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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일록 작전
필립 로스 지음, 김승욱 옮김 / 비채 / 2025년 2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전화를 끊자마자 밤에 침대에서 생각했던 것과 아주 연관이 없지는 않은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 마치 내가 쓴 소설을 읽는 것 같다던 아하론의 말이 씨앗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어쨌든 엄청나게 객관적인 사실이라고 다시 확인된 것을 내가 직업적으로 너무나 잘 아는 정신적인 사건으로 변환하려는 또 하나의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주관적인 시도였다... 이들이 모두 활자의 속박에서 해방되어 나를 풍자하듯 닮은 인물 한 명으로 재구성된 거야. 다시 말해서 이것이 할시온 때문도 아니고 꿈도 아니라면, 틀림없이 문학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는 뜻이다. 내면의 삶보다 만 배나 더 터무니없는 외면의 삶은 있을 수 없다는 듯이. p.39
어느 날 필립 로스는 자신과 똑같이 생긴 사람이 자신을 사칭하며 돌아다니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자신은 뉴욕에 있었는데, 자신을 사칭하는 사람은 예루살렘에서 공포의 이반이라고 알려진 존 데미야뉴크의 재판을 방청하고, ‘유대인은 유럽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정치적 주장을 공표하는 등 각종 파격적인 행보를 하고 있다고 했다. 필립 로스는 이스라엘로 가서 사칭범을 직접 대면하기로 하고, 그가 묶고 있다는 호텔로 찾아간다. 그 순간까지 결코 그의 존재를 진심으로 믿지 않았던 필립 로스는 막상 사칭범과 마주하자 충격에 휩싸인다. 자신과 똑같이 생긴 그는 이목구비가 자신보다 조금 더 보기 좋은 미남 버전에 가까웠는데, 그는 호들갑을 떨며 진짜 필립 로스를 만난 것을 감격스러워했다. 게다가 그는 자신이 당신의 가장 열성적인 팬이자, 당신의 책을 읽고 누구보다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하며, '사실 당신은 그냥 도구일 뿐'이라고 하는데, 대체 그의 정체는 뭘까.
필립 로스는 자신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소설을 여러 편 집필했는데, 이번 작품에선 그중 가장 미스터리한 방식으로 등장한다. 가짜 자신에 대한 소식을 들은 뒤 확인을 위해 연락처를 알아내 통화를 할 때도, 사칭범은 자신을 '필립 로스'라고 소개한다. 정말로 그 작가계요? <포트노이의 불평>의 작가? 라고 필립 로스가 되묻자, 사칭범은 그래요, 그래요. 누구십니까? 라고 대꾸한다. 그래서 통화하는 내내 진짜 필립 로스는 아무렇게나 고른 이름을 붙여 자신이 기자인 척 그와 통화를 한다. '수화기 저편에서 놈은 내 행세를 하고, 나는 이쪽에서 내가 아닌 척한다는 사실이 뜻밖에도 사육제처럼 사람을 들뜨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미스터리로 시작했던 이 작품은 점차 첩보소설로 전개된다. 사칭범을 대면하기 위해 방문한 예루살렘의 상황이 나치 집권기의 수용소 간수로 의심받는 인물의 재판이 한창이고, 팔레스타인인의 봉기는 점차 격화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나와 나란히 당신의 목을 매달 거요. 물론, 그들이 당신을 또 다른 필립 로스로 착각한다면, 당신은 조금이나마 희망을 품을 수 있을 거요. 그 필립 로스는 유럽 출신 유대인들이 훔친 땅에서 물러나 유럽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유럽 디아스포라가 그들에게 마땅하다고 주장했으니까. 그 필립 로스는 그들의 친구, 그들의 동맹, 그들의 유대인 영웅이었소. 그리고 그 필립 로스가 당신의 유일한 희망이오. 당신이 괴물로 생각하는 그자가 사실은 당신의 구원이라고. 그 사기꾼이 곧 당신의 무고함이오. 재판에서 그자 행세를 하면서, 온갖 속임수를 동원해 당신들 두 사람이 사실은 하나라고 믿게 만들어야 하오. p.502~503
<에브리맨>, <휴먼 스테인>에 이어 국내에 세 번째로 소개되는 필립 로스의 펜/포크너상 수상작이다. 극중 ‘필립 로스’가 자신의 사칭범과 만나면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과 그 이면의 첩보작전에 휘말리게 되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데, 묵직한 분량의 작품을 읽다 보면 누가 진짜이고 가짜인지, 무엇이 현실이고 허구인지 점점 혼란스러워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필립 로스를 사칭하는 수수께끼의 인물은 스스로 반유대주의와 싸우는 투사로 점점 파격적인 행보를 이어가고, 필립 로스의 친척은 제2차 세계대전 때 겪은 폭력의 후유증을 앓고 있는 것으로 나오며, 그 와중에 필립 로스는 이스라엘의 정치적 분쟁에 깊이 관여하게 된다.
이 작품은 필립 로스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에 관해 정면으로 다룬 최초이자 마지막 소설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묵직한 분량만큼이나 심도 있는 질문을 독자들에게 던진다. 유대인은 피해자인가 가해자인가. 억압받은 민족 혹은 소수자는 어떤 미래로 나아가야 하는가. 또한 특정한 민족 혹은 소수자 집단이 항상 피해자이거나 가해자일 수 없는 세계의 복잡성과 유대인의 정체성에 관한 깊이 있는 사유 또한 작품의 전면에 깔려 있다. 특히나 흥미로운 것은 현실의 경계를 의도적으로 애매하게 만들어 소설 형식을 뛰어넘는 포스트모던 문학으로서의 매력을 지닌다는 것이다. 서두에서 화자는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책을 썼음을 밝히지만, 마지막 장에서 '이 책은 허구다'라고 쓰여있기 때문에 이 작품은 실제로 작가가 전부 실제로 겪은 일일 수도, 혹은 전부 허구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게 현실의 경계를 지움으로써 문학적으로는 더욱 흥미진진하고 매력적인 작품이 되었다. 오래 전에 쓰인 작품이지만, 역사의 폭력은 계속되고 피해자와 가해자는 수시로 뒤바뀌고 있는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여전히 시사하는 바가 많은 이야기였다. 거장이 전성기에 남긴 압도적인 이야기를 경험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