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켄슈타인 에디터스 컬렉션 15
메리 셸리 / 문예출판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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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석은 이제는 살인자의 손길을 느끼지 않아. 잔디가 그 아이의 부드러운 몸을 덮으면, 녀석은 더는 고통을 느끼지 않을 거야. 그러니 녀석은 더는 불쌍한 존재가 아니야. 산 사람들에겐 흘러가는 시간만이 위로가 될 거야. ‘죽음은 악이 아니다’, ‘인간의 마음은 사랑하는 대상의 영원한 부재에도 절망감을 초월한다’ 따위의 스토아철학자들의 격언을 굳이 꺼낼 필요도 없겠지. 카토도 죽은 형제의 시신 앞에서 흐느끼지 않았나.        p.128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은 이미 다양한 버전으로 소장하고 있고, 여러 번역본으로 읽었지만, 이번에 나온 문예출판사의 '에디터스 컬렉션' 버전은 정말 소장하고 싶은 책이다. DC 코믹스, 마블 코믹스의 전설적인 일러스트레이터 버니 라이트슨이 7년에 걸쳐 완성한 독창적이고 아름다운 펜화 작품 45점을 더한 아름다운 버전이기 때문이다. 정말 디테일하고 섬세한 묘사가 일품인 삽화들은 원작의 깊이를 더해주고, 장면들을 더욱 생생하게 느낄 수 있도록 해준다.

 

 

특히나 이번 버전이 특별한 이유는 작가의 의도가 더 잘 보존된 1818년 초판본을 우리말로 옮겼기 때문이다. <프랑켄슈타인>은 1818년에 익명으로 출간된 초판과 메리 셸리가 초판을 수정해 1831년에 출간한 개정판, 두 가지 판본이 있는데, 여성 작가의 창작 활동이 자유롭지 않았던 시대였기에 익명으로 출간한 버전이 더 날카롭고 대담하다고 평가받는다고 하니 말이다. 또한 작품의 착상과 집필 과정, 작가의 의도가 드러나는 ‘스탠더드 노블스 판 저자 서문’과 역자의 ‘작품 해설’을 수록해 작품의 이해를 도왔다. 

 

 

그 놀라운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나는 이상한 느낌에 사로잡혔소. 그토록 강하고 고결하고 훌륭한 인간이 그렇게 사악하고 비열하단 말인가? 인간은 어느 때는 순전히 악의 근원에서 태어난 자식 같기도 하고 어느 때는 고귀하고 신과 같은 존재로 보이기도 했소. 위대하고 고결한 인간이 되는 것은 감각이 예민한 존재에게 있을 수 있는 최고의 영예 같았소. 많은 역사적 기록에서 볼 수 있듯이 비열하고 사악한 인간이 되는 것은 가장 비천한 타락, 눈먼 두더지나 나약한 벌레보다도 더 비참한 지경의 인간처럼 보였소.           p.228

 

<프랑켄슈타인>은 영화로 여러 번 각색되었을 뿐 아니라 이후에 등장한 여러 과학소설과 공포영화에 큰 영향을 끼친, 최초의 과학소설이다. 극중 프랑켄슈타인은 ‘괴물’을 창조해냈고, 프랑켄슈타인을 창조한 메리 셸리는 그야말로 괴물 같은 소설을 세상에 내놓은 것이다. 프랑켄슈타인은 이후에 등장한 거의 모든 미치거나 사악한 과학자 캐릭터의 전형이 되었으니 말이다. 1818년 메리 셸리가 맨 처음 이 작품을 익명으로 발표했을 때 그녀의 나이는 불과 스물한 살이었다. 그녀는 '인간의 본성에 내재된 묘한 두려움을 건드려 오싹한 공포를 일깨우는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다. '무서워서 주위를 둘러볼 수도 없게 만드는, 읽으면서 피가 얼어붙고 가슴이 두근대는 그런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던 그녀의 의도대로 놀라운 작품이 탄생했고, <프랑켄슈타인>은 1931년에 영화로 제작되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프랑켄슈타인의 피조물이 처음부터 악한 존재였던 것은 아니다. 보기 흉한 모습 때문에, 사람들과 '다르다'는 이유 때문에 인간들로부터 외면 당하고, 핍박 받으며 고립되어 살게 만든 사회가 그를 진짜 괴물로 만들어 낸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괴물이 저지른 행동들을 정당화할 수는 없겠지만, 그의 분노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는 있을 만하니 말이다. 비록 고통만 더해 가는 삶이라도, 산다는 것이 괴물에게도 소중한 일이었다. 그러니 우리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 애초에 선하고 따뜻한 존재였으나, 절망으로 인해 악마가 되고 만 존재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한다. 생명 과학과 생명 복제 기술이 발달한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프랑켄슈타인은 단순히 공포를 불러오는 괴물로만 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니 말이다.

 

고전이 왜 끊임없이 다시 책으로 출간되고, 왜 여러 매체를 통해서 계속 변주되는 것인지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프랑켄슈타인>이 아닐까 생각한다. 워낙 유명한 작품이라 원작을 읽지 않았더라도 친숙한 캐릭터와 스토리이지만, 이번 기회야말로 원작 소설을 제대로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메리 셸리의 소설과 버니 라이트슨의 아름다운 삽화가 만나 그 어떤 영화보다도 흥미진진하고, 그 어떤 책보다도 세련되고 우아하며, 그 어떤 음악, 뮤지컬 등으로도 표현해내지 못할 감동을 안겨주는 버전이 탄생했으니 말이다. <프랑켄슈타인>이 궁금했다면, 꼭 이번 에디터스 컬렉션 버전으로 만나보길 적극 추천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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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문구점에 갑니다 - 꼭 가야 하는 도쿄 문구점 80곳
하야테노 고지 지음, 김다미 옮김 / 비채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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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여행일기 작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 그리고 문구에 진심인 문구 덕후인 하야테노 고지가 도쿄의 문구점 80곳을 소개하는 탐방기이다. 나 역시 예쁜 문구들만 보면 일단 사고 보는 편이라 너무 재미있게 읽었다. 내 서재 곳곳에 연필, 지우개, 노트, 포스트잇, 마스킹테이프, 다이어리 등등 아기자기한 문구들이 가득한데, 한정판이 붙거나 책을 사야 받을 수 있는 굿즈들도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책만큼이나 문구류에 관심이 많아서, 이 책은 출간 전부터 기대하며 기다렸었다.

 

 

도쿄의 숨겨진 문구점들을 순례하는 것도 재미있지만, 무엇보다 포근한 손 그림으로 이 모든 것들을 소개하고 있는 것이 이 책의 장점이다. 위치를 알려주는 지도부터, 각 문구점의 풍경, 그리고 각종 잡화와 문구류까지 디테일한 일러스트로 재탄생해서 페이지를 넘기면서 그림을 보는 것만으로도 흐뭇해진다.

 

문구 마니아 일러스트레이터가 사심을 듬뿍 담아 그렸기에 애정이 느껴지는데다, 사진과는 다르게 손 그림이 주는 아기자기한 감성이 더해져서 개성 넘치고, 매력적인 문구점 탐방기가 만들어졌다.

 

 

백화점, 브랜드의 로드숍 등으로 버라이어티한 긴자의 문구점부터 오피스빌딩이 늘어선 도쿄 역 주변의 문구점, 미술, 사진, 패션 등을 배울 수 있는 학교가 많은 신주쿠 역의 문구점, 기술자들이 모여드는 '제작의 거리'로 알려진 구라마에의 문구점, 젊은이들이 북적거리는 기치조지의 다양한 문구점 등이 소개되어 있다.

 

도쿄의 문구점 순례로 여행 스케줄을 짜도 좋을 만큼 각각의 문구점이 모두 특색이 있다. 작가가 애용하는 원고지를 파는 가게, 명품 종이들이 가득한 곳, 이탈리아 왕실에 쓰이는 제품을 취급하는 곳도 있고, 나만의 노트를 만드는 곳, 수동식 활판 인쇄기를 이용해 자기 작품으로 엽서를 만드는 곳 등 직접 체험을 해볼 수 있는 곳들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유니크한 디자인의 문구와 잡화가 가득한 고베 감성 문구점 노이에에 한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래 모양 페이퍼나이프, 생선 볼펜, 안경 모양 미니 가위 등 재미있는 문구와 잡화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책갈피, 스티커, 마스킹 테이프, 트레이, 칼과 펜, 블랙윙 연필, 노트, 포스트잇플래그, 문진 등 아끼는 물건들로 가득 찬 내 책상을 좋아한다. 가끔 마음 잡고 정리를 싹 해도 며칠만 지나면 원상태로 복구가 되어 버려서 이제는 각종 문구류로 복닥거리는 그대로 놔두는데, 그렇게 만들어진 나만의 우주 속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혹자는 '예쁜 쓰레기'라고도 하는 쓸데없는 것들의 가치를 믿는다. 언젠가 <아무튼, 문구>라는 책에서 '생필품들은 삶을 이어나가게 해주지만 삶을 풍성하게 하는 것은 쓸모 없는 물건들이다'라는 문장에 밑줄을 좍 그었던 적이 있다.

 

이 책은 문구점을 테마로 한 여행 가이드로도 훌륭한 역할을 해준다. 상세 가게 정보를 담은 QR코드를 이용한다면 도쿄 거리에서도 간편하게 문구점 정보를 확인할 수 있으니, 도쿄에 가게 된다면 꼭 챙겨가면 좋을 것 같다. 게다가 판형과 두께도 딱 적당해서 짐이 늘어날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결코 실용성만으로 돌아가지 않는, 꼭 필요에 의해서만 구매하는 것이 아닌, 쓸모는 없지만 보는 것만으로 내 기분을 즐겁게 만들어주는, 문구의 세계를 사랑한다면 이 특별한 문구점 탐방기를 놓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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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로이 야스오의 캐릭터 얼굴 & 바스트업 작화 기술 그리다
무로이 야스오 지음, 김재훈 옮김 / 영진.com(영진닷컴)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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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루토>, <에반게리온 신극장판 : 파, Q>, <전뇌 코일> 등의 작품에 참여한 최고의 애니메이터 '무로이 야스오'의 캐릭터 얼굴 & 바스트업 작화 기술을 한 권에 담았다. 전체, 중간, 세부의 가장 쉬운 3단계로 완성하는 애니메이션 작화법이다. '전체, 중간, 세부'의 순서로 '배치, 크기, 각도'에 주의하면서 그리면 자연스럽게 얼굴의 형태가 된다.

 

 

‘전체’는 그리고 싶은 것을 선으로 나누고, ‘중간’은 그것을 면으로 나누는 과정이다. 이는 각각 그리고 싶은 것을 바른 위치에 배치하는 데 필요한 단계이다. 이어지는 '세부'는 배치가 끝난 뒤에 선을 정리하고 완성하는 마무리 단계이다.

 

저자에 따르면 잘 그릴 수 있고 없는 데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 느낌만으로 우연히 잘 그려지는 일은 없다는 거다. 이 책을 통해 '전체, 중간, 세부'로 확실하게 그림을 잘 그릴 수 있는 순서를 경험해본다면, 어떤 그림을 그릴 때에도 적용되는 기본을 익힐 수 있을 것이다.

 

 

그림 습득에는 재능 이전에 기술과 지식이 필요하다. 스포츠와 음악의 세계와 마찬가지로 기술 습득에 필요한 룰과 순서를 익힐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재능은 기술과 지식의 습득 그리고 경험치로 꽃 피울 수 있으므로, 그림의 수준과 관계없이 처음 시작하는 이들도 이 책을 따라하는 것만으로 그림을 그리는 데 필요한 기초를 쌓을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이 '세부'에 많은 시간을 쓰기 쉬운데, '전체'를 먼저 파악하는 것이 원하는 이미지의 그림을 그리는 지름길이라는 말이 인상적이다. '전체'는 건축과 마찬가지로 그림의 설계도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프레임 속의 무엇을 어디에 배치하는 것까지 생각하고 전체를 그리는 요령을 배운 뒤, 중간, 세부 순서대로 그리는 방법에 대해 디테일하게 알려 준다.

 

어떤 그림이든 방침과 구성 등의 밑그림 작업이 완성도를 거의 좌우한다고 한다. 전체를 꼼꼼하게 파악하고 준비하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다. 캐릭터 그리기, 인체 드로잉, 만화 작법이 궁금하다면 이 책 한 권으로 충분할 것 같다.

 

 

무로이 야스오는 그림을 다소 늦게 시작한 편인데, 18살 때부터 약 20년간 그림을 그려 오고 있다. 그는 그림을 잘 그릴 수 있을지 아닐지는 재능과 센스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며, '그림은 기술'이라고 말해왔다. 제대로 그림 그리는 방법을 배운다면, 누구라도 기본 이상의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말이다.

 

이 책은 애니메이션 작화법이 궁금했던 이들에게도 훌륭한 만화 작법서이자 드로잉 책이 되어줄 것이다. 정면 얼굴의 기본부터 시작해 옆얼굴, 반측면 얼굴, 로우앵글, 하이앵글 등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고, 눈, 코, 입, 코 등 세부사항을 거쳐 표정과 연기, 연출도 차근차근 알려준다. 좋아하는 캐릭터의 얼굴 형태를 그려보고 싶었다면, 표현과 움직임의 변화까지 더해 인체드로잉을 배우고 싶다면 이 책을 만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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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 없는 여자와 도시 비비언 고닉 선집 2
비비언 고닉 지음, 박경선 옮김 / 글항아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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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가 지난다. 그리고 또 하루. 레너드한테 전화해야지, 다짐해보지만 몇 번이고 손을 전화기로 뻗으려다가도 그만두고 만다. 물론 레너드도 똑같은 심정이겠지, 전화가 안 오는 걸 보면. 행동이 되지 못한 충동은 차곡차곡 쌓여 신경을 망가트리고, 망가진 신경은 굳어져 권태가 된다. 복잡한 감정과 망가진 신경, 그리고 마비된 의지까지 한 바퀴를 다 돌고 나면, 그제야 만나고 싶은 마음이 다시 초조하게 올라오고 전화기를 향해 뻗는 손은 마침내 동작을 완료한다.      p.10

 

비비언 고닉은 버지니아 울프에 비견되는 문학비평, 특히 회고록의 새 장을 열었다고 평가될 만큼 자전적 글쓰기 분야에서 독보적인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 작가이다. '비비언 고닉 선집' 첫 번째 작품이었던 <사나운 애착>은 중년의 작가가 노년의 어머니와 뉴욕 거리를 거닐며 담소하고, 회상하고, 언쟁하는 이야기가 거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닌데, 삶에 대한 통찰력과 뛰어난 문장들로 인해 매 순간 심금을 울렸다. 그리고 거의 일 년을 기다려 두 번째 책 <짝없는 여자와 도시>를 만났다. 고닉이 <사나운 애착>을 펴내고 30여 년 만에 쓴 작품으로 평생을 살아온 뉴욕을 배경으로 사랑과 우정에 대해 탐색하고 있다.

 

20년이 넘도록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는 게이 친구와의 에피소드들은 특히나 흥미롭다. 요즘 사는 게 어떠냐는 질문에 대해 닭뼈가 목구멍에 딱 걸린 거 같다는 대답을 하고, 나는 사는 게 적성에 안 맞아, 라는 말에 누군들 맞겠어? 라고 대꾸하는 식의 담백하고, 시크한 관계였으니 말이다. 사랑을 성배의 자리에 올려둔 엄마와는 달리 고닉은 서른다섯이 되기 전에 결혼도 두 번, 이혼도 두 번 경험했다. 그리고 예순이 된 지금, 짝 없는 여자가 되어 자신을 있는 그대로, 완전하고 충만하게 느낀다. 로맨틱한 사랑의 상실 혹은 종말로 인해 굳어버린 심장이 문학비평가이자 작가로서 고닉의 문장들을 더욱 깊어지게 만들었다.

 

 

 

이런 식의 몰입은 구체적인 일상에 추상적 사고가 맞물릴 때의 짜릿한 흥분을 양분 삼아 날마다 달마다 해마다 우리 안에서 깊어져만 갔다. 우리는 함께하는 대화 속에서 일상적인 것들에 부과된 맥락의 힘을 느꼈다. 이론에 접목되는 생활의 요소들, 그러니까 버스에서 우연히 마주칠 확률, 최근에 읽기 시작했거나 다 읽은 책, 엉망이 돼버린 저녁 파티 따위를 파고들수록 세계가 점점 더 확장되는 기분이었다. 거실에 앉아 있거나 식당에서 밥을 먹거나 거리를 걷거나 하는 나날의 일상에 서사적 동력이 더해져 관점을 형성해가는 원료가 되었다. 집을 나서지 않고도 세상만사를 꿰뚫어볼 수 있게 된 것만 같았다.        p.83~84

 

현대 사회에서, 특히 도시에서의 사람들간에 만들어지는 관계와 우정에 관한 글들이 인상적인 부분이 많았다. 전작에서도 자주 언급되었던 고닉이 어린 시절 살았던 공동주택 이웃들의 우정, 그저 말없이 필요한 순간마다 알아주는 마음들이 사라진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으니 말이다. 지금은 '친구란 자기 내면의 선량함에 말을 건네는 선량한 존재'라는 개념 자체가 낯설게 느껴지는 세상이다. 우정이라는 결속, 솔직한 자아, 문화적인 착각 등 익명으로 집결한 도시 거주자들을 향한 고닉의 시선은 누구라도 공감할 만한 것들이었다.

 

고닉의 글을 좋아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막연하게 생각했던 것들, 희미하게 짐작했던 것들을 구체화시켜서 바로 눈 앞에 들이미는 듯한 느낌을 안겨준다는 점인데, 덕분에 언제나 그리 두껍지 않은 페이지가 인덱스와 밑줄로 가득해지곤 한다. 글항아리에서 출간되는 비비언 고닉 선집은 <끝나지 않은 일: 만성 재독서가의 노트>로 이어질 예정이다. 특히나 이 책은 '다시 읽기'를 통해서 지난달 중요했던 책들의 기억을 재구성하고, 당연하던 것들을 질문으로 바꾸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고 해서 기대 중이다. 고닉이 '만성재독서가'를 자처한다고 하니, 그 책의 목록들과 사유가 더욱 궁금해진다.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에서 오는 친밀함과 날카로운 사유에서 느껴지는 보편성으로 버무려진 고닉의 놀라운 작품을 만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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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3-02-24 19: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도 글이지만 이 깔맞춤 ㅎㅎ
👍

피오나 2023-02-24 22:09   좋아요 1 | URL
ㅋㅋㅋ 깔맞춤을 알아봐주시다니 감사!!
 
샌드 카운티 연감 - 자연은 스스로 조화롭고 이제 우리의 결정만 남았다
알도 레오폴드 지음, 이동신 옮김 / 이다북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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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는 이제 색을 정해서 이슬로 분사했다. 올방개 잔디는 예전보다 더 푸르고, 이제 물꽈리아재비와 분홍색 용머리와 벗풀의 우윳빛 꽃으로 가득하다. 여기저기에서 진홍로벨리아가 하늘을 향해 붉은색 창을 뻗는다. 강둑 머리에는 자주색 수레국화와 옅은 분홍색 등골나물이 버드나무 벽을 배경으로 똑바로 서 있다. 그리고 단 한 번만 아름다울 수 있는 곳을 찾을 때 당연히 그래야 하듯 조용하고 겸손하게 왔다면, 당신은 무릎까지 오는 기쁨의 정원에 서 있는 붉은 사슴을 볼 수 있을 것이다.           p.72~73

 

‘지구의 허파’로 불리는 아마존의 삼림이 기후변화와 무분별한 벌목으로 2030년에는 거의 60%가 파괴될 것으로 예상된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아마존을 빽빽이 메운 3,900억 그루 이상의 나무들이 그렇게 파괴된다면, 지구온난화에 폭발적인 가속도가 붙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삼림을 보존하지 않았을 때 발생하는 생태학적 문제가 우리의 삶과 고스란히 직결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문제일 것이다. 하지만 바쁘게 살아 가느라 편리함만을 추구하는 현대인들에게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소박하고 검소한 삶에의 미덕이란 어느 먼 세상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생태문학, 환경도서들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번에 만난 것은 미국 생태문학의 고전이자 환경운동의 교과서이자, 캠브리지대학교 지속가능 리더십 프로그램 센터(CPSL)가 선정한 ‘20세기 최고의 환경 도서’인 알도 레오폴드의 <샌드 카운티 연감>이다. 이 책은 생태학자이자 환경보호론자로 인간이 자연을 해치지 않으면서 자연과 조화롭게 사는 세상을 이루려고 했던 알도 레오폴드의 사후인 1949년에 출간되었다. 출간 이후 20여 년 동안은 크게 반응을 받지 못했지만, 1970년대부터 폭발적으로 성장한 환경운동의 영향으로 관심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자연을 보호할 대상이 아니라 인간과 함께하는 존재로 바라보는 그는 이 책에서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환경과 생태적 문제를 정확하게 분석하고 창의적인 해결책을 알려준다.

 

 

 

모든 살아가는 것들과 이미 죽은 것들도 그 소리에 주의를 기울인다. 사슴에게는 생명체가 사는 방식에 대한 기억이고, 소나무에게는 한밤중의 싸움과 눈 위의 피에 대한 예고이며, 코요테에게는 앞으로 수확물에 대한 약속이고, 목동에게는 은행에 빚을 질 위험이고, 사냥꾼에게는 총알에 맞서는 송곳니의 도전이다. 하지만 이 명백하고 즉각적인 희망과 공포 뒤에는 산에게만 알려진 좀더 심오한 의미가 담겨 있다. 산만이 객관적으로 늑대 울음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오래 살았다.       p.163

 

여러모로 흥미로운 부분이 많은 책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초반부를 재미있게 읽었다. 극심한 근대화로부터 주말 도피처인 '오두막'에서 저자가 가족들과 겪었던 자연과 함께한 삶을 에세이로 자연스럽게 풀어 내었다. '샌드 카운티의 사계'라는 컨셉으로 1월부터 1월까지 매달의 자연 풍경들을 그리고 있다. 한겨울의 눈보라가 지나가고 땅에서 물방울 소리가 들리는 해빙의 밤을 거치면, 겨우내 잠든 동물들이 세상 밖으로 나오기 시작한다. 이동하는 거위 한 무리가 겨울의 침묵을 깨고 봄이 옴을 알려준다. 꽃이 개화하고, 새가 날아 다니는 등 숲과 평원에서 일어나는 수백 편의 작은 드라마를 글로 읽다 보면, 마치 푸르른 숲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땅이 공동체라는 것은 생태학의 기본 개념이지만, 땅이 사랑받고 존경받아야 한다는 것은 윤리의 확장'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 책은 땅과 땅 위에서 자라는 동물과 식물과 인간의 관계를 다루는 '땅의 윤리'에 대해서 철학적으로 고찰한다. 토양, 물, 식물, 그리고 동물들 모두의 존재를 지속하고, 자연 상태로 계속 존재할 권리가 있다. 무엇보다 인간과 자연의 합리적인 균형이 가능하다는 믿음과 그러한 균형을 인간이 합리적으로 받아들이는 실천 철학이야말로 자연과 인간이 공존과 공생의 길로 가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사실 우리가 환경 재앙이라고 일컫는 것들은 모두 인간들이 저질러온 행동 때문에 발생한 문제들이다. 인간들은 편리를 위해 자연스럽게 흐르는 강물을 막아 댐을 쌓고, 언덕과 산을 파헤쳐 고속도로를 닦았으며, 광물이나 귀금속을 찾기 위해 땅속을 샅샅이 뒤졌고, 강과 바다에 온갖 쓰레기를 갖다 버렸으니 말이다. 학자들은 이대로 가다가는 2050년경이 되면 지구상에서 모든 열대 우림이 사라지고, 석탄이나 석유 같은 연료들도 모두 바닥이 날 예정이라고 한다. 그러니 지금이야말로 인간과 환경에 대한 본질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환경운동의 가장 기본적인 윤리와 지침을 알려주는 이 책을 읽어야 할 시기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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