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메시스 - 복수의 여신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4
요 네스뵈 지음, 노진선 옮김 / 비채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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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는 이, 눈에는 눈'. 복수의 제1원칙이다. 내 가족이 죽었으므로 너의 연인이 죽어야 한다. 내 조카가 자살했으므로 너의 가족이 고통 받아야 한다. 내가 고통 받았으므로 너 또한 상처받아야 한다. 누구에게 벌을 준다는 것은 자신의 척도로 세상을 재단하는 일이다. 그러나 국가가 독점하고 있는 권리를 탈취해 누군가에게 사적으로 복수하는 일은 금지되어 있다. 돈이나 권력 같은 외적 이유에 의한 폭력과 달리 내적 동력에 이끌리는 '복수'는 폭력의 본질이 엿보인다는 점에서 더욱 무시무시해질 수 있다. 그래서 복수를 하는 그들 행동의 정당성은 법이나 도덕이 아니라, 그들이 '당한 바'로 부터 나오며, 주체의 의지나 결단도 무의미하다. 이 작품의 제목인 <네메시스>는 정의와 복수의 여신이다. 로마인들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네메시스를 슬쩍 훔쳐다가 자기들만의 여신을 만들었다. 저울은 그대로 두고 채찍 대신 칼을 쥐여준 다음, 눈에 안대를 둘러주고 유스티티아라고 불렀다. 그리고 로마인들은 직접 갚아주는 복수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해서, 개인적 차원이었던 복수를 공적인 업무로 바꿔버린다. 이것이 바로 근대 입헌국의 상징이 된다. 맹목적 정의. 그리고 차가운 복수.

 

요 네스뵈가 <네메시스>를 쓴 것은 2002년으로, 9.11테러가 발생한 지 1년 뒤이다. 그러니까 미국이 이슬람 국가들을 상대로 엄청난 군사력을 동원하여 그야말로 두 눈 시뻘겋게 뜨고 복수를 할 때이다. 9.11 테러는 많은 사상자와 재산적인 피해뿐만 아니라 미국의 자존심에 커다란 상처를 남겼기에, 테러의 수장인 빈 라덴을 잡기 위해 무려 10년 동안 엄청난 예산을 쏟아 붓는다. 요 네스뵈는 그러한 미국의 복수를 은근히 바닥에 깔고, 한 인간이 계획할 수 있는 최고의, 철두철미하면서도 냉철한 복수 보여준다.

 

 

, 여기 아무런 단서도 남기지 않은 은행강도 사건과 정황상 의심 없이 자살로 보이는 사건이 있다. 우선 첫 번째, 한 남자가 백주대낮에 사람들로 붐비는 은행에 걸어 들어가 200만 크로네를 강탈하고, 여자까지 죽였다. 그러고는 유유히 걸어 나가 노르웨이 수도 한복판에 있는, 비교적 인적이 드물기는 해도 차량 통행량이 엄청나게 많은데다 경찰서에서 불과 몇 백 미터 떨어지지 않은 거리로 도망쳤다. 그런데 경찰에선 수사를 계속할 단서가 하나도 없는 상태이다. 그리고 두 번째, 해리에게 7년 전에 고작 6주 동안 사귀었던 옛 애인에게서 오랜만에 연락이 온다. 그들은 가볍게 술을 한잔 하고 안나의 집에 들러 그녀가 작업 중인 작품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녀의 저녁 초대를 받았던 다음 날, 그는 숙취를 느끼며 잠에서 깬다. 전날의 기억이 전혀 생각나지 않은 채로. 며칠 뒤, 우연히 출동한 사건 현장에서 그녀의 시체를 발견한다. 아무도 그녀의 자살을 의심하지 않았고, 그날 밤 안나의 집에 있었던 해리는 기억나는 것이 하나도 없는 상태이다.

 

이 작품은 구조가 완벽하게 짜여진, 플롯이 치밀하게 계획된 소설이다. 작품의 구상 단계에서 부터 시놉시스를 여러 번 고쳐 쓰는 바람에 나중에는 했던 이야기를 다시 한다는 느낌마저 들었을 정도라고 한다. 일년에 걸쳐 이야기의 골조를 설계했고, 특히 초반 십여 페이지에 특별히 공을 들였다고 하는데, 그 결과 남은 이야기 전부를 지배할 수 있을 만한 첫 장면, 모든 것이 그 한 장면에 달려 있는 그런 장면이 탄생한다. "나는 곧 죽을 것이다"로 시작하는 인상적인 모놀로그는 후반부에 다시 변주되며 두 건의 살인사건을 관통하는 단 하나의 동기로 연결된다. 이어지는 은행강도 사건에 대한 묘사는 거의 초단위로 진행되어, 내가 마치 그 시간, 그곳에서 사건을 목격하는 것만 같은 짜릿함을 안겨준다. 복면을 한 은행강도와 은행원인 스티네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건은 굉장히 압도적인 인상을 남겨준다. 1 3초 만에 은행털이는 끝나고, 돈은 강도의 배낭에 담기고, 2~3분 후면 경찰차가 도착하려는 그 짧은 찰나의 순간. 강도는 이제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완벽하게 끝났으므로 그대로 도주하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바로 거기서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강도가 달아나기는커녕 스티네의 의자를 돌려 그녀를 마주보며 무언가 속삭인다. 그리고는 총구를 그녀에게 겨누고 방아쇠를 당겨버린다. 대체 왜?

 

 

기본적으로 <네메시스>는 세 가지 사건이 소용돌이치면서 진행된다. 오슬로에서 연달아 발생하는 은행 강도 사건, 해리 홀레의 전 여자친구인 안나의 자살 사건, 그리고 전작인 <레드브레스트>에서 끝맺지 못했던 엘렌 사건에 대한 의혹이다. 우선 작품의 주요 플롯을 차지하고 있는 은행 강도 사건과 안나의 사건은 거의 전혀 교집합이 없어 보이는 동떨어지는 사건으로 보인다. 안나의 자살 사건에 대한 의혹이 해리로 하여금 혼자 수사를 하게 만들고, 하나씩 드러나는 증거들은 자살이 아니라 살인 사건으로 보인다. 문제는 누군가 그날 밤 해리가 안나의 집에 있었다는 걸 알고, 그를 점점 용의자로 몰고 간다는 것이다. 해리는 자신을 협박하는 이메일 발신자를 추적하는 한편, 안나의 살인 사건을 독자적으로 수사해나간다. 은행강도 사건의 피해자인 스티네 그레테의 남편인 트론 그레테의 형은 신출귀몰한 강도로 전설적인 인물은 레브 그레테이다. 안나의 삼촌인 라스콜은 현재 수감 중이지만 스스로 자수하기 전에는 단 한번도 잡힌 적이 없는 은행강도이다. 수사팀은 라스콜에게 은행 강도 범인에 대한 자문을 구하고, 그는 사건 현장에 대한 영상을 보고 범인으로 레브를 지목한다. 그리고 해리의 새로운 파트너인 베아테의 아버지를 현장에서 죽게 만든 은행강도는 바로 라스콜이었다. (이쯤에서 조금의 스포일러를 감수하고 말하자면) 그래서 이들의 복잡하고도 다층적인 이야기가 '복수'라는 하나의 동기로 얽히게 되는 것은 결국 '사랑'으로 연결된다. 스티네와 트, 레브 형제의 스토리, 라스콜과 스테판 형제와 안나의 어머니인 마리아의 스토리, 안나와 내연관계에 있던 아르네 알부와 연인이자 약물 공급책이었던 알프, 그리고 잠깐 애인사이였던 해리 홀레와의 스토리. "인생에서 최악의 사건은 죽는 것이 아니다. 살아야 할 이유가 사라지는 것이다."라고 말했던 극중 누군가 처럼 삶의 의미를 잊어버린 그들은 복수를 하려고 한다. 복수야말로 신이 인간에게 준 가장 위험한 마약이니 말이다. 인간의 영혼은 비극이 주는 연민과 공포로 정화된다고 한다. 그래서 이들은 복수의 비극을 통해 영혼의 가장 깊숙한 욕망을 실현시키려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런 복수의 카타르시스가 그들을 정화시켜줄 수 있었을까?

 

이 작품은 레드브레스트, 데빌스 스타와 함께 오슬로 3부작으로 불린다. 배경이 거의 오슬로에만 집중되어 있고, 레드브레스트에서 시작된 엘렌 옐텐 사건 사건이 비로소 데빌스 스타에서 끝나기 때문이다. 국내에는 오슬로 3부작 중에 두 권이 출시되어있고, 데빌스 스타는 곧 출간될 예정이다. 대만에서는 이 오슬로 3부작을 박스 패키지로 별도로 판매를 했는데, 이미 품절된 곳도 있어 서점 몇 군데를 돌아 대만 성품 서점에서 구할 수 있었다. 특히 대만 판은 네메시스를 노르웨이 원제인 "Sorgenfri"로 출간했다. 극중 안나가 살던 곳인 소르겐프리 가는 그 유래에 대해 알아둘 필요가 있다. 소르겐프리는 크리스토프 왕의 소유였던 궁전 이름으로, 아이티의 왕이었던 크리스토프는 프랑스 군의 포로로 잡혔을 때 자살했다. 소르겐프리 성은 상 수시 성이라고도 불리는데, 둘다 아무런 근심 걱정이 없다는 뜻이라고 한다. 그러니 소르겐프리 가는 만사 태평한 거리라는 뜻이다. 하지만 그곳에 살던 안나의 삶은 그다지 근심과 슬픔 없이 흘러가지 않는다. 안나가 해리를 집으로 초대한 날, 그녀는 한 손에는 저울을, 다른 손에는 칼을 든 여자의 조각상이 달린 스탠드가 비추고 있는 그림을 보여준다. 세 구의 그림은 모두 누군가의 초상화였고, 아직 미완성인 이 작품의 이름은 복수의 여신인 '네메시스'라고 알려준다. 해리가 무심코 흘려 보고 지나가는 그 작품은, 결국 이 방대한 분량의 서사에 방점을 찍어주는 열쇠가 된다. 그러니 이 작품의 영문판과 국내판 제목이 <네메시스>인 것은 상당히 그럴 듯 하지만, 원제인 <소르겐프리>도 작품의 전체 분위기와 완전히 반어적인 느낌으로 매력적이다. 이 작품 어디에서도 소르겐프리의 뜻인 '슬픔없이, 만사태평으로, 근심 걱정 없이'의 분위기는 찾아볼 수 없으니 말이다. 

 

 

 어쩌면 이 작품에서 정말 재미있는 것은 두 가지 사건의 매우 실감나는 수사 과정, 꽤 많은 인물들을 엮어내는 기막힌 플롯, 형사인 해리가 살인 사건의 용의자가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 의문의 누군가가 보내는 이메일에 대한 의혹,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동기인 복수라는 매력적인 테마 뿐만 아니라 바로 해리 홀레가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엘렌 사건'에 대한 집착인지도 모르겠다. 오죽하면 해리가 은행강도 사건을 누구보다 빨리 해결하고 싶어하는 이유가 "그래야 다른 사건을 수사할 수 있으니까요" 였을까. 물론 이미 <레드 브레스트>를 읽었던 우리들은 엘렌을 죽인 진짜 범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다. 해리를 비롯한 극중 인물들만 모르고 있지만, 중요한 건 범인이 누구냐. 보다는 어떻게 범인을 찾아내느냐.에 있으니 우리는 엘렌 사건의 내막을 파헤치게 될 다음 작품인 <데블즈 스타>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사실 내부의 적이 보여지는 외부의 적보다 더 무섭고, 소름 끼치고, 완벽한 경우가 많은 건 실제 현실에서 벌어지는 사건 사고들의 보도에서도 숱하게 만날 수 있기도 하고 말이다. 해리는 파트너였던 엘렌 과의 추억을 끊임없이 상기시켜주고, 악몽을 꾸기도 하며, 새로운 목격자를 발견하기도 하고, 그 와중에 다른 사건들의 수사를 열심히 하지만 사건이 해결되어도 전혀 기뻐하지 않는다. 그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있는 엘렌 사건이 해결되기 전까지는 자신은 전혀 기쁘지 않을 거라고 틈만 나면 보스에게 반 협박을 하기도 한다. 해리는 엄청난 직관력으로 사건을 해결할 때는 정말 완벽한 형사처럼 보이지만, 알콜에 취약한 모습과 특정 사건에 집착하며 옛 동료와의 추억에 매달리는 모습은 너무도 인간적이라 안쓰럽기까지 하다. 시리즈로 전개되는 작품들의 유명한 캐릭터들이 꽤 많지만, 내가 그 중에서도 유독 해리 홀레를 사랑하고 편애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막무가내 식, 독불장군식이지만 사람냄새 나는 캐릭터성에 있다. 완벽하진 않지만, 오히려 불안정해 보이기까지 하지만, 그래도 정말 살아 숨쉬는 캐릭터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꼼꼼한 복선과 수많은 등장인물들을 치밀하게 엮어서 한 편의 거대한 퍼즐이 완성되는 이 작품에서는 아무런 상관도 없어 보이는 인물들, 그냥 스치듯 지나가는 대사 한 마디, 누군가의 행동들이 결국엔 모두 한 방향으로 흘러 마지막 결론에 이른다. 단순히 깜짝 쇼처럼 허를 찌르는 반전으로 끝내는 게 아니라, 치밀하게 계산되어 감탄사를 불러 일으키는 결론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복잡한 스토리가 톱니 바뀌처럼 맞물리면서 굴러갈 때의 그 짜릿한 즐거움이란 단순히 리뷰 몇 자로 끄적거려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아쉬울 정도이다. 요 네스뵈의 모든 작품들이 그러하지만 특히 <네메시스>는 그 어떤 장면도 '그냥' 흘러가는 법이 없어 진정한 페이지 터너가 아니었나 싶다. 이런저런 단서들은 극이 앞으로 나아갈수록 풍성해지고, 끝으로 향할수록 이야기는 폭발한다. 작가가 구축해놓은 이야기의 설계도가 완벽하고 탄탄해서 빈틈이 없어, 이 책을 읽는 그 누구라도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허우적거릴 수밖에 없는 그런 솜씨라는 말이다. 게다가 요 네스뵈의 글을 읽으면 장면들이 바로 머릿속에 영상화되어 보인다는 점 또한 매력적이다. 작법의 기본 원칙 중 하나가 바로 '설명하지 말고, 그냥 보여줘라' 인 것을 떠올려본다면, 그에 가장 부합되는 작품인 셈이다. 독자들이 머릿속에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언어를 빚어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는 적확하고 단단한 단어를 골라 쓰고, 어떤 순간의 본질이 포착될 수 있도록 구체적인 명사들과 역동적인 동사들을 찾아서 글을 빚어낸다. 그러는 와중에도 캐릭터의 매력과 유머를 잊지 않고, 꼼꼼하고 복잡하게 설계된 플롯은 방향성을 잃어버리지 않고 한 곳을 향해 질주한다. 600페이지가 훌쩍 넘는 이 두툼한 소설을 읽는 내내, 단 한 순간도 한눈을 팔 수가 없었는데,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하랴. 그저 직접 읽어보고, 체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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