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트 오브 차이니즈 SF : 중국 여성 SF 걸작선
시우신위 외 지음, 김이삭 옮김 / 아작 / 2023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간은 문학을 어떻게 창작하는 걸까? 이건 아주 흥미로운 질문이다. 어쩌면 누군가가 당신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귓가를 스치는 아름다운 수사와 운율을 붙잡아 합리적인 방식으로 다시 배치하면 된다고. 또한 어떤 이는 당신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창작의 과정은 직감과 놀리라는 기본적인 기능 두 가지가 기반이 된다고. 전자가 최초의 영감이 번뜩이도록 불을 붙인다면 후자는 남은 작업을 도맡아 완성한다. 그래서 고전 명작은 종종 절묘한 첫 문장에서 탄생하곤 했다. 돌 하나가 호수에 일으키는 파문처럼 말이다.           - '여우는 뭐라고 말할까?' 중에서, p.64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나는 요즘 '아이 키우기'라는 인터넷 게임에 빠져 있다. 아이가 없지만, 아이를 키우는 즐거움을 느끼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그 기쁨을 직접 체험하게 해주는 게임이다. 정작 나는 아이를 키우고 싶어 한 적이 없지만, 해당 게임의 업그레이드 버전을 개발할 책임자가 되면서부터 집에서도 홀로 컴퓨터방에 앉아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사장이 준 기한은 2년이었고, 그 안에 현실처럼 번거롭지 않지만, 실생활 속 디테일을 고스란히 살려서 현실처럼 경험할 수 있는 게임을 개발해야 했다. 결국 아내를 설득해 아이를 가지게 되는데, 실제 아이를 키우면서 체험하는 모든 것들을 모아 생동감 넘치는 홀로그램 아기를 탄생시킨다. 그렇게 현실 속 진짜 아기와 게임 속 아기가 한 공간에 공존하게 되면서 점점 게임과 생활을 구분하기 어려워진다.

 

 

그러던 어느 날, 게임 속 아기인 바오바오가 신나게 손가락을 빨고 있는데, 거실에 있던 아기 베이베이가 옹알거리는 소리를 내며 작은 몸을 비집고 서재로 들어온다. 그렇게 들어온 베이베이는 허공에 있던 전자 신호로 이뤄진 바오바오를 마주하게 되는데... 자신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는 또 다른 아기의 존재를 보게 된 베이베이와 그 모든 것을 지켜보는 남극 빙하처럼 차가운 아내의 시선... 자, 나는 현실 속 아기와 가상의 아기를 앞에 두고 제대로 된 생활을 지속시킬 수 있을까. 가상 공간을 현실로 가져오는 홀로그래피 기법을 통해 게임의 현실감을 증가시키려다, 결국 그것이 현실의 삶을 잠식하게 되는 과정을 놀라울 정도로 공감되게 그려낸 이야기였다.

 

이 책에 수록된 여러가지 이야기들은 굉장히 일상적이고, 현실적인 배경을 바탕으로 그려지고 있어 SF라는 장르를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라 누구라도 즐길 수 있는 이야기로 다가오게 만든다. 산속에 유성이 둥둥 떠다니고, 아기별을 길들이는 동화같은 이야기부터 양로원의 젊은 간병인과 죽음을 거부해 수십 년간이나 노쇠와 죽음 사이에 머물고 있는 노인의 마지막 여정, 딸과 아버지 두 사람이 운영하는 멀고 먼 우주 끝의 레스토랑, 많은 기억 입자를 가지고 태어나 기억을 유전시키는 종족의 이야기, 골동품 시장에서 발견된 얼굴 없는 여자아이가 그려진 연화에 담긴 비밀 등 신비롭고,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쉴 새없이 페이지를 넘기게 만들어 준다. '중국 SF'라고 하면 어쩐지 이야기의 문턱이 좀 높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는데, 그런 걱정을 무색하게 만드는 가독성 뛰어난 이야기들의 향연이다.

 

 

"내가 살아 있을 때 저들은 나를 보지 못했으니까. 그래서 저들이 나를 볼 수 있도록 착한 일을 하고 싶었어."
나는 말했다. "하지만 저들은 그럴 가치가 없는 사람들이었어요."
아이는 고개를 숙이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안경 황은 몸을 굽히며 말했다. "언젠가는 죗값을 치르기 마련이야. 널 괴롭혔던 사람들은 벌을 받았어. 네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니지만, 하늘이 널 대신해 벌을 내린 거야. 그들은 벌을 받을 만했어. 이제 다 끝났어. 그러니 우리를 내보내줘."              - '얼굴 없는 여자아이 연화' 중에서, p.302

 

제대로 된 중국의 SF 작품이라고 하면 류츠신의 <삼체> 정도 밖에 읽어보지 않았던 내게 이 작품은 감고 있던 눈을 확 뜨이게 한 듯한 느낌이 들게 했다. 게다가 여성 작가들의 SF 작품들만 모아 놓은 선집이라 더욱 의미가 있다. 이 책은 그야말로 처음으로 중국 밖으로 소개되는 중국 여성 작가, 논바이너리 작가들만의 SF 작품을 18편이나 수록해, 중국 SF에는 결코 지금까지 알려진 몇몇 남성 작가들만이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SF와 판타지 분야에서 당대 가장 핫한 중국 작가들이라는 문구가 전혀 과장이 아닌 것이 SF라는 장르가 일부 마니아들에게만 인기 있는 장르가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에 대한 동시대성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작품들이기 때문이다. SF는 어렵고, 무겁고, 전혀 대중적이지 않은 장르라고 생각했다면, 이 책은 왜 우리가 지금 SF를 읽어야 하는 지에 대한 대답을 제시해준다고 할까. SF라는 장르가 가지고 있는 매력을 제대로 느끼게 해준다. 보편성을 지니고 있는 소재들을 현실에 머무르게 하지 않고, 미래로, 우주로 나아가게 만드는 이야기들은 젊은 작가들의 상상력을 통해 책을 읽고 있는 우리들에게 도달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새삼 SF라는 장르가 얼마나 매혹적인지 깨닫게 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