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롤 에디션 D(desire) 9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지음, 김미정 옮김 / 그책 / 2016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무대 디자이너를 꿈꾸는 열아홉의 테레즈는 백화점에서 임시직으로 일하고 있는 중이다. 크리스마스 선물로 인형을 사주려는 사람들을 상대하던 어느 날, 한 여인을 만나게 된다. 우연히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친 순간은 그렇게 운명처럼 그녀에게 각인된다. 테레즈는 일상이 불안했고, 자신의 꿈에 대해 자신이 없었으며, 항상 갈팡질팡했고, 스스로의 삶이 처량했다. 게다가 연인인 리처드와 만난 지 열 달 정도 되었지만, 그를 전혀 사랑하지 않았다. 그를 좋아하긴 했지만, 그와 사랑에 빠지는 건 영원히 불가능할 것 같다는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캐롤은 남편과 불행한 결혼 생활을 이어오다 이혼을 앞두고 있었고, 딸의 양육권 관련해서 골치가 아픈 상황이었다. 그녀 역시 삶에 아무런 기쁨도 찾을 수 없는 상태였던 것이다.

그렇게 생에 지치고 외로웠던 두 여자가, 한 눈에 상대를 알아본다.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맞닿았다. 테레즈는 상자를 열다가 고개를 들었고, 때마침 여인도 고개를 돌리는 순간 두 시선이 부딪쳤다. 여인은 늘씬한 몸매에 금발이었으며 넉넉한 모피 코트를 걸친 모습이 우아했다. 한 손을 허리에 대고 있어서 모피 코트 앞섶이 벌어졌다. 눈동자에 붙들린 테레즈는 시선을 피할 수 없었다. 앞에 있는 손님이 재차 묻는 소리가 들렸지만 테레즈는 가만히 선 채 벙어리가 되었다......테레즈는 저 여인이 분명 자기에게 올 것임을 직감했다. 여인이 서서히 카운터로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테레즈의 심장은 멈춰 섰던 순간을 만회하려는 듯 쿵쾅거렸다. 여인이 점점 다가오자 테레즈의 얼굴이 붉어졌다.

보수적인 당시의 시대상에 비추어 여자와 여자의 로맨스를 그린 작품으로 보자면 상당히 파격적이지만, 사실 그저 한 존재와 다른 존재가 서로를 알아보고 마음이 시키는 대로 서로에게 다가가는 과정으로 이 작품을 보자면 여느 연애 소설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무미건조하고 확신 없는 삶에 지쳐 있는 테레즈와 무기력한 결혼 생활에 지쳐 있는 캐롤은 처음 만난 순간부터 서로에게 강렬한 끌림을 느꼈고, 재고 따지고 할 것도 없이 가까워진다. 그리고 두 사람은 함께 미국 서부를 가로지르는 여행을 떠나게 된다. 하지만 캐롤의 남편이 고용한 사설탐정이 그들을 쫓아오고, 그는 캐롤에게 딸과 테레즈 중 한 사람을 택하라며 위협하고 그들의 관계는 그렇게 사람들의 이해를 얻지 못한 채 위기를 맞이한다.

테레즈와 캐롤이 서로를 알아가는 초반의 분위기는, 남녀가 미묘한 떨림을 간직한 채 서로를 탐색하는 그것과 매우 비슷한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한참 이 책을 읽다 보면 굳이 이걸 레즈비언 소설로 구분 지어야 하나 의문이 들만큼, 그저 사랑에 빠진 인물들의 심리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작품이다. 태어나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게 된 것이 하필 남자가 아니라 여자였다는 것만 다를 뿐, 테레즈의 사랑 또한 다른 이들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그것을 다르게 보는 이들의 사회적 시선을 완전히 배재할 수는 없는 것이 안타깝지만 말이다.

"그럼 부끄러워할 일인가요?"

"맞아, 너도 알잖아." 캐롤은 또렷하게 말했다. "이 세상의 눈으로 보면 그건 혐오스러운 일이야."

캐롤의 말에 테레즈는 차마 웃을 수도 없었다. "당신은 그걸 믿지 않는군요."

"사람들은 하지네 가족하고 비슷해."

"그들이 이 세상 전부는 아니잖아요."

"그들만으로도 차고 넘쳐. 너도 이 세상에서 살아야 하잖아. 그러니까 내 말은, 너더러 지금 당장 누굴 사랑할지 결정하라는 소리가 아니야." 캐롤은 테레즈를 쳐다보았다. 이제 캐롤의 눈동자에서 미소가 천천히 차오르며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내 말은 이 세상에서 남들과 어울려 살아야 하는 책임감이란 게 말이지, 그게 네 것이 아닐 수도 있어. 지금은 안 그래도 돼. 네가 뉴욕에서 알아야 할 나쁜 사람이 바로 나거든. 왜냐, 내가 널 마음껏 즐기고 자라지 못하게 막을 테니까."

퍼트리샤 하이스미스는 <열차 안의 낯선 자들>의 집필을 막 끝내고, 돈에 쪼들리는 상황이라 몇 푼이라도 벌려고 크리스마스 시즌 동안 대형 백화점에서 판매 사원으로 일을 하기로 했다. 그녀는 시끄럽고 정신 없는 장난감 코너로 배치되어 인형 카운터에서 일을 했는데, 어느 날 아침 모피 코트를 걸친 금발 여성을 만나게 된다. 여느 때와 별 다를 것 없는 판매 과정을 거쳐 여자는 돈을 지불하고 떠났지만, 이상하게도 그녀는 환영을 본 듯 기분이 들떴으며, 머릿속이 이상하고 어질 해서 기절할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힌다. 그렇게 퇴근을 한 후 혼자 사는 아파트로 돌아가 그날 저녁, 주제를 정해 플롯을 짜고 여덟 쪽 정도 되는 스토리가 느닷없이 펜 끝에서 줄줄 흘러 나오게 된다. 두 시간도 채 걸리지 않은 시간 동안 <캐롤>의 줄거리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주로 서스센프 소설을 썼던 그녀는 이 작품을 통해 레즈비언 소설 작가라는 딱지가 붙을 까봐 필명으로 이 책을 내기로 했고, <소금의 값>으로 출간된 이 작품은 당시 엄청난 흥행에 성공한다. 책이 출간된 1950년대의 미국에서 당시 동성애자들은 남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그 대가를 치뤄야 했고, 외롭고 비참하게 단절된 삶을 살아야 했었다. 하지만 이 작품은 동성애 소설 중에서 처음으로 해피 엔딩으로 끝나는 작품이었기에 많은 이들의 호응을 받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후 동성애 소설은 다시 쓰지 않았고, 이 작품은 범죄 소설의 대가가 쓴 자전적 소설이자 유일한 로맨스 소설로 남게 된다.

이 책이 출간된 지 70년에 가까운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동성애를 바라보는 일반인의 편견은 존재한다. 동성 결혼이 합법화되는 나라가 늘고, 동성애를 다룬 작품들도 늘어나고, 당당히 커밍아웃하는 사람들이 생겼지만 말이다. 토드 헤인즈 감독의 동명 영화가 온갖 영화제를 휩쓸고, 사람들의 호평을 받고 있지만,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원작 또한 영화만큼이나 아름답다. 물론 케이트 블란쳇의 캐롤과 루니 마라의 테레즈는 원작과 조금 다른 부분이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매력적이고, 영화가 그려내지 못하는 미세한 감정의 떨림들은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단단한 문장들로 힘을 발한다. 인생에 단 한번, 당신의 그 사람을 만나게 된 순간을 가지고 있다면 공감할 수밖에 없는 작품이 아닐까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