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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 하이든
사샤 아랑고 지음, 김진아 옮김 / 북폴리오 / 2016년 6월
평점 :
소설가를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는 언제나 매혹적이다. 게다가 비밀과 거짓말로 가득 찬 삶을 살고 있는 소설가라면 더할 나위 없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한술 더 떠 작가도 아니면서 작가라고 뻥치고 남의 인생을 훔쳐서 살고 있는 소설가가 등장한다. 그러니 재미가 없을 래야 없을 수가 없지 않겠는가.
원칙적으로 서평을 읽지 않는 마르타와 달리 헨리는 모든 평을 한 자 한 자 다 읽었다. 특히 마음에 드는 칭찬에는 자를 대고 줄을 그었고 기사를 오려서 스크랩북도 만들었다. '문장 하나하나가 요새와 같다.' 헨리는 이 평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책 표지 접히는 곳에 굵은 글씨로 인쇄돼 있었는데 큰 신문사에서 문학 카럼을 쓰는 페펜코퍼라는 사람이 쓴 것이었다. 헨리는 '그렇지!' 단순하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문장. 내가 써도 이렇게 썼을 거야'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애석하게도 그건 그에게서 나온 문장이 아니었고, 그 무엇도 그에게서 나온 것은 없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성공한 소설가 헨리는 자신의 작품 중 단 한 문장도 쓰지 않았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사실 그의 모든 소설은 그의 아내가 쓴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세상은 이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걸 아는 사람은 그 자신과 아내뿐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니 그런 아내를 위해 목숨까지 바쳐도 아깝지 않을 만큼 지극정성을 쏟아 부어도 모자랄 텐데, 이 남자 자신의 담당 편집자인 베티와 바람을 피우는 중이다. 거기다 베티는 임신까지 한 상태이다. 그 소식을 듣고 나서야 아내에 대한 죄책감이 들기 시작해 애인과 헤어지기로 결심하게 된다. 그런데 약속 장소에 세워져 있던 베티의 차를 보고는 충동적으로 차를 들이받아 절벽 아래로 밀어 버리고 만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와 얼마 후 베티가 나타난다. 부인이 이미 다 알고 있었고, 자신 대신 약속 장소에 나갔다는 것이다. 애인 대신 아내를 죽이고 말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헨리의 삶은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집필 중이던 원고는 마무리가 되지 않아 출판사에 넘길 수가 없고, 자신이 아내를 죽인 사실을 숨겨야 했고, 아내가 사라진 것처럼 일을 꾸며야 했다. 아내가 없어진 마당에 자신의 불륜 사실을 세상에 알릴 수는 없었으므로, 베티의 아기 또한 어떻게 할지 결정을 해야 했다. 게다가 가장 중요한 사실은 그의 소설가 인생은 이제 완전히 끝이 나 버렸다는 것이다. 무려 8년 간이나 소설가로 이름을 알렸고, 무려 20가지 언어로 번역이 되어 팔리는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수많은 문학상의 수상자였던 그인데, 이제 한 글자도 새로 써낼 수가 없으니 앞길이 막막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믿고 싶은 게 있다면 직접 해보는 게 훨씬 낫지. 지어낸 거짓말은 금세 잊어버린다. 기억을 해야 하는데 세부적인 것까지 정확히 기억하려면 신경이 많이 쓰인다. 그리고 거짓말이란 언젠가는 폭탄으로 변하기 때문에 위험하다. 오래된 거짓말은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천천히 녹슬어간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기 때문에 거짓말한 사람은 안심하게 되고 점점 부주의해진다. 그러다 결국 잊어 버린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그 일을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잊어버린 거짓말이 어디 놓여 있는지 모른다면 그 부근 일대를 피하는 것이 좋다. 헨리의 지나온 인생은 그런 위험물로 가득했다. 그래서 그는 절대로 자신의 과거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온통 지뢰밭이니까.
그렇게 거짓 삶을 살던 소설가의 실체가 온 세상에 다 까발려지는 것을 막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이야기는, 그의 과거가 조금씩 드러나면서 더 흥미로워진다. 단순히 아내의 이름 대신 소설가인 것처럼 살았던 게 전부가 아니라, 과거부터 악행을 거듭했던 나쁜 놈이었던 것이다. 한동안 잘난 소설가 행세하며 사느라 잠잠했던 그의 내면이 아내의 죽음을 계기로 다시 깨어나게 되면서, 베스트셀러 작가는 두 얼굴을 가진 하이드가 되어 간다. 아내의 죽음을 감추고, 자신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거짓말에 거짓말을 거듭하는 그의 위태로운 삶은 과거로부터 그를 쫓아다니는 누군가로부터 위협을 받기도 하고, 현실에서 의심을 받게 되어 쫓기기도 하면서 점점 더 엉망진창이 되어 간다.
특히나 흥미로운 인물은 바로 소설가의 아내인 마르타인데, 천재적으로 글을 써내지만 정작 자신은 원고를 전혀 읽지도 않고, 그에 대해 언급하지도 않으며 스스로의 작품을 자랑스러워하지도 않는다. 작품을 발표할 의사도 없었기에 남편이 출판사에 원고를 보낼 때 그의 이름으로 하는 것을 조건으로 걸었을 정도로, 문학에 관심이 없으며 그저 글을 쓰는 것만을 좋아한다. 그리고 초고를 한번도 수정하지 않더라도, 매번 완벽한 글을 써내는 천재 작가이다. 그녀가 그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메세지, “여보, 어떻게 끝날지 알겠어?”는 작품을 읽는 내내 궁금증을 자아내게 만들고, 끝까지 긴장감을 놓치지 않도록 만들어 준다. 사실 나는 그녀가 살아서 남편 앞에 다시 나타나 엄청난 반전을 보여줄 거라고 기대하기도 했을 정도이다. 그만큼 이 작품은 지루할 틈 없이 이야기의 속도를 휘몰아치게 만들어 앉은 자리에서 마지막 페이지까지 달려가게 만들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