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돌의 6일 버티고 시리즈
제임스 그레이디 지음, 윤철희 옮김 / 오픈하우스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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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작품은 시드니 폴락 감독, 로버트 레드포드 주연의 영화 콘돌(Three Days Of The Condor)의 원작 소설이다. 그렇게 영화로 먼저 전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된 이 작품은 첩보 스릴러의 모던 클래식으로 손꼽히는 작품이기도 하다. 70년대의 잘 만들어진 첩보물이라는 점 외에도 영화가 인상적이었던 이유는 바로 콘돌이라는 캐릭터 때문이었다. 제대로 된 현장 훈련도 받은 적이 없는, 총이라고는 사냥할 때 딱 한 번 쏴본 게 전부인, 그런 첩보물의 주인공은 난생 처음이었으니까. 그렇게 우리는 대부분의 첩보물에 등장하는 히어로들과는 너무도 다른, 그 어디서도 만난 적 없는 이상한 주인공을 만나게 된다.

말콤은 권총 사격을 평생 딱 한 번 해봤다. 친구가 가진 22구경 모델이었다. 달아나는 다람쥐를 향해 쏜 다섯 발은 모두 빗나갔다. 그는 미시즈 러셀의 권총을 허리 높이에서 발사했다. 자신이 방아쇠를 당겼다는 걸 그가 인지하기도 전에 귀청이 터질 듯한 총소리가 골목에 메아리쳤다.

말콤 미국문학사협회에서 근무하는 CIA 조사원이다. 그가 하는 일은 문학 분야에 기록된 모든 스파이 활동과 관련 행위들을 파악하는 것이다. 그는 스파이 스릴러와 살인 미스터리 물을 읽고, 미스터리와 아수라장을 다룬 단행본 수천 권에 등장하는 모든 행동과 상황들을 대단히 상세하게 기록하고 분석한다. 그렇게 모든 서적의 플롯과 거기에 사용된 방법들을 요약하고, 본부로부터 위생 처리된 일련의 보고서를 날마다 수령하는데, 그 보고서에는 실제 사건들을 묘사한 요약 본이 담겨 있고, 그것을 토대로 사실과 픽션을 비교하는 작업이 진행된다. 둘 사이에 중요한 상관관계가 드러날 경우, 심층 조사에 착수하고, 상층에 있는 기밀부서에 검토용으로 제출되는 것이다. 소설이 단순히 작가의 상상력으로 얻어낸 결과물이 아니라, 어떤 사상적 배경으로 인해 쓰여졌다고 믿는 음모론이야 말로 이 작품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 중의 하나이다.

재미있는 건 당시 스물 셋이던 작가 지망생 제임스 그레이디가 이런 설정을 구축할 때만 해도, 이것이 실제로 존재하는 직업이 아니었다는 거다. 게다가 당시만 해도 CIA를 다른 책은 한 권도 없었다고 한다. 굉장하지 않은가. 세계에서 출판된 모든 모험물들과 소설들을 읽고, 플롯들을 (추잡한 수법들과 암호들을) 컴퓨터에 입력하면 그것으로 CIA의 실제 계획과 작전들과 비교하면서 정보 누설자들을 찾아 낸다니 말이다. 그리고 실제로 KGB에 그런 업무를 하는 비밀 사업부가 생긴다. 바로 콘돌에서 영감을 얻어서, 소설가 지망생이 지어낸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 2,000명이나 되는 인력이 투입된 것이다. 이 이야기는 재출간을 하면서 작가의 고백이라는 부분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는데, 작품의 탄생 배경과 그 외 수많은 부분들을 이야기하고 있는 이 부분은 무려 30 페이지가 넘는다. 작가의 말이 이렇게 길게 수록되어 있는 것 또한 난생 처음인데, 소설 본문 만큼이나 흥미진진하다.

말콤은 신중하게 계산한 위험을 감수했다. 가장 눈에 띄는 은폐 장소가 가장 안전한 곳인 경우가 잦다는 에드거 앨런 포의 '도둑맞은 편지' 원칙을 활용한 그와 웬디는 의사당행 버스를 탔다. 그들은 협회에서 채 400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이스트 캐피톨 스트리트에 있는 여행자용 숙소를 임대했다. 우중충한 호스텔의 여주인은 오하이오에서 온 신혼부부를 환영했다.

여느 때와 다름 없는 평범했던 어느 날, 말콤의 동료 중 하나가 과거의 기록들을 조사하던 중에 잃어버린 책 두 상자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말콤을 비롯한 다른 이들은 그가 발견한 것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지만, 그걸로 인해 그 사실을 알게 된 모든 이들이 전원 학살당한다. 마침 점심으로 샌드위치를 주문하러 나왔던 말콤만 살아 남게 되고, CIA 본부에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한다. 요원들과 접선하기로 한 곳에 나간 말콤은 그 중 한 명이 오늘 아침 협회에 있었던 이와 동일 인물이라는 걸 알아보고, 뭔가 잘못됐다는 걸 깨닫는다. 그에게서 도망치는 와중에 말콤은 생애 두 번째로 권총 사격을 하게 되고, 그것은 남자의 왼쪽 허벅지를 관통하며 박살을 낸다. 그렇게 아무도 믿을 수 없어진 상황에서 그들로부터 도망쳐야 하는 코드네임 콘돌이 벌이는 6일 동안의 활약이 펼쳐진다.

미국문학사협회의 직원들을 모두 사살한 CIA 내부의 이중 첩자와 그 모든 사태를 파악하려는 CIA 본부의 주요 인물들과 그들과 긴밀해 협조해 자신의 목숨을 지키고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지 알아내려 하는 콘돌의 이야기는 그가 초짜 현장 요원이라는 데서 더 긴장감을 부여한다.  물론 책상에 앉아 문서만 분석하던 그가 숨 가쁜 추격 전에서 너무 쉽게 달아나고, 적들을 물리친다는 허술함이 있긴 하지만, 그마저도 비현실적인 히어로들에 비해 인간적인 주인공이 가진 매력으로 인해 상쇄가 될 만큼 흥미롭다. 분석관에 불과한 그가 복잡하고 위험한 포위망을 얼마나 잘 피해 다니는지 사실 너무 이상하지만, 실제 세상에는 그보다 더 이상하고 어이없는 일이 더 많이 벌어지지 않은가.

1974년 출간되었던 <콘돌의 6> 1975 <콘돌의 그림자> 이후 제임스 그레이디는 다른 작품들을 계속 써왔지만, 지난 2014 <콘돌의 다음 날>, 그리고 2015년에 <콘돌의 마지막 날들>을 출간하며 콘돌을 다시 재 탄생시켰다. "나는 이런 내용의 글을 읽는 사람이지, 그걸 실행하는 사람이 아니란 말입니다." 라며 자신이 처한 상황을 부정하던 그가 그럼에도 꽤 훌륭하게 그 모든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 남았지만, "요점만 얘기하면, 자네는 썩 훌륭한 현장 요원은 아냐." 라는 평가를 받았던 첫 번째 작품 이후, 또 어떤 활약을 보여주며 현장 요원으로서의 자질을 드러내게 될지 매우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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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오어 데스 스토리콜렉터 50
마이클 로보텀 지음, 김지선 옮김 / 북로드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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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자가 탈옥을 한다. 여기까지는 평범하다. 그런데 그 남자는 감옥에서 10년을 보내고, 출소를 하루 앞 둔 상태였다. 하루만 더 있으면 자유의 몸이 되었을 텐데, 왜 마지막 날 밤에 그런 짓을 했을까? 그렇게 탈옥수가 된 그가 잡힌다면 재판을 받고 다시 감옥에 들어와야 할 것이다. 아마도 20년은 더 수감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탈옥을 감행했다. 여기서부터 이 작품이 특별해진다. 우리는 지금 세상에서 가장 이상하고, 특별한 스릴러의 주인공을 만나게 된다.

뭔가를 기대한다는 건 그런 식이지, 하고 오디는 생각한다. 단 하나의 사건이나 단 하나의 잘못된 결정 때문에 모든 게 뒤집힐 수 있다. 타이어에 펑크가 나거나 잘못된 순간에 보도에서 내려서거나 하필이면 급조 폭발물 옆으로 차를 몰아가거나. 오디는 사람이 자기 운을 만든다는 생각을 믿지 않는다. 또한 공정함 같은 건 생각지도 않는다. 피부색이나 누군가의 머리카락을 가리킬 때만 빼고.

드라이퍼스 카운티의 무장 트럭 강도사건. 그날 네 사람이 죽었고, 한 명이 도망치고, 한 명이 잡혔다. 현금 700만 달러의 행방에 대해 말해줄 수 있는 유일한 생존자는 바로 범인으로 지목된 오디 파머 뿐이다. 그런데 그는 감옥에 수감된 10년 동안 온갖 협박과 살해 위협에도 꿋꿋하게 버티며, 꾸역꾸역 살아남았다. 그가 감옥에 도착하고 몇 시간 안 되어 그에 대한 소문이 쫙 퍼졌고, 사라진 7백만 달러에 대한 관심으로 오디는 매일같이 지독한 짓을 당해야 했다. 그는 첫날 열두 명의 남자와 싸워야 했고, 다음 날에는 새로 열두 명이 더 나타났다. 하지만 그는 겁에 질려 하지도, 독방에 넣어달라고 애원하지도 않고, 그저 그 모든 것을 견뎌냈다. 그렇게 10년을 버티고, 출소 하루 전에 탈옥을 한다.

이 작품에서 감옥을 탈옥하는 과정의 드라마틱함이나 계획 따위는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이야기는 그가 탈옥을 하고 나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탈옥이 아니라 그가 탈옥을 한 이유였으니까. 그리고 그것이 이 작품 전체를 굴러가게 하는 동력이 된다. 그가 탈옥을 하고 난 뒤, 그의 옆방 동료였던 모스와 미해결 강도사건을 추적 중인 연방수사국 특수수사관 데지레, 10년 전 강도사건 현장에 있었던 보안관 발데즈,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의문의 추적자들까지 모두 사라진 오디를 쫓기 시작한다.

"우리가 되어야 할 사람이 된다는 게, 때로는 쉽지가 않단다."

오디를 찾기 위해 온 데지레에게 모스는 이렇게 말한다. 그 친구가 왜 탈옥했는지 알고 싶어 하시지만, 그건 잘못된 질문이라고. 왜 더 일찍 탈옥하지 않았는지를 물어야 하는 거라고. 오디는 감옥에 있는 내내 칼에 찔리고 목을 졸리고 두들겨 맞고 유리에 베이고 불에 지져졌다고. 일주일이 멀다 하고 간수들이 두들겨 팼고, 낮에는 마피아나 깡패들이 오디를 덮치려고 했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오디는 단 한번도 증오나 후회나 나약함을 보이지 않았다고 말이다. 이야기는 그렇게 탈옥한 오디의 뒤를 쫓는 인물들과 감옥을 나온 오디의 의문스러운 여정을 교차로 보여주면서 진행되지만, 우리는 이야기가 꽤 진행될 때까지 그의 의도를 짐작조차 할 수 없다. 그러다 어느 순간, 시간이 멈춰 버린다. 호흡이 짧고, 긴장감 넘치는 스릴러라는 장르에서 이런 느낌을 받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도로 위로 몸을 숙인 채 가슴을 들썩인다. 콧물이 흐르고 어딘지도 모를 곳들이 아파온다. 상실감과 당황 속에서 오디는 자신의 통제를 잃었다. 한때 품었던 모든 계획은 이제 더는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가능해 보이지도 않는다.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을 짊어진 채 가고 있다. 통근객들, 쇼핑객들, 관광객들, 사업가들, 야구모자 쓴 소년들, 넝마를 입은 거지들. 자기 자신이 되기로 결심한 사람들, 다른 사람이 되려고 애쓰는 사람들. 오디는 그저 존재하고 싶을 뿐이다.

마이클 로보텀은 이 작품으로 작년 골드 대거상을 수상했다. 올해 에드거상과 배리상에도 최종 후보로 선정되었고 말이다. 그의 대표작인 조 올로클린 시리즈가 그 재미와는 별개로 두툼한 두께만큼이나 느린 이야기 진행으로 책장을 넘기는 속도를 느리게 만드는 걸로 유명하지만, 이번 작품은 그 속도감이 대단하다. 그리고 550페이지를 앉은 자리에서 읽게 만드는 가장 큰 동력은 주인공 오디 파머 때문이다. 실제 그가 행하는 말과 행동보다, 다른 사람들이 그에 대해서 기억하고 평가하는 걸로 우리는 그를 먼저 알게 된다. 하지만 그렇게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과거 그의 모습과, 실제 사건의 전말이 밝혀지면서 현재 그의 행동에 전혀 다른 의미가 부여되기 시작하고, 그제야 비로소 우리는 진짜 오디 파머의 모습을 알게 된다.

사랑은 남자를 그렇게 만든다. 남자를 미치게 만든다. 사랑은 남자를 장님이나 불사신으로 만들지 않는다. 약하게 만든다. 남자를 인간으로 만든다. 현실로 돌려놓는다.

단 하나의 사건이나 단 하나의 잘못된 결정 때문에 모든 게 달라질 수 있다. 삶은 누구에게나 공정한 것이 아니며, 스스로 자기의 운을 만들 수 있다는 것도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은 아니다. 게다가 기대는 항상 현실과 일치하지 않으며, 삶은 가장 평범한 꿈도 짓밟고 꺽어 버리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뭐 하나 마음먹은 대로 삶을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이라면, 대체 어떻게 해야 된다는 말이냐 싶을 수도 있다. 내가 아무 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니까 그 어떤 잘못을 저지르지도, 그 무슨 결정을 내리지도 않았음에도 최악의 상황에 처해지게 된다면 당신이라면 어떨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저 자기 자신으로 남아 있기 위해 뭘 할 수 있을까. 누군 가에게는 숨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 누군 가에게는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죽을 힘을 다해 버텨야 하는 일이라면 말이다. 글쎄, 나라면 오디 파머처럼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산다는 게 어떤 건지 나는 아직 겪어보지 못했으니 말이다. 한 가지는 분명하다. 마이클 로보텀은 이 작품을 통해 책장에서 튀어나와 우리의 마음과 기억에 파고드는 인물을 창조했다는 것. 나는 그저 오디 파머가 행복하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마치 그가 실제로 살아있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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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여 마땅한 사람들
피터 스완슨 지음, 노진선 옮김 / 푸른숲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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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공항의 비즈니스 클래스 라운지 바에서 만난 두 남녀. 남자는 신생 인터넷 기업에 자금을 대고 조언하는 일을 하는 부유한 결혼 3년차였고, 여자는 여자 대학교에서 문서 보관 담당자로 일을 하는 미혼이었다. 어차피 그들은 평생 다시 볼 일도 없을 테니, 낯선 사람에게 가장 개인적인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인형 같고 동그란 얼굴은 나이를 먹으면서 둥실둥실해질 것이고, 핀업 사진 속 모델 같은 몸도 처질 것이다. 하지만 어차피 그녀는 늙지 못할 것이다. 내가 죽일 거니까. 맞지? 난 그럴 계획이었다. 그녀를 죽이고도 들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니 굉장한 힘과 희열이 느껴졌지만 또한 두려움과 슬픔도 느껴졌다. 난 아내를 미워하지만 그 이유는 한때나마 아내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남자는 해안가의 부지를 사들여 집을 짓는 중이었는데, 시공업자와 아내가 사랑에 빠져 버린 것이다. 그들의 모습을 직접 눈 앞에서 확인한 그는 엄청나게 화가 났고, 아내를 죽이고 싶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불륜 장면을 목격한 일주일 전부터 지금까지 스스로에게 자문했던 질문, 아내를 죽이는 일에 대해 그녀에게 털어놓자, 놀랍게도 그녀가 이렇게 말을 한다. "나도 당신과 같은 생각이에요."

살다 보면 누구나, 어떤 상황에서 상대방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렸으면 좋겠다 싶은 순간이 있을 것이다. 물론 대부분은 그런 생각을 금방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살아가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말이다. 너무 괴롭고, 분하고, 화가 나서 미쳐버릴 것 같은데, 그 순간 곁에 있던 누군가가 그 생각은 당연한 거고, 전혀 나쁜 게 아니라며 도와주겠다고 나선다면 어떨까. 어차피 사람은 누구나 죽게 마련이고, 당신이 하는 건 그 사람의 죽음을 앞당겨주는 행동일 뿐이라고 말이다. 당신에게 나쁜 짓을 한 그 사람이 세상을 더 나쁘게 만드는 사회의 암적인 존재이니, 사라져도 상관없다고 말이다. 왜냐하면 당신의 그 행동이 이후에 그로 인해 상처받을 많은 사람들을 구해주는 일이 되기도 한다고. 글쎄, 장난처럼 웃어 넘길 수도 있겠고,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냐며 정색하게 될 수도 있을 테고, 정말 그래도 될까 싶어 자신의 마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당신이라면 어떨까. 하지만 세상에 '죽여 마땅한' 사람들은 없다. 그가 아무리 나쁜 짓을 저질렀다 해도 말이다.

"계획대로만 한다면 잘못될 일은 없어요. 하나만 물을게요. 만약 오늘 케네윅에 지진이 나서 미란다와 브래드가 죽었다고 해 봐요. 기분이 어떻겠어요?"

"행복할 겁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내가 대답했다. "내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그들은 죗값을 치르겠죠."

"우리가 하려는 일이 바로 그거예요. 지진을 만드는 거죠. 둘 다 매장할 정도의 지진. 제대로만 한다면 사건을 수사하게 될 경찰을 포함해 모두가 미란다는 브래드가 줄였고, 브래드는 도망갔다고 생각할 거예요. 그러고는 브래드를 찾는 데 총력을 기울일 테지만 영영 찾아내지 못하겠죠. 당신을 잠깐 의심할 수도 있어요. 의심하지 않으면 이상한 거죠. 하지만 당신에게 불리한 증거는 전혀 나오지 않을 테고, 당신의 알리바이는 절대 깨지지 않을 거예요."

, 그렇게 아내의 불륜을 용서하지 못한 남편의 복수극이 짜잔.하고 펼쳐질 거라고 생각했다면 당신의 오산이다. 이야기는 살인을 계획하는 남편 테드와 우연히 공항에서 만나 그를 돕는 릴리의 스토리와 과거 릴리의 행적이 교차 진행된다. 그런데 황당하게도, 1인칭 화자였던 우리의 주인공 테드는 1장을 끝으로 이야기 속에서 사라져 버린다. 그리고 시작된 2장은 릴리와 테드의 첫 만남 장면으로 이어지고, 이야기는 테드가 죽이려고 하던 아내 미란다와 살인 계획을 모의하다 혼자 남겨진 릴리의 시점으로 교차 진행되기 시작한다. 마지막 3장에선 그녀들 외에 사건을 수사하는 형사 킴볼과 사건을 수습해야 하는 릴리의 시점으로 교차 진행되며 이야기는 더욱 복잡해진다.

릴리가 이렇게 된 배경에는 그녀의 독특한 가정 환경과 어린 시절의 영향이 매우 컸지만, 사실 그녀를 그저 사이코 패스라고 치부하기에는 모자란 부분이 많다. '사람을 죽이는 것이 정말 나쁜 것인지. 왜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되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과 어차피 누구나 한번은 죽게 마련인데 그 시기를 조금 앞당기는 것뿐이라는 합리화, 그리고 내가 만약 누군가를 죽이고, 완벽하게 숨길 수 있는 상황에 놓여 있다면 과연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은 이 작품의 전체를 관통하는 의문이다. 나라면? 과연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애초에 살인의 당위성을 믿는다면 말이 안 되겠지만, 이상하게도 이 작품을 읽고 있노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은 지점과 어느 순간 만나게 된다. 우리가 그 동안 옳다고 믿어 왔던 모든 것이 허물어지는 경험을 하게 만드는, 매력적인 작품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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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 하이든
사샤 아랑고 지음, 김진아 옮김 / 북폴리오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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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를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는 언제나 매혹적이다. 게다가 비밀과 거짓말로 가득 찬 삶을 살고 있는 소설가라면 더할 나위 없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한술 더 떠 작가도 아니면서 작가라고 뻥치고 남의 인생을 훔쳐서 살고 있는 소설가가 등장한다. 그러니 재미가 없을 래야 없을 수가 없지 않겠는가.

원칙적으로 서평을 읽지 않는 마르타와 달리 헨리는 모든 평을 한 자 한 자 다 읽었다. 특히 마음에 드는 칭찬에는 자를 대고 줄을 그었고 기사를 오려서 스크랩북도 만들었다. '문장 하나하나가 요새와 같다.' 헨리는 이 평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책 표지 접히는 곳에 굵은 글씨로 인쇄돼 있었는데 큰 신문사에서 문학 카럼을 쓰는 페펜코퍼라는 사람이 쓴 것이었다. 헨리는 '그렇지!' 단순하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문장. 내가 써도 이렇게 썼을 거야'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애석하게도 그건 그에게서 나온 문장이 아니었고, 그 무엇도 그에게서 나온 것은 없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성공한 소설가 헨리는 자신의 작품 중 단 한 문장도 쓰지 않았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사실 그의 모든 소설은 그의 아내가 쓴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세상은 이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걸 아는 사람은 그 자신과 아내뿐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니 그런 아내를 위해 목숨까지 바쳐도 아깝지 않을 만큼 지극정성을 쏟아 부어도 모자랄 텐데, 이 남자 자신의 담당 편집자인 베티와 바람을 피우는 중이다. 거기다 베티는 임신까지 한 상태이다. 그 소식을 듣고 나서야 아내에 대한 죄책감이 들기 시작해 애인과 헤어지기로 결심하게 된다. 그런데 약속 장소에 세워져 있던 베티의 차를 보고는 충동적으로 차를 들이받아 절벽 아래로 밀어 버리고 만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와 얼마 후 베티가 나타난다. 부인이 이미 다 알고 있었고, 자신 대신 약속 장소에 나갔다는 것이다. 애인 대신 아내를 죽이고 말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헨리의 삶은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집필 중이던 원고는 마무리가 되지 않아 출판사에 넘길 수가 없고, 자신이 아내를 죽인 사실을 숨겨야 했고, 아내가 사라진 것처럼 일을 꾸며야 했다. 아내가 없어진 마당에 자신의 불륜 사실을 세상에 알릴 수는 없었으므로, 베티의 아기 또한 어떻게 할지 결정을 해야 했다. 게다가 가장 중요한 사실은 그의 소설가 인생은 이제 완전히 끝이 나 버렸다는 것이다. 무려 8년 간이나 소설가로 이름을 알렸고, 무려 20가지 언어로 번역이 되어 팔리는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수많은 문학상의 수상자였던 그인데, 이제 한 글자도 새로 써낼 수가 없으니 앞길이 막막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믿고 싶은 게 있다면 직접 해보는 게 훨씬 낫지. 지어낸 거짓말은 금세 잊어버린다. 기억을 해야 하는데 세부적인 것까지 정확히 기억하려면 신경이 많이 쓰인다. 그리고 거짓말이란 언젠가는 폭탄으로 변하기 때문에 위험하다. 오래된 거짓말은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천천히 녹슬어간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기 때문에 거짓말한 사람은 안심하게 되고 점점 부주의해진다. 그러다 결국 잊어 버린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그 일을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잊어버린 거짓말이 어디 놓여 있는지 모른다면 그 부근 일대를 피하는 것이 좋다. 헨리의 지나온 인생은 그런 위험물로 가득했다. 그래서 그는 절대로 자신의 과거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온통 지뢰밭이니까.

그렇게 거짓 삶을 살던 소설가의 실체가 온 세상에 다 까발려지는 것을 막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이야기는, 그의 과거가 조금씩 드러나면서 더 흥미로워진다. 단순히 아내의 이름 대신 소설가인 것처럼 살았던 게 전부가 아니라, 과거부터 악행을 거듭했던 나쁜 놈이었던 것이다. 한동안 잘난 소설가 행세하며 사느라 잠잠했던 그의 내면이 아내의 죽음을 계기로 다시 깨어나게 되면서, 베스트셀러 작가는 두 얼굴을 가진 하이드가 되어 간다. 아내의 죽음을 감추고, 자신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거짓말에 거짓말을 거듭하는 그의 위태로운 삶은 과거로부터 그를 쫓아다니는 누군가로부터 위협을 받기도 하고, 현실에서 의심을 받게 되어 쫓기기도 하면서 점점 더 엉망진창이 되어 간다.

특히나 흥미로운 인물은 바로 소설가의 아내인 마르타인데, 천재적으로 글을 써내지만 정작 자신은 원고를 전혀 읽지도 않고, 그에 대해 언급하지도 않으며 스스로의 작품을 자랑스러워하지도 않는다. 작품을 발표할 의사도 없었기에 남편이 출판사에 원고를 보낼 때 그의 이름으로 하는 것을 조건으로 걸었을 정도로, 문학에 관심이 없으며 그저 글을 쓰는 것만을 좋아한다. 그리고 초고를 한번도 수정하지 않더라도, 매번 완벽한 글을 써내는 천재 작가이다. 그녀가 그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메세지, “여보, 어떻게 끝날지 알겠어?”는 작품을 읽는 내내 궁금증을 자아내게 만들고, 끝까지 긴장감을 놓치지 않도록 만들어 준다. 사실 나는 그녀가 살아서 남편 앞에 다시 나타나 엄청난 반전을 보여줄 거라고 기대하기도 했을 정도이다. 그만큼 이 작품은 지루할 틈 없이 이야기의 속도를 휘몰아치게 만들어 앉은 자리에서 마지막 페이지까지 달려가게 만들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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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밤의 눈 - 제6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박주영 지음 / 다산책방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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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이상한 스파이 소설을 만났다. 이 책은 스파이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지만, 스파이가 등장하는 첩보물은 아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스파이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스파이는, 오로지 자신의 일에 대한 신뢰와 투철한 자부심으로 움직이는 캐릭터가 아니던가. 애초에 스파이는 자기 자신에 대해 의심하거나 의문을 가질 수가 없다. 그러니 이 작품은 정말 이상한 기반에서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기억을 잃어버리면 무얼 할 수 있지?"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정작 기억을 잃은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을 그녀가 알고 있다는 듯이.

"다시 시작하는 거지. 전부 다. 다시 태어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일지도 모르잖아. 살면서 느꼈던 좌절감이나 실망감 같은 것, 이를테면 불가능에 대해 아무것도 모를 거잖아."

"너는 뭐가 불가능한데?"

"다시는 그때의 나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거. 그때의 나, 참 괜찮았거든."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익명'으로 존재한다

D는 실종된 정신과 의사인 언니를 찾아 나서는 동생이다. 그들 자매는 한 번 본 것, 들은 것, 읽은 것을 거의 모드 기억하는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무정부주의자이자 히피였던 그들의 부모는 아이를 낳고 정부에 등록하는 일을 하지 않았고, 그들이 일곱 살이 되던 해에 부모가 사라지고 어떤 가정에 입양되었고, 언니만 서류상으로 정부에 등록되었다. D는 여전히 이 세상에 기록되지 않은 채 존재하고, 이제 그녀의 언니는 세상에 기록된 채 존재하지 않는다. 그녀는 언니 대신 진료실을 지키다 고민을 상담하러 환자로 온 X와 만나 그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X는 계절이 두 번 바뀌는 동안 잠들어 있었고, 깨어났을 때 십오 년의 세월이 사라져 버렸다. 그는 자신이 무슨 일을 하던 어떤 사람인지 기억하지 못한다. 그의 퇴원 서류에 보호자로서 서명한 이는 Y였다. 누군가 나타나 그에게 그가 조직에 속한 특수요원이며, 스파이라고 말해준다. 그는 전혀 기억나지 않았지만, 그의 상사라고 하는 남자가 건네준 자신의 파일을 읽는다. 자신에 관해 나열된 객관적 사실들을 읽으면서 그는 생각한다. 자신의 머릿속에서 사라졌다고 해서 자신이 한 일이 세상 속에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고. 자신이 했던 모든 선택의 순간들이 모여 지금의 자신을 만들었을 거라고 말이다.

Y는 다큐멘터리 작가 감독의 역할을 하고 있는 그녀는 X의 대학시절 친구 역할을 부여 받았다. 그의 보호감시 업무를 십 개월 동안 진행했고, 그가 깨어난 후 그의 지인으로 가장해 그를 원래 일로 복귀시키는 업무를 했다. 하지만 그 업무는 완벽하게 마무리되지 않아 징계를 받았고, 그 뒤 Z라는 소설가를 관찰하는 새로운 일을 받게 된다. 그녀의 관심사는 오로지 전문 요원으로 승진하는 것이다. B는 중년의 스파이로 그의 직책은 중간 보스이다. 해외에 나간 지 오 년 째인 아내와 아이와 떨어져 홀로 지내는 기러기 아빠이다. 남편에게도, 세상사에도 아무 관심 없이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지내는 아내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늘 일등을 해온 아버지를 존경스러워하는 아이 속에서 그는 평생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Z는 별볼일 없는 서른 다섯의 소설가이다. 스물다섯에 소설가가 되고, 십 년 동안 소설만 썼지만, 특별한 학벌도 없는데다 작품이 팔리지 않는 시시한 작가라 출판사 또한 무관심한 작가이다. 현재는 창작기금을 받아 겨우 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이다.

"정말 알고 싶은 게 뭐야?"

"난 너의 진짜 냄새와 숨결과 땀을 알고 싶어. 그건 진짜겠지."

원한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위안을 주는 환상 속에서 살 수 있다. 거짓된 현실에 속아주기도 하고 본래 의도를 감추려고 그 현실을 이용하기도 하면서. 이 거짓으로 쌓은 도미노가 길고 크고 복잡해질수록 어쩌면 우리는 더더욱 환상을 포기할 수 없을 것이다.

성공적인 환상을 지키기 위해 거짓된 삶을 사는 것, 그것이 바로 스파이의 삶이다.

직장도 없고 애인도 없고, 심지어 할 일도 없어 보이는 무명의 소설가를 감시하는 스파이들. 반사회적이거나 반정부적이거나 반경제적인 구석도 없어, 애초에 무엇 때문에 그가 표적이 되었는지부터가 의문인 남자를 감시하는 그들의 임무 또한 그 실상을 알 수 없어 미심쩍기만 하다. 그렇게 무명의 소설가를 감시하는 스파이들의 이야기와, 그 속에 등장하는 비밀스런 독서클럽의 초대장, 그리고 그 곳에서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길을 '패자의 서'라는 책 속에서 찾으려는 이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각각의 스파이들의 자기 자신에 대해, 세계에 대해 끊임없이 의심하는 방식으로 전개되는 이 작품은 스파이라는 각자의 정체성뿐만 아니라, 한 인간을 지탱하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도 함께 던지고 있다.

'가난은 극복할 수 없는 것이며 그저 그렇게 살다 죽는 건 억울한 일이 아니며 아무것도 바꿀 수 없도록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정해졌다'는 단정적인 작가의 어투는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끊임없이 시니컬하게 내뱉고 있는 세계의 존재 이유와 현대인들의 고루한 삶에 대한 시선을 여실히 보여준다.

우리가 바꾸지 못하는 것이 우리를 바꾸기도 한다. 그리고 우리가 바꿀 수 없는 것과 바꿀 수 있는 것들 가운데 우리의 진실이 있다

현대 사회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조작되고, 감시 당하는 거야 뭐 기존에 다른 작품에서도 만날 수 있었던 설정이었지만, 이렇게 독특한 '스파이'는 난생 처음이었던 터라 신선하고 색다른 느낌이었다. 내가 아닌 나로 살면서도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해 아무런 고민 없이 살아가는 숱한 사람들에게 이 작품 속 인물들은 말한다. 자기 자신을 찾아야 한다고. 어차피 우리 삶의 선택은 이것 아니면 저것이고, 그것들 모두 진실이라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아주 사소한 것부터 정말 위대한 것까지 상상하고, 꿈꿔보라고. 불리할 수는 있어도 불가능한 건 아니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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