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지금까지 살아 온 모든 순간이 그런 풍경과 같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성공이니 실패니 하는 것들은 그 순간이 지나면 아무것도 아니게
되지만, 그 길을 지나쳐 오며
보고 느낀 것들은 끝에 무엇이 있든 기억에 새겨지니까.
어쩌면 사람은 길의 끝에 놓은 결과가 아니라, 눈에 담은 길가의 풍경들을 곱씹으면서 깊어지는 게 아닐까.
결혼 후 육아에 전념하느라 직장을 그만두고 전업 주부로 살다 보니, 정말 치열하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끔 그런 생각이
든다. 남들은 다 잘나가는데
나만 제자리에 있는 건 아닐까. 아직 직장 생활을 하고 있는 동료들,
친구들의 모습을 보며 뭔가 허전한 기분이 드는 것이다. 오로지 아이에게만 모든 걸 쏟아 붓고 있는 나는
그들처럼 커리어가 쌓이는 것도, 돈을 버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내 젊음이 다 사라져 버리는 건 아닐까 싶었다.
그래서 이 책을 처음 만났을 때, 제목부터 그냥 호감이 가고, 내용을 읽지 않아도 위로되는 느낌이 들었던 것 같다..
저자의 말처럼 '내가 시시할 정도로 흔한 사람이라는 걸 내 입으로 이야기하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졌다'는 그런 기분, '더 이상 애써 무엇이 되려고 안간힘을 쓸 필요가
없고, 굳이 어떤 가능성을
보여 주지 않아도 괜찮다'는
그런 느낌 말이다. 반드시
뭔가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을 내려놓자 되레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지고,
그 실체가 더 잘 보였다는 저자의 말에도 공감 이백퍼센트였다. 조금 시시해지면 뭐 어떻단
말인가. 다들 이루고 얻는
것보다 버리고 포기하는 게 더 많은 시시한 삶을 살고 있을 텐데 말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도
'비로소 내 보잘것없음에 애정을 갖기 시작'한 것 같다.
그 모든 것을 목격한 순간부터 나는
‘젊은이스럽기’를 그만두었다.
의지든 패기든 발랄함이든,
딱 내가 버겁지 않을 만큼만 내놓기로 했다. 타고난 게으름이나 소심함 같은 것들도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젊음은 누군가에게
보답해야 하는 선물이 아니라 삶의 한 구간일 뿐이니까.
모든 나이가 그렇듯.
그것만으로도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저자는 마음이 지친 날이면 자기 전 과자를 한 봉지 뜯어 놓고 착한 주인공들과 우스꽝스러운 악당들이 등장하는 어린이용 애니메이션을
본다고 했다. 무슨 일이
벌어지든 결국 해피 엔딩을 맞이하는 이런 작품들을 보다,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나는
'어차피 해피 엔딩이야.'라는 말을 주문처럼 속으로 외우게 되었다고. 이런 만화들처럼 삶의 결말이 해피 엔딩이라는 걸
확신할 수 있다면 지금의 일상이 조금 덜 버겁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시작했다고 하는데, 너무 좋은 방법 같았다. 나도 그녀처럼 내 삶이 해피 엔딩일 것을 믿고 싶어 졌다. 어쨌든 결국 행복해질 거라고. 그 과정이야 얼마나 복잡하고
어렵더라도, 미래의 행복을
믿는다면, 현재의 고통쯤이야
충분히 견딜 수 있지 않을까.
이 책은 그야말로
평범한 30대 초반의 직장인이
할 법한 고민들과 현재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어,
청춘이기를 포기하고 사는 요즘의 젊은 세대들이 공감할 수밖에 없는 에세이이기도
하다. 그녀가
그려내는 '실패로 끝났기에
이야기는커녕 추억으로도 남기지 못했던 내 삶의 가장 찌질하고 구질구질한 순간들'은 우리가 살면서 누구나 경험해봤을 만한 것들이라 그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위로를 안겨 준다. ‘나만
그런 게 아니다’라는 생각은
그 어떤 방법으로도 줄 수 없는 커다란 안도감을 주니까 말이다.
'소비에 실패할 여유'라는 글로 작년 큰 화제가 됐던 유정아 작가의 첫 번째
에세이는 그렇게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이야기로 가슴 한 가득 위안을 안겨 주고 있다. 그녀의 삶도,
나의 삶도 결국에는 모두 해피 엔딩이 되기를 바래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