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어 제인 오스틴 - 젊은 소설가의 초상 디어 제인 오스틴 에디션
김선형 지음 / 엘리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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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가는 18세기 영국에, 독자는 21세기 한국에 있으므로, 매일 한 문장 한 문장을 옮겨 쓰다보면 작가와 독자 사이의 한없이 멀고도 한없이 가까운 그 기이한 거리를 두뇌에서 손끝까지 말 그대로 온몸으로 겪고 그 간극 위에서 줄타기를 하려 애쓰게 됩니다.... 여러 작품을 이런 식으로 겪다보면 불가피하게 이 미시적 단위들의 기억이 몸에 쌓이고, 어느 순간 각 소설을 한 편 한 편 따로 읽을 때 스쳐 지나갔던 낱말들이나 표현들이 갑자기 서로 연결될 때가 있어요. 퍼즐 조각이 맞춰지듯, 머릿속 전구에 팍 불이 들어오면서, 작가의 의도가 문득 명징하게 떠오르는, 그런 신나는 순간 말이에요.            p.83


'제인 오스틴의 편지함'이라는 뉴스레터로 발행되었던 서른 번의 편지와 미공개 글들이 더해져 한 권의 책이 되었다. 제인 오스틴의 모든 것이 담긴 백과사전이자 문학 번역가의 작업 과정을 엿볼 수 있는 에세이이다. 이 책에서 김선형 번역가는 제인 오스틴에 대한 애정을 평생 품어온 ‘덕후’로서의 면모와 수많은 문학 작품을 번역해 온 베테랑 번역가로서의 모습을 함께 보여준다. 작가와 작품에 대한 연구, 수많은 문학인들이 쓴 오스틴론 등 마치 제인 오스틴에 대한 너무 재미있는 강의를 듣는 듯한 시간이었다. 이런 에세이가 앞으로도 두 권이나 더 나올 예정이라 너무 너무 좋다. '디어 제인 오스틴 에디션' 시리즈는 제인 오스틴이 태어난 지 정확히 250주년이 되는 2025년 12월 16일을 시작으로, 매년 두 권씩 삼 년에 걸쳐 순차적으로 나올 예정이다. 그리고 두 작품에 대한 번역가의 에세이도 해마다 함께 출간된다는 것이 선물처럼 느껴진다. 


제인 오스틴의 작품들은 여러 출판사의 다양한 역자 버전으로 읽어 왔다. 다양한 판본으로 가지고 있지만, 매번 홀린 듯이 데려오게 되는 것 같다. <오만과 편견>을 읽으며 19세기 여성의 사랑과 결혼에 대한 이야기가 21세기에도 웃음을 자아내고,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니 감탄하고, <이성과 감성>을 읽으며 로맨스, 이성과 감성의 대립 구도 외에도 당대의 중요한 정치, 사회적 이슈를 반영하고 있으며 날카로운 사회적 문제의식을 문학적으로 매우 뛰어나게 구현시켰다는 점에 놀란다. 특히 이번에 나온 '디어 제인 오스틴 에디션'이 특별한 것은 바로 '각주'에 있다. 고전 문학을 읽을 때, 대부분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옮긴이의 주석에 주목해야 한다. 김선형 역자의 각주들은 일부러 찾아서 읽고 싶을 만큼 깊이 있고, 재미있으니 말이다. 또한 작품에서 매우 중요하게 쓰이는 표현에 대한 원문과 해석, 단어의 문맥적 의미 등 깨알같은 팁들로 가득하다. 각주를 잘 따라가다 보면 시대적, 사회적 맥락을 더욱 잘 이해해 이 작품을 더 풍부하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제가 이 소설들에서 화자의 목소리를 경어체로 설정한 가장 주된 이유는, 이처럼 인물들의 다양한 목소리들을 자유간접화법 속에 포괄하는 제인 오스틴의 천재적인 서술 방식을 한없이 유연하게 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음에 읽어보실 때는─ 오스틴은 결코 한 번만 읽고 영원히 덮어두는 작가가 아니니까요!─ 화자가 서술 속에서 어떻게 변신하는지를 유심히 잘 살펴보세요. 그러면서 작가뿐 아니라 번역가의 움직임을 추적하면 색다른 관점에서 이 재미있는 책을 더욱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거예요.             p.225


이 책을 읽으며 새삼 번역이 왜 중요한지, 누가 번역하느냐에 따라 작품이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에 대해서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번역만으로는 옮길 수 없는 중요한 행간'에 대해 고민하는 김선형 번역가에게 완전히 반해버렸다. 제인 오스틴의 '톤'을 자신만의 문장으로 포착하고 싶었다는 김선형 번역가는 그 과정을 '비평이자 고백이자 번역'이라고 칭했다. 번역가는 원본 텍스트가 정해준 큰 틀의 목소리 안에서 모어로 작동할 수 있는 또 다른 큰 틀의 목소리를 제일 먼저 구상하고 결정해야 한다고, 텍스트는 그대로여도 언어의 지형이나 번역하는 사람이 바뀌거나 시대와 배경이 달라지면 그 '톤'은 무한대로 달라질 수 있다고 말한다. 김선형 번역가의 글은 인공지능이 아무리 긴 텍스트라도 삽시간에 무수한 언어로 번역해 내놓는 시대에, 더디고 취약한 사람 문한 번역가의 존재, 그 가치에 대해서 깨닫게 해준다. 


<이성과 감성> 1부 2장은 풍자와 유머, 심리적 리얼리즘과 사회 비판이 완벽하게 결합된 위대한 문학적 성취라는 점과 1부 22장에서는 이성과 감성을 오가던 sensible이라는 단어가 결정적인 어느 순간 극적으로 '이성적으로 이해하다'와 '감성으로 느끼다'를 모두 품게 되는 대목이 등장하며 오스틴의 초기 소설에서 특정한 유의 인물들을 묘사할 때 꼭 등장하는 air라는 단어의 쓰임새를 보여주는 <오만과 편견> 1부 15장 등 단어, 구절, 문장 단위로 제인 오스틴이 어떤 작가인지 보여주는 작품 분석이 정말 흥미진진했다. 이 에세이를 읽고 나니 <오만과 편견>과 <이성과 감성>을 처음부터 다시 읽고 싶어질 정도로 너무도 충만한 시간이었다. 문학을 번역하는 사람이 맞닥뜨리는 딜레마, 인물들의 육성이 지닌 리듬과 강렬한 고유성을 문체의 힘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번역의 과정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어 감동적이기도 했다. 문학 번역이라는 비현실적이리만큼 느리디느린 읽기의 과정을 엿볼 수 있어 너무 행복했다. 김선형 번역가님이 그 동안 작업하신 작품들을 거의 다 읽었는데, 하나씩 다시 꺼내어 읽고 싶어졌다. 아, 올해 12월까지 어떻게 기다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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