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트 오브 차이니즈 SF : 중국 여성 SF 걸작선
시우신위 외 지음, 김이삭 옮김 / 아작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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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문학을 어떻게 창작하는 걸까? 이건 아주 흥미로운 질문이다. 어쩌면 누군가가 당신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귓가를 스치는 아름다운 수사와 운율을 붙잡아 합리적인 방식으로 다시 배치하면 된다고. 또한 어떤 이는 당신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창작의 과정은 직감과 놀리라는 기본적인 기능 두 가지가 기반이 된다고. 전자가 최초의 영감이 번뜩이도록 불을 붙인다면 후자는 남은 작업을 도맡아 완성한다. 그래서 고전 명작은 종종 절묘한 첫 문장에서 탄생하곤 했다. 돌 하나가 호수에 일으키는 파문처럼 말이다.           - '여우는 뭐라고 말할까?' 중에서, p.64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나는 요즘 '아이 키우기'라는 인터넷 게임에 빠져 있다. 아이가 없지만, 아이를 키우는 즐거움을 느끼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그 기쁨을 직접 체험하게 해주는 게임이다. 정작 나는 아이를 키우고 싶어 한 적이 없지만, 해당 게임의 업그레이드 버전을 개발할 책임자가 되면서부터 집에서도 홀로 컴퓨터방에 앉아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사장이 준 기한은 2년이었고, 그 안에 현실처럼 번거롭지 않지만, 실생활 속 디테일을 고스란히 살려서 현실처럼 경험할 수 있는 게임을 개발해야 했다. 결국 아내를 설득해 아이를 가지게 되는데, 실제 아이를 키우면서 체험하는 모든 것들을 모아 생동감 넘치는 홀로그램 아기를 탄생시킨다. 그렇게 현실 속 진짜 아기와 게임 속 아기가 한 공간에 공존하게 되면서 점점 게임과 생활을 구분하기 어려워진다.

 

 

그러던 어느 날, 게임 속 아기인 바오바오가 신나게 손가락을 빨고 있는데, 거실에 있던 아기 베이베이가 옹알거리는 소리를 내며 작은 몸을 비집고 서재로 들어온다. 그렇게 들어온 베이베이는 허공에 있던 전자 신호로 이뤄진 바오바오를 마주하게 되는데... 자신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는 또 다른 아기의 존재를 보게 된 베이베이와 그 모든 것을 지켜보는 남극 빙하처럼 차가운 아내의 시선... 자, 나는 현실 속 아기와 가상의 아기를 앞에 두고 제대로 된 생활을 지속시킬 수 있을까. 가상 공간을 현실로 가져오는 홀로그래피 기법을 통해 게임의 현실감을 증가시키려다, 결국 그것이 현실의 삶을 잠식하게 되는 과정을 놀라울 정도로 공감되게 그려낸 이야기였다.

 

이 책에 수록된 여러가지 이야기들은 굉장히 일상적이고, 현실적인 배경을 바탕으로 그려지고 있어 SF라는 장르를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라 누구라도 즐길 수 있는 이야기로 다가오게 만든다. 산속에 유성이 둥둥 떠다니고, 아기별을 길들이는 동화같은 이야기부터 양로원의 젊은 간병인과 죽음을 거부해 수십 년간이나 노쇠와 죽음 사이에 머물고 있는 노인의 마지막 여정, 딸과 아버지 두 사람이 운영하는 멀고 먼 우주 끝의 레스토랑, 많은 기억 입자를 가지고 태어나 기억을 유전시키는 종족의 이야기, 골동품 시장에서 발견된 얼굴 없는 여자아이가 그려진 연화에 담긴 비밀 등 신비롭고,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쉴 새없이 페이지를 넘기게 만들어 준다. '중국 SF'라고 하면 어쩐지 이야기의 문턱이 좀 높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는데, 그런 걱정을 무색하게 만드는 가독성 뛰어난 이야기들의 향연이다.

 

 

"내가 살아 있을 때 저들은 나를 보지 못했으니까. 그래서 저들이 나를 볼 수 있도록 착한 일을 하고 싶었어."
나는 말했다. "하지만 저들은 그럴 가치가 없는 사람들이었어요."
아이는 고개를 숙이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안경 황은 몸을 굽히며 말했다. "언젠가는 죗값을 치르기 마련이야. 널 괴롭혔던 사람들은 벌을 받았어. 네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니지만, 하늘이 널 대신해 벌을 내린 거야. 그들은 벌을 받을 만했어. 이제 다 끝났어. 그러니 우리를 내보내줘."              - '얼굴 없는 여자아이 연화' 중에서, p.302

 

제대로 된 중국의 SF 작품이라고 하면 류츠신의 <삼체> 정도 밖에 읽어보지 않았던 내게 이 작품은 감고 있던 눈을 확 뜨이게 한 듯한 느낌이 들게 했다. 게다가 여성 작가들의 SF 작품들만 모아 놓은 선집이라 더욱 의미가 있다. 이 책은 그야말로 처음으로 중국 밖으로 소개되는 중국 여성 작가, 논바이너리 작가들만의 SF 작품을 18편이나 수록해, 중국 SF에는 결코 지금까지 알려진 몇몇 남성 작가들만이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SF와 판타지 분야에서 당대 가장 핫한 중국 작가들이라는 문구가 전혀 과장이 아닌 것이 SF라는 장르가 일부 마니아들에게만 인기 있는 장르가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에 대한 동시대성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작품들이기 때문이다. SF는 어렵고, 무겁고, 전혀 대중적이지 않은 장르라고 생각했다면, 이 책은 왜 우리가 지금 SF를 읽어야 하는 지에 대한 대답을 제시해준다고 할까. SF라는 장르가 가지고 있는 매력을 제대로 느끼게 해준다. 보편성을 지니고 있는 소재들을 현실에 머무르게 하지 않고, 미래로, 우주로 나아가게 만드는 이야기들은 젊은 작가들의 상상력을 통해 책을 읽고 있는 우리들에게 도달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새삼 SF라는 장르가 얼마나 매혹적인지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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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상을 말씀드립니다
유키 신이치로 지음, 권일영 옮김 / 시옷북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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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내 시선이 어느 한 지점에 머물렀다. 거기 적혀 있는 '글자'가 무슨 뜻인지 바로 이해되지 않았다. 머릿속이 혼란해지며 심장 고동이 빨라졌다.
'아니, 어떻게 된 거지?'
다음 순간, 어떤 생각이 머릿속을 번개처럼 스쳤다. 그리고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그걸 계기로 지금까지 계속해서 느꼈던 '위화감'이 다시 떠올랐다.                - '참자면담'중에서, p.41~42

 

가정교사 영업사원인 나는 도쿄에 있는 사립초등학교에 다니는 12세 남자 아이의 집을 방문한다. 가을에 치른 전국 모의고사 결과가 엉망이라서 과외의 필요성을 느꼈다는데, 여느 때처럼 어머니와 아들을 앞에 두고 이야기를 나누는 내내 반응이 영 미지근하다. 아들을 나무라는 듯한 어머니의 매서운 말투, 눈치를 보며 잔뜩 움츠러든 아들, 게다가 어수선한 집안 분위기며 손님이 왔는데도 고무장갑을 끼고 있는 어머니의 태도도 뭔가 이상하다. 잘 통하지 않는 대화, 예상과 다른 반응, 나는 계속해서 '위화감'을 느끼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마침내 드러나는 위화감의 정체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반전이 숨겨져 있었다. 게다가 그 반전이 끝이 아니었으니... 예상을 벗어나는 전개에서 오는 신선함이 아주 인상적인 작품 '참자면담'이다.

 

 

이어지는 '매칭어플'이라는 작품은 데이트 앱을 통해 만난 두 남녀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한참 '매칭 어플 살인사건'이야기가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었지만, 실제로 어플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별로 신경쓰지 않는 분위기다. 대학교 3학년인 딸이 있는 나는 아무렇지 않게 어플을 통해 만난 20대 여성을 '테이크 아웃'하려고 하는 중이다. 이는 소개팅 후에 바로 상대를 데리고 가서 잠자리를 하는 경우를 뜻하는데, 1차로 수제 맥주 전문점에 갔다가 2차로 바에 들렀다가 지금은 여자의 집으로 향하고 있는 중이었다. 문제는 예상보다 훨씬 빠른 상황 전개덕분에 일이 너무 잘 풀리고 있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는 것이다. 게다가 더 근본적이며 정체를 알 수 없는 위화감이 있었는데, 그 정체가 파악되지 않았기에 샤워를 하며 지금까지의 흐름을 되짚어본다. 과연 그가 여자의 집에서 무의식중에 맡은 '위화감의 냄새는 무엇때문이었을까. 이 작품 역시 거듭되는 반전이 있고, 그 반전은 대부분의 독자들의 뒤통수를 거세게 후려친다. '당신의 예상은 반드시 배신당한다'는 홍보문구가 과장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분명히 변했다. 어린 마음에도 그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여느 때와 똑같은 모습이지만 속으로는 '이 아이들과 어울리면 안 된다'라고 하는 생각이 빤히 보이는 듯했다. 무엇보다 믿을 수 없었던 점은 그런 섬사람들 가운데는 린코도 포함된다는 사실이다. 다른 섬주민들과 마찬가지로 린코도 우리 곁에서 떠나가고 말았다. 모든 게 이날부터였다. 뭔가 톱니바퀴가 어긋나고, 우리 일상이 바뀌기 시작한 것은.             - '#퍼트려주세요'중에서, p.244~245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작가 유키 신이치로의 첫 단편집이다. 미스터리로서는 이례적으로 2023 일본서점대상에 노미네이트되었고, 폭발적인 인기에 힘입어 최근 만화로도 제작되었다고 한다. 이 책에 수록된 작품 중에 〈#퍼뜨려주세요〉는 제74회 일본추리작가협회상(단편 부문)을 수상하며 작품성과 흥행성을 모두 인정받기도 했다. 이 책을 번역한 권일영 번역가님은 '미스터리 독자로는 오래간만에 맛보는 청량감'이라고 소감을 남겼는데, 그만큼 짧은 분량에 걸맞게 꼭 필요한 요소들이 적절히 배치되어 군더더기 없는 작품들이었다.

 

이 책에 수록된 다섯 편의 이야기는 지금 일본에서 가장 핫한 젊은 작가의 작품이라 그런지 현대적인 소재를 깔끔하고 세련된 미스터리로 잘 풀어내고 있다. 데이트 앱, SNS를 통한 정자 제공, 온라인 회식, 그리고 유튜브 모두 일상 속에서 쉽게 마주하게 되는 상황과 인물들을 통해 현대사회의 욕망을 고스란히 보여줄 수 있는 소재들이라 흥미로웠다. 꽤나 오싹하게 만드는 반전의 순간들이 많았기에 본격적으로 호러 미스터리를 써봐도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작가 유키 신이치로의 다음 작품을 기대해 본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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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동 김블루의 친절한 과학 3 - 지구, 전류와 전압, 대기와 해양 악동 김블루의 친절한 과학 3
오차(이영아) 그림, 조영선 글, 샌드박스 네트워크 외 감수, 악동 김블루 원작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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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동 김블루의 친절한 과학> 그 세 번째 이야기가 나왔다. 1권에서는 '힘과 운동, 빛과 파동, 우주', 2권에서는 ‘생물의 기능, 물질의 변화, 에너지'를 다루었고, 이번 3권에서는 '지구, 전류와 전압, 대기와 해양'편이다. 구독자 170만 명을 보유한 '악동 김블루' 채널의 인기 크리에이터 김블루는 재치 넘치는 입담, 욕설 없는 청정 방송으로 어린이들에게도 인기가 많다. 덕분에 아이들이 읽고 또 읽는 과학 학습 만화 시리즈로 쉽고 재미있게 기초 과학의 세계로 이끌어 준다. 이 시리즈는 김블루와 친구들이 벌이는 모험과 소동이 만화 형식으로 그려져, 자칫 어렵고, 딱딱하게 느껴질 수 있는 기초 과학 이론도 흥미롭게 읽을 수 있도록 해준다.

 

 

이 시리즈의 재미는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 캐릭터에 있다. 불친절해 보이지만 따뜻한 악동인 김블루는 파란 머리가 트레이드마크이다. 과학 수준이 높은 먼지 행성에서 온 외계인 지지는 지구를 정복하러 왔지만, 김블루와 친구들에게 점점 마음이 간다. 시큰둥한 빗자루 루이, 순진한 청소 솔 솔이, 명상가 두루마리 휴지 휴이, 잘난 척 대마왕 뚫어뻥 뻥이, 수다쟁이 수세미 세미, 겁 많은 때밀이 타월 밀이까지 너무 귀여운 캐릭터 친구들이 등장한다.

 

1권에서는 평화로운 김블루와 친구들 세계에 외계인 지지가 떨어지면서 이야기가 시작되어, 그들 모두 우주선이 폭발하기 직전에 탈출 캡슐에 몸을 실어 낯선 장소에 도착하면서 끝이 났었다. 2권에서는 지구에서 못 보던 식물들이 가득한 외계 행성에 오게 된 김블루와 친구들의 모험에서 시작해 그들이 다시 지구로 돌아오고, 불의의 비행기 사고로 무인도에 불시착하는 스토리로 이어졌다. 3권에서는 김블루와 친구들이 사방이 거대한 벽으로 막혀 있는 곳에서 깨어나면서 이야기가 시작되어 오즈의 마법사처럼 집이 통째로 날아다니는 상황에서 지지가 우주선을 타고 우주를 떠돌게 되면서 끝이 났다.

 

 

이 책은 ‘지구’, ‘전류와 전압’, ‘대기와 해양’라는 주제를 다루면서, 지구를 뚫고 반대 방향으로 나올 수 없는 이유에 대해 지권의 층상 구조를 알아보고, 지구가 퍼즐 조각처럼 나뉘어 있다는 판 구조론에 대해 배우고, 겨울철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는 불꽃의 정체인 정전기에 대해 살펴보고, 바다에서 잡은 물고기를 과연 집에서 키울 수 있을지 해수와 담수에 대해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 준다.

 

어린이들이 일상 속에서 호기심을 느낄 만한 내용들을 기초 과학 이론과 엮어 풀어내고 있기 때문에 지루하지 않게 과학에 재미를 붙여 갈 수 있을 것이다.

 

 

김블루와 친구들, 그리고 외계인 지지가 만들어 내는 에피소드를 통해 18가지 기초 과학 이론을 배우고, 각 장 끝에 수록된 ‘왕친절한 과학 수업’ 코너에서 그림 자료를 곁들여 앞서 배운 개념을 다시 한번 다지면 된다. 기존에 나왔던 대부분의 과학 학습 만화는 초등 교과 과정의 과학 지식들을 주로 다루었다. 그에 비해 이 시리즈는 초등 학습 만화로는 유일하게 난이도 높은 중학 교과 과정의 과학까지 아우르고 있다.

 

단단한 암석을 부수는 씨앗이 있다? 전기로 자석을 만들 수 있다고? 지구의 물을 뒤섞는 거대한 존재의 정체는? 날씨를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다고? 호기심 많은 어린이들을 위한 김블루의 과학 학습 만화를 통해 학교 수업보다 더 재미있는 기초 과학 이야기를 만나 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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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마물의 탑 모토로이 하야타 시리즈
미쓰다 신조 지음, 민경욱 옮김 / 비채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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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가사키에서 느낀 예감은 인간의 이성을 뛰어넘는 것만 같았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그것은 본능이 충고하는 것이리라. 넨네 갱에서의 예감이 '불쾌함'이었다면 구지암 앞에서 느낀 것은 '꺼림칙함'이었다. 혐오와 두려움의 차이...... 좀 더 쉽게 말하자면 넨네 갱에서는 너무나도 탐정소설 같은 사건에 휘말렸다면 고가사키에서는 아무래도 괴기소설과 분간이 안될 어떤 현상과 맞닥뜨릴 것 같은 느낌이다. 말도 안 돼...... 근거라 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다. 영문 모를 자신의 예감과 단자와의 살짝 거슬리는 언동만 있을 뿐이다. 그런데......         p.45~46

 

미쓰다 신조가 선보이는 방랑하는 청년 ‘모토로이 하야타’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이다. 첫 번째 작품이었던 <검은 얼굴의 여우>가 2016년에 나왔었으니, 상당히 오랜 만에 만나게 되는 두 번째 이야기이다. 이 시리즈는 현재 세 번째 작품인 <붉은 옷의 어둠>까지 출간되어 있는 상태라고 한다. 태평양전쟁 직후라는 역사적 배경 위에 미쓰다 신조의 장기인 호러미스터리적 요소와 추리를 섞어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냈었는데, 이번에는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기대가 된다. 미쓰다 신조는 작가가 됐을 때부터 쓰고 싶었던 무대가 탄광과 등대였다고 한다. 그리고 ‘도조 겐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을 하기 위해 ‘모토로이 하야타’를 탄생시켰다고 하니, 이 시리즈도 도조 겐야 시리즈 만큼이나 길게 이어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미쓰다 신조의 작품들은 아무도 없는 조용한 장소에서, 시계 초침소리만 들리는 조용한 밤에 읽으면 몰입도가 배가 된다. 주말을 앞둔 금요일 밤에 시작하기 딱 좋은 작품이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부여잡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모토로이 하야타는 패전 후 혼란기의 일본, 청운의 꿈을 품고 만주 건국대학에 들어갔지만 조국의 현실에 환멸을 느끼고 학교를 나온다. 이후 신문사나 출판사에서 일거리를 찾아 다니며 입에 풀칠을 하다 그마저도 그만두고 방랑여행을 떠난 결과, 노동자의 밑바닥이라고 불리는 탄광부가 되어 보이지 않는 곳에서 국가 부흥에 기여하고 싶다는 결의를 다지게 된다. 탄광에서 일하며 마물인지 귀신인지 모를 ‘검은 얼굴의 여우’가 신출귀몰하는 가운데, 괴이한 사건을 겪었던 것이 <검은 얼굴의 여우>였다. 이어지는 두 번째 시리즈 <하얀 마물의 탑>에서는 바닷가 마을의 등대지기가 되어 민간신앙 속 하얀 마물이라는 존재를 만나게 된다.

 

 

 

사실 진정한 공포가 찾아온 것은, 그다음이었다...... 이상하잖아. 숲속에 서 있는 하얀 사람의 존재 자체가 이상했으나 그와는 다른 이유로 도통 영문을 알 수 없는 가운데 그것이 지독한 위화감을 지녔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뭔가 이상해. 그게 뭔지, 그 핵심을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다시 그것을 보는 건 무리였다. 시야 끝에 걸려 있는 것만으로도 진저리가 날 정도로 싫었는데 똑바로 볼 수는 없다. 하지만 완전히 고개를 돌리지도 못했다. 무서웠기 때문이다. 눈을 피하는 순간 그것이 등대로 다가오지 않을까...... 해서.          p.251

 

예리하고 가늘고 긴 기암이 뾰족뾰족 솟아 있는 바다, 어깨를 맞대고 선 바위 사이를 소용돌이치는 거친 파도와 뿌연 안개까지 등대가 세워진 장소는 불길한 예감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그런 척박한 곳에서 일하는 등대지기는 편견이 많은 직업이다. 모토로이 하야타는 탄광에서 일할 때 땅 밑으로 내려가는 공포에 한없이 시달렸었다. 이번에는 새로 부임하게 된 부임지를 찾아 가던 중 흔들리는 고깃배 위에서 슬쩍 보이는 고가사키 등대를 보며 불길한 예감이 든다. 가능하다면 저 곶에는 가고 싶지 않다는 두려움이 든 것이다. 게다가 등대 회랑에 희끄무레한 게 눈에 들어왔다. 하얀 사람 그림자가 이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등대로 향하는 길은 순탄치않았고, 결국 빽빽하게 치솟은 나무로 가득한 숲 속을 홀로 지나가게 되고, 외따로 있는 하얀 집에서 하룻밤을 묵게 된다. 그곳에서 여관 주인이 싸준 도시락을 꺼내는데, 뚜껑 위에 '만약 길을 잃더라도 하얀 집에는 가지 말라는, 거기서 묵으면 안된다'는 종잇조각이 발견된다. 과연 하야타는 무사히 등대까지 갈 수 있을까.

 

전작인 <검은 얼굴의 여우>에서는 탄광이라는 미지의 공간에 대한 두려움이 만들어낸 불길한 존재와 실제 현실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그렸었다면, 이번 작품 <하얀 마물의 탑>에서는 인간의 이성을 뛰어넘는 두려움과 무시무시한 공포, 그리고 20년의 시간을 뛰어넘는 수수께끼를 그리고 있다. 미쓰다 신조가 그려내는 공포란 아무 의미 없이 사람들을 깜짝 놀래키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구제할 수 없는 절망, 불합리할 정도의 우월감, 끝을 모를 악의, 압도적인 광기, 소름 돋는 증오, 너무나도 제멋대로인 살의'에 이르기까지 반드시 동기가 있어 출발한 공포라 더욱 섬뜩하다. 오싹하고 기분 나쁜 기운 자체는 굉장히 비현실적으로 그려져 있는데, 사실 그 악의 기원을 따지고 보면 극도로 현실적인 배경에서 시작한 거라 그만큼 등줄기가 서늘해지고 공포감에 감정을 이입하게 된다. 동일한 주인공이 등장하는 시리즈이지만, 전작을 읽지 않았더라도 내용이 연결되는 것은 아니므로 각각 별개의 이야기로 읽어도 좋을 것 같다. 호러 미스터리의 거장이 선보이는 수준 높은 공포 속으로 들어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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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슬픔의 거울 오르부아르 3부작 3
피에르 르메트르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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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즈는 자문했다. 대체 내가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지? 여기서는 아무도 날 보고 싶어 하지 않고, 나도 더 이상 여기에 있고 싶지 않아. 이제 삶을 바꿔야 할 때가 아닐까? 하지만 어떻게? 쥘 씨는 풀타임으로 일할 종업원을 둘 형편이 못 되었고, 그녀는 아이들에게 읽기를 가르치거나 라비고트소스로 졸인 송아지 머리 요리를 서빙하는 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는 다른 모든 이들과 같은 상황에 있었다. 다시 말해서 기적을 기다리고 있었다.        p.119

 

<오르부아르>, <화재의 색>에 이어 '오르부아르 3부작'의 마지막 작품 <우리 슬픔의 겨울>이 나왔다. 사실 55세의 나이에 늦깎이 소설가가 된 피에르 르메트르는 추리 소설로 작품을 시작했었다. 국내에 처음 소개된 작품도 추리 소설이었고,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작품도 '카미유 베르호벤' 시리즈이다. 소설의 모든 요소들이 전부 다 꼭 있어야 할 자리에 놓여 있는 그의 추리 소설들은 꽤나 방대한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불필요한 부분이 전혀 없었고, 3부작의 주인공 카미유 베르호벤 반장도 매우 독특한 매력을 발산하는 캐릭터였다. 하지만 피에르 르메트르는 처음으로 추리 장르를 벗어나 쓴 작품 <오르부아르>로 공쿠르 상을 받았다. 프랑스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문학상' 수상 이후 더 이상 추리 소설은 만날 수 없었지만, 대신 프랑스 현대사를 배경으로 깊이 있는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이 시리즈는 1차 세계대전을 겪은 두 젊은이의 사기극을 그린 <오르부아르>, 2차 세계 대전을 앞두고 어수선한 시대에 펼쳐지는 한 여인의 무자비한 복수극 <화재의 색>에 이어 <우리 슬픔의 거울>에서는 2차 세계 대전 당시 역사의 거대한 수레바퀴에 짓눌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살다 보면 아주 복잡한 일들이 순식간에 결말에 이르게 되는 경우가 이따금 일어난다. 멀쩡하던 사업이 하루아침에 무너져 내린다거나, 아주 사소한 일에서부터 시작된 것이 결국 모든 것을 바꾸게 된다거나, 하나의 결정으로 인해 단 몇 초 사이에 누군가의 삶의 방향이 달라져 버리곤 한다. 아마도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가장 많이 바꾸어 놓는 것이 전쟁이라는 환경일 것이다. 피에르 르메트르는 이야기 속에서 끊임없이 코미디나 시트콤 같은 상황을 연출하면서 거대 권력과 사회 시스템에 대한 비판을 드러낸다. 21세기의 발자크라는 평이 과장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 시리즈의 가장 큰 장점이기도 할 것이다. 물론 서사 자체가 흥미로워서 페이지가 술술 넘어가기 때문에, 뛰어난 이야기꾼으로서의 면모도 보여주고 있다.

 

 

 

「나 같으면 다 총으로 갈겨 버릴 거야, 그냥......」
놀라운 것은 아무도 그의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아무도 누구에게 총질하고 싶지 않았지만, 이 이상한 밤, 파리에서의 도주, 이 눈먼 사람 같은 차들, 저 고집스레 닫힌 대문, 그리고 앞으로 일이 어떻게 흘러갈지 모른다는 불안감...... 이 모든 것에 지쳐 버린 사람들은 더 이상 말싸움할 기력도 없었다.          p.351

 

이번 작품의 주인공 루이즈는 시리즈 첫 번째 작품이었던 <오르부아르>에 어린 소녀로 등장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초등학교 교사인 루이즈는 10대 소녀였을 때부터 쥘 씨가 주인이자 주방장인 레스토랑에서 토요일마다 서빙 일을 해왔다. 그런데 어느 날 가게의 단골인 의사선생으로부터 당황스러운 부탁을 받게 된다. 그는 20년 전부터 토요일마다 똑같은 테이블에 앉았고, 루이즈와는 인사 외에 몇 마디 이상을 나누는 법이 없었다. 루이즈의 벗은 모습을 딱 한 번만 보고 싶다는 거였다. 그냥 보기만 하고 다른 것은 하지 않겠다고. 루이즈는 너무 놀라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고, 그날 서빙하는 내내 그 이상한 제안에 대해 생각한다. 처음에는 어리벙벙했다가 곧 화가 치밀었지만, 그에게 만 프랑이라는 엄청난 액수를 제시했고 함께 호텔에 가게 된다. 하지만 그 노인은 그녀의 벗은 몸을 보고는 권총을 꺼내 들어 자신의 머리에 대고 쏜다. 루이즈는 넋이 나가 벌거벗은 채로 길거리로 뛰쳐나왔고, 이후로 많은 것들이 달라진다.

 

단골손님으로부터 기묘한 부탁을 받은 루이즈 외에도 헌병대원 페르낭, 군인인 라브리엘과 라울, 변장과 사기술의 대가 데지레 등 다양한 인물들이 2차 세계 대전의 한복판을 누비며 각자의 삶을 살아 간다. 루이즈는 엄마가 죽고 나서부터 혼자였고, 아이가 생기지 않아 약혼자와 파혼했으며, 되는대로 아무 남자와 어울리기도 했다. 그러다 손님의 이상한 제안에서 시작된 사건 이후 경찰과 학교 동료들로부터 창녀 취급을 받기도 하는 등 여러 일을 겪으며 자신의 삶에 문제가 있음을 깨닫게 된다. 마지노선에서 근무하는 군인이었던 가브리엘과 라울은 독일군의 공격에 전선이 무너지며 탈영병 신세가 되고, 헌병대원 페르낭은 같이 피란을 가자는 아내의 말을 뿌리치고 혼자 파리에 남게 되면서 엄청난 비밀이 담긴 가방을 얻게 된다. 인물들은 각자 다른 상황에서 저마다의 이유로 피란길에 오르는데, 전쟁으로 인한 피란길의 디테일한 묘사가 사실 이 작품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을 읽는 대부분의 독자들이 전쟁을 겪어 보지 못한 세대일 텐데, 실제 전시에 프랑스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각색한 에피소드들이라 더욱 실감나게 전쟁을 간접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피에르 르메트르는 이 시리즈를 마무리하고,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역사를 그리는 새로운 3부작의 시작이 되는 작품을 작년에 발표했다. 그 작품도 국내에서 빨리 만나볼 수 있기를 고대해 본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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