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에서 우리는 잠시 매혹적이다
오션 브엉 지음, 김목인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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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말씀드리고 싶은 게 정말 많아요, 엄마. 저도 한때는 지식이 모든 걸 명료하게 해줄 거라 믿을 만큼 어리석었죠. 그러나 어떤 것들은 겹겹의 통사론과 의미론 뒤에, 세월과 시간 뒤에, 잊히고 구출되고 조명되는 이름들 뒤에 덮여 있어, 단순히 상처가 존재한다는 걸 아는 것만으로는 그걸 드러내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죠.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어요. 아마 제 말은, 가끔 저도 우리가 무엇인지 혹은 누구인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p.92~93


'나'는 엄마에게 편지를 쓴다. 사랑하는 엄마에게 가닿기 위해. 비록 한 단어 한 단어 쓸 때마다 엄마가 계신 곳에서 멀어질지라도. 왜냐하면 나는 영어를 읽지 못하는 엄마에게 영어로 편지를 쓰고 있기 때문이다. 결코 가닿지 못할 고백들, 전해질 수 없는 말들, 끝내 부치지 못한 편지.. 에는 가난한 아시아계 소년으로서의 성장기와 자신의 성정체성을 깨닫게 만든 한 소년과의 만남 등 엄마가 알 수 없었던 많은 시간들이 담겨 있다. 


할머니는 전쟁통에서 성노동자로 일하며 딸을 키웠고, 현재는 전쟁 후유증으로 정신이 온전치 못하다. 하지만 가끔씩 정신이 돌아올 때면 나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그리고 '리틀독'이라는 별명으로 나를 불렀다. "자, 이번 이야기는 말야, 리틀독. 널 정말이지 멀리로 데려가줄 게다. 준비됐니?" 할머니의 어휘로 만들어져 나의 상상력으로 움직이는 영화가 펼쳐진다. 어쩌면 내가 작가가 된 것은 이런 할머니와의 시간 덕분이었을지도 모른다. 엄마는 열일곱 살에 아이를 데리고 미국으로 건너와 네일숍에서 일한다. 엄마는 나를 사랑했지만, 외상후스트레스장애를 앓고 있었기에 자주 폭력을 휘둘렀다. 하지만 어린 나는 그 폭력 조차 자신에 대한 엄마의 애정이라고 믿었다. 엄마는 아들이 영어를 배우고 강해지기를 바랬다. 그 기대로 나는 앞으로 나아가지만, 해내지 못한 많은 일들에 대해서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 한 소년의 성장담이자 삼대에 걸친 가족의 디아스포라 이야기는 고통과 비극으로 점철되어 있지만, 소년은 그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어디를 보느냐에 따라 그곳은 아름다운 나라'라고 믿으면서 말이다. 




무엇이 저로 하여금 상처 입은 것의 목소리를 따라가게 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마치 제가 아직 소유해본 적이 없는 질문에 대한 답을 약속받은 듯 이끌렸어요. 사람들은 우리가 무언가를 절실히 원하면, 그로부터 결국 하나의 신을 만들어낸대요. 하지만 엄마, 만일 제가 늘 원했던 전부가 저의 삶이었다면요? 저는 다시 아름다움에 대해, 어떻게 무언가가 우리가 그것들을 아름답게 여겨왔다는 이유로 사냥되는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어요.              p.318


시적인 문장들로 소외된 사람들의 연대를 섬세하고도 아름답게 그려냈던 <기쁨의 황제>를 쓴 오션 브엉의 첫 소설이다. 국내에는 2019년에 소개되었었지만, 이번에 새로운 표지로 옷을 갈아입고 개정판이 나왔다. 이 작품은 베트남계 미국인이자 성소수자인 작가의 자전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이민자 가족들이 대부분 그렇듯, 부모는 영어를 잘 못하고, 아들은 영어로 글을 쓰고 말하며 살아 간다. 이 작품이 엄마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인 것도 그 이유에서다. 폭력이 일상이었던 자신의 어린 시절을 돌아보고, 자신의 성정체성에 대해 들려주며, 베트남 전쟁으로 얼룩진 가족의 역사 등 오랫동안 덮어두었던 이야기를 꺼낼 수 있었던 것이 '엄마가 이 글을 읽을 일이 없다는 불가능성'에서 비롯된 것이니 말이다. 


몇 대에 걸려 대물림된 전쟁의 트라우마와 비극적인 가정사, 폭력 또한 궁극적으로 사랑이라고 믿었던 어린 시절에 대한 고백은 섬세하고, 시적인 언어들로 서술된다. 이야기가 누군가를 구원할 수도 있다는 것, 글쓰기가 결코 견뎌낼 수 없는 모든 것들을 이겨낼 수 있게 한다는 것을 보여 주는 가슴 아프면서도 눈부시게 아름다운 작품이었다. 특히나 문장이 너무 좋았다. 꼭 밑줄 그을 펜을 준비하고 읽어 보기를 권한다. 작가이자 뮤지션인 김목인이 번역을 했는데, 옮긴이의 말에서 그의 시를 함께 읽는다면 이 작품을 더 입체적으로 읽을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다행히 그의 첫 시집 <총상 입은 밤하늘>도 이미 출간이 되어 있어서 바로 주문했다. 게다가 번역이 안톤 허라서 더 기대가 된다. 오션 브엉의 <시간은 어머니>라는 시집도 국내에 출간되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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