셜로키언
그레이엄 무어 지음, 이재경 옮김 / 비채 / 2016년 1월
평점 :
절판


이런 장면을 상상해봐요. 두꺼운 유리창을 때리며 비가 마구 쏟아져요. 창 밖 베이커 가의 가스등 불빛은 너무 약해서 보도에도 못 미치고, 공기 중에 맴도는 안개 때문에 노란 불빛만 어슴푸레 빛나요. 음침한 구석마다, 어두운 방마다 미스터리가 바람처럼 일어요. 그리고 한 남자가 그 어둑하고 안개 낀 세상으로 걸어 나가죠. 남자는 소매의 마름질만 보고 상대의 인생사를 알아맞혀요. 지력과 담배의 힘만으로 답답한 어둠에 불을 밝히고요. , 이런 게 낭만이 아니면 어떤 게 낭만이죠?

사실, 홈스가 살았던 1895년의 런던에는 윤락녀가 이십만 명에 달했고 매독이 만연했으며, 큰길마다 배설물이 널렸고, 인종차별적인 문화와 여성의 참정권을 인정하지 않는 성차별이 만연했던 시대였다. 하지만 백 년 전의 영국을 현재보다 훨씬 더 친숙하게 여기며, 그 시대를 낭만으로 기억하는 이들이 있다. 바로 셜로키언들이다. 전 세계적으로 많은 사람들이셜로키언을 자처하며 셜록 홈즈와 아서 코난 도일에 대한 모든 자료를 모으고 탐구하는 작업에 매진해 온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레이엄 무어의 <셜로키언>은 바로 현실의 그들을 위한 최고의 선물이다. 

세상에서 가장 똑똑하고 유명하지만 지독하게 괴팍한 남자, 이야기 속에서 만들어진 가상의 인물이지만 꽤 많은 사람들이 실존 인물이라고 믿고 싶어하는 남자. 바로 셜록 홈즈. 하지만 이렇게 유명한 캐릭터에 비해 바로 그 인물을 창조한 작가 코난 도일에 대해서는 생각보다 그리 많은 것들이 알려져 있지 않았다. 실제로 의사였던 그는 한평생 대단한 역사 소설을 쓰고 싶었으나, 출판사와 독자들이 그에게 원했던 것은 대중적인 탐정 소설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대충 써낸 것이 바로 셜록 홈즈였다고 한다. 의사로서 수입이 신통치 않아 시간이나 때우고자 시작했던 그 작품에게 대중이 열광하기 시작하자, 그는 사람들이 어째서 이따위 소설을 좋아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음울하고 까칠한 냉혈한 홈스는 그가 애착을 느끼기에는 너무 싸늘하고 너무 무심하기도 했고 말이다. 결국 그는 홈스가 세상에서 제일 역겹다며, 자신이 그를 죽이지 않았다면 그가 자신을 죽였을 거라고 분노하며 작품 속에서 홈스를 죽여 버린다. 하지만 사람들은 홈스가 실존인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도일을 살인자 취급하며 허구의 인물을 위한 부고 기사가 신문에 실리기도 한다. 독자들의 항의와 주변 사람들의 핍박때문에, 혹은 알 수 없는 어떤 이유로 코난 도일은 결국 홈스를 살려내기에 이른다. 모리어티와의 결전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홈즈가 몸을 피해 3년간 은신했던 것으로 이야기를 설정해 다시 셜록 홈스 시리즈가 부활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셜록 홈즈의 공백기에 대한 이야기가 전 세계 셜로키언들의 무수한 상상력을 자극했고, 이 작품 역시 그에 대한 아주 매력적인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결국 그럴 줄 알았지! 다시 살려낼 거죠?"

"누구를 말입니까?"

"셜록 홈스요!" 남자가 계단 꼭대기에서 몸을 돌려 아서를 내려다보며 외쳤다. 위층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이 남자를 후광처럼 에워쌌다.

"아무렴, 그럴 때가 됐죠. 홈스는 끝내주는 마약이었어요. 고달픈 하루를 버티는 데 그만한 낙도 없었지. 가족처럼 그립다니까." 남자가 낄낄 웃었다. "막말로 가족보다 낫지."

1893 8월의 어느 날, 코난 도일은 그 동안 벼르고 벼르던 일을 시작한다.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아무도 모르게 살짝 킬킬대기까지 하면서, 램프 불빛 하나에 의지하여 셜록 홈스를 죽인 것이다. 입술에는 살인의 달콤함이 느껴졌고, 몇 년 만에 처음으로 자유를 느끼며 행복한 기분에 젖어든다. 그렇게 셜록 홈스가 죽은 지 칠 년이 흐른 뒤, 사람들은 여전히 홈스에 대해 쓰고, 홈스를 논하고, 홈스를 그리워하고, 홈스 이야기가 실렸던 잡지사마다 편재를 보내 그의 귀환을 애걸했다. 그리고 어느 날, 소포로 위장한 폭탄이 배달되는데 폭탄은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지만 그에게 충격을 주기에는 무리가 없었다. 경찰은 폭탄이 그를 살해할 목적은 아니었던 것 같다며 전력을 다해 범인을 잡겠다는 말 뿐, 실제로 심각하게 수사에 착수하지는 않았다. 진지하지 못한 경찰의 행동에 화가 난 아서는 자신이 직접 조사를 하겠다고 나서고, 폭탄과 함께 온 편지에 있던 죽은 여성에 대한 기사를 추적하다 연쇄 살인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재미있는 것은 자신이 스무 편도 넘는 이야기 속에서 떠벌렸던 수사 방법을 실제 사건에도 적용하면서, 아서가 탐정 역할 특유의 지적 허세를 어느 정도 즐기게 된다는 것이다. 경찰청에서 사건 기록을 뒤적이던 날에 비하면 이날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스릴 있었던 것이다. 혼자 힘으로 실마리를 잡아내는 기분도 짜릿했지만, 아직 안개 속을 헤매는 상대에게 그것을 설명하는 기분에는 비할 바가 아니었으니까. 그는 직접 수사에 뛰어 들게 되면서, 과연 탐정에게는 청중이 필요하다는 것을 실감하고, 갈수록 홈스를 이해하게 된다. 하지만 허구의 이야기로 단서 퍼즐과 허를 찌르는 반전을 구상하고 미스터리 플롯을 짜는 것과 현실에서 살인 사건을 해결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일이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그가 그 동안 주장했던 주장하는 추리의 과학, 즉 인간사의 가장 어두운 이면을 이성의 힘으로 밝히는 능력이 저속한 속임수로 추락할 판이었다. 그가 자신이 소설에 썼던 그 수사 방법이 실제 사건에도 적용되는 게 아니라면 그 모든 것들이 싸구려 거짓말, 반 푼어치도 안 되는 쓰레기가 되어 버린 다는 것을 체감하면서 아서와 홈스는 이제 운명 공동체였다. 둘 다 사기꾼이 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였다

해럴드는 셜록 홈스를 믿었다. 물론 홈스 이야기는 '실화'가 아니다. 셜록 홈스를 믿는다는 게 그를 실존 인물로 생각한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홈스 이야기가 주장하는 바를 믿었다. 이성의 힘을 믿었고 추리라는 정밀과학을 믿었다. 셜록 홈스는 그걸 할 줄 알았다. 그렇다면 나도 할 수 있어. 해럴드는 생각했다.

1900년대의 아서 코난 도일에 이어 이야기는 2010년대의 셜로키언 해럴드 화이트의 현재 이야기로 진행된다.  그는 지금 셜록 홈스 연구 단체 중에서도 세계 제일로 꼽히는 스트리트 이레귤러스 회원으로 선정되어 단체에 입회하는 중이다. 스물 아홉의 그는 짧은 연구 경력에 회원과 특별히 초대받은 사람만 참석할 수 있는 이레귤러스의 만찬 초대 한 번 만에 회원 자격을 얻은 첫 번째 인물이었다. 열네 살때부터 셜록 홈스에 빠져 프린스턴 대학교 졸업식에도 자랑스럽게 디어스토커를 쓰고 갔을 정도로 그의 홈스 사랑은 꾸준했다. 수백 개의 셜로키언 단체 중에서도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고 가장 권위 있고 가장 들어가기 어려운 단체인 베이커 스트리트 이레귤러스의 신입 회원이 된 그는 오래도록 원하던 것을 얻은 이 순간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행복했다.

이날 밤 모든 회원들의 관심은 코난 도일이 죽은 후 행방불명 되었던 한 권의 일기였다. '마침내 발견된 사라진 일기'에 대해 홈스 권위자 중에서도 첫손에 꼽히는 알렉스가 다음 날 컨벤션에서 발표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그는 호텔방에서 시체로 발견되고, 모두가 기다린 사라진 일기는 흔적도 찾을 수가 없게 된다. 피비린내 나는 살인 사건 이야기는 수없이 읽었지만 시체를 실제로 본 건 처음이었던 해럴드는 현장에서 자신도 모르게 현장을 수색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셜록 홈스라면 어떻게 할까요?" 해럴드가 물었다. 멍했지만 진지했다. 그는 알고 싶었다. 가능한 일인지 알고 싶었다.

"홈스라면 책 속으로 도로 기어들어가겠지. 홈스는 잉크와 소나무 펄프니까."

"홈스가 실존 인물이고 그의 이야기가 실화라면, 그럼 홈스는 어떻게 할까요? 해럴드는 호기심을 누를 수 없었다.

그는 홈스가 사건 현장에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을 떠올리고, 시체에 다가가 자세히 살피기 시작한다. 경찰이 와서 현장을 엉망으로 만들기 전에 호텔 방을 조사해야겠다고 말이다. 왜냐하면 어떻게 보더라도 현재 경찰의 살인 사건 해결률보다 홈스가 압도적으로 월등하니까. 지금 과학 수사대에다 정전기식 지문 추출법까지 있음에도 불구하고 살인 사건 해결률은 60퍼센트밖에 안되니 말이다. 그는 도난 된 '사라진 일기'와 살인사건에 대해서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는 '셜록 홈스의 방식'으로 해결해보겠다고 나선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해럴드가 이 일에 뛰어든 것이 살해된 알렉스 때문만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의 시야 너머에, 컴컴한 구름을 지나 밝은 창공에 엄청난 답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 때문이었다. 정의 실현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미스터리'를 풀고 싶었던 자신을 위해서였던 것이다. 알렉스의 이런 점이 매우, 셜록 홈스와 닮아 있다는 점이 재미있다. 그의 주변 다른 셜로키언들은 이건 추리 소설이 아니고 현실이라고 그를 걱정하거나, 한심하게 생각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엄마를 왜 사랑하느냐고 하면 할 말이 없는 것처럼, 그가 홈스를 사랑하는 이유도 설명하기 막막했다. “문제에 해답이 존재한다는 개념이 좋아서요. 홈스 이야기를 포함해서 그게 모든 추리소설의 매력이에요. 추리소설 속의 세상은 따져볼 수 있는 세상이에요. 모든 문제에 해답이 있는 세상이죠. 똑똑하면 인과 관계를 밝힐 수 있는 곳이에요

그레이엄 무어의 번뜩이는 상상력은 100년의 시간을 왕복하면서 과거의 코난 도일과 현재의 셜로키언이 추적하는 각각의 살인 사건을 전혀 별개의 이야기로 진행시키다 교묘하게 만나도록 만들어낸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사건 중 상당수는 실제로는 없었던 일이고, 등장하는 인물 중 상당수는 가공의 인물이다. 하지만 실존 인물들도 다수 등장하며, 엄연한 사실과 사실 가능성이 있는 일들과 100퍼센트의 허구가 섞여 있다. 코난 도일이 작고한 뒤 그의 유품 중에서 일부가 유실되었고, 그중에 사라진 일기 한 권이 있었다. 그리고 2004년 저명한 코난 도일 연구가가 사라진 문서를 발견했다고 발표했고, 그는 지인들에게 자신의 신변이 위험하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결국 그는 자택에서 주검으로 발견되었지만, 그의 죽음은 아직까지도 미제 사건으로 남겨져 있다. 그의 죽음으로 전세계 셜로키언들은 살인자를 찾기 시작했고, 그의 죽음에 대한 그럴듯한 이론들이 속속 대두했다. 그리고 이 작품에 나오는 코난 도일의 생애에 관한 정보 모두 사실이며, 그의 지인으로 등장하는 작가 브램 스토커도 최대한 실제에 충실하게 묘사되고 있다. 이렇게 실제와 허구와 매력적으로 얽혀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가 탄생한 것이다.

이 작품은 물론 셜록 홈즈에 대해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일수록 더욱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요소들이 많이 있다. 하지만, 셜록 홈즈의 이름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전혀 상관없을 만큼 흥미로운 작품이기도 하다. 내 인생 최초의 미스터리 소설은 코난 도일의 셜록 홈스 시리즈였다. 초등학생이었지만 지칠 줄 모르는 독자이기도 했던 나는, 셜록 홈스를 만나고 나서 한동안 다른 소설은 거의 읽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가 문학의 비현실성에서 현실로 걸어 나왔기 때문이었다. 그날로부터 수십 년이 지났지만, 나에게 셜록 홈스란 절대 사라질 수 없는 존재이다.

당신은 셜록 홈즈 외에 이야기에 종속되지 않고, 스스로 생명을 가지고 살아 있는 캐릭터를 본 적이 있는가? 당신이 홈즈를 소설 속 인물이 아니라 형체를 갖추고 있는 실제 인간처럼 느낀 적이 단 한번이라도 있다면, 그레이엄 무어의 이 작품을 적극 추천한다. 1887년경부터 무려 21세기에 이르기까지, 왜 아직도 홈스 이야기가 결코 끝나지 않는지 궁금한 사람들에게도 이 작품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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