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롤 에디션 D(desire) 9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지음, 김미정 옮김 / 그책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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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디자이너를 꿈꾸는 열아홉의 테레즈는 백화점에서 임시직으로 일하고 있는 중이다. 크리스마스 선물로 인형을 사주려는 사람들을 상대하던 어느 날, 한 여인을 만나게 된다. 우연히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친 순간은 그렇게 운명처럼 그녀에게 각인된다. 테레즈는 일상이 불안했고, 자신의 꿈에 대해 자신이 없었으며, 항상 갈팡질팡했고, 스스로의 삶이 처량했다. 게다가 연인인 리처드와 만난 지 열 달 정도 되었지만, 그를 전혀 사랑하지 않았다. 그를 좋아하긴 했지만, 그와 사랑에 빠지는 건 영원히 불가능할 것 같다는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캐롤은 남편과 불행한 결혼 생활을 이어오다 이혼을 앞두고 있었고, 딸의 양육권 관련해서 골치가 아픈 상황이었다. 그녀 역시 삶에 아무런 기쁨도 찾을 수 없는 상태였던 것이다.

그렇게 생에 지치고 외로웠던 두 여자가, 한 눈에 상대를 알아본다.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맞닿았다. 테레즈는 상자를 열다가 고개를 들었고, 때마침 여인도 고개를 돌리는 순간 두 시선이 부딪쳤다. 여인은 늘씬한 몸매에 금발이었으며 넉넉한 모피 코트를 걸친 모습이 우아했다. 한 손을 허리에 대고 있어서 모피 코트 앞섶이 벌어졌다. 눈동자에 붙들린 테레즈는 시선을 피할 수 없었다. 앞에 있는 손님이 재차 묻는 소리가 들렸지만 테레즈는 가만히 선 채 벙어리가 되었다......테레즈는 저 여인이 분명 자기에게 올 것임을 직감했다. 여인이 서서히 카운터로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테레즈의 심장은 멈춰 섰던 순간을 만회하려는 듯 쿵쾅거렸다. 여인이 점점 다가오자 테레즈의 얼굴이 붉어졌다.

보수적인 당시의 시대상에 비추어 여자와 여자의 로맨스를 그린 작품으로 보자면 상당히 파격적이지만, 사실 그저 한 존재와 다른 존재가 서로를 알아보고 마음이 시키는 대로 서로에게 다가가는 과정으로 이 작품을 보자면 여느 연애 소설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무미건조하고 확신 없는 삶에 지쳐 있는 테레즈와 무기력한 결혼 생활에 지쳐 있는 캐롤은 처음 만난 순간부터 서로에게 강렬한 끌림을 느꼈고, 재고 따지고 할 것도 없이 가까워진다. 그리고 두 사람은 함께 미국 서부를 가로지르는 여행을 떠나게 된다. 하지만 캐롤의 남편이 고용한 사설탐정이 그들을 쫓아오고, 그는 캐롤에게 딸과 테레즈 중 한 사람을 택하라며 위협하고 그들의 관계는 그렇게 사람들의 이해를 얻지 못한 채 위기를 맞이한다.

테레즈와 캐롤이 서로를 알아가는 초반의 분위기는, 남녀가 미묘한 떨림을 간직한 채 서로를 탐색하는 그것과 매우 비슷한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한참 이 책을 읽다 보면 굳이 이걸 레즈비언 소설로 구분 지어야 하나 의문이 들만큼, 그저 사랑에 빠진 인물들의 심리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작품이다. 태어나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게 된 것이 하필 남자가 아니라 여자였다는 것만 다를 뿐, 테레즈의 사랑 또한 다른 이들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그것을 다르게 보는 이들의 사회적 시선을 완전히 배재할 수는 없는 것이 안타깝지만 말이다.

"그럼 부끄러워할 일인가요?"

"맞아, 너도 알잖아." 캐롤은 또렷하게 말했다. "이 세상의 눈으로 보면 그건 혐오스러운 일이야."

캐롤의 말에 테레즈는 차마 웃을 수도 없었다. "당신은 그걸 믿지 않는군요."

"사람들은 하지네 가족하고 비슷해."

"그들이 이 세상 전부는 아니잖아요."

"그들만으로도 차고 넘쳐. 너도 이 세상에서 살아야 하잖아. 그러니까 내 말은, 너더러 지금 당장 누굴 사랑할지 결정하라는 소리가 아니야." 캐롤은 테레즈를 쳐다보았다. 이제 캐롤의 눈동자에서 미소가 천천히 차오르며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내 말은 이 세상에서 남들과 어울려 살아야 하는 책임감이란 게 말이지, 그게 네 것이 아닐 수도 있어. 지금은 안 그래도 돼. 네가 뉴욕에서 알아야 할 나쁜 사람이 바로 나거든. 왜냐, 내가 널 마음껏 즐기고 자라지 못하게 막을 테니까."

퍼트리샤 하이스미스는 <열차 안의 낯선 자들>의 집필을 막 끝내고, 돈에 쪼들리는 상황이라 몇 푼이라도 벌려고 크리스마스 시즌 동안 대형 백화점에서 판매 사원으로 일을 하기로 했다. 그녀는 시끄럽고 정신 없는 장난감 코너로 배치되어 인형 카운터에서 일을 했는데, 어느 날 아침 모피 코트를 걸친 금발 여성을 만나게 된다. 여느 때와 별 다를 것 없는 판매 과정을 거쳐 여자는 돈을 지불하고 떠났지만, 이상하게도 그녀는 환영을 본 듯 기분이 들떴으며, 머릿속이 이상하고 어질 해서 기절할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힌다. 그렇게 퇴근을 한 후 혼자 사는 아파트로 돌아가 그날 저녁, 주제를 정해 플롯을 짜고 여덟 쪽 정도 되는 스토리가 느닷없이 펜 끝에서 줄줄 흘러 나오게 된다. 두 시간도 채 걸리지 않은 시간 동안 <캐롤>의 줄거리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주로 서스센프 소설을 썼던 그녀는 이 작품을 통해 레즈비언 소설 작가라는 딱지가 붙을 까봐 필명으로 이 책을 내기로 했고, <소금의 값>으로 출간된 이 작품은 당시 엄청난 흥행에 성공한다. 책이 출간된 1950년대의 미국에서 당시 동성애자들은 남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그 대가를 치뤄야 했고, 외롭고 비참하게 단절된 삶을 살아야 했었다. 하지만 이 작품은 동성애 소설 중에서 처음으로 해피 엔딩으로 끝나는 작품이었기에 많은 이들의 호응을 받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후 동성애 소설은 다시 쓰지 않았고, 이 작품은 범죄 소설의 대가가 쓴 자전적 소설이자 유일한 로맨스 소설로 남게 된다.

이 책이 출간된 지 70년에 가까운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동성애를 바라보는 일반인의 편견은 존재한다. 동성 결혼이 합법화되는 나라가 늘고, 동성애를 다룬 작품들도 늘어나고, 당당히 커밍아웃하는 사람들이 생겼지만 말이다. 토드 헤인즈 감독의 동명 영화가 온갖 영화제를 휩쓸고, 사람들의 호평을 받고 있지만,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원작 또한 영화만큼이나 아름답다. 물론 케이트 블란쳇의 캐롤과 루니 마라의 테레즈는 원작과 조금 다른 부분이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매력적이고, 영화가 그려내지 못하는 미세한 감정의 떨림들은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단단한 문장들로 힘을 발한다. 인생에 단 한번, 당신의 그 사람을 만나게 된 순간을 가지고 있다면 공감할 수밖에 없는 작품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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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들 속에서/조 월튼 (지은이), 김민혜 (옮긴이) | 아작 |

 

만약 내 어머니가 세상을 지배하려는 사악한 마녀라면? 어머니의 음모를 저지하려다가, 쌍둥이 자매를 잃고 불구의 몸까지 된 열다섯 살 소녀는 홀로 본 적도 없는 아버지를 찾아간다. 아버지에겐 세 명의 쌍둥이 고모가 있어, 소녀를 평범한 아이로 만들어 버리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린다.

 

SF와 판타지 소설에 탐닉하는 이 소녀의 이야기는 짧은 시놉만으로도 궁금증을 마구 유발시키는 작품이다.

 

 

 

 

 

피에로들의 집/윤대녕 (지은이) | 문학동네 |

 

윤대녕 작가의 무려 11년만의 장편 소설이다. 그는 수년 전부터 ‘도시 난민’에 대한 이야기를 구상해왔다고 한다. 가족의 해체, 타인과의 유대 붕괴 등을 비롯해서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부분들이 많을 것 같다.

 

 

 

 

 

 

 

 

 

바람의 안쪽 | 밀로라드 파비치 (지은이), 김동원 (옮긴이) | 이리 |

 

그리스 신화 헤로와 레안드로스의 전설과 베오그라드를 배경으로 두 연인의 이야기가 나란히 펼쳐진다. 헤로의 이야기는 20세기 초 베오그라드와 프라하를 배경으로, 레안드로스의 이야기는 17세기 남동부 유럽을 배경으로 한다. 소설은 신화 속 전설의 형태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고 하는데, 궁금한 작품이다.

 

 

 

 

 

 

 

 

 

웬만해선 아무렇지 않다 ㅣ이기호 (지은이), 박선경 (그림) | 마음산책 |

 

웃고 싶은가, 울고 싶은가, 그럼 ‘이기호’를 읽으면 된다(소설가 박범신)", "이기호의 소설에는 심장 박동 소리가 난다(시인 함민복)"와 같은 평에 부응하는 40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부담없고 짧지만, 웃을 수 있고 울수도 있는 그런 소설을 보고 싶다.

 

 

 

 

 

 

 

떠오르는 아시아에서 더럽게 부자 되는 법 ㅣ모신 하미드 (지은이) |

안종설 (옮긴이) | 문학수첩 |

 

제목 때문에 당연히 자기 계발서인줄 알았으나 소설이란다. 자기계발서를 유쾌하게 비판하는 글로 각 장이 시작되는 '소설'이라는데, 제목만큼이나 도발적이고 거침없는 글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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셜로키언
그레이엄 무어 지음, 이재경 옮김 / 비채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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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런 장면을 상상해봐요. 두꺼운 유리창을 때리며 비가 마구 쏟아져요. 창 밖 베이커 가의 가스등 불빛은 너무 약해서 보도에도 못 미치고, 공기 중에 맴도는 안개 때문에 노란 불빛만 어슴푸레 빛나요. 음침한 구석마다, 어두운 방마다 미스터리가 바람처럼 일어요. 그리고 한 남자가 그 어둑하고 안개 낀 세상으로 걸어 나가죠. 남자는 소매의 마름질만 보고 상대의 인생사를 알아맞혀요. 지력과 담배의 힘만으로 답답한 어둠에 불을 밝히고요. , 이런 게 낭만이 아니면 어떤 게 낭만이죠?

사실, 홈스가 살았던 1895년의 런던에는 윤락녀가 이십만 명에 달했고 매독이 만연했으며, 큰길마다 배설물이 널렸고, 인종차별적인 문화와 여성의 참정권을 인정하지 않는 성차별이 만연했던 시대였다. 하지만 백 년 전의 영국을 현재보다 훨씬 더 친숙하게 여기며, 그 시대를 낭만으로 기억하는 이들이 있다. 바로 셜로키언들이다. 전 세계적으로 많은 사람들이셜로키언을 자처하며 셜록 홈즈와 아서 코난 도일에 대한 모든 자료를 모으고 탐구하는 작업에 매진해 온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레이엄 무어의 <셜로키언>은 바로 현실의 그들을 위한 최고의 선물이다. 

세상에서 가장 똑똑하고 유명하지만 지독하게 괴팍한 남자, 이야기 속에서 만들어진 가상의 인물이지만 꽤 많은 사람들이 실존 인물이라고 믿고 싶어하는 남자. 바로 셜록 홈즈. 하지만 이렇게 유명한 캐릭터에 비해 바로 그 인물을 창조한 작가 코난 도일에 대해서는 생각보다 그리 많은 것들이 알려져 있지 않았다. 실제로 의사였던 그는 한평생 대단한 역사 소설을 쓰고 싶었으나, 출판사와 독자들이 그에게 원했던 것은 대중적인 탐정 소설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대충 써낸 것이 바로 셜록 홈즈였다고 한다. 의사로서 수입이 신통치 않아 시간이나 때우고자 시작했던 그 작품에게 대중이 열광하기 시작하자, 그는 사람들이 어째서 이따위 소설을 좋아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음울하고 까칠한 냉혈한 홈스는 그가 애착을 느끼기에는 너무 싸늘하고 너무 무심하기도 했고 말이다. 결국 그는 홈스가 세상에서 제일 역겹다며, 자신이 그를 죽이지 않았다면 그가 자신을 죽였을 거라고 분노하며 작품 속에서 홈스를 죽여 버린다. 하지만 사람들은 홈스가 실존인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도일을 살인자 취급하며 허구의 인물을 위한 부고 기사가 신문에 실리기도 한다. 독자들의 항의와 주변 사람들의 핍박때문에, 혹은 알 수 없는 어떤 이유로 코난 도일은 결국 홈스를 살려내기에 이른다. 모리어티와의 결전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홈즈가 몸을 피해 3년간 은신했던 것으로 이야기를 설정해 다시 셜록 홈스 시리즈가 부활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셜록 홈즈의 공백기에 대한 이야기가 전 세계 셜로키언들의 무수한 상상력을 자극했고, 이 작품 역시 그에 대한 아주 매력적인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결국 그럴 줄 알았지! 다시 살려낼 거죠?"

"누구를 말입니까?"

"셜록 홈스요!" 남자가 계단 꼭대기에서 몸을 돌려 아서를 내려다보며 외쳤다. 위층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이 남자를 후광처럼 에워쌌다.

"아무렴, 그럴 때가 됐죠. 홈스는 끝내주는 마약이었어요. 고달픈 하루를 버티는 데 그만한 낙도 없었지. 가족처럼 그립다니까." 남자가 낄낄 웃었다. "막말로 가족보다 낫지."

1893 8월의 어느 날, 코난 도일은 그 동안 벼르고 벼르던 일을 시작한다.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아무도 모르게 살짝 킬킬대기까지 하면서, 램프 불빛 하나에 의지하여 셜록 홈스를 죽인 것이다. 입술에는 살인의 달콤함이 느껴졌고, 몇 년 만에 처음으로 자유를 느끼며 행복한 기분에 젖어든다. 그렇게 셜록 홈스가 죽은 지 칠 년이 흐른 뒤, 사람들은 여전히 홈스에 대해 쓰고, 홈스를 논하고, 홈스를 그리워하고, 홈스 이야기가 실렸던 잡지사마다 편재를 보내 그의 귀환을 애걸했다. 그리고 어느 날, 소포로 위장한 폭탄이 배달되는데 폭탄은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지만 그에게 충격을 주기에는 무리가 없었다. 경찰은 폭탄이 그를 살해할 목적은 아니었던 것 같다며 전력을 다해 범인을 잡겠다는 말 뿐, 실제로 심각하게 수사에 착수하지는 않았다. 진지하지 못한 경찰의 행동에 화가 난 아서는 자신이 직접 조사를 하겠다고 나서고, 폭탄과 함께 온 편지에 있던 죽은 여성에 대한 기사를 추적하다 연쇄 살인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재미있는 것은 자신이 스무 편도 넘는 이야기 속에서 떠벌렸던 수사 방법을 실제 사건에도 적용하면서, 아서가 탐정 역할 특유의 지적 허세를 어느 정도 즐기게 된다는 것이다. 경찰청에서 사건 기록을 뒤적이던 날에 비하면 이날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스릴 있었던 것이다. 혼자 힘으로 실마리를 잡아내는 기분도 짜릿했지만, 아직 안개 속을 헤매는 상대에게 그것을 설명하는 기분에는 비할 바가 아니었으니까. 그는 직접 수사에 뛰어 들게 되면서, 과연 탐정에게는 청중이 필요하다는 것을 실감하고, 갈수록 홈스를 이해하게 된다. 하지만 허구의 이야기로 단서 퍼즐과 허를 찌르는 반전을 구상하고 미스터리 플롯을 짜는 것과 현실에서 살인 사건을 해결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일이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그가 그 동안 주장했던 주장하는 추리의 과학, 즉 인간사의 가장 어두운 이면을 이성의 힘으로 밝히는 능력이 저속한 속임수로 추락할 판이었다. 그가 자신이 소설에 썼던 그 수사 방법이 실제 사건에도 적용되는 게 아니라면 그 모든 것들이 싸구려 거짓말, 반 푼어치도 안 되는 쓰레기가 되어 버린 다는 것을 체감하면서 아서와 홈스는 이제 운명 공동체였다. 둘 다 사기꾼이 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였다

해럴드는 셜록 홈스를 믿었다. 물론 홈스 이야기는 '실화'가 아니다. 셜록 홈스를 믿는다는 게 그를 실존 인물로 생각한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홈스 이야기가 주장하는 바를 믿었다. 이성의 힘을 믿었고 추리라는 정밀과학을 믿었다. 셜록 홈스는 그걸 할 줄 알았다. 그렇다면 나도 할 수 있어. 해럴드는 생각했다.

1900년대의 아서 코난 도일에 이어 이야기는 2010년대의 셜로키언 해럴드 화이트의 현재 이야기로 진행된다.  그는 지금 셜록 홈스 연구 단체 중에서도 세계 제일로 꼽히는 스트리트 이레귤러스 회원으로 선정되어 단체에 입회하는 중이다. 스물 아홉의 그는 짧은 연구 경력에 회원과 특별히 초대받은 사람만 참석할 수 있는 이레귤러스의 만찬 초대 한 번 만에 회원 자격을 얻은 첫 번째 인물이었다. 열네 살때부터 셜록 홈스에 빠져 프린스턴 대학교 졸업식에도 자랑스럽게 디어스토커를 쓰고 갔을 정도로 그의 홈스 사랑은 꾸준했다. 수백 개의 셜로키언 단체 중에서도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고 가장 권위 있고 가장 들어가기 어려운 단체인 베이커 스트리트 이레귤러스의 신입 회원이 된 그는 오래도록 원하던 것을 얻은 이 순간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행복했다.

이날 밤 모든 회원들의 관심은 코난 도일이 죽은 후 행방불명 되었던 한 권의 일기였다. '마침내 발견된 사라진 일기'에 대해 홈스 권위자 중에서도 첫손에 꼽히는 알렉스가 다음 날 컨벤션에서 발표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그는 호텔방에서 시체로 발견되고, 모두가 기다린 사라진 일기는 흔적도 찾을 수가 없게 된다. 피비린내 나는 살인 사건 이야기는 수없이 읽었지만 시체를 실제로 본 건 처음이었던 해럴드는 현장에서 자신도 모르게 현장을 수색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셜록 홈스라면 어떻게 할까요?" 해럴드가 물었다. 멍했지만 진지했다. 그는 알고 싶었다. 가능한 일인지 알고 싶었다.

"홈스라면 책 속으로 도로 기어들어가겠지. 홈스는 잉크와 소나무 펄프니까."

"홈스가 실존 인물이고 그의 이야기가 실화라면, 그럼 홈스는 어떻게 할까요? 해럴드는 호기심을 누를 수 없었다.

그는 홈스가 사건 현장에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을 떠올리고, 시체에 다가가 자세히 살피기 시작한다. 경찰이 와서 현장을 엉망으로 만들기 전에 호텔 방을 조사해야겠다고 말이다. 왜냐하면 어떻게 보더라도 현재 경찰의 살인 사건 해결률보다 홈스가 압도적으로 월등하니까. 지금 과학 수사대에다 정전기식 지문 추출법까지 있음에도 불구하고 살인 사건 해결률은 60퍼센트밖에 안되니 말이다. 그는 도난 된 '사라진 일기'와 살인사건에 대해서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는 '셜록 홈스의 방식'으로 해결해보겠다고 나선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해럴드가 이 일에 뛰어든 것이 살해된 알렉스 때문만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의 시야 너머에, 컴컴한 구름을 지나 밝은 창공에 엄청난 답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 때문이었다. 정의 실현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미스터리'를 풀고 싶었던 자신을 위해서였던 것이다. 알렉스의 이런 점이 매우, 셜록 홈스와 닮아 있다는 점이 재미있다. 그의 주변 다른 셜로키언들은 이건 추리 소설이 아니고 현실이라고 그를 걱정하거나, 한심하게 생각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엄마를 왜 사랑하느냐고 하면 할 말이 없는 것처럼, 그가 홈스를 사랑하는 이유도 설명하기 막막했다. “문제에 해답이 존재한다는 개념이 좋아서요. 홈스 이야기를 포함해서 그게 모든 추리소설의 매력이에요. 추리소설 속의 세상은 따져볼 수 있는 세상이에요. 모든 문제에 해답이 있는 세상이죠. 똑똑하면 인과 관계를 밝힐 수 있는 곳이에요

그레이엄 무어의 번뜩이는 상상력은 100년의 시간을 왕복하면서 과거의 코난 도일과 현재의 셜로키언이 추적하는 각각의 살인 사건을 전혀 별개의 이야기로 진행시키다 교묘하게 만나도록 만들어낸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사건 중 상당수는 실제로는 없었던 일이고, 등장하는 인물 중 상당수는 가공의 인물이다. 하지만 실존 인물들도 다수 등장하며, 엄연한 사실과 사실 가능성이 있는 일들과 100퍼센트의 허구가 섞여 있다. 코난 도일이 작고한 뒤 그의 유품 중에서 일부가 유실되었고, 그중에 사라진 일기 한 권이 있었다. 그리고 2004년 저명한 코난 도일 연구가가 사라진 문서를 발견했다고 발표했고, 그는 지인들에게 자신의 신변이 위험하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결국 그는 자택에서 주검으로 발견되었지만, 그의 죽음은 아직까지도 미제 사건으로 남겨져 있다. 그의 죽음으로 전세계 셜로키언들은 살인자를 찾기 시작했고, 그의 죽음에 대한 그럴듯한 이론들이 속속 대두했다. 그리고 이 작품에 나오는 코난 도일의 생애에 관한 정보 모두 사실이며, 그의 지인으로 등장하는 작가 브램 스토커도 최대한 실제에 충실하게 묘사되고 있다. 이렇게 실제와 허구와 매력적으로 얽혀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가 탄생한 것이다.

이 작품은 물론 셜록 홈즈에 대해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일수록 더욱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요소들이 많이 있다. 하지만, 셜록 홈즈의 이름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전혀 상관없을 만큼 흥미로운 작품이기도 하다. 내 인생 최초의 미스터리 소설은 코난 도일의 셜록 홈스 시리즈였다. 초등학생이었지만 지칠 줄 모르는 독자이기도 했던 나는, 셜록 홈스를 만나고 나서 한동안 다른 소설은 거의 읽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가 문학의 비현실성에서 현실로 걸어 나왔기 때문이었다. 그날로부터 수십 년이 지났지만, 나에게 셜록 홈스란 절대 사라질 수 없는 존재이다.

당신은 셜록 홈즈 외에 이야기에 종속되지 않고, 스스로 생명을 가지고 살아 있는 캐릭터를 본 적이 있는가? 당신이 홈즈를 소설 속 인물이 아니라 형체를 갖추고 있는 실제 인간처럼 느낀 적이 단 한번이라도 있다면, 그레이엄 무어의 이 작품을 적극 추천한다. 1887년경부터 무려 21세기에 이르기까지, 왜 아직도 홈스 이야기가 결코 끝나지 않는지 궁금한 사람들에게도 이 작품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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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타기리 주류점의 부업일지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68
도쿠나가 케이 지음, 홍은주 옮김 / 비채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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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누구나 한번쯤 정말 꼴도 보기 싫은 미운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못 견디게 보고 싶은 그리운 사람도 있을 수 있고, 미래의 내 모습이 궁금한 사람도, 닿을 수 없는 높은 곳에 있는 사람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미운 사람에게 나대신 악의를 배달해주고, 인기 정상의 아이돌에게 직접 만든 케이크를 전해주고, 칠 년 뒤의 나에게 편지를 배달해주는, 그런 이상한 가게가 있다고 치자. 그렇다면 당신은 무엇을 배달 시키고 싶은가. 이곳은 법에 저촉되지 않는 한 '무엇이든' 배달한다는 캐치프레이즈를 걸고 있다. 겉보기엔 낡고 평범한 주류점이지만 말이다.

"알겠습니다. 그럼, 구체적인 방법이나 물품은 이쪽에 일임하시는 걸로."

"저한텐 일러주시지 않는다고요?"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위해를 가하는 일은 안 하니까요."

",........"

"사람이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그리고 법에 저촉되지 않는 선에서 처리합니다."

검은 양복에 흰 드레스셔츠, 침울한 표정, 무뚝뚝한 말투, 멍한 눈빛. 어딜 봐도 손님 상대로 뭘 팔아보겠다는 얼굴은 아닌 사장과 아담한 체구의 중년 여자가 카운터를 보는 평범한 주류 판매점. 이곳은 주요 업무 외에도 '무엇이든 배달합니다' 류의 택배 비슷한 일도 함께 하고 있다. 주류점만으로는 아무래도 돈벌이가 안 되는 탓에, 간단한 배달 업무도 한다는 것이다. 흔하디 흔했던 소박한 동네 주류점이 수상쩍은 사이트를 운영하고 있다. 새까만 배경 한복판에 트럭 아이콘이 달랑 하나. 스크롤을 내리면 보이는 '무엇이든 배달합니다' 트럭 아이콘을 클릭하면 견적 의뢰서가 있고, 간단한 신상과 의뢰 내용을 입력하면 된다. 그렇게 의뢰 내용에 따라 비용이 산출되고 나면, 정식 의리는 가게에 방문해서 직접 해야 한다.

콘서트 중인 인기 최정상의 아이돌 가수에게 삼엄한 경비를 뚫고 물건을 전달하고, 열세 살의 어린 소녀가 미래의 자신에게 보낸 편지를 그녀가 스무 살이 되었을 때 배달해주고, 며느리와 사이가 좋지 않은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보내는 거북이며, 자전거를 전해주고, 길에서 우연히 만난 꼬마 아이가 만든 장난감을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없는 아이의 엄마를 찾아서 전달해주고, 자신을 무시하는 상사가 괴로운 일을 좀 당하면 좋겠다 싶은 그 마음, 즉 악의를 배달하기도 하고, 이혼을 앞둔 남자가 신혼 여행 중에 산 기념품을 버려주길 원해 직접 그곳으로 여행을 가기도 하며, 가타기리 주류점은 그렇게 본업보다는 부업에 충실하며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준다. 가타기리 주류점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의 사연이야 제각각이지만, 그들의 공통점은 모두 마음 한구석에 구멍이 휑하니 뚫려있는 외로운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누군가 자신의 마음 한구석에 있는 구멍을 메워주기를 바라고 그들은 이곳을 찾는다.

"과거 청산, 이란 말이 있지?"

"."

"그게 지난 일을 깨끗이 잊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과거를 안은 채 계속 살아간다는 뜻 아닌가.... 요즘 그런 생각이 드네."

암흑 속에서 몸부림쳤던 지난날의 자신. 깊은 가슴속에서는 사실은 살고 싶었기에 고통스러웠던 것이다. 지금은 그렇게 단언할 수 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의 사연을 들어주며, 정작 사장인 가타기리는 그다지 행복하지 않다. 대체 그에게는 무슨 사연이 있었던 것일까. 비밀스러운 그의 과거와 현재의 손님들이 사연이 어우러지면서 가볍게만 느껴지던 이야기가 어느새 묵직한 감동을 주는 스토리로 발전한다. 어쩌면 이곳은 '기적'을 배달하는 가게인지도 모르겠다. 보내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그리고 그것을 배달하는 사람도 어떤 의미에서 조금은 성장하고, 자신을 되돌아보고, 위로 받고 용기를 얻고 있으니 말이다.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정말 이런 곳이 존재한다면, 나는 무엇을 배달시키고 싶을까 가만히 생각해본다. 아마도 예전 같으면, 마음에 안 드는 누군가 혹은 나를 힘들게 하는 누군가를 먼저 떠올렸을 텐데, 한 아이의 엄마가 되고, 새로운 가정이 생기고 보니 마음이 조금은 너그러워진 것 같다. 단 번에 떠오른 것이 고마운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만약 내가 가타기리 주류점에 배달을 의뢰한다면 초등학교 시절의 담임선생님에게 편지를 건네달라고 하고 싶다. 지금은 이미 너무 떨어진 먼 곳에 있는데다, 초등학교 졸업 이후에는 거의 소식을 듣지 못했기에 정말 궁금한 선생님이 한 분 계시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일기를 매일 같이 쓰고 선생님께 검사를 받아야 하는 숙제가 항상 있었는데, 대부분의 아이들은 일기 쓰는 것을 싫어해 일주일씩 몰아서 쓰거나 대충 베끼기 일쑤였다. 그런데 나는 일기장에 선생님께서 코멘트를 써주시는 내용이 궁금해서 항상 부지런히 일기를 썼던 기억이 난다. 그 분은 '참 잘했어요' 류가 아니라, 아이들의 일기 내용에 따라 항상 자신의 생각을 서너 줄 씩 적어 주셨던 것이다. 선생님 덕분에 내가 그 어린 시절부터 글 쓰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다고 꼭 말해 주고 싶었는데, 지금은 너무 멀리 와 버렸으니 말이다. 그래서 가타기리 주류점 같은 곳이 정말 있다면, 꼭 배달을 시켜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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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가와 란포 결정판 1 에도가와 란포 결정판 시리즈 1
에도가와 란포 지음, 권일영 옮김 / 검은숲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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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얘기를 해달라는 말씀이군요. 그렇다면 이런 얘기는 어떨까요?

에도가와 란포의 작품 속으로 들어가기 전에 당신에게 한 가지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이 있다. 그의 작품은 추리/미스터리소설로 분류가 되지만, 사실 엄밀히 말해서 그의 작품은 그렇게 규정하긴 어렵다는 것. 이렇게 보자면 호러에 가깝고, 또 저렇게 보자면 심리 스릴러에 가깝고, 한 마디로 이상하기 그지없는 장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당신이 어느 날 갑자기 천편일률적인 이야기에 질려 뭔가 새로운, 아주 이상한 이야기를 읽고 싶다는 욕망이 들었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바로 그때 제일 먼저 당신의 머릿속에서 고려해야 할 작가의 리스트 가장 상위에 있어야 할 작가가 바로 에도가와 란포라는 말이다.

 

 

<란포지옥>이란 영화를 본 적이 있다. 누군가의 표현대로 정말 '지옥 같은' 작품이었다. 4명의 감독이 에도가와 란포의 단편 중에 4작품을 선정해 각자의 방식으로 각색한 옴니버스 영화였는데, 매우 그로테스크하고 기괴한 작품이었다. 란포의 원작만큼이나 말이다. 이 작품을 보며 새삼 에도가와 란포가 얼마나 특별한 작가인지 깨달았다고나 할까. 그의 독특한 그 상상력이 영상화되어 책보다 더 대중적인 매체로 등장하고 보니, 반대로 얼마나 비현실적이고도 음울하고 끔찍한 것인지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고 할까.

 

 

일본 추리소설의 아버지로 칭송받는 거장 에도가와 란포의 본명은 히라이 다로, 그의 필명은 누구나 알고 있듯이 '에드거 앨런 포'의 이름에서 착안한 것이다. 그가 창조한 아케치 고고로는 일본 최초의 사립탐정으로, 그의 작품들은 일본 추리소설의 초석으로 평가받고 있다. 에드거 앨런 포가 역사상 최초의 탐정 오귀스트 뒤팽을 탄생시켰듯, 란포 또한 이 작품들 속에서 아케치 고고로라는 일본 최초의 명탐정을 낳은 것이다. 아케츠 고고로를 비롯해서 소년 탐정단, 괴도 이십면상 시리즈로 캐릭터를 단단하게 구축했지만, 명탐정 코난에서도 그의 작품에 영향을 받아 탄생된 인물이 등장할 정도이니 그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될 것이다. 추리 만화로 어린이부터 누구나 좋아하는 이 작품의 주인공 이름이 바로 에도가와 코난아닌가.

다가 그는 마치 '에드거 앨런 포'의 이름을 딴 '에드거 상'처럼, 자신의 이름을 딴 '에도가와 란포 상'을 통해 신인작가를 발굴하고 있는데,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히가시노 게이고, 미야베 미유키, 요코미조 세이시, 시마다 소지 등 일본의 대표적인 추리소설 작가들이 모두 그에게 영향을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작품은 일단 분위기부터 남다른데, 뭔가 낯설고 기괴하고, 어둡고 음울하기 그지 없다. 하지만 또 마냥 그렇기만 하면 책장 넘기는 속도가 느려질 수밖에 없는데 그의 작품은 그런 와중에도 본연의 미스터리에 매우 충실한 플롯으로 움직이고, 무거운데도 발랄함이 어딘가 있고, 심각한데도 위트를 잃지 않고 있어 이야기에 몰입을 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준다. 그래서 지금 읽기에는 너무도 낯선 화자의 방식에도, 전혀 어색함 없이 끌려 들어가는 느낌이랄까. 게다가 그의 작품은 평범한 추리 소설이 아니라 그로테스크한 악마성이 돋보이는 작품들이라 인간의 심연에 자리한 어둠까지 맛보게 할 정도의 오싹함을 함께 가지고 있어 공포 소설의 느낌마저 준다

"현실은 꿈, 밤의 꿈이야말로 진실"

란포가 사인을 할 때 써주곤 했다는현실은 꿈, 밤의 꿈이야말로 진실이라는 유명한 문구는 이러한 몽상가적인 작품 성향을 잘 표현하고 있으며, 작가 자신이 오랫동안 품고 있던 고뇌와 고독을 직접적으로 표현한 말이기도 할 것이다. 그는 작품들 속에서 변신과 광기, 동성애, 에로티시즘, 거울, 미궁 등 현실에서는 닿을 수 없는 공포와 수치심이 뒤얽힌 아름다움에 집착했는데 이런 성향이 그를 더욱 특별한 작가로 만들었다.

 

국내에도 꽤 오래 전에 출간된 작품인 <음울한 짐승> <외딴섬의 악마>는 일본에서 발표 당시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킨 그의 최고 걸작 들이지만, 아쉽게도 국내에서는 그다지 큰 호응을 불러 일으키지 못했다. 그리고 이후에 그의 단편집이 3권짜리로 출간되기도 했지만, 보다 화제가 된건 이번에 출간된 <에도가와란포 결정판>시리즈가 아닌가 싶다. 게다가 이번에는 단편뿐만 아니라 기존에 소개되지 않았던 장편도 함께 만날 수 있으니 말이다. 아마존 저팬에서 확인할 수 있는 에도가와 란포 전집의 수만 해도 무려 30권이나 되니, 앞으로 검은숲에서 소개될 결정판에 어떤 작품이 담길지 벌써부터 설레 인다.

특히나 이번 작품집은 초판 한정판으로 '누드사철'로 불리는 제본방식을 채택해서 독특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책에게 '내용과 상관없이' 아름답다는 표현을 써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실제로 그렇다. 누드사철 제본으로 만들어진 이 책은 정말 아름답다. 고전작품임을 드러내는 옛스러운 느낌이면서도, 어딘지 세련된 느낌으로 현대적인 감각을 유지하고 있는 묘한 제본방식이다. 두꺼운 커버 없이 표지와 본문으로 연결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분량을 나눠 분권해야 했다고 하는데, 사실 책이 분권이 되어 있어 가지고 다니면서 읽기엔 더욱 좋다. 장편인 거미남이 두 권으로, 나머지 단편 오시에와 여행하는 남자, 애벌레, 천장위의 산책자가 한 권으로 되어 있다. 게다가 펼쳐서 볼 때 너무 잘 펴져서 책상 위에 두고 읽기에도 참 좋다. 대부분의 책은 읽다가 페이지를 펼쳐두려면 양쪽에 뭔가 고정하는 것이 필요하니 말이다. 세 권이지만 하드 케이스에 커버와 함께 넣어두면, 전체 한 권처럼 보여 책장에 꽂아 둘 때도 튀지 않아 좋다.

 

초판 한정판 판매가 종료되면 일반판으로 하드커버로 제작된 책이 나온다고 하는데, 내가 당신이라면 망설이지 않고 초판 한정판으로 책을 살 것이다. 누드사철이 예쁘기도 하고, 분권되어 읽기도 편하고, 케이스가 있어 오래도록 보관하기에도 용이하니 말이다. 놓치지 마시라.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그리고 이 작품집에는 유족과 평론가가 인정한 정본 텍스트에 작가 본인 및 여러 평론가들의 작품 후기, 분석 및 해제가 실려 있으니, 에도가와 란포를 처음 만나는 사람이라도 어렵지 않게 그의 작품 세계에 입문할 수 있을 것이다. 무려 '에드거 앨런 포'의 이름을 오마주해서 쓰는 작가 아닌가. 그 이름만큼의 가치가 있는지 궁금하다면, 직접 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말길.

이번 결정판 1권에 실린 작품은 장편 한 편과 단편 세 편인데, 그 중에서도 장편 <거미남>은 국내에 처음으로 공개되는 작품이라 더욱 중요하다. 여러 차례 영화화, 드라마화 되기도 한 작품이고, 란포를 대중에게 사랑 받는 히트작가로 부상시킨 작품이기도 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매우 재미있다. 이 시대에 벌써, 이렇게나 현대적인 사이코 패스가 등장할 수 있었다니 놀랍기도 하고, 마치 변사가 관객에게 이야기를 하듯 작가가 독자들에게 직접 사건과 인물을 서술하는 것 또한 친근하면서도 독특한 매력을 발산한다. 단편 <애벌레>는 반전소설로 알려져 판매금지되었던 문제작으로 란포 특유의 그로테스크와 에로티시즘이 잔뜩 묻어나는 작품이다. <오시에와 여행하는 남자>는 란포가 선택한 최고작 중 하나로 환상소설이 보여줄 수 있는 분위기를 마음껏 드러내고 있고, <천장 위의 산책자>는 모든 걸작선마다 반드시 소개된 작가의 대표 작품으로 <거미남>보다 더 많이 영화화, 드라마화 된 유명한 작품이다.

추리 소설에서 트릭과 기교만큼 중요한 것이 인물의 심리적 동기와 내면 묘사라고 생각한다면, 공포 소설에서 진짜 무서운 것은 유혈이 낭자한 것이 아니라 스물스물 어둠을 잠식하는 분위기라고 생각한다면, 미스터리 소설에서 서사에 방점을 찍는 것이 반전이 아니라 독특한 매력의 캐릭터라고 생각한다면, 그렇다면 당신은 에도가와 란포를 읽어보아야 한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여 줄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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