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생물체는 항복하라 - 정보라 연작소설집
정보라 지음 / 래빗홀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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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어였다. 거대한 문어가 다리로 나를 툭툭 건드리고 있었다.

지구 ? 생물체는 ? 항복하라.

문어가 말했다. 아니 "문어가 말했다"라는 이 문장은 상식적으로 굉장히 이상하지만 하여간 그 당시 나는 문어가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생각했다. 물론 문어가 말하는 걸 듣다니 내가 정신이 이상해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같이 했다. 애초에 대학교 건물 안에 복도를 꽉 채우는 크기의 거대 문어가 등장해서 빨판투성이 다리를 굼실거리며 나에게 말을 거는 사건이 내 평생에 일어나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 '문어' 중에서, p.27


해양 생물을 주제로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아낸 정보라 작가의 SF연작소설집이다. 문어, 대게, 상어, 개복치, 해파리, 고래라는 제목으로 쓰인 여섯 편의 이야기에서 '나'와 '남편(위원장님)은 자꾸만 말하는 해양 생물과 마주하고, 그때마다 정체 모를 검은 양복 군단에게 연행된다. 진지하지만 코믹하게 느껴지는 이야기들이지만 그 배경들은 대부분 실화에 바탕을 두고 있다. 작가는 한국비정규교수노조 소속이고 실제로 국회 앞에서 고등교육법 개정 농성을 한 적이 있다. 팬데믹이 한창일 때 위원장님과 연애를 하고 결혼해 포항으로 이주했고, 그곳에서 살면서 바다나 환경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실제로 이 책의 제목을 '포항 소설'이라고 하고 싶었다고 할 정도로 말이다. 


새벽에 대학교 본관 건물 복도에 문어, 혹은 문어처럼 생긴 어떤 생물이 등장한다. 때는 고등교육법 개정안, 일명 강사법이라고 하는 것이 제정되어 대량 해고 사태가 일어났고, 잘려서 열받은 선생님들이 대거 노조에 가입해 농성 중인 시기였다. 농성 천막을 홀로 지키던 위원장님은 자다가 배가 고파서 깼고, 잠결에 자신한테 오는 문어를 잡아 라면에 넣는다. 그리고 그 이유로 검은 정장을 입은 사람들과 취조실에 있는 참이다. 그걸 대체 왜 먹었습니까, 대학교 건물 복도에 문어가 돌아다니는 게 이상하다는 생각 안 해봤어요?로 시작되는 대화는 벌써 한 시간째 똑같은 말의 되풀이 상태였다. 실제로 이 소설 <문어>의 초반 5~6쪽 정도는 2021년 모 대학교 농성장에서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렇게 농성도 하고 데모도 하면서 러시아 문학과 문화 수업도 열심히하던 작가는 러시아 정보가 다양한 방식으로 바다를 망가뜨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렇게 러시아어로 '나'에게 구조 요청을 하는 대게가 등장하는 작품 <대게>가 만들어 진다. 





(그러니까 떠나요. 잔인한 권력이 쫓아오지 못하는 곳으로 가요. 가서 행복하게 살아요.)

그리고 나는 울었다. 비인간 생물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인간이 망쳐버려 살 수 없게 된 바다, 부서진 해저, 죽은 땅과 도망칠 곳 없이 좁아져버린 지구가 한없이 미안했다. 그러나 우는 것 외에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예브게니가 다른 다리들로 나를 받치고 집게발에 기대어 울게 해주었다. 집게발은 비린내가 나고 거칠고 단단했다. 나는 그 거친 단단함에 기대어 울었다. 검은 덩어리도 예브게니도 내가 다 울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 대게' 중에서, p.84


작가는 <문어>, <대게>, <상어>까지 쓰고 3부작으로 마무리하려고 했으나, 이야기를 몇 개 더 붙여서 책으로 내보자는 제안을 받고 <상어>가 탄생하고 이어 <개복치>와 외계 생물 거래의 음모를 밝히기 위한 <해파리>와 <고래>까지 만들어 진다. 그러는 동안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했고, 일본은 원전 폐수를 바다에 버렸으며, 전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세상은 이렇게 점점 나빠지고 있지만, 어디선가는 세상을 바꾸기 위해 투쟁하고, 저항하는 사람들이 있다. 여섯 종의 해양 생물이 등장하는 이 연작 소설들은 세계의 위기 속에 있는 그들의 삶에 대해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자연과 생물들이 죽으면 인간도 죽게 마련이다. 그러니 기후 위기에 대응해야 하고, 더 적극적으로 지구가 망가지지 않도록 맞서야 하는 것이다. 


이 작품은 시간강사인 작가가 처우 개선을 위해 싸웠던 이야기에서 시작해 러시아와 일본의 국제적인 문제를 거치고, 지구 환경 위기에 이르는 여러 이슈들을 보여준다. 이길 것 같으니까 싸우는 것도 아니고, 도망칠 데가 항상 있어서 싸우는 것도 아니다. 그저 가만히 있기엔 열받으니까, 안 싸울 수는 없으니까 싸우는 거다. 지금도 어디선가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치열한 투쟁을 벌이고 있을 누군가를 응원하며 읽게 되는 작품이었다. 해양 생태계 파괴,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 노동자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해고 처분과 장애인의 이동권을 무시하는 시설, 세상 전체가 의존하면서도 무시하고 착취하는 돌봄의 가치 등 결코 가볍지 않은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유머러스하게 풀어내고 있어 아주 잘 읽히는 작품이었다. 이 작품을 통해 지구 생물체가 모두가 함께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면 좋을 것 같다. 항복하면 죽는다. 우리는 다 같이 살아야 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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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플갱어 살인사건
애슐리 칼라지언 블런트 지음, 남소현 옮김 / 북플라자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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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건은 피로함을 느끼고 손가락 끝으로 눈을 가볍게 눌렀다. 

"그러니까, 나랑은 아무 상관이 없는 게 분명하네."

"네가 이 유명한 살인 사건 피해자와 똑같이 생겼고, 널 닮은 다른 여자들이 살해당해서 똑같은 자세로 발견되는 게 정말 우연이라고 생각해?"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두 번째 피해자는 아직 - "         p.115


일요일 이른 아침, 조깅을 하던 레이건은 알몸이 드러난 여자의 상반신을 발견한다. 마치 마네킹처럼 몸이 반으로 쪼개진 채 토막난 시신이었다. 경찰에 신고해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럴 수가 없었다. 죽은 여성의 얼굴이 자신과 쌍둥이처럼 닮아 있었던 것이다. 레이건은 마치 자신의 시체를 내려다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얼마 뒤 또 다른 여성의 시체가 발견되었고, 그녀도 레이건과 놀라울 만큼 닮아 있었다. 이 사건은 오래 전 미국에서 발생해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블랙 달리아 사건과 유사한 면이 많아 언론에서는 '시드니 달리아 사건'이라 부르기 시작한다. 


사실 레이건은 어린 시절 지독한 스토킹을 겪은 적이 있었고, 그로 인해 SNS도 전혀 하지 않았으며, 온라인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 왔다. 현재는 화원을 운영 중이었지만, 장사가 계속 안 되어 작년부터 형편이 어려워지고 있었는데, 이런 일까지 벌어진 것이다. 레이건은 한국에서 만난 친구 민을 찾아가지만, 자신의 과거에 대해 솔직히 털어놓을 자신이 없다. 자신의 과거가 민과 그녀의 가족까지 위협하게 되는 걸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레이건의 친구 민은 시드니 모닝 헤럴드지의 범죄 보도 부서에서 일하며 20년 전에 발생한 충격적인 살인 사건에 관해 책을 쓰고 그것이 국제적인 출판 계약으로 이어져 유명해졌다. 지금도 경찰은 물론 언론 쪽에도 지인들이 있었기에, 레이건은 사건에 관해 뭔가 알 수 있을까 해서 친구를 찾아간 거였다. 





"저는 인터넷만 안 쓰면 저 자신을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인터넷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저와 아무 관계가 없다고 생각했고요. 삶에 어떤 문제가 생기면 무조건 여자들 탓으로 돌리도록 사람들을 세뇌하는 여성 혐오 커뮤니티들이 그 안에 존재한다는 것조차 이번에 처음 알았어요. 하지만 이런 커뮤니티에서 내세우는 폭력성은 현실 세계에도 영향을 끼쳐요. 우리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는 거죠."          p.357


10년도 더 전에 있었던 스토킹 사건은 레이건을 다시 위협하기 시작한다. 과연 그 남자가 다시 레이건을 찾아낸 것일까. 그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연쇄 살인 사건의 범인인 것일까. 민은 레이건을 걱정하며 경찰에 알려야 한다고 말하지만, 레이건은 경찰에는 한사코 가지 않겠다고 말한다. 사실 오래 전 그녀를 스토킹했던 남자가 바로 경찰이었기에, 경찰들이 그녀를 도와주지 않을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상한 이메일이 오기 시작하고, 집 근처에 속옷이 선물 포장되어 배달 되는 등 그는 점점 그녀의 삶을 위협하고 있었다. 범인은 왜 블랙 달리아 범죄 현장을 재현한 것일까. 시드니 살인범이 블랙 달리아 살인범과 동기가 같은 걸까. 그리고 왜 그는 레이건과 도플갱어처럼 닮은 여성들만 골라 살해하는 걸까. 정말 오래 전 그녀를 스토킹했던 그 남자가 다시 나타난 것일까.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작가 애슐리 칼라지언 블런트의 이 작품은 실화를 바탕으로 쓰였다고 한다. 다크웹, 스토킹, 여성 혐오, 온라인 범죄 등 지금도 어디선가 벌어지고 있는 현대 사회의 어두운 면모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어 더욱 오싹한 이야기였다. 작가가 한국에 거주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낸 한국계 캐릭터와 에피소드도 국내 독자들에게 친숙하게 느껴질 것이고, 극중 주인공이 겪는 사건 또한 누구에게나 벌어질 수 있는 일이기에 더욱 몰입감있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호주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른 심리 스릴러를 만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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셜록 홈즈 인물 사전 - 일러스트로 보는
에노코로 공방 지음, 이지호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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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사람의 서명>은 <주홍색 연구>에 이은 셜록 홈즈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이다... 이 작품은 코난 도일이 처음으로 쓴 '속편'이라고 할 수 있다. <네 사람의 서명>에서는 홈즈에게 코카인을 사용하는 습관이 있다는 사실, 권투와 변장의 달인이라는 사실, 독특한 여성관의 소유자라는 사실 등도 밝혀진다. 여기에 전작에서는 이름이 없었던 221B번지의 여주인 이름이 '허드슨 부인'으로 밝혀진다든가 의뢰인이 찾아 오면서 사건이 시작되는 패턴이 사용되는 등 이후 시리즈의 기본이 되는 요소가 다수 등장한다.             p.65


영원히 읽히고 재창조되는 독보적인 캐릭터, 100년도 넘은 시대에 탄생했지만 여전히 동시대에 숨쉬고 있는 캐릭터, 바로 셜록 홈스이다. 그동안 수많은 셜록 홈즈 이야기를 만나왔고, 그를 소재로 변주된 또 많은 이야기를 읽어 왔지만 여전히 재미있다는 사실이 놀랍기 그지 없다. 셜록 홈즈가 없었다면 오늘날 법과학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홈즈는 최초의 과학 수사 요원이었고, 그가 썼던 방식을 현대에도 활용하고 있으니 말이다. 셜록홈즈가 처음 등장할 때만 해도, 경찰들의 수사 방식은 주먹 구구식이라 현장을 보존하고, 증거를 찾는 다는 생각 따위는 전혀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셜록 홈즈는 아주 작은 증거와 흔적도 놓치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단서를 찾는 캐릭터였다. 그는 백여년이나 앞선 과학 수사의 선구자였던 것이다. 그러니 작가보다 캐릭터가 더 많이 언급되고, 더 유명해진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셜록 홈즈 시리즈는 1887년 탄생한 이래 여전히 만화, 영화, 드라마등으로 변주되며 사랑받는 고전이다. 그 '셜록 홈즈' 시리즈에 등장하는 250여 명의 인물을 비주얼화해 전격 해부한 셜록 홈즈 인물 해부 도감이다. 아서 코난 도일이 쓴 60편의 ‘셜록 홈즈 시리즈’ 중 장편 <주홍색 연구>와 <네 사람의 서명>, 단편집 <셜록 홈즈의 모험>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의 일러스트와 작품의 주요 배경인 221B번지 하숙집 거실 조감도, 사건이 벌어지는 빅토리아 시대의 런던 근교와 광역 지도, 영국 그레이트브리턴 섬 전체 지도가 작품 속 연관 정보와 함께 수록 되어 있다. 각 작품마다 등장인물 관계도와 개성을 잘 살린 인물 해설 일러스트, 토막 지식, 체크 포인트를 담았고, 작품의 이해를 돕는 주요 배경 설명과 사건의 흐름 연표, 깊이 있는 다양한 주제의 칼럼과 핵심 관전 포인트, 셜록 홈즈 시리즈에 등장하는 인기 명소, 셜록 홈즈의 세계를 장식하는 관련 아이템 이야기까지 꼼꼼하게 정리했다. 




홈즈와 왓슨이 아침 식사를 하는 장면은 작중에서 이따금 등장하지만 어떤 요리를 먹는지 까지 적혀 있는 경우는 많지 않으며, 아침 식사의 정석인 베이컨 앤 에그가 등장하는 것도 <기술자의 엄지손가락>뿐이다. 그 밖에는 스크램블 에그가 1회(블랙 피터), 햄 앤 에그가 2회(네 사람의 서명, 해군 조약문), 삶은 달걀이 2회(토르 교 사건, 은퇴한 물감 제조업자) 등장했다... 그 밖의 아침 식사 메뉴는 <해군 조약문>에 나오는 커리맛 닭요리뿐이다. 왓슨이 허드슨 부인의 요리만이라도 조금 더 상세히 기록해 줬으면 어땠을까 싶어 아쉬울 따름이다.                p.174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온갖 판본의 셜록 홈즈를 다 읽어왔는데, 서재에 보관하고 있는 건 딱 세 버전이다. 가장 긴 버전, 가장 짧은 버전, 휴대가 편리한 버전이다. 가장 긴 버전은 당연히 '주석 달린' 셜록 홈즈 시리즈이고, 가장 짧은 버전은 '미니북' 버전의 셜록 홈즈, 그리고 휴대에 중점을 둔 것은 이북 버전이다. 그리고 이제 거기에 더해 바로 이 책 <셜록 홈즈 인물 사전>을 추가해야 할 것 같다. 


'셜록 홈즈 시리즈의 등장인물을 전부 그려 보자'라고 생각한 것에서 시작된 이 책은 에노코로 공방이 <셜록 홈즈어 사전>을 작업하며 원작을 거듭 읽게 되면서 비로소 구체화되었다고 한다. 코난 도일의 뛰어난 캐릭터 창조력을 새삼 깨닫게 된 것이다. 그렇게 탄생한 이 책은 원작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에 대한 묘사를 최대한 충실히 따르고, 간혹 영상화 작품 등을 참고하면서 독자적인 해석을 가미해 시각화를 시도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작품에 대한 줄거리나 주목할 포인트, 사건의 핵심 부분 등 셜록 홈즈의 '기본'을 알리는 데도 집중하고 있어, 셜록 홈즈 시리즈를 사랑한다면 반드시 소장해야만 하는 책이 되었다. 게다가 이 책은 셜록 홈즈 전체 시리즈의 첫 1/3에 해당하니, 이어질 다음 책도 설레이는 마음으로 기다려야 할 것 같다. 




셜록 홈즈는 초등학교 시절 나를 처음으로 추리 소설에 입문하게 해준 작품이기도 하고, 그 이후 수십 년 동안 나의 확고한 독서 취향을 만들어준 계기가 된 작품이기도 하다. 그래서 다양한 버전과 판본의 셜록 홈즈 작품들을 가지고 있고, 지금도 가끔 펼쳐서 읽어보곤 한다. 그래서인지 정말 깨알같이 디테일한 정보들을 담고 있는 이 책을 너무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이 책에 소개된 '셜록 홈즈'에 대한 묘사를 살펴보면 이렇다. 꿰뚫듯 날카로운 눈(주홍색 연구), 깡마른 얼굴(녹주석 보관), 검은 머리카락(춤추는 인형), 그을린 뺨(등이 굽은 남자). 살집이 없는 매부리코(빨간 머리 연맹), 근육질의 팔뚝(네 사람의 서명),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다섯 개의 오렌지 씨앗), 얇은 입술(빈집의 모험) 등 각각의 원작에서 묘사된 외모에 대한 묘사들을 모두 수집해 하나의 인물로 탄생시켰으니, 얼마나 탄탄한 정보를 기반으로 인물들을 구축시켰는지 짐작이 될 것이다. 


그리고 소개된 작품들의 첫 페이지는 만화로 재구성된 장면들로 시작하는데, 만화 또한 아주 흥미진진하다. 사건의 흐름을 시간순으로 정리해둔 것도 좋았고, 홈즈의 명언과 패션 체크, 코난 도일이 쓴 원문에 대한 고찰 등 볼거리로 가득하다. 그야말로 원작을 다각적으로 즐길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다. 아마도 이 책을 읽으면 원작 소설을 보다 더 깊이 있게 읽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셜록 홈즈'를 처음 접하는 이들에게는 입문서로도 좋을 것 같고, '셜록 홈즈' 전문가들인 셜로키언들에게도 너무나 훌륭한 선물같은 책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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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즈의 마법사 클래식 리이매진드
라이먼 프랭크 바움 지음, 올림피아 자그놀리 그림, 윤영 옮김 / 소소의책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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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오리바람이, 회오리바람치고는 매우 조심스럽게 도로시의 집을 놀랍도록 아름다운 나라 한가운데로 옮겨놓은 것이었다. 그곳엔 온통 초록 풀밭이 펼쳐져 있고, 우람한 나무에는 향기 좋고 감미로운 과일이 열려 있었다. 사방에 멋들어진 꽃밭이 보이고, 빛나는 깃털의 진귀한 새들이 나무와 덤불에서 날개를 파닥이며 노래를 불렀다. 조금 떨어진 곳에는 초록빛 둑 사이를 반짝이며 흐르는 작은 시냇물이 있었다. 오랫동안 건조한 회색빛 들판에서 살아온 소녀에게는 속삭이듯 졸졸 흐르는 물소리가 너무나 고맙게 느껴졌다.           p.25


농부인 헨리 삼촌, 엠 숙모와 함께 캔자스 대평원 한가운데에 살고 있는 도로시는 어느 날 갑자기 불어온 회오리바람에 휘말려 집과 함께 통째로 날아가게 된다. 그곳은 놀랍도록 아름다운 나라였는데, 착한 북쪽 마녀와 먼치킨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도로시에게 사악한 동쪽 마녀를 죽이고 자신들을 자유롭게 해주어 감사하다고 인사를 하는데, 어리둥절한 도로시는 자신의 집이 먼치킨의 나라에 도착하면서  동쪽 마녀를 죽게 만들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덕분에 마법이 숨겨진 동쪽 마녀의 은색 구두를 얻게 된 도로시는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위대한 마법사 오즈가 다스리는 에메랄드 시로 향한다. 




강아지 토토와 함께 길을 떠난 도로시는 기나긴 여정 속에 허수아비, 양철 나무꾼, 사자를 만나 함께 하게 된다. 허수아비는 짚으로 가득 차 있어서 뇌를 갖고 싶어했고, 심장을 잃어버린 양철 나무꾼은 행복하기 위해 새로운 심장이 필요했고, 겁쟁이 사자는 용기를 얻고 싶었으며, 도로시와 토토는 캔자스로 돌아가고 싶었다. 오즈는 위대한 마법사라고 알려져 있으므로, 그들 모두에게 필요한 걸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에메랄드 시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하기만 했다. 


죽을 고비를 넘기고 겨우 에메랄드빛 도시에 도착한 그들은 여러 모습으로 변하는 오즈를 만나게 되지만, 그는 각자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한 조건으로 사악한 서쪽 마녀를 죽여야 한다고 말한다. 결국 그들은 서쪽에 있는 윙키의 나라로 향하게 되는데, 과연 그들은 사악한 마녀를 없애고 각자의 간절한 소망을 이룰 수 있을까. 




혼자 남은 오즈는 허수아비, 양철 나무꾼, 사자가 원하는 것을 정확히 들어준 것 같아서 자신의 성공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다들 나에게 불가능한 일을 시키는데, 어떻게 내가 사기꾼이 되지 않을 수 있겠어? 허수아비와 사자, 나무꾼을 행복하게 만드는 건 쉬웠어. 그들은 내가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상상했으니까. 하지만 도로시를 캔자스로 돌려보내는 건 상상만으로 불가능해. 그건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정말 모르겠군."               p.229


소소의책에서 나오는 클래식 리이매진드 시리즈 그 세 번째 작품은 <오즈의 마법사>이다. 이 시리즈는 세계적인 예술가들의 독특한 시각적 해석을 담은 컬렉터용 하드커버 에디션이다. 첫 번째 작품인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에서는 세계적인 화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로 알려진 티나 베르닝의 강렬한 일러스트들이 텍스트에 담기지 않은 부분까지 상상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수준 높은 콜라보를 선보였다. 두 번째 작품인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는 일러스트레이터 안드레아 다퀴노의 현대적이고 세련된 이미지 연출로 어디서도 만날 수 없었던 버전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보여주었다. 




이번 <오즈의 마법사>는 이탈리아의 비주얼아티스트인 올림피아 자그놀리의 모던한 재해석으로 정말 색다르고 독특한 버전의 작품을 탄생시켰다. <뉴욕타임스>, <마리끌레르>, 프라다, 디올 등 저명한 미디어 및 브랜드와 협업을 해온 올림피아 자그놀리는 유려한 선과 매혹적인 색으로 사물과 인물을 표현하는 걸로 유명한데, 기하학적 그래픽과 강렬한 색채를 통해 자신만의 '오즈의 마법사'를 만들어 냈다. 도로시의 집이 회오리 바람으로 인해 날아가는 장면이나 그렇게 도착한 먼치킨들의 도시 풍경, 에메랄드 시로 향하는 도로시와 토토의 마음을 보여주는 장면과 허수아비를 만난 옥수수밭 등 주요 장면들의 이미지가 모두 단순하고 심플한데도 불구하고 시선을 확 사로잡는 힘이 있었다. 


향이 너무 강력해서 냄새를 들이마시면 잠에 빠져들게 만드는 양귀비꽃밭은 대부분의 작품에서 붉은 컬러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 작품 속에서는 초록 컬러를 기본으로 화이트, 골드, 블랙으로만 표현한 것도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같은 패턴이 반복되는 이미지와 과감한 컬러 배치가 처음에는 낯설게 느껴지더라도, 보면 볼수록 중독성이 있어 스토리에 더 빠져들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이야기의 전체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핵심이 되는 부분만 짚어 내어 강조하는 방식이라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여백을 남겨주어 더욱 좋았던 것 같다. 클래식 리이매진드 시리즈를 세 작품 째 만나고 있는데, 다음 작품은 어떤 이야기일지, 또 어떤 아티스트가 재해석해는 작품일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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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크 손 현대문학 핀 시리즈 장르 2
단요 지음 / 현대문학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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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전한 소음 속에서, 약함과 악함의 경계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우리들 중 누구라도 그저 무해할 수 있었더라면 이러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서로를 다른 방식으로 아끼는 법을 알았더라면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철학자가 말하길 자연 상태에서 잠든 거인은 난쟁이에게도 죽을 수 있으므로 인간은 평등하다고 했다. 그 말에는 아주 약한 사람조차 상대를 죽일 마음을 품는다는 뜻이 숨어 있는 것 같다. 그러니까 걷어채인 아픔을 자신의 단단함으로 삼는 자세는 둘 중 하나다. 너무 오래도록 앓은 탓에 그만 나아버리기로 결단한 것이다. 혹은 처음부터 아픔이 아니었던 것이다.        p.55~56


맨손으로 살아 있는 걸 만지면 아무거나 케이크로 바뀌어 버리는 남자가 있다. 가끔씩 손이 타는 것처럼 뜨거워지고 머릿속까지 깜빡거리는데, 뭐든 만져야 정신이 돌아오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집 한쪽에 쥐 사육장을 만들고 케이크를 만들어야 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재경직 사무관으로 평범하게 살았던 그의 삶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여기, 변두리 원룸촌에서 업소에서 일하는 엄마와 둘이 살고 있는 중학교 3학년 소녀가 있다. 어릴 때부터 그 어떤 보살핌이나 훈육, 사랑을 받지 못한 채 방치되어 자란 선머슴 같은 그녀의 유일한 친구는 못된 짓만 골라하는 세력의 우두머리였다. 못된 애의 곁에서 불쌍한 애들을 괴롭히고, 못된 짓을 함께하며 살던 소녀는 어느 날 케이크 손이라는 남자를 알게 되면서, 비로소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다시 돌아보게 된다. 


소녀의 이름은 현수영이지만, 그녀의 유일한 친구인 안혜리는 그녀를 현수라고 부른다. 친구들은 수영을 안혜리의 개이자 일종의 남편처럼 여긴다. 수영은 키도 큰데다 머리도 짧았고 살갗도 까무잡잡해 보통 체대 입시를 준비하는 남자애로 보인다. 안혜리는 학교에서 겉도는 애들을 모아놓고 싸움판을 종종 벌이곤 한다. 안혜리는 투견장의 주인이었고, 겉도는 애들은 투견이었으며, 그의 곁을 지키는 수영은 그녀의 행동대장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어딜 가나 겉돌았던 수영은 세 마디 이상의 문장을 만드는 법을 몰랐고, 기본적인 예절이나 행동에 대해서 전혀 배우질 못했다. 그런 수영을 데리고 다니며 한글을 가르치고, 아이들에게 욕을 하면 안 되는 이유를 설명한 것이 바로 안혜리였다. 그 모든 것에 선의가 담기지 않았을지라도 혜리가 베푼 모든 시간이 고마웠던 수영은 그녀가 창조한 세계 속에서 갇혀 별다른 불만 없이 살아가고 있었다. 케이크 손이라는 남자를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나는 그 셋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 하나만을 그 순간의 이미지로 삼고 나머지는 외면하는 방식으로 삶을 버텨왔다. 반면 상식적이며 교양 갖춘 사람들이 보이는 속물성이란 사랑할 만한 것만을 사랑한 다음 따지러 올 사람이 없는 채무는 그저 잊어버리는 태도다. 받아들이지 못할 정도의 더러움은 오로지 저들의 몫이며 자신에게는 빚이 없다는 확신이다. 그런 속물성을 거부할 방법이, 속물조차 되지 못할 무언가에 이미지를 덧씌우는 것뿐이라면 삶은 고통이거나 거짓말이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으므로 이건 파국이 아니었다. 다만 싱겁고 지겨웠다.               p.147


중학생 여자애와 서른 넘은 남자와의 기묘한 우정은 세상의 시선으로 보자면 숨겨야 하는 무엇일 것이다. 하지만 원래 안 된다고 정해진 일들은 사실 매일 일어나는 일들이고, 그렇게 따지자면 옳고 그름의 경계를 따지는 것이 의미가 있나 싶어지기도 한다. 엄마의 남자가 집에 오면 언제나 밖으로 나가야 했던 수영에게는 시간을 때울 공간이 필요했고, 집에 틀어박혀서 아무도 만나지 못하고 살던 남자에게는 말 상대가 되어줄 사람이 필요했다. 남자는 가끔씩 와서 말 상대가 되어주는 조건으로 공부를 가르쳐주겠다고 제안했고, 수영은 그렇게 남자의 집을 드나들기 시작한다. 일주일에 두 번이, 이틀에 한 번이 됐고, 방학이 되자 매일로 변했다. 쥐가 찍찍거리는 소리로 가득한 낯설고 비현실적인 공간이 이상하고 편안한 꿈처럼 느껴진다. 그렇게 수영을 둘러싼 세계가 조금씩 바뀌기 시작한다. 


당대 한국 문학의 가장 현대적이면서도 첨예한 작가들과 함께하는 <현대문학 핀 장르>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이다. 시리즈 첫 번째 작품은 인간이었던 흡혈인과 인간이라고 주장하는 인조인간이 기계에 대항하는 사투를 보여주었던 정보라 작가의 <밤이 오면 우리는>이었다. 두 번째 작품은 <다이브>, <개의 설계사>, <마녀가 되는 주문> 등의 SF작품으로 만났던 단요 작가의 첫 중편소설이다. 이기호 작가와 조예은 작가의 추천평이 기대감을 더해 주었는데, 다 읽고 나니 역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작품이었다. 단요 작가는 새로운 작품이 나올 때마다 점점 더 좋아지는 느낌이다. 우리는 누군가의 고통과 불행을 아닌 척 즐기면서 사는 세상 속에 살고 있다. 남자가 만들어내는 케이크는 아름답고 달콤했지만, 결국 살아 있던 존재를 무생물로 만들어서 탄생한 것이었다. 무언가의 비명과 죽음이 만들어내는 케이크, 어른들의 세계와는 별개로 존재하는 아이들의 세계, 그 속의 비정함과 잔인함, 그들만의 회계장부는 악의가 없어도 폭력을 만들어 낸다. 누군가의 불행이 또 다른 누군가의 행복이 되는 세계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긴 여운을 남겨주는 작품이다. 단요 작가의 다음 작품이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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