근에 판교 신도시로 이사를 했는데, 원하는 설계대로 주택을 짓고 정원까지 있는 마당을 가질 수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그런데 마당에서 악취가 나기 시작하면서, 완벽했던 그녀의 생활에 조금씩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백화점 침대 코너에서 일하는 상은은 결혼 사 년 만에 임신을 했지만, 그다지 행복하지 않다. 신혼 초부터 자신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남편과 이혼을 하기 위해 변호사와 상담까지 받았지만, 임신 이후로 남편은 신체적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고, 그와 헤어지기란 점점 더 어려운 일이 되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남편이 저수지에서 밤낚시 약속이 있어 가는 길에 친정에 들른 상은은 다음 날 아침 전화를 한 통 받게 된다. 남편이 시신으로 발견되었으니 병원으로 와서 신원 확인을 해달라는 경찰의 연락이었다.

 

나는 피곤할 따름이었다. 잠이 자고 싶었다. 푹 자고 일어난다고 해서 세상이 달라지지 않을 테고, 내 삶도 그대로일 게 분명했다. 김주란의 말대로 모두가 불행할 테고, 나의 내일도 불행할 거다. 하지만 이상하게 김주란의 말이 위로가 되었다.

'이 세상에 쉬운 삶은 없어요. 자신을 특별히 불행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요. 우린 모두 다 평범하게 불행한 거예요.'

이야기는 완벽했던 일상에 조금씩 스며들기 시작한 의심이 커져 가는 주란과 남편의 폭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기기 시작한 상은의 시점에서 교차 서술된다. 결혼과 함께 모두가 꿈꾸는 집에서 부유한 생활을 하는 여자와 남편과 맞벌이하며 근근이 삶을 살아내는 여자의 삶이란 얼핏 교집합이 존재하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주란의 남편이 일하는 병원에 제약 회사의 영업직원인 상은의 남편이 들락거리던 사이였고, 사고가 나던 날 밤에도 두 사람이 밤낚시 약속이 있었던 참이었다. 주란의 남편은 그날 밤에 마음이 바뀌어 약속에 가지 않았다고 주장했고, 그의 말을 주란이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들이 벌어진다. 하지만 극 초반에 상은이 직접 자신이 남편을 죽인 살인자라고 고백하면서 이야기가 진행되기 때문에, 주란의 의심은 사실상 크게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게다가 주란은 이사오기 전에도 오해로 타인을 의심했던 전력이 있었고, 오래 전 언니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기에 스스로도 자신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

주란의 이야기는 믿을 수 없는 화자로 서술되는 방식이라 심리 서스펜스의 분위기를 띠고 있고, 살인 사건이 벌어지고 그에 대한 완벽한 범죄를 꿈꾸는 상은의 이야기는 미스터리의 분위기를 띠고 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이야기가 교집합을 이루게 되고 주란과 상은이 만나 그들이 협력해서 같은 비밀을 추적하게 되는 순간, 작품은 또 다른 색채를 띠게 된다. 과연 두 주인공의 집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하는 궁금증을 풀어나가는 과정은 영미권에서 한참 인기였던 가정 스릴러로서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면서 극에 긴장감을 부여한다. 가정 폭력에서 비롯된 살인 사건이라는 소재 자체는 그다지 새로울 것도 없지만,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 방식이 매우 흥미로웠던 작품이었다. 소설 집필 경험이 없는 작가의 첫 작품이지만, 영화 연출을 했고, 장편 시나리오를 썼던 작가라 그런지 놀라운 데뷔작을 써낸 것 같다. 다음 작품이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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