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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마물의 탑 ㅣ 모토로이 하야타 시리즈
미쓰다 신조 지음, 민경욱 옮김 / 비채 / 2023년 4월
평점 :
고가사키에서 느낀 예감은 인간의 이성을 뛰어넘는 것만 같았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그것은 본능이 충고하는 것이리라. 넨네 갱에서의 예감이 '불쾌함'이었다면 구지암 앞에서 느낀 것은 '꺼림칙함'이었다. 혐오와 두려움의 차이...... 좀 더 쉽게 말하자면 넨네 갱에서는 너무나도 탐정소설 같은 사건에 휘말렸다면 고가사키에서는 아무래도 괴기소설과 분간이 안될 어떤 현상과 맞닥뜨릴 것 같은 느낌이다. 말도 안 돼...... 근거라 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다. 영문 모를 자신의 예감과 단자와의 살짝 거슬리는 언동만 있을 뿐이다. 그런데...... p.45~46
미쓰다 신조가 선보이는 방랑하는 청년 ‘모토로이 하야타’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이다. 첫 번째 작품이었던 <검은 얼굴의 여우>가 2016년에 나왔었으니, 상당히 오랜 만에 만나게 되는 두 번째 이야기이다. 이 시리즈는 현재 세 번째 작품인 <붉은 옷의 어둠>까지 출간되어 있는 상태라고 한다. 태평양전쟁 직후라는 역사적 배경 위에 미쓰다 신조의 장기인 호러미스터리적 요소와 추리를 섞어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냈었는데, 이번에는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기대가 된다. 미쓰다 신조는 작가가 됐을 때부터 쓰고 싶었던 무대가 탄광과 등대였다고 한다. 그리고 ‘도조 겐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을 하기 위해 ‘모토로이 하야타’를 탄생시켰다고 하니, 이 시리즈도 도조 겐야 시리즈 만큼이나 길게 이어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미쓰다 신조의 작품들은 아무도 없는 조용한 장소에서, 시계 초침소리만 들리는 조용한 밤에 읽으면 몰입도가 배가 된다. 주말을 앞둔 금요일 밤에 시작하기 딱 좋은 작품이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부여잡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모토로이 하야타는 패전 후 혼란기의 일본, 청운의 꿈을 품고 만주 건국대학에 들어갔지만 조국의 현실에 환멸을 느끼고 학교를 나온다. 이후 신문사나 출판사에서 일거리를 찾아 다니며 입에 풀칠을 하다 그마저도 그만두고 방랑여행을 떠난 결과, 노동자의 밑바닥이라고 불리는 탄광부가 되어 보이지 않는 곳에서 국가 부흥에 기여하고 싶다는 결의를 다지게 된다. 탄광에서 일하며 마물인지 귀신인지 모를 ‘검은 얼굴의 여우’가 신출귀몰하는 가운데, 괴이한 사건을 겪었던 것이 <검은 얼굴의 여우>였다. 이어지는 두 번째 시리즈 <하얀 마물의 탑>에서는 바닷가 마을의 등대지기가 되어 민간신앙 속 하얀 마물이라는 존재를 만나게 된다.
사실 진정한 공포가 찾아온 것은, 그다음이었다...... 이상하잖아. 숲속에 서 있는 하얀 사람의 존재 자체가 이상했으나 그와는 다른 이유로 도통 영문을 알 수 없는 가운데 그것이 지독한 위화감을 지녔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뭔가 이상해. 그게 뭔지, 그 핵심을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다시 그것을 보는 건 무리였다. 시야 끝에 걸려 있는 것만으로도 진저리가 날 정도로 싫었는데 똑바로 볼 수는 없다. 하지만 완전히 고개를 돌리지도 못했다. 무서웠기 때문이다. 눈을 피하는 순간 그것이 등대로 다가오지 않을까...... 해서. p.251
예리하고 가늘고 긴 기암이 뾰족뾰족 솟아 있는 바다, 어깨를 맞대고 선 바위 사이를 소용돌이치는 거친 파도와 뿌연 안개까지 등대가 세워진 장소는 불길한 예감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그런 척박한 곳에서 일하는 등대지기는 편견이 많은 직업이다. 모토로이 하야타는 탄광에서 일할 때 땅 밑으로 내려가는 공포에 한없이 시달렸었다. 이번에는 새로 부임하게 된 부임지를 찾아 가던 중 흔들리는 고깃배 위에서 슬쩍 보이는 고가사키 등대를 보며 불길한 예감이 든다. 가능하다면 저 곶에는 가고 싶지 않다는 두려움이 든 것이다. 게다가 등대 회랑에 희끄무레한 게 눈에 들어왔다. 하얀 사람 그림자가 이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등대로 향하는 길은 순탄치않았고, 결국 빽빽하게 치솟은 나무로 가득한 숲 속을 홀로 지나가게 되고, 외따로 있는 하얀 집에서 하룻밤을 묵게 된다. 그곳에서 여관 주인이 싸준 도시락을 꺼내는데, 뚜껑 위에 '만약 길을 잃더라도 하얀 집에는 가지 말라는, 거기서 묵으면 안된다'는 종잇조각이 발견된다. 과연 하야타는 무사히 등대까지 갈 수 있을까.
전작인 <검은 얼굴의 여우>에서는 탄광이라는 미지의 공간에 대한 두려움이 만들어낸 불길한 존재와 실제 현실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그렸었다면, 이번 작품 <하얀 마물의 탑>에서는 인간의 이성을 뛰어넘는 두려움과 무시무시한 공포, 그리고 20년의 시간을 뛰어넘는 수수께끼를 그리고 있다. 미쓰다 신조가 그려내는 공포란 아무 의미 없이 사람들을 깜짝 놀래키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구제할 수 없는 절망, 불합리할 정도의 우월감, 끝을 모를 악의, 압도적인 광기, 소름 돋는 증오, 너무나도 제멋대로인 살의'에 이르기까지 반드시 동기가 있어 출발한 공포라 더욱 섬뜩하다. 오싹하고 기분 나쁜 기운 자체는 굉장히 비현실적으로 그려져 있는데, 사실 그 악의 기원을 따지고 보면 극도로 현실적인 배경에서 시작한 거라 그만큼 등줄기가 서늘해지고 공포감에 감정을 이입하게 된다. 동일한 주인공이 등장하는 시리즈이지만, 전작을 읽지 않았더라도 내용이 연결되는 것은 아니므로 각각 별개의 이야기로 읽어도 좋을 것 같다. 호러 미스터리의 거장이 선보이는 수준 높은 공포 속으로 들어가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