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주류 연애 블루스
한상운 지음 / 네오픽션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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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 다니는 성욱은 7년을 사귄 검사 여자친구 인영에게 차였다. 원고 마감이 늦어져 야근을 하느라 무려 3주 만의 데이트였다. 대체 뭐가 문제인지 이유라도 알자는 그에게, 인영은 "재미가 없어."라고 말한다. 7년 하고도 5개월 이틀을 만났는데, 그 동안 한 일이라고는 밥 먹고 가끔 잠자고 그게 전부였다고. 이제는 달라지고 싶다고 말이다. 차가운 봄비를 맞으며 바깥으로 나온 그는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늘씬한 미녀를 만나 홀리듯 그녀를 따라 영화관에 들어간다. 그녀와 멀리 떨어진 자리에서 영화를 같이 보고, 함께 버스를 탔지만 말 한마디 건네보지 못하는 소심한 우리의 주인공. 그런데 버스정류장에 검정색 벤츠가 급하게 세워지더니, 30대 초반의 남자가 내려 다짜고짜 그녀의 머리채를 잡고 뺨을 갈기며 내가 그렇게 우습게 보였냐며 소리친다. 정류장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남자의 난폭함에 누구 하나 나서질 못하고, 다른 때라면 도망쳤을 성욱은 그날 여자친구에게 차인 충격 때문인지 그 동안 꾹꾹 누르기만 해온 감정들과 분노가 한꺼번에 치밀어 그에게 덤벼들고 만다. 벤츠에 타고 있던 운전사가 내리면서 트럭에 치여 죽으면서 상황은 일단락이 되지만, 그는 이미 엉망이 되도록 맞은 상태이다. 여자 친구에게 차인 날, 생전 처음 보는 남자에게 얻어맞고 아무도 없는 뒷골목 구석에서 비를 쫄딱 맞고 있는 신세라니, 왜 이렇게 재수가 없는 걸까 생각했지만, 그렇게 인연이 되어 그는 아리따운 그녀, 수정과 하룻밤을 함께 보내게 된다. 하지만 우연히 휘말린 이 사건으로 인해 그의 앞날은 평탄치 못하게 흘러간다.

성욱은 침을 삼켰다. 괜찮을까? 그가 하려는 일이 과연 옳은 일일까? 입술을 깨물었다. 옳냐, 올지 않느냐는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오직 행동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전직 경찰로 해결사인 일도는 대한민국 제일의 사채업자인 방성환의 의뢰를 받는다. 그의 아들 방태수가 바로 버스 정류장에서 수정을 난폭하게 폭행했던 벤츠의 그 남자였던 것이다. 그는 아들과 잠깐 사귀었다가 돈을 가지고 도망쳤던 여자를 찾아달라고 일도에게 의뢰를 한다. 아들이 뒤통수를 맞은 것이 자존심이 상했던 것이다. 그는 수정을 찾아내기 위해 뒷조사를 시작하고, 성욱과 수정 모두 쫓기는 신세가 된다. 수정이 근무하던 다이어트 회사의 사장이 방태수였고, 불법적인 운영을 하는 것을 수정이 알게 되어 회사를 나와 협박 받는 신세가 되었던 것이다. 성욱은 위험한 일이라는 걸 알지만, 수정을 도와 증거물과 돈을 거래하는 것을 돕기로 하지만, 거래 장소에서 수정은 방태수를 차로 치여 죽이고 혼자 사라져버린다. 방태수의 비서인 석구는 그녀가 사실은 꽃뱀에 사기 전과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성욱은 그녀의 정체에 대해 알 수 없지만 어쩐지 그녀를 믿어주고 싶다. 그렇게 이리저리 얽히고 설켜 인물들이 엮이고, 사건은 점점 막바지로 치달아간다.

지금껏 목적 없이 그럭저럭 살았던 성욱의 인생에 '단 하나의 동기' 같은 게 생겨버린 이후, 그는 갑자기 평범하고 소심한 남자에서 용기 있고 정의로운 인물이 되어 간다. 수정과 함께라면 뭐든 해낼 수 있을 거란 믿음이 그에게 그런 무모한 용기를 심어 주었던 것이다. 매번 시험에 낙방하기 전까지만 해도 자심 감이 넘치던 시절이 있었지만, 그렇게 몇 년을 허탕 친 후에 간신히 출판사에 취직한 이후로는 대충대충 시간을 때우면서 늘 성공한 친구들의 험담으로 시간을 보냈던 그였다. 그런데 이 사건을 계기로 자신도 달라져야 할 때라는 걸 스스로 깨닫게 된 것이다.

'여기 이 비열한 거리를 지나가야만 하는 한 남자가 있다. 그 자신은 비열하지도 않으며 세속에 물들지 않았으며 두려워하지도 않으면서.'

작가는 레이먼드 챈들러의 이 구절을 읽으며 어둡고 을씨년스러운 거리를 꿋꿋하게 걷는 한 남자의 뒷모습을 떠올렸다고 한다. 어쩌면 비열한 거리를 걷는 그 남자는 그냥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하고 소심한 남자일지도 모른다고, 단지 지켜야 할 무언가가 있기에 이를 악물고 버티는 게 아닐까 하고. 그것이 이 작품의 시발점이다. '비주류 연애 블루스'라는 말랑말랑한 제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지만 말이다. 그렇다. 사실 제목과 표지의 분위기만 보고는 가벼운 멜로 인줄 알았는데, 웬걸 진행되는 스토리는 다소 어둡고, 긴박감 있고, 흡사 스릴러 영화라도 한 편 본 것 같은 느낌마저 준다. 영화 '비열한 거리' 처럼 변해가면서 성숙해져 가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그리고 싶었던 거라면, 왜 이런 의문스러운 제목을 달아놓았는지 의아할 정도로 말이다. 무엇이 평범한 남자를 비열한 거리에서 버틸 수 있게 만드는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라면, 그에 맞는 제목을 달아두었다면 훨씬 더 많은 낫지 않았을까. 이야기는 재미있었는데, 제목 때문에 어쩐지 스파게티를 뚝배기 그릇에 담은 듯한 어색함이 남아 아쉬웠다.

하지만 스피디하게 진행되는 스토리는 흥미로웠고,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평범한 플롯이었지만 우리의 주인공이 스스로를 극복해나가는 과정은 공감할만했다. 게다가 지루하지 않아 킬링 타임 용으로는 나쁘지 않은 작품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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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레논 레터스
헌터 데이비스 지음, 김경주 옮김 / 북폴리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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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작가이자 사상가인 모리스 블랑쇼는 소통의 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글로 쓰는 말들은 고유의 목소리와 영혼, 공간, 대기를 갖는다. 말은 말 자체로 존재함과 동시에 그 의미가 가리키는 장소로 독자를 운반해 가는 힘을 지녀야 한다."

비틀즈와 존 레논이라는 엄청난 스타에 대해서는 이미 숱한 평전들이 출간되었었지만, 이번 작품집은 또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나 생각한다. 단순한 평전이 아니라 존 레논이 주변 사람들에게 보낸 엽서와 편지들을 긴 세월에 걸쳐 찾아 모으고 복원해서, 비즐트 공식 전기 작가인 저자의 해석을 곁들여 엮어 낸 책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날 것 그대로의 생생한 존 레논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점에서 그의 팬이라면 더할 나위 없는 선물이 될 것이다.

존 레논은 기쁘거나 짜증나거나 증오심이 치밀거나, 유쾌하거나 화가 나는 그 모든 순간에 자신의 감정을 음악뿐만 아니라 글로도 남겼다고 한다. 그는 영감이 떠오르거나 누군가와 소통하고 싶을 때면 언제나 자연스럽게 펜과 종이를 꺼내 들었다고 한다. 가족, 친구, , 신문사 등에 타자기로 편지와 엽서를 써서 보냈다고 하는데, 이 책을 읽다 보면 그의 위트와 설득력, 지혜로움 뿐만 아니라 분노와 고뇌까지 엿볼 수 있다. 그가 작사한 노랫말과 시집 두 권은 대중에게 알려져 있지만, 그가 남긴 편지들을 출판하는 것은 이 책이 처음이라 가치가 충분히 있는 것 같다.

 

소설가 E.M.포스터는 편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편지는 좋은 편지로 분류되기 전 두 가지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우선 쓰는 사람의 인간성을 드러내야 하고, 그 다음으로 받는 사람의 인간성을 드러내야 한다."

저자는 존의 친척과 친구, 팬들과 애인, 심지어 세탁소 앞으로 쓴 편지와 엽서까지 무려 300여 점을 추적해서 그것들을 수집했다. 그리고 편지의 사연을 하나하나 소개하고, 편지들이 쓰일 당시에 존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누구에게 썼고 어떤 내용과 맬락의 편지인지를 상세하고 설명해주고 있다. 우리는 그 편지를 통해서 존의 삶과, 당시 그가 가졌던 고민과 두려움, 열정 등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천재적인 뮤지션이 아니라 인간 존 레논의 맨 얼굴을 만나는 기분이 들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나니, 얼마 전 고인이 된 가수 신해철씨가 자꾸 생각이 났다. 의료사고일지도 모르는 죽음에 대한 문제로 아직 시끌시끌하지만, 너무도 젊은 나이에 맞이하게 된 죽음이라 가족들도, 팬들도 쉽게 그를 놓을 수 없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특히나 음악인의 죽음은 그가 떠나도 우리 곁에 그 음악이 항상 있기 때문에 더욱 애잔하고, 그 슬픔이 오래 가는 거 아닐까. 비단 그 뿐만 아니라 이른 나이에 죽음을 맞이해야 했던 존 레논을 비롯해서 여러 유명인들이 젊은 나이에 불꽃처럼 생을 피우다 갔다. 꽉 차지 못한 이른 죽음은 어딘지 황망한 기분을 주변인들에게 떠 남기고 만다. 물론 저 곳으로 가야 하는 그의 발걸음도 그들을 보며 쉽사리 뗄 수 없겠지만 말이다. <존 레논 레터스>가 너무도 알차게, 소중한 정보들을 모아 만든 책이라 그런지 신해철씨를 비롯해서 젊은 나이에 유명을 달리한 이들의 이런 책이 또 출간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남긴 글들과 생의 자취들을 따라가며, 남겨진 이들이 그를 더욱 오래 기억할 수 있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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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어 그릴스, 뜨거운 삶의 법칙
베어 그릴스 지음, 김미나 옮김 / 이지북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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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으로부터 내가 배운 것은 가장 어두운 시간을 지나고 나서야 새벽이 온다는 것이다.

디스커버리채널의 모험 프로그램 [Man vs. Wild] [Born Survivor] 등에 출연하면서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베어 그릴스의 책은 국내에 여러 권 나와 있다. 사막에서 살아남기, 숲 속에서 살아남기, 정글에서 살아남기, 늪지대에서 살아남기 등등 제목만 들어도 극한체험 같은 그의 '무한도전'을 그리고 있는 책들이다. 그는 이미 국내에서도베어 형이라는 친근한 별명으로 불리며 두터운 마니아 층을 형성하고 있다고 한다. 디스커버리채널의 모험 프로그램은 최소한의 장비만 가지고 극한의 환경에서 살아남는 여러 가지 생존 기술을 보여주었고, 그 덕에 그를 지구상 그 어떤 혹독한 야생에서도 살아남은 남자, 생존 왕으로 불리게 해주었다. 이 책은 그의 가족 이야기와 어린 시절 이야기부터 전 세계 최강 영국 군특수부대 SAS에 입대하기까지 겪었던 혹독한 일들, 척추뼈 세 개가 부러져 다시 걸을 수 없을지 모르는 고통 속에서도 에베레스트 등반을 꿈꾸고 결국 그것을 실현한 그의 실제 삶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흉터와 부러진 뼈들, 끊어질 것처럼 아픈 사지와 욱신거리는 등에 대해 말하자면, 그것들은 내게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일깨워주는 작은 암시 같은 것들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저 아마도, 내가 인정할 수 있는 것보다 실은 내가 훨씬 더 연약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극지, 사막, 바다, 정글 인간은 인간이 도저히 생존할 수 없는 곳에서 조난을 당하고 또한 이겨내는 세계 최고의 탐험가 베어 그릴스는 사실 유명한 정치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게다가 왕족들이 유학을 간다는 영국 명문대 출신이고 말이다. 머리도 좋고 공부도 잘했고, 가문도 좋았던 그가 왜 이리 험난한 삶을 선택하게 되었을까. 삶에서 벌어지는 모든 선택은 계획적인 부분보다는, 우연인 경우가 많다. 그의 단짝 친구 트러커와 대학의 예비 장교 훈련소에서 SAS 출신 장교의 모습에 자극을 받고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군인에 대한 꿈을 키워나가게 된다. 그런데 SAS 입대 후 낙하산 추락 사고로 일생일대의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이다. 그때 그는 앞으로 걸을 수 없을지도 모르는 상황에 놓였지만, 그런 엄청난 절망 속에서도 에베레스트 등반을 꿈꿨다. 항상 모험을 즐겼던 아버지의 영향이기도 했고, 그는 결국 인생 최대의 위기를 극복한 이후 끝내 등반에 성공한다.

 

그는 남들이 다 하는 일, 남들이 다 가는 길이라서 가야겠다고 생각하지 않고, 스스로의 삶을 개척하고, 직접 경험한 것들을 통해 삶의 지혜를 깨닫는다. 불의의 낙하산 사고로 척추가 세 조각으로 부러지면서 의가사 제대를 한 그가 기적적으로 몸이 회복되자마자 2년 만에 세계 최연소 에베레스트 정복으로 기네스북에 이름을 올렸던 것도 그의 정신력이 가장 큰 힘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때 나이는 불과 스물셋이었으니 말이다. 이후 그는 세계 곳곳을 누비며 획기적인 탐험을 성공적으로 할 수 있었다. 가장 큰 위기가 그의 삶에서 가장 큰 도전이 되었던 셈이다.

이 책을 읽는데, 문득 얀 마텔의 <파이 이야기> 한 장면이 떠올랐다. 동물들을 싣고 캐나다 이민 길에 나선 어린 10대 소년 파이가 배가 난파된 뒤 살아남은 사나운 호랑이와 함께 227일 동안 태평양을 표류한 그 이야기에 말이다. 먹고 마실 것도 없거니와, 몸을 따뜻하게 할 것도 없고, 상어 떼의 습격을 받을 수도, 리차드 파커라는 이름의 호랑이에게 물려 죽을 수도 있는 고독하고도 무시무시한 상황에 처한 소년 파이야 말로 극한의 상황에 처한 인간의 한 단면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니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순간에 약간 싸우다가 희망을 놓아버리거나, 한숨지으며 살기를 포기하거나, 혹은 어떤 대가를 치르든 싸우고, 불확실한 희망에 모든 것을 건다. 어린 소년 파이는 명백하게 후자였다. 게다가 그는 살겠다고 결심한 이후, 쳐다보고 있기만 해도 무서운 호랑이를 길들여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그는 마음 한편으로는 호랑이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호랑이 마저 없었다면 막막한 태평양 한 복판에서 절망을 껴안은 채 자신 혼자 남겨질테니까 말이다. 절망이 호랑이보다 훨씬 무서운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렇게 어린 소년이, 그것도 희망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어쩐지 베어 그릴스 또한 늘 이와 같은 상황에서 파이와 같은 선택을 하는 게 아닐까 싶어 책을 덮으면서 뭉클해졌던 것 같다. 살아 있다면 모든 순간이 서바이벌 상황이다. 우리는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인간이니까. 내 앞에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그러니 살아있는 모든 순간을 즐겨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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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취록 - 조선 최고의 예언서를 둘러싼 미스터리
조완선 지음 / 북폴리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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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가 되면 사람들은 올해 내 운수가 어떨지 토정비결을 보곤 한다. 몇 년 전부터는 타로 점까지 가세해서 카페에서 쉽게 운을 점쳐 볼 수 있는 시대이니, 다들 재미로라도 한 번쯤은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라. 자신의 미래를 정확히 맞췄던 적이 있을까. 그 누구도 인간의 미래를 내다볼 수는 없다. 그저 심리적인 위안을 위해서, 단순한 오락거리로 재미 삼아 보는 거지만, 그래도 내심 마음 한 켠에선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불안한 내일이 궁금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그게 대체 어떤 책이길래 사사건건 끼어드는 거요? 이게 정말 팔자를 고칠 정도로 값이 나가는 책입니까?”

안기룡의 아내도 그런 소리를 했다. 이 책 한 권이면 팔자를 고칠 것이라고.

“하여튼 귀신이 붙은 책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소.”

“귀신이 붙은 책이라뇨?”

“이 책과 엮인 자들은 죄다 저 세상으로 갔으니 말이오. 그러니 귀신 들린 책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섬뜩한 소리였다. 명준은 자신도 모르게 움찔거렸다

조선 중기 이후 민간에 성행하였던, 국가운명에 관한 예언서로 '정감록'이라는 것이 있었다. 비록 허무맹랑한 도참설·풍수설에서 비롯된 예언이라 하지만, 당시 오랜 왕정에 시달리며 조정에 대해 실망을 느끼고 있던 민중들에게 끼친 영향은 지대하였다고 한다. 실제로 광해군·인조 이후의 모든 혁명운동에는 거의 빠짐없이 정감록의 예언이 거론되었다고 하니, 그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비취록>은 바로 이 '정감록'에서 모티브로 삼아 시작된 작품으로 19세기의 예언이 21세기의 현실로 나타난다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조완선 작가의 전작인 <외규장각 도서의 비밀>, <천년을 훔치다>를 떠올려보자면, 비록 '비취록'이 허구의 예언서이지만 얼마나 설득력 있게 그려질지 짐작이 될 것이다. 게다가 전체적으로 추리소설의 플롯을 가지고 치밀한 역사 고증을 통해 이야기를 꾸려가고 있어 매우 흥미진진한 스토리가 펼쳐지고 있다.

이야기는 고서 감정 전문가이자 역사학자 강명준 교수에게 누군가 방문하면서 시작된다. 고서점을 운영하는 최용만으로 '비취록'이라는 예언서를 들고 나타나 다짜고짜 진품 여부를 확인해 달라고 하는데, 한눈에도 심상치 않은 책이라는 것을 직감하게 된다. 그런데 그는 다시 오겠다는 말만 남긴 채 일부 복사본 샘플만 던져주고 사라진 뒤 연락이 없다. 그리고 며칠 뒤 수상한 전화가 걸려와 강교수를 협박하고, 이어 강력계 형사가 찾아와 최용만이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알려준다. 그리고 계룡사에 은둔한 사찰 쌍백사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은 해광스님의 사인을 밝히기 위해 유정스님이 도착한다. 쌍백사라는 곳은 여러모로 일반 사찰과는 달랐는데, 해광이 남긴 수첩 속의 문구들은 그런 의심을 더욱 기폭 시켰다. 이렇게 두 가지 이야기가 병행되면서 진행이 되는데, 결국 쌍백사라는 교집합에 의해 이야기에 가속도가 붙기 시작한다. 최용만이 죽고, 그를 살해했을 것으로 보이는 용의자 안기룡마저 살해당하고, 그들 두 사람이 쌍백사와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알고 두 형사가 사찰에 방문하지만 또 다른 죽음을 목격하게 된다

'이 고서에 적힌 대로라면...... 그러니까.....조만간 우리나라에......아주 심각한 일이.....벌어질 것 같단 말이지. 흠흠, 내가.... 예언 글귀를 좀..... 풀 줄 아는디 말이여. 청양지세는 을미년, 바로 올해를 말하는 게 아니유?'

최용만의 목소리였다. 그는 실종되기 전에 연구실로 전화를 걸어 이 같은 소리를 늘어놨었다. 조금씩 꼬인 매듭이 풀어지고 있었다.

마치 사이비 종교처럼 보이는 수상한 종교단체부터, 옛 고서의 비밀을 파헤쳐가는 이야기까지 추리 소설로서의 긴장감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어 역사 소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나에게도 수월하게 읽혔던 작품이다. 20세기 초반에 한때 각종 예언이 범람했었지만, 시대는 어느덧 21세기에 이르렀다. 과연 예언서는 미래를 보는 눈일까.에 대해 의문을 가져볼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예언서가 불행에 빠진 당시 사회의 열망을 담고 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진인이 출현하여 혼탁한 이 세상을 뒤엎고 백성을 구제할 것이라는 예언은홍경래의 난이 있던 시절이나, 어쩌면 어지러운 지금이나 마찬가지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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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메시스 - 복수의 여신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4
요 네스뵈 지음, 노진선 옮김 / 비채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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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는 이, 눈에는 눈'. 복수의 제1원칙이다. 내 가족이 죽었으므로 너의 연인이 죽어야 한다. 내 조카가 자살했으므로 너의 가족이 고통 받아야 한다. 내가 고통 받았으므로 너 또한 상처받아야 한다. 누구에게 벌을 준다는 것은 자신의 척도로 세상을 재단하는 일이다. 그러나 국가가 독점하고 있는 권리를 탈취해 누군가에게 사적으로 복수하는 일은 금지되어 있다. 돈이나 권력 같은 외적 이유에 의한 폭력과 달리 내적 동력에 이끌리는 '복수'는 폭력의 본질이 엿보인다는 점에서 더욱 무시무시해질 수 있다. 그래서 복수를 하는 그들 행동의 정당성은 법이나 도덕이 아니라, 그들이 '당한 바'로 부터 나오며, 주체의 의지나 결단도 무의미하다. 이 작품의 제목인 <네메시스>는 정의와 복수의 여신이다. 로마인들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네메시스를 슬쩍 훔쳐다가 자기들만의 여신을 만들었다. 저울은 그대로 두고 채찍 대신 칼을 쥐여준 다음, 눈에 안대를 둘러주고 유스티티아라고 불렀다. 그리고 로마인들은 직접 갚아주는 복수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해서, 개인적 차원이었던 복수를 공적인 업무로 바꿔버린다. 이것이 바로 근대 입헌국의 상징이 된다. 맹목적 정의. 그리고 차가운 복수.

 

요 네스뵈가 <네메시스>를 쓴 것은 2002년으로, 9.11테러가 발생한 지 1년 뒤이다. 그러니까 미국이 이슬람 국가들을 상대로 엄청난 군사력을 동원하여 그야말로 두 눈 시뻘겋게 뜨고 복수를 할 때이다. 9.11 테러는 많은 사상자와 재산적인 피해뿐만 아니라 미국의 자존심에 커다란 상처를 남겼기에, 테러의 수장인 빈 라덴을 잡기 위해 무려 10년 동안 엄청난 예산을 쏟아 붓는다. 요 네스뵈는 그러한 미국의 복수를 은근히 바닥에 깔고, 한 인간이 계획할 수 있는 최고의, 철두철미하면서도 냉철한 복수 보여준다.

 

 

, 여기 아무런 단서도 남기지 않은 은행강도 사건과 정황상 의심 없이 자살로 보이는 사건이 있다. 우선 첫 번째, 한 남자가 백주대낮에 사람들로 붐비는 은행에 걸어 들어가 200만 크로네를 강탈하고, 여자까지 죽였다. 그러고는 유유히 걸어 나가 노르웨이 수도 한복판에 있는, 비교적 인적이 드물기는 해도 차량 통행량이 엄청나게 많은데다 경찰서에서 불과 몇 백 미터 떨어지지 않은 거리로 도망쳤다. 그런데 경찰에선 수사를 계속할 단서가 하나도 없는 상태이다. 그리고 두 번째, 해리에게 7년 전에 고작 6주 동안 사귀었던 옛 애인에게서 오랜만에 연락이 온다. 그들은 가볍게 술을 한잔 하고 안나의 집에 들러 그녀가 작업 중인 작품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녀의 저녁 초대를 받았던 다음 날, 그는 숙취를 느끼며 잠에서 깬다. 전날의 기억이 전혀 생각나지 않은 채로. 며칠 뒤, 우연히 출동한 사건 현장에서 그녀의 시체를 발견한다. 아무도 그녀의 자살을 의심하지 않았고, 그날 밤 안나의 집에 있었던 해리는 기억나는 것이 하나도 없는 상태이다.

 

이 작품은 구조가 완벽하게 짜여진, 플롯이 치밀하게 계획된 소설이다. 작품의 구상 단계에서 부터 시놉시스를 여러 번 고쳐 쓰는 바람에 나중에는 했던 이야기를 다시 한다는 느낌마저 들었을 정도라고 한다. 일년에 걸쳐 이야기의 골조를 설계했고, 특히 초반 십여 페이지에 특별히 공을 들였다고 하는데, 그 결과 남은 이야기 전부를 지배할 수 있을 만한 첫 장면, 모든 것이 그 한 장면에 달려 있는 그런 장면이 탄생한다. "나는 곧 죽을 것이다"로 시작하는 인상적인 모놀로그는 후반부에 다시 변주되며 두 건의 살인사건을 관통하는 단 하나의 동기로 연결된다. 이어지는 은행강도 사건에 대한 묘사는 거의 초단위로 진행되어, 내가 마치 그 시간, 그곳에서 사건을 목격하는 것만 같은 짜릿함을 안겨준다. 복면을 한 은행강도와 은행원인 스티네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건은 굉장히 압도적인 인상을 남겨준다. 1 3초 만에 은행털이는 끝나고, 돈은 강도의 배낭에 담기고, 2~3분 후면 경찰차가 도착하려는 그 짧은 찰나의 순간. 강도는 이제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완벽하게 끝났으므로 그대로 도주하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바로 거기서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강도가 달아나기는커녕 스티네의 의자를 돌려 그녀를 마주보며 무언가 속삭인다. 그리고는 총구를 그녀에게 겨누고 방아쇠를 당겨버린다. 대체 왜?

 

 

기본적으로 <네메시스>는 세 가지 사건이 소용돌이치면서 진행된다. 오슬로에서 연달아 발생하는 은행 강도 사건, 해리 홀레의 전 여자친구인 안나의 자살 사건, 그리고 전작인 <레드브레스트>에서 끝맺지 못했던 엘렌 사건에 대한 의혹이다. 우선 작품의 주요 플롯을 차지하고 있는 은행 강도 사건과 안나의 사건은 거의 전혀 교집합이 없어 보이는 동떨어지는 사건으로 보인다. 안나의 자살 사건에 대한 의혹이 해리로 하여금 혼자 수사를 하게 만들고, 하나씩 드러나는 증거들은 자살이 아니라 살인 사건으로 보인다. 문제는 누군가 그날 밤 해리가 안나의 집에 있었다는 걸 알고, 그를 점점 용의자로 몰고 간다는 것이다. 해리는 자신을 협박하는 이메일 발신자를 추적하는 한편, 안나의 살인 사건을 독자적으로 수사해나간다. 은행강도 사건의 피해자인 스티네 그레테의 남편인 트론 그레테의 형은 신출귀몰한 강도로 전설적인 인물은 레브 그레테이다. 안나의 삼촌인 라스콜은 현재 수감 중이지만 스스로 자수하기 전에는 단 한번도 잡힌 적이 없는 은행강도이다. 수사팀은 라스콜에게 은행 강도 범인에 대한 자문을 구하고, 그는 사건 현장에 대한 영상을 보고 범인으로 레브를 지목한다. 그리고 해리의 새로운 파트너인 베아테의 아버지를 현장에서 죽게 만든 은행강도는 바로 라스콜이었다. (이쯤에서 조금의 스포일러를 감수하고 말하자면) 그래서 이들의 복잡하고도 다층적인 이야기가 '복수'라는 하나의 동기로 얽히게 되는 것은 결국 '사랑'으로 연결된다. 스티네와 트, 레브 형제의 스토리, 라스콜과 스테판 형제와 안나의 어머니인 마리아의 스토리, 안나와 내연관계에 있던 아르네 알부와 연인이자 약물 공급책이었던 알프, 그리고 잠깐 애인사이였던 해리 홀레와의 스토리. "인생에서 최악의 사건은 죽는 것이 아니다. 살아야 할 이유가 사라지는 것이다."라고 말했던 극중 누군가 처럼 삶의 의미를 잊어버린 그들은 복수를 하려고 한다. 복수야말로 신이 인간에게 준 가장 위험한 마약이니 말이다. 인간의 영혼은 비극이 주는 연민과 공포로 정화된다고 한다. 그래서 이들은 복수의 비극을 통해 영혼의 가장 깊숙한 욕망을 실현시키려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런 복수의 카타르시스가 그들을 정화시켜줄 수 있었을까?

 

이 작품은 레드브레스트, 데빌스 스타와 함께 오슬로 3부작으로 불린다. 배경이 거의 오슬로에만 집중되어 있고, 레드브레스트에서 시작된 엘렌 옐텐 사건 사건이 비로소 데빌스 스타에서 끝나기 때문이다. 국내에는 오슬로 3부작 중에 두 권이 출시되어있고, 데빌스 스타는 곧 출간될 예정이다. 대만에서는 이 오슬로 3부작을 박스 패키지로 별도로 판매를 했는데, 이미 품절된 곳도 있어 서점 몇 군데를 돌아 대만 성품 서점에서 구할 수 있었다. 특히 대만 판은 네메시스를 노르웨이 원제인 "Sorgenfri"로 출간했다. 극중 안나가 살던 곳인 소르겐프리 가는 그 유래에 대해 알아둘 필요가 있다. 소르겐프리는 크리스토프 왕의 소유였던 궁전 이름으로, 아이티의 왕이었던 크리스토프는 프랑스 군의 포로로 잡혔을 때 자살했다. 소르겐프리 성은 상 수시 성이라고도 불리는데, 둘다 아무런 근심 걱정이 없다는 뜻이라고 한다. 그러니 소르겐프리 가는 만사 태평한 거리라는 뜻이다. 하지만 그곳에 살던 안나의 삶은 그다지 근심과 슬픔 없이 흘러가지 않는다. 안나가 해리를 집으로 초대한 날, 그녀는 한 손에는 저울을, 다른 손에는 칼을 든 여자의 조각상이 달린 스탠드가 비추고 있는 그림을 보여준다. 세 구의 그림은 모두 누군가의 초상화였고, 아직 미완성인 이 작품의 이름은 복수의 여신인 '네메시스'라고 알려준다. 해리가 무심코 흘려 보고 지나가는 그 작품은, 결국 이 방대한 분량의 서사에 방점을 찍어주는 열쇠가 된다. 그러니 이 작품의 영문판과 국내판 제목이 <네메시스>인 것은 상당히 그럴 듯 하지만, 원제인 <소르겐프리>도 작품의 전체 분위기와 완전히 반어적인 느낌으로 매력적이다. 이 작품 어디에서도 소르겐프리의 뜻인 '슬픔없이, 만사태평으로, 근심 걱정 없이'의 분위기는 찾아볼 수 없으니 말이다. 

 

 

 어쩌면 이 작품에서 정말 재미있는 것은 두 가지 사건의 매우 실감나는 수사 과정, 꽤 많은 인물들을 엮어내는 기막힌 플롯, 형사인 해리가 살인 사건의 용의자가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 의문의 누군가가 보내는 이메일에 대한 의혹,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동기인 복수라는 매력적인 테마 뿐만 아니라 바로 해리 홀레가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엘렌 사건'에 대한 집착인지도 모르겠다. 오죽하면 해리가 은행강도 사건을 누구보다 빨리 해결하고 싶어하는 이유가 "그래야 다른 사건을 수사할 수 있으니까요" 였을까. 물론 이미 <레드 브레스트>를 읽었던 우리들은 엘렌을 죽인 진짜 범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다. 해리를 비롯한 극중 인물들만 모르고 있지만, 중요한 건 범인이 누구냐. 보다는 어떻게 범인을 찾아내느냐.에 있으니 우리는 엘렌 사건의 내막을 파헤치게 될 다음 작품인 <데블즈 스타>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사실 내부의 적이 보여지는 외부의 적보다 더 무섭고, 소름 끼치고, 완벽한 경우가 많은 건 실제 현실에서 벌어지는 사건 사고들의 보도에서도 숱하게 만날 수 있기도 하고 말이다. 해리는 파트너였던 엘렌 과의 추억을 끊임없이 상기시켜주고, 악몽을 꾸기도 하며, 새로운 목격자를 발견하기도 하고, 그 와중에 다른 사건들의 수사를 열심히 하지만 사건이 해결되어도 전혀 기뻐하지 않는다. 그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있는 엘렌 사건이 해결되기 전까지는 자신은 전혀 기쁘지 않을 거라고 틈만 나면 보스에게 반 협박을 하기도 한다. 해리는 엄청난 직관력으로 사건을 해결할 때는 정말 완벽한 형사처럼 보이지만, 알콜에 취약한 모습과 특정 사건에 집착하며 옛 동료와의 추억에 매달리는 모습은 너무도 인간적이라 안쓰럽기까지 하다. 시리즈로 전개되는 작품들의 유명한 캐릭터들이 꽤 많지만, 내가 그 중에서도 유독 해리 홀레를 사랑하고 편애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막무가내 식, 독불장군식이지만 사람냄새 나는 캐릭터성에 있다. 완벽하진 않지만, 오히려 불안정해 보이기까지 하지만, 그래도 정말 살아 숨쉬는 캐릭터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꼼꼼한 복선과 수많은 등장인물들을 치밀하게 엮어서 한 편의 거대한 퍼즐이 완성되는 이 작품에서는 아무런 상관도 없어 보이는 인물들, 그냥 스치듯 지나가는 대사 한 마디, 누군가의 행동들이 결국엔 모두 한 방향으로 흘러 마지막 결론에 이른다. 단순히 깜짝 쇼처럼 허를 찌르는 반전으로 끝내는 게 아니라, 치밀하게 계산되어 감탄사를 불러 일으키는 결론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복잡한 스토리가 톱니 바뀌처럼 맞물리면서 굴러갈 때의 그 짜릿한 즐거움이란 단순히 리뷰 몇 자로 끄적거려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아쉬울 정도이다. 요 네스뵈의 모든 작품들이 그러하지만 특히 <네메시스>는 그 어떤 장면도 '그냥' 흘러가는 법이 없어 진정한 페이지 터너가 아니었나 싶다. 이런저런 단서들은 극이 앞으로 나아갈수록 풍성해지고, 끝으로 향할수록 이야기는 폭발한다. 작가가 구축해놓은 이야기의 설계도가 완벽하고 탄탄해서 빈틈이 없어, 이 책을 읽는 그 누구라도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허우적거릴 수밖에 없는 그런 솜씨라는 말이다. 게다가 요 네스뵈의 글을 읽으면 장면들이 바로 머릿속에 영상화되어 보인다는 점 또한 매력적이다. 작법의 기본 원칙 중 하나가 바로 '설명하지 말고, 그냥 보여줘라' 인 것을 떠올려본다면, 그에 가장 부합되는 작품인 셈이다. 독자들이 머릿속에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언어를 빚어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는 적확하고 단단한 단어를 골라 쓰고, 어떤 순간의 본질이 포착될 수 있도록 구체적인 명사들과 역동적인 동사들을 찾아서 글을 빚어낸다. 그러는 와중에도 캐릭터의 매력과 유머를 잊지 않고, 꼼꼼하고 복잡하게 설계된 플롯은 방향성을 잃어버리지 않고 한 곳을 향해 질주한다. 600페이지가 훌쩍 넘는 이 두툼한 소설을 읽는 내내, 단 한 순간도 한눈을 팔 수가 없었는데,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하랴. 그저 직접 읽어보고, 체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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