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슬픔의 거울 오르부아르 3부작 3
피에르 르메트르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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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즈는 자문했다. 대체 내가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지? 여기서는 아무도 날 보고 싶어 하지 않고, 나도 더 이상 여기에 있고 싶지 않아. 이제 삶을 바꿔야 할 때가 아닐까? 하지만 어떻게? 쥘 씨는 풀타임으로 일할 종업원을 둘 형편이 못 되었고, 그녀는 아이들에게 읽기를 가르치거나 라비고트소스로 졸인 송아지 머리 요리를 서빙하는 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는 다른 모든 이들과 같은 상황에 있었다. 다시 말해서 기적을 기다리고 있었다.        p.119

 

<오르부아르>, <화재의 색>에 이어 '오르부아르 3부작'의 마지막 작품 <우리 슬픔의 겨울>이 나왔다. 사실 55세의 나이에 늦깎이 소설가가 된 피에르 르메트르는 추리 소설로 작품을 시작했었다. 국내에 처음 소개된 작품도 추리 소설이었고,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작품도 '카미유 베르호벤' 시리즈이다. 소설의 모든 요소들이 전부 다 꼭 있어야 할 자리에 놓여 있는 그의 추리 소설들은 꽤나 방대한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불필요한 부분이 전혀 없었고, 3부작의 주인공 카미유 베르호벤 반장도 매우 독특한 매력을 발산하는 캐릭터였다. 하지만 피에르 르메트르는 처음으로 추리 장르를 벗어나 쓴 작품 <오르부아르>로 공쿠르 상을 받았다. 프랑스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문학상' 수상 이후 더 이상 추리 소설은 만날 수 없었지만, 대신 프랑스 현대사를 배경으로 깊이 있는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이 시리즈는 1차 세계대전을 겪은 두 젊은이의 사기극을 그린 <오르부아르>, 2차 세계 대전을 앞두고 어수선한 시대에 펼쳐지는 한 여인의 무자비한 복수극 <화재의 색>에 이어 <우리 슬픔의 거울>에서는 2차 세계 대전 당시 역사의 거대한 수레바퀴에 짓눌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살다 보면 아주 복잡한 일들이 순식간에 결말에 이르게 되는 경우가 이따금 일어난다. 멀쩡하던 사업이 하루아침에 무너져 내린다거나, 아주 사소한 일에서부터 시작된 것이 결국 모든 것을 바꾸게 된다거나, 하나의 결정으로 인해 단 몇 초 사이에 누군가의 삶의 방향이 달라져 버리곤 한다. 아마도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가장 많이 바꾸어 놓는 것이 전쟁이라는 환경일 것이다. 피에르 르메트르는 이야기 속에서 끊임없이 코미디나 시트콤 같은 상황을 연출하면서 거대 권력과 사회 시스템에 대한 비판을 드러낸다. 21세기의 발자크라는 평이 과장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 시리즈의 가장 큰 장점이기도 할 것이다. 물론 서사 자체가 흥미로워서 페이지가 술술 넘어가기 때문에, 뛰어난 이야기꾼으로서의 면모도 보여주고 있다.

 

 

 

「나 같으면 다 총으로 갈겨 버릴 거야, 그냥......」
놀라운 것은 아무도 그의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아무도 누구에게 총질하고 싶지 않았지만, 이 이상한 밤, 파리에서의 도주, 이 눈먼 사람 같은 차들, 저 고집스레 닫힌 대문, 그리고 앞으로 일이 어떻게 흘러갈지 모른다는 불안감...... 이 모든 것에 지쳐 버린 사람들은 더 이상 말싸움할 기력도 없었다.          p.351

 

이번 작품의 주인공 루이즈는 시리즈 첫 번째 작품이었던 <오르부아르>에 어린 소녀로 등장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초등학교 교사인 루이즈는 10대 소녀였을 때부터 쥘 씨가 주인이자 주방장인 레스토랑에서 토요일마다 서빙 일을 해왔다. 그런데 어느 날 가게의 단골인 의사선생으로부터 당황스러운 부탁을 받게 된다. 그는 20년 전부터 토요일마다 똑같은 테이블에 앉았고, 루이즈와는 인사 외에 몇 마디 이상을 나누는 법이 없었다. 루이즈의 벗은 모습을 딱 한 번만 보고 싶다는 거였다. 그냥 보기만 하고 다른 것은 하지 않겠다고. 루이즈는 너무 놀라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고, 그날 서빙하는 내내 그 이상한 제안에 대해 생각한다. 처음에는 어리벙벙했다가 곧 화가 치밀었지만, 그에게 만 프랑이라는 엄청난 액수를 제시했고 함께 호텔에 가게 된다. 하지만 그 노인은 그녀의 벗은 몸을 보고는 권총을 꺼내 들어 자신의 머리에 대고 쏜다. 루이즈는 넋이 나가 벌거벗은 채로 길거리로 뛰쳐나왔고, 이후로 많은 것들이 달라진다.

 

단골손님으로부터 기묘한 부탁을 받은 루이즈 외에도 헌병대원 페르낭, 군인인 라브리엘과 라울, 변장과 사기술의 대가 데지레 등 다양한 인물들이 2차 세계 대전의 한복판을 누비며 각자의 삶을 살아 간다. 루이즈는 엄마가 죽고 나서부터 혼자였고, 아이가 생기지 않아 약혼자와 파혼했으며, 되는대로 아무 남자와 어울리기도 했다. 그러다 손님의 이상한 제안에서 시작된 사건 이후 경찰과 학교 동료들로부터 창녀 취급을 받기도 하는 등 여러 일을 겪으며 자신의 삶에 문제가 있음을 깨닫게 된다. 마지노선에서 근무하는 군인이었던 가브리엘과 라울은 독일군의 공격에 전선이 무너지며 탈영병 신세가 되고, 헌병대원 페르낭은 같이 피란을 가자는 아내의 말을 뿌리치고 혼자 파리에 남게 되면서 엄청난 비밀이 담긴 가방을 얻게 된다. 인물들은 각자 다른 상황에서 저마다의 이유로 피란길에 오르는데, 전쟁으로 인한 피란길의 디테일한 묘사가 사실 이 작품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을 읽는 대부분의 독자들이 전쟁을 겪어 보지 못한 세대일 텐데, 실제 전시에 프랑스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각색한 에피소드들이라 더욱 실감나게 전쟁을 간접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피에르 르메트르는 이 시리즈를 마무리하고,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역사를 그리는 새로운 3부작의 시작이 되는 작품을 작년에 발표했다. 그 작품도 국내에서 빨리 만나볼 수 있기를 고대해 본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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