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타기리 주류점의 부업일지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68
도쿠나가 케이 지음, 홍은주 옮김 / 비채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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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살면서 누구나 한번쯤 정말 꼴도 보기 싫은 미운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못 견디게 보고 싶은 그리운 사람도 있을 수 있고, 미래의 내 모습이 궁금한 사람도, 닿을 수 없는 높은 곳에 있는 사람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미운 사람에게 나대신 악의를 배달해주고, 인기 정상의 아이돌에게 직접 만든 케이크를 전해주고, 칠 년 뒤의 나에게 편지를 배달해주는, 그런 이상한 가게가 있다고 치자. 그렇다면 당신은 무엇을 배달 시키고 싶은가. 이곳은 법에 저촉되지 않는 한 '무엇이든' 배달한다는 캐치프레이즈를 걸고 있다. 겉보기엔 낡고 평범한 주류점이지만 말이다.

"알겠습니다. 그럼, 구체적인 방법이나 물품은 이쪽에 일임하시는 걸로."

"저한텐 일러주시지 않는다고요?"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위해를 가하는 일은 안 하니까요."

",........"

"사람이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그리고 법에 저촉되지 않는 선에서 처리합니다."

검은 양복에 흰 드레스셔츠, 침울한 표정, 무뚝뚝한 말투, 멍한 눈빛. 어딜 봐도 손님 상대로 뭘 팔아보겠다는 얼굴은 아닌 사장과 아담한 체구의 중년 여자가 카운터를 보는 평범한 주류 판매점. 이곳은 주요 업무 외에도 '무엇이든 배달합니다' 류의 택배 비슷한 일도 함께 하고 있다. 주류점만으로는 아무래도 돈벌이가 안 되는 탓에, 간단한 배달 업무도 한다는 것이다. 흔하디 흔했던 소박한 동네 주류점이 수상쩍은 사이트를 운영하고 있다. 새까만 배경 한복판에 트럭 아이콘이 달랑 하나. 스크롤을 내리면 보이는 '무엇이든 배달합니다' 트럭 아이콘을 클릭하면 견적 의뢰서가 있고, 간단한 신상과 의뢰 내용을 입력하면 된다. 그렇게 의뢰 내용에 따라 비용이 산출되고 나면, 정식 의리는 가게에 방문해서 직접 해야 한다.

콘서트 중인 인기 최정상의 아이돌 가수에게 삼엄한 경비를 뚫고 물건을 전달하고, 열세 살의 어린 소녀가 미래의 자신에게 보낸 편지를 그녀가 스무 살이 되었을 때 배달해주고, 며느리와 사이가 좋지 않은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보내는 거북이며, 자전거를 전해주고, 길에서 우연히 만난 꼬마 아이가 만든 장난감을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없는 아이의 엄마를 찾아서 전달해주고, 자신을 무시하는 상사가 괴로운 일을 좀 당하면 좋겠다 싶은 그 마음, 즉 악의를 배달하기도 하고, 이혼을 앞둔 남자가 신혼 여행 중에 산 기념품을 버려주길 원해 직접 그곳으로 여행을 가기도 하며, 가타기리 주류점은 그렇게 본업보다는 부업에 충실하며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준다. 가타기리 주류점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의 사연이야 제각각이지만, 그들의 공통점은 모두 마음 한구석에 구멍이 휑하니 뚫려있는 외로운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누군가 자신의 마음 한구석에 있는 구멍을 메워주기를 바라고 그들은 이곳을 찾는다.

"과거 청산, 이란 말이 있지?"

"."

"그게 지난 일을 깨끗이 잊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과거를 안은 채 계속 살아간다는 뜻 아닌가.... 요즘 그런 생각이 드네."

암흑 속에서 몸부림쳤던 지난날의 자신. 깊은 가슴속에서는 사실은 살고 싶었기에 고통스러웠던 것이다. 지금은 그렇게 단언할 수 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의 사연을 들어주며, 정작 사장인 가타기리는 그다지 행복하지 않다. 대체 그에게는 무슨 사연이 있었던 것일까. 비밀스러운 그의 과거와 현재의 손님들이 사연이 어우러지면서 가볍게만 느껴지던 이야기가 어느새 묵직한 감동을 주는 스토리로 발전한다. 어쩌면 이곳은 '기적'을 배달하는 가게인지도 모르겠다. 보내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그리고 그것을 배달하는 사람도 어떤 의미에서 조금은 성장하고, 자신을 되돌아보고, 위로 받고 용기를 얻고 있으니 말이다.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정말 이런 곳이 존재한다면, 나는 무엇을 배달시키고 싶을까 가만히 생각해본다. 아마도 예전 같으면, 마음에 안 드는 누군가 혹은 나를 힘들게 하는 누군가를 먼저 떠올렸을 텐데, 한 아이의 엄마가 되고, 새로운 가정이 생기고 보니 마음이 조금은 너그러워진 것 같다. 단 번에 떠오른 것이 고마운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만약 내가 가타기리 주류점에 배달을 의뢰한다면 초등학교 시절의 담임선생님에게 편지를 건네달라고 하고 싶다. 지금은 이미 너무 떨어진 먼 곳에 있는데다, 초등학교 졸업 이후에는 거의 소식을 듣지 못했기에 정말 궁금한 선생님이 한 분 계시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일기를 매일 같이 쓰고 선생님께 검사를 받아야 하는 숙제가 항상 있었는데, 대부분의 아이들은 일기 쓰는 것을 싫어해 일주일씩 몰아서 쓰거나 대충 베끼기 일쑤였다. 그런데 나는 일기장에 선생님께서 코멘트를 써주시는 내용이 궁금해서 항상 부지런히 일기를 썼던 기억이 난다. 그 분은 '참 잘했어요' 류가 아니라, 아이들의 일기 내용에 따라 항상 자신의 생각을 서너 줄 씩 적어 주셨던 것이다. 선생님 덕분에 내가 그 어린 시절부터 글 쓰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다고 꼭 말해 주고 싶었는데, 지금은 너무 멀리 와 버렸으니 말이다. 그래서 가타기리 주류점 같은 곳이 정말 있다면, 꼭 배달을 시켜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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