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이상한 스파이 소설을 만났다. 이 책은 스파이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지만, 스파이가 등장하는 첩보물은 아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스파이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스파이는, 오로지 자신의 일에 대한 신뢰와 투철한 자부심으로 움직이는 캐릭터가 아니던가. 애초에 스파이는 자기 자신에 대해 의심하거나 의문을 가질 수가 없다. 그러니 이 작품은 정말 이상한 기반에서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기억을 잃어버리면 무얼 할 수 있지?"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정작 기억을 잃은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을 그녀가 알고 있다는 듯이.
"다시 시작하는 거지. 전부 다. 다시 태어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일지도 모르잖아. 살면서 느꼈던 좌절감이나 실망감 같은 것, 이를테면 불가능에 대해 아무것도 모를 거잖아."
"너는 뭐가 불가능한데?"
"다시는 그때의 나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거. 그때의 나, 참 괜찮았거든."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익명'으로 존재한다.
D는 실종된 정신과 의사인 언니를 찾아 나서는 동생이다. 그들 자매는 한 번 본 것, 들은 것, 읽은 것을 거의 모드 기억하는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무정부주의자이자 히피였던 그들의 부모는 아이를 낳고 정부에 등록하는 일을 하지 않았고, 그들이 일곱 살이 되던 해에 부모가 사라지고 어떤 가정에 입양되었고, 언니만 서류상으로 정부에 등록되었다. D는 여전히 이 세상에 기록되지 않은 채 존재하고, 이제 그녀의 언니는 세상에 기록된 채 존재하지 않는다. 그녀는 언니 대신 진료실을 지키다 고민을 상담하러 환자로 온 X와 만나 그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X는 계절이 두 번 바뀌는 동안 잠들어 있었고, 깨어났을 때 십오 년의 세월이 사라져 버렸다. 그는 자신이 무슨 일을 하던 어떤 사람인지 기억하지 못한다. 그의 퇴원 서류에 보호자로서 서명한 이는 Y였다. 누군가 나타나 그에게 그가 조직에 속한 특수요원이며, 스파이라고 말해준다. 그는 전혀 기억나지 않았지만, 그의 상사라고 하는 남자가 건네준 자신의 파일을 읽는다. 자신에 관해 나열된 객관적 사실들을 읽으면서 그는 생각한다. 자신의 머릿속에서 사라졌다고 해서 자신이 한 일이 세상 속에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고. 자신이 했던 모든 선택의 순간들이 모여 지금의 자신을 만들었을 거라고 말이다.
Y는 다큐멘터리 작가 감독의 역할을 하고 있는 그녀는 X의 대학시절 친구 역할을 부여 받았다. 그의 보호감시 업무를 십 개월 동안 진행했고, 그가 깨어난 후 그의 지인으로 가장해 그를 원래 일로 복귀시키는 업무를 했다. 하지만 그 업무는 완벽하게 마무리되지 않아 징계를 받았고, 그 뒤 Z라는 소설가를 관찰하는 새로운 일을 받게 된다. 그녀의 관심사는 오로지 전문 요원으로 승진하는 것이다. B는 중년의 스파이로 그의 직책은 중간 보스이다. 해외에 나간 지 오 년 째인 아내와 아이와 떨어져 홀로 지내는 기러기 아빠이다. 남편에게도, 세상사에도 아무 관심 없이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지내는 아내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늘 일등을 해온 아버지를 존경스러워하는 아이 속에서 그는 평생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Z는 별볼일 없는 서른 다섯의 소설가이다. 스물다섯에 소설가가 되고, 십 년 동안 소설만 썼지만, 특별한 학벌도 없는데다 작품이 팔리지 않는 시시한 작가라 출판사 또한 무관심한 작가이다. 현재는 창작기금을 받아 겨우 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이다.
"정말 알고 싶은 게 뭐야?"
"난 너의 진짜 냄새와 숨결과 땀을 알고 싶어. 그건 진짜겠지."
원한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위안을 주는 환상 속에서 살 수 있다. 거짓된 현실에 속아주기도 하고 본래 의도를 감추려고 그 현실을 이용하기도 하면서. 이 거짓으로 쌓은 도미노가 길고 크고 복잡해질수록 어쩌면 우리는 더더욱 환상을 포기할 수 없을 것이다.
성공적인 환상을 지키기 위해 거짓된 삶을 사는 것, 그것이 바로 스파이의 삶이다.
직장도 없고 애인도 없고, 심지어 할 일도 없어 보이는 무명의 소설가를 감시하는 스파이들. 반사회적이거나 반정부적이거나 반경제적인 구석도 없어, 애초에 무엇 때문에 그가 표적이 되었는지부터가 의문인 남자를 감시하는 그들의 임무 또한 그 실상을 알 수 없어 미심쩍기만 하다. 그렇게 무명의 소설가를 감시하는 스파이들의 이야기와, 그 속에 등장하는 비밀스런 독서클럽의 초대장, 그리고 그 곳에서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길을 '패자의 서'라는 책 속에서 찾으려는 이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각각의 스파이들의 자기 자신에 대해, 세계에 대해 끊임없이 의심하는 방식으로 전개되는 이 작품은 스파이라는 각자의 정체성뿐만 아니라, 한 인간을 지탱하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도 함께 던지고 있다.
'가난은 극복할 수 없는 것이며 그저 그렇게 살다 죽는 건 억울한 일이 아니며 아무것도 바꿀 수 없도록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정해졌다'는 단정적인 작가의 어투는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끊임없이 시니컬하게 내뱉고 있는 세계의 존재 이유와 현대인들의 고루한 삶에 대한 시선을 여실히 보여준다.
우리가 바꾸지 못하는 것이 우리를 바꾸기도 한다. 그리고 우리가 바꿀 수 없는 것과 바꿀 수 있는 것들 가운데 우리의 진실이 있다.
현대 사회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조작되고, 감시 당하는 거야 뭐 기존에 다른 작품에서도 만날 수 있었던 설정이었지만, 이렇게 독특한 '스파이'는 난생 처음이었던 터라 신선하고 색다른 느낌이었다. 내가 아닌 나로 살면서도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해 아무런 고민 없이 살아가는 숱한 사람들에게 이 작품 속 인물들은 말한다. 자기 자신을 찾아야 한다고. 어차피 우리 삶의 선택은 이것 아니면 저것이고, 그것들 모두 진실이라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아주 사소한 것부터 정말 위대한 것까지 상상하고, 꿈꿔보라고. 불리할 수는 있어도 불가능한 건 아니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