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의 기쁨과 슬픔 - 인간이 꿈꾼 가장 완벽한 낙원에 대하여
올리비아 랭 지음, 허진 옮김 / 어크로스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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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많은 이들이 낙원을 잃어버렸고, 또 그런 경험이 없다 해도 잃어버린 낙원에 대한 이야기는 울림을 갖는다. 우리 대부분은 세상이 너무나 새롭고 놀랄 일이 가득한 어린이의 인식이라는 낙원을, 또 몸 자체가 정원이 되는 첫사랑의 달콤하고 풍성한 낙원을 잃어버리거나, 포기하거나, 잊은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세속적인 에덴동산 이야기가 문학에 그토록 많은지도 모른다. 예상치 못하게 열렸다가 다시 잠기는 정원, 우연히 발견했지만 두번 다시 찾을 수 없는 낙원.              p.53~54



올리비아 랭은 마흔 살에 뒤늦게 집을 살 때까지 줄곧 세 들어 살았고, 야외 공간이 있는 아파트에 산 적은 드물었다. 그러다 케임브리지 대학 교수를 만나 사랑에 빠졌고 곧 결혼했다. 애초에 정원 가꾸기라는 공동의 취미 때문에 친구가 되었고, 그의 은퇴 후 정원을 가꿀 수 있는 곳으로 이사를 하게 된다. 그들이 서퍽의 작은 마을에 도착하고 얼마 뒤 코로나로 인해 영국에서 봉쇄 조치가 실시된다. 거의 모든 사람이 집에 갇혔고, 야외 운동은 하루에 한 시간만 허락되면서 너무도 빠르게 움직이던 세상이 딱 멈추게 된 것이다. 


그 시기 동안 올리비아 랭은 집의 오래된 정원에 매료되어, 옛 모습을 복원하고, 식물을 살리기 위해 애쓴다. 전염병의 공포가 커질수록, 정원을 드나들며 위안을 얻었던 것이다. 실제로 전 세계 사람들은 팬데믹 기간 동안 식물과 열병 같은 사랑에 빠졌다. 정원 가꾸기는 발을 땅에 붙이게 하고, 마음을 달래고, 유용하고, 아름다움을 더해주는 것이었기에 사람들 모두가 갇혀버린 현재의 순간에 순응하는 방법이 되어준 것이다. 상상할 수 없는 재난의 문턱에서 시간이 멈춰버린 그때, 씨앗이 펴지고, 싹이 움트고, 나팔 수선화가 흙을 밀며 올라오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놓이고, 보장되지 않은 미래를 기다릴 수 있게 되는 희망이 생기게 된다. 올리비아 랭의 새로운 집에는 유명 정원사 마크 루머리가 디자인한 오래된 정원이 있었기에, 정원을 복원하는 동시에 그것이 역사와 어떻게 교차되는지 추적하기로 한다. '모든 식물은 공간과 시간의 여행자이므로 아무리 작은 정원도 역사와 교차할 수밖에 없다'고 말이다. 그렇게 예상치 못한 곳에서 싹을 틔우거나 이상하게 성장할 수 있는 요소들이 파묻혀 있던 정원의 비밀은 세기를 거스르는 여행으로 확장된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짐을 진 채 어른이 된다. 그 짐의 일부는 개인적이고 개별적이고 독특할 수밖에 없지만 일부는 정치적으로 분류하는 것이 더 적절하고, 같은 환경을 공유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역사와 관련이 있다. 어른이 때로 방사능 물질처럼 위험한 자신의 과거를 처리하고 관리하는 방법은 무척 다양하다. 정원을 가꾸는 행위에서 위안을 찾는 사람이 나 혼자만은 아닐 것이다. 나는 어린 시절의 경험 덕분에 안전하고, 야생적이고, 어지럽고, 풍요롭고, 무엇보다도 공개되지 않은 공간에 대한 갈망을, 끈질기게 계속되는 필요성을 느꼈다. 나는 물론 집을 갖고 싶었지만 내게 정말 필요한 것은 정원이었다.                p.236~237


'제2의 리베카 솔닛'이라 불리는 올리비아 랭의 신작이다. <외로운 도시>, <이상한 날씨>, <에브리바디>까지 차근차근 읽어왔는데, 매번 인문학적인 사유와 빛나는 통찰력으로 정말 좋아하는 작가이다. 개인의 고독을 사회적 소외로 확장한 <외로운 도시>, 혼란스러운 시대에 예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탐색한 <이상한 날씨>, 그리고 질병과 성, 저항과 감옥 등 몸의 여러 다른 측면들을 살펴보았던 <에브리바디> 모두 너무 좋았던 기억이 있다. 특히나 이번 신작은 '정원'을 다룬다고 해서 더 기대가 되었다. 나 역시 나만의 정원을 가지는 것이 오랜 로망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심에서 단독주택이 아닌 이상 정원을 만들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서재가 실내 정원처럼 되어버렸는데, 나름 온실도 있고, 천장까지 닿는 식물들도 몇 있어서 정원이나 다름없는 공간이긴 하다. 이렇게 식물이 주는 위안에 대해 깊이 공감하는 독자로서, 올리비아 랭의 정원 이야기는 기대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팬데믹, 브렉시트, 극우 세력의 부상 등 시대의 어두운 분위기와 새어머니의 죽음 같은 개인적 문제에 짓눌려 있던 올리비아 랭은 정원에 탐닉하며 자신만의 낙원을 만들어간다. 또한 정원에서 존 밀턴의 《실낙원》을 탐독하며 우리가 잃어버린 낙원에 대해 이야기한다. 《실낙원》을 시작으로 윌리엄 모리스의 《에코토피아 뉴스》, 데릭 저먼의 퀴어 유토피아 등 예술, 역사, 사회사상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지는데, 정원을 돌보는 방법에서 ‘정원’이라는 개념 그 자체로 확장되는 사유가 정말 흥미진진했다. 대정원의 매끄러운 아름다움에 어떤 희생이 담겨 있는지도 놀라웠다. 18세기 영국에서 진행된 대정원화 작업에서는 상류 지배 계층을 위해 오소길, 농장, 때로는 마을 전체를 옮기기도 했다니 말이다. 농지를 개선한다는 명목하에 진행된 인클로저 역시 대정원화와 마찬가지로 자연을 대대적으로 개조하는 작업이었다고 한다. 이렇듯 '숨겨진 비용, 권력 및 배제와의 눈에 보이지 않는 관계'가 정원의 한 측면이라고 생각해보면, 정원의 의미는 완전히 달라진다. 살아있는 것과 죽은 것, 개인의 것과 공공의 것의 경계가 희미해진 공간에 대한 올리비아 랭의 사유는 혐오와 배제, 기후위기와 파국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희망을 잃지 말라고 말해주는 듯하다. 예쁜 책표지만큼이나, 눈부시게 아름다운 책이었다. 자, 올리비아 랭의 아주 특별한 정원으로 당신을 초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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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비와 베끼기 - 자기만의 현재에 도달하는 글쓰기에 관하여
아일린 마일스 지음, 송섬별 옮김 / 디플롯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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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나는 문학이 낭비된 시간이며, 좋은 점이라고는 하나도 없다고 생각한다. 문학은 도덕적 프로젝트가 아니라 그저 지극히 심오한 시간 낭비일 뿐이다. 나는 모든 방면에서 그 모험을 샅샅이 탐구했다. 우리 시대의 위대한 모험을.              p.30



일흔 살이 넘은 지금까지도 '이 시대 희귀한 컬트적 존재이자 록스타 시인'으로 불리는 아일린 마일스의 책이 국내에 처음 출간되었다. 1992년에 노동계급 퀴어예술가로서 미국 대선에 출마해 화제가 되었었는데, 당시 아일린 마일스의 출마에 응답하는 헌시 〈나는 이런 대통령을 원한다I Want a President〉(조이 레너드)는 삼십 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여전히 회자되고 있다. 


이번에 출간된 책에서 원문 도판과 번역을 만나볼 수 있다. 이 책은 예일대학교에서 제정한 윈덤캠벨문학상의 시상식 기조연설을 단행본으로 펴내는 시리즈 '나는 왜 쓰는가'의 세 번째 책이다. 아일린 마일스는 자신이 사십 년 넘도록 살아온 뉴욕의 아파트 이야기로 말문을 연다. 지극히 사사로운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같지만, 매우 시적인 문장으로 사회적이고, 문학적인 사유를 보여주는 글이었다. 그는 '쓰기'란 삶에서 겪는 경험들을 '베끼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 핵심은 베끼기copy다. 그는 글쓰기를 삶을 획기적으로 바꿔줄 도구가 아니라, 끝없이 주문을 읊는 하나의 수행으로 지속한다.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베끼고 그 허위를 폭로하는 일이야말로 문학적 구원의 길이 된다고 말이다. 





나는 지금까지 쓴 모든 시를 기억한다. 암송할 수는 없지만 그것들은 파도처럼 돌아온다. 모두 내 뇌의 일부니까. 그것들이 내 뇌를 이룬다. 내 뇌는 안팎이 뒤집혀 있다. 시가 나를 증명한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조금도 알 바가 아니다. 일전에 시인 애덤 피츠제럴드가 망각에 관한 이야기를 했는데, 아마 루이스 하이드식 이야기였던 것 같다. 망각은 잃어버리는 것처럼 구체적인 게르만적인 것, 그리고 덮이거나 덧씌워지거나 보이지 않게 되는, 사라지는 것에 더 가까운 그리스적인 것으로 나뉜다.                p.92



이 책의 원제는 "For Now"이다. 아일린 마일스는 오랫동안 '중요한 것은 이곳에 존재하는 것, 현재에 있는 것'이라는 개념을 뒷받침하는 온갖 철학으로 무장해왔다. 거의 한평생 살아온 뉴욕의 집을 둘러싼 투쟁의 과정 속에서, 노동계급 퀴어예술가로서 정치적, 미학적 최전선의 글쓰기를 온몸으로 밀고나간 그의 '현재'를 만날 수 있는 책이었다. '이곳에 있고 싶다, 여기에 있다'고 생각하는 마음이 글을 쓰고, 읽힐수록 오롯이 하나의 사실이 되어 간다는 것. 아일린 마일스는 뉴욕의 한 아파트에서 사십 이 년째 살고 있고, 삶의 어지간한 일들은 바로 그곳에서 일어났다. 시간과 장소의 의미가, 현재와 세계가 되어 가는 과정을 느낄 수 있는 글이었다. 


특히나 '나는 문학이 낭비된 시간이며, 좋은 점이라고는 하나도 없다고 생각한다.'는 문장에 매우 인상적이었다. '문학은 도덕적 프로젝트가 아니라 그저 지극히 심오한 시간 낭비일 뿐'이라며, 그 모험을 샅샅이 탐구했다는 말이 그의 문학 세계를 이루는 근간이기도 할 것이다. 자본으로 환원되지 않는, 순전한 시간 낭비로서의 글쓰기라니... 아일린 마일스의 글쓰기 스타일을 제대로 보여주는 게 아닌가 싶었다. 짧은 분량의 책이지만, 어려운 단어로 쓰인 것도 아니지만, 대단히 밀도 있는 글이라 충분히 시간을 들여 읽어야 했다. 책 전체가 한 편의 시처럼 읽히기도 하는 그의 글은 결코 수월하게 읽히진 않지만, 삶과 문학 사이의 복잡다단한 관계를 보여주고 있어 매우 인상적이었다. 글쓰기에 관한 아주 독창적인 시적 통찰이 궁금하다면, 이 책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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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맥거핀의 인체 친구들 3 - 뉴런, 번쩍 배송을 부탁해! 소맥거핀의 인체 친구들 3
김기수 그림, 서후 글, 박상민.샌드박스네트워크 감수, 소맥거핀 원작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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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소맥거핀의 인체 친구들>이 벌써 세 번째 이야기로 찾아왔다. 이 시리즈는 920만 구독자를 보유한 소맥거핀의 인기 콘텐츠 ‘인체 친구들의 하루’를 어린이 메디컬 개그 만화로 재탄생시킨 것이다. 1권에서는 몸속 기관들을 하나씩 살펴봤다면, 2권에서는 소맥이의 몸속에 들어온 독감 바이러스 때문에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이번에 나온 3권에서는 뉴런 캐릭터가 전면에 등장해 신경계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들려준다.




우리 몸의 주요 인체 기관들을 캐릭터화해 몸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코믹하게 담은 메디컬 개그 만화이지만, 초등 과학 연계로 재미있게 책장을 넘기면서 자연스럽게 '우리 몸의 구조와 기능'을 배울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이 책의 장점이다. 주인공 소맥이 몸속의 인체친구들이 독창적인 캐릭터로 재탄생해 각자 몸의 기관들이 하는 일을 보여주는데, 뇌와 뉴런을 비롯해 혀, 눈동자, 폐, 심장, 근육, 피부가 주요 캐릭터로 등장한다. 




친구들과의 약속을 깜빡하고 늦잠을 잔 소맥이의 정신없는 하루부터 마을 체육 대회에 강제로 참여하게 된 소맥이의 좌충우돌 에피소드, 코피가 나고, 멍이 드는 이유와 외부의 자극을 감각기관이 어떻게 받아들이는 지 등 자극부터 반응까지 모든 순간에 함께하는 뉴런의 활약을 만나볼 수 있다. 


소맥이가 겪는 일과 소맥이 몸속에서 일어나는 일은 다른 모양의 만화 칸으로 구분해서 표현했다. 몸 밖과 몸속 세계가 자연스럽게 구분되어 읽으면 더 재미있을 것이다. 




가족 중 최약체이자 서열 꼴지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주인공 소맥이, 부동의 서열 1위 엄마, 소맥이 괴롭히기가 제일 재밌는 누나에다가 이 시리즈에는 다양한 몸속 친구들이 잔뜩 등장한다. 아무리 힘들어도 절대 쉬지 않는 운동 중독자 심장, 소맥이의 움직임을 책임지는 근육, 열정적으로 운동해서 소맥이를 숨 쉬게 하는 폐, 자주 다치는 소맥이 때문에 상처나 멍에 예민한 피부, 열심히 몸속의 각종 정보를 전달하는 뉴런, 온몸과 신호를 주고받느라 늘 분주한 뇌, 입에 뭐가 들어올지 몰라 쉽게 놀라는 혀 등 귀여운 인체 친구들이 각자의 이야기를 들려 준다.




인체 상식을 알고 읽으면 더 재미있게 즐길 수 있다. 인체 비밀 노트와 '특!' 지문을 꼼꼼히 살펴 보며 이야기를 따라가보자. 그리고 ‘인체 친구들 탐구 편’ 코너에서도 짚고 넘어가면 좋을 인체 지식을 알차게 수록했으니 놓치지 말고 살펴보면 좋을 것 같다. 모든 만화와 정보 글은 의사이자 소설가인 박상민 선생님의 감수를 통해 정확도를 높였다. 


이상형을 만나면 뇌에 설렘 경보가 울릴까? 왜 머리카락은 잘라도 아프지 않을까? 긴장하면 정말 오줌이 마려울까? 운동은 정말 건강에 좋을까? 등 흥미로운 주제들을 귀여운 만화적 표현과 친절한 설명을 통해 알려줘 인체 필수 지식에 대해 재미있게 배울 수 있을 것이다. 과학에 흥미를 붙여주고 싶은 아이들에게 적극 추천해주고 싶은 책이다. 초판 한정으로 구급상자 만들기도 받을 수 있으니 놓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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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작은 무법자
크리스 휘타커 지음, 김해온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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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나쁜 짓 했어, 엄마.'

'누구나 나쁜 짓을 해.'

'근데 바로잡을 수가 없을 것 같아.'

스타는 두 눈을 감고 아직도 기타를 연주하며 노래했고, 딸이 그녀에게 부드럽게 기댔다. 

더치스는 너무나도 간절히 같이 노래 부르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갈라지기 시작했다.

"내가 널 지켜줄게. 그게 엄마들이 하는 거니까."

더치스는 우는 법이 없었지만 그때는 거의 울 뻔했다.                    p.130



열세살 소녀 더치스는 스스로를 '무법자'라 칭한다. 술과 약에 빠져 사는 엄마를 대신해 다섯 살인 어린 남동생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세상 모든 것으로부터 맞서 싸울 자세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도 우리를 괴롭힐 수 없어. 아무도 우리를 비웃을 수 없어. 내가 너를 지켜.' 라는 말로 소녀는 오직 동생을 보호하기 위해 애쓴다. 사실 소녀와 소녀의 남동생이 태어나기도 한참 전에 비극은 시작되었다. 30년 전, 열다섯 살의 '빈센트 킹'이 '시시 래들리'라는 아이를 죽이고 살인죄로 교도소에 수감된 사건 이후로 모든 것이 바뀌어 버렸기 때문이다다. 더치스의 엄마인 스타의 삶이 잿빛이 된 것도 일곱 살이던 동생 시시가 죽고 나서부터였다. 그리고 이제, 빈센트 킹이 마을로 돌아오면서, 비극의 서막이 다시금 시작된다. 


경찰 서장인 워크는 어린 시절 빈센트 킹과 스타 래들리와 모두 친구 사이였다. 그의 시계는 30년 전 그 사건 이후로 멈춰 있다. 그는 친구를 30년 동안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스타의 아이들을 늘 신경쓰고 보살피며 살고 있다. 빈센트 킹이 출소해 마을로 돌아오고 나서 얼마 뒤 또 살인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이번에야말로 친구를 도와야겠다고 마음먹은 워크는 친구의 결백함을 믿고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나선다. 더치스의 삶에는 계속해서 위기가 생기고, 한번도 찬란한 시기를 보내지 못했던 소녀의 삶은 활짝 피기도 전에 무채색으로 물든다. 극중 더치스는 코코아를 들어 숟가락으로 마시멜로를 퍼서 입에 넣는 장면이 있다. 소녀는 너무 달아서 깜짝 놀라는데, 그렇게 삶의 좋은 것들을 잊어 버린 채 살아온 것이다. 할아버지는 더치스에게 "끝은 또 다른 시작이다."라고 늘 말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밤이 되어 달이 아타야 캐니언으로 숨고 운전기사가 속도를 늦추더니 실내등을 끈 뒤에야 더치스는 로빈 생각이 떠오르는 것을 막지 않았다. 가슴이 아팠다. 누가 좌석 등받이에 버려두고 간 반질반질한 잡지에 나온 연애 이야기 같은 아픔이 아니라, 영혼을 잡아 뽑아버리는 종류의 고통이었고, 너무 격렬해서 소녀는 몸을 웅크리고 숨을 헐떡이며 가방에 손을 넣어 물병을 꺼낸 뒤 병에 대고 얕은 숨을 쉬어야 했다. 운전기사가 소녀와 눈이 마주쳤을 때 그의 눈에 걱정이 어려 있었으나, 헛된 걱정이었으니 소녀는 괜찮지 않을 것이었다. 앞으로 소녀 인생의 그 무엇도 괜찮지 않을 터였다.               p.517



정말 오랜만에 탄탄하게 잘 쓰인, 밀도 높은 범죄 소설을 만났다. 별 다섯 개를 주는 것조차 부족하다고 느껴질 만큼, 완벽한 작품이었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은 뒤에도 결코 눈물을 흘리지 않던 어린 소녀의 삶이 그 뒤로 어떻게 됐을지 궁금해졌을 만큼 긴 여운을 남기는 작품이기도 했다. 출간된 해 골드대거상, 식스턴 올해의 범죄소설상, 네드 켈리 국제상을 휩쓴 이 작품의 원제는 'We Begin at the End'이다. 번역본의 제목도 좋지만, 작품을 읽는 내내 원제의 의미가 가슴을 먹먹하게 해준다. 희망은 세속적인 것이다. 삶은 쉽게 깨지는 거고. 하지만 우리는 이따금 너무 꽉 매달린다. 곧 부서질 거라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아이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던 엄마, 30년 동안 친구를 믿고 포기하지 않은 경찰 서장, 동생을 지키기 위해 온 힘을 다해 세상과 맞서 싸운 누나,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린 손녀의 뒤에서 묵묵히 버틴 할아버지, 그리고 병원에 있는 딸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거는 한 남자... 모두 각자의 소중한 대상을 위해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차곡차곡 쌓인 이야기의 끝에 도달해서 가장 슬펐던 점이 바로 그것이다. 각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세상에 나쁜 사람은 없다는 것. 모두 그저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했을 뿐이라는 것. 하지만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는 것이 생의 아이러니이자 비극이다. 잘못에 따른 대가를 치른 인생, 다시 찾아온 기회, 구원을 바라는 애처로운 간청, 소중한 사람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는 마음... 겉으로 보여지는 서사는 범죄소설이지만, 이 작품은 훨씬 더 많은 것을 담고 있다. '하루하루 분투하며 살아가는 여자아이와 과거에 지나치게 매달리는 경찰관에 관한 이야기, 실수에 관한 이야기, 다시 일어나서 한 걸음씩 발을 내딛는 것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선악의 개념과 희생과 구원에 관한 이 아름다운 이야기는 단 한 페이지도 허투루 넘기지 못하도록 시선을 사로잡는다. 일단 시작하면 절대 손에서 내려놓을 수 없을 만한 작품을 만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 경이로운 작품을 놓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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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 마거릿 미드 Who 세계인물 33
스튜디오 울림 지음, 스튜디오 청비 그림, 경기초등사회과교육연구회 감수 / 다산어린이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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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새롭게 옷을 갈아입고 개정판으로 출간된 <who? 세계인물> 시리즈! 정치, 경제, 인문, 사상, 인권, 환경 등 다양한 분야에서 오늘날 우리들이 살아가는 세상을 만든 인물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세계인물' 시리즈에서 이번에 골라본 것은 자연과 하나가 된 철학자 헨리 데이비드 소로와 원시 부족을 연구한 인류학의 어머니 마거릿 미드이다. 학습 만화를 통해 인물의 삶을 이해하고, 통합 지식 플러스 코너를 통해 다양한 배경지식과 상식에 대해 공부할 수 있었다. 




이 시리즈는 다양한 직업군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 장점인데, 각 책의 후반부에는 진로 탐색 워크북을 구성해 인물의 직업 세계를 이해하고, 스스로의 가능성을 생각해보고, 진로를 탐색하고 설계해볼 수 있다. 이번에 만난 두 책을 통해 문화 인류학자와 수필가라는 직업의 세계에 대해 배워 보았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쓴 <월든>은 19세기의 가장 중요한 책 중 하나로 손꼽히는데, 아이가 읽기엔 조금 어려울 수 있을 만한 책이다. 대신 이번에 자연의 순리 속에서 욕심 없이 사는 것이 가장 멋진 삶이라고 생각한 그의 가치관에 대해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게 되었다. 마거릿 미드는 넓은 세상을 탐험하겠다는 꿈을 어른이 되어서도 실현 시킨 인물로, 밀림 속 원시 부족을 찾아가 연구한 그의 삶을 통해 자기만의 꿈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필요한 용기에 대해 배워볼 수 있었다. 




who? 시리즈 중에 '세계인물' 편에서는 버락 오바마, 힐러리 클린턴, 에이브러햄 링컨을 시작으로 워런 버핏, 넬슨 만델라, 체 게바라, 헬렌 켈러, 마더 테레사, 알베르트 슈바이처, 프리드리히 니체, 존 스튜어트 밀, 헨리 데이비드 소로 등 40명의 인물을 만나볼 수 있다.


먼저 영어 지문으로 만나본 적이 있었던 헬렌 켈러와 신화 속 도시를 발굴해 낸 고고학자 하인리히 슐리만을 읽었고, 이번에 헨리 데이비드 소로와 마거릿 미드를 만나 보았다. 다음에는 또 어떤 인물을 만나볼 지 선택의 폭이 넓어 기대가 된다. 아이가 처음 만나는 인물이 많은 편인데, 학습 만화로 풀어가는 내용이라 부담없이 아주 재미있게 읽을 수 있어 더 좋다. 딱딱한 역사도 쉽고 재미있게 만날 수 있도록 풀어내고 있고, 낯선 인물들의 삶도 공감이 갈 수 있도록 그려내고 있어 학습 만화 형식이지만 더욱 깊이 있는 독서를 할 수 있는 시리즈가 아닌가 싶다. 




who? 시리즈만의 독보적인 장점은 대통령, 변호사, 성직자, 애널리스트, CEO, 사회 운동가, 의사, 철학자, 환경운동가, 문화인류학자, 고고학자, 수필가 등 다양한 직업군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해당 나라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서도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다는 점도 매력적이다. Who? 시리즈는 세계인물뿐만 아니라, 한국사, 인물 중국사, 아티스트, 인물 사이언스, 세계 인물, 그리고 스폐셜, K-pop라는 다양한 카테고리로 위대한 인물들을 소개해왔는데, 세계 인물 편을 완독한 뒤 다른 시리즈도 하나씩 찾아 읽어볼 예정이다. 


세상을 바꾼 위대한 인물들의 이야기는 그들 또한 평범했던 어린 시절부터 자신이 가졌던 꿈을 구체화시키기 위한 노력과 과정을 고스란히 보여주어 아이들이 스스로 꿈을 찾고 이루어 가는 방법을 느끼게 해준다. 특히나 who? 시리즈는 책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독후활동을 함께 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어 더 좋다. 문해력도 기를 수 있고, 다양한 영역의 통합 교육도 가능한 who? 시리즈를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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