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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돌의 6일 ㅣ 버티고 시리즈
제임스 그레이디 지음, 윤철희 옮김 / 오픈하우스 / 2016년 10월
평점 :
절판
이 작품은 시드니 폴락 감독, 로버트 레드포드 주연의 영화 콘돌(Three Days Of The Condor)의 원작 소설이다. 그렇게 영화로 먼저 전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된 이 작품은 첩보 스릴러의 모던 클래식으로 손꼽히는 작품이기도 하다. 70년대의 잘 만들어진 첩보물이라는 점 외에도 영화가 인상적이었던 이유는 바로 콘돌이라는 캐릭터 때문이었다. 제대로 된 현장 훈련도 받은 적이 없는, 총이라고는 사냥할 때 딱 한 번 쏴본 게 전부인, 그런 첩보물의 주인공은 난생 처음이었으니까. 그렇게 우리는 대부분의 첩보물에 등장하는 히어로들과는 너무도 다른, 그 어디서도 만난 적 없는 이상한 주인공을 만나게 된다.
말콤은 권총 사격을 평생 딱 한 번 해봤다. 친구가 가진 22구경 모델이었다. 달아나는 다람쥐를 향해 쏜 다섯 발은 모두 빗나갔다. 그는 미시즈 러셀의 권총을 허리 높이에서 발사했다. 자신이 방아쇠를 당겼다는 걸 그가 인지하기도 전에 귀청이 터질 듯한 총소리가 골목에 메아리쳤다.
말콤 미국문학사협회에서 근무하는 CIA 조사원이다. 그가 하는 일은 문학 분야에 기록된 모든 스파이 활동과 관련 행위들을 파악하는 것이다. 그는 스파이 스릴러와 살인 미스터리 물을 읽고, 미스터리와 아수라장을 다룬 단행본 수천 권에 등장하는 모든 행동과 상황들을 대단히 상세하게 기록하고 분석한다. 그렇게 모든 서적의 플롯과 거기에 사용된 방법들을 요약하고, 본부로부터 위생 처리된 일련의 보고서를 날마다 수령하는데, 그 보고서에는 실제 사건들을 묘사한 요약 본이 담겨 있고, 그것을 토대로 사실과 픽션을 비교하는 작업이 진행된다. 둘 사이에 중요한 상관관계가 드러날 경우, 심층 조사에 착수하고, 상층에 있는 기밀부서에 검토용으로 제출되는 것이다. 소설이 단순히 작가의 상상력으로 얻어낸 결과물이 아니라, 어떤 사상적 배경으로 인해 쓰여졌다고 믿는 음모론이야 말로 이 작품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 중의 하나이다.
재미있는 건 당시 스물 셋이던 작가 지망생 제임스 그레이디가 이런 설정을 구축할 때만 해도, 이것이 실제로 존재하는 직업이 아니었다는 거다. 게다가 당시만 해도 CIA를 다른 책은 한 권도 없었다고 한다. 굉장하지 않은가. 세계에서 출판된 모든 모험물들과 소설들을 읽고, 플롯들을 (추잡한 수법들과 암호들을) 컴퓨터에 입력하면 그것으로 CIA의 실제 계획과 작전들과 비교하면서 정보 누설자들을 찾아 낸다니 말이다. 그리고 실제로 KGB에 그런 업무를 하는 비밀 사업부가 생긴다. 바로 콘돌에서 영감을 얻어서, 소설가 지망생이 지어낸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 2,000명이나 되는 인력이 투입된 것이다. 이 이야기는 재출간을 하면서 작가의 고백이라는 부분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는데, 작품의 탄생 배경과 그 외 수많은 부분들을 이야기하고 있는 이 부분은 무려 30 페이지가 넘는다. 작가의 말이 이렇게 길게 수록되어 있는 것 또한 난생 처음인데, 소설 본문 만큼이나 흥미진진하다.
말콤은 신중하게 계산한 위험을 감수했다. 가장 눈에 띄는 은폐 장소가 가장 안전한 곳인 경우가 잦다는 에드거 앨런 포의 '도둑맞은 편지' 원칙을 활용한 그와 웬디는 의사당행 버스를 탔다. 그들은 협회에서 채 400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이스트 캐피톨 스트리트에 있는 여행자용 숙소를 임대했다. 우중충한 호스텔의 여주인은 오하이오에서 온 신혼부부를 환영했다.
여느 때와 다름 없는 평범했던 어느 날, 말콤의 동료 중 하나가 과거의 기록들을 조사하던 중에 잃어버린 책 두 상자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말콤을 비롯한 다른 이들은 그가 발견한 것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지만, 그걸로 인해 그 사실을 알게 된 모든 이들이 전원 학살당한다. 마침 점심으로 샌드위치를 주문하러 나왔던 말콤만 살아 남게 되고, CIA 본부에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한다. 요원들과 접선하기로 한 곳에 나간 말콤은 그 중 한 명이 오늘 아침 협회에 있었던 이와 동일 인물이라는 걸 알아보고, 뭔가 잘못됐다는 걸 깨닫는다. 그에게서 도망치는 와중에 말콤은 생애 두 번째로 권총 사격을 하게 되고, 그것은 남자의 왼쪽 허벅지를 관통하며 박살을 낸다. 그렇게 아무도 믿을 수 없어진 상황에서 그들로부터 도망쳐야 하는 코드네임 콘돌이 벌이는 6일 동안의 활약이 펼쳐진다.
미국문학사협회의 직원들을 모두 사살한 CIA 내부의 이중 첩자와 그 모든 사태를 파악하려는 CIA 본부의 주요 인물들과 그들과 긴밀해 협조해 자신의 목숨을 지키고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지 알아내려 하는 콘돌의 이야기는 그가 초짜 현장 요원이라는 데서 더 긴장감을 부여한다. 물론 책상에 앉아 문서만 분석하던 그가 숨 가쁜 추격 전에서 너무 쉽게 달아나고, 적들을 물리친다는 허술함이 있긴 하지만, 그마저도 비현실적인 히어로들에 비해 인간적인 주인공이 가진 매력으로 인해 상쇄가 될 만큼 흥미롭다. 분석관에 불과한 그가 복잡하고 위험한 포위망을 얼마나 잘 피해 다니는지 사실 너무 이상하지만, 실제 세상에는 그보다 더 이상하고 어이없는 일이 더 많이 벌어지지 않은가.
1974년 출간되었던 <콘돌의 6일>과 1975년 <콘돌의 그림자> 이후 제임스 그레이디는 다른 작품들을 계속 써왔지만, 지난 2014년 <콘돌의 다음 날>, 그리고 2015년에 <콘돌의 마지막 날들>을 출간하며 콘돌을 다시 재 탄생시켰다. "나는 이런 내용의 글을 읽는 사람이지, 그걸 실행하는 사람이 아니란 말입니다." 라며 자신이 처한 상황을 부정하던 그가 그럼에도 꽤 훌륭하게 그 모든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 남았지만, "요점만 얘기하면, 자네는 썩 훌륭한 현장 요원은 아냐." 라는 평가를 받았던 첫 번째 작품 이후, 또 어떤 활약을 보여주며 현장 요원으로서의 자질을 드러내게 될지 매우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