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명랑한 이시봉의 짧고 투쟁 없는 삶
이기호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7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사랑은 예측 불가능한 일을 겪는 거야.”
아빠는 무덤덤하게 말했다.
“강아지를 사랑하는 건 더 그래.”
아빠는 그러면서 자신이 다시 강아지를 키우게 될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어떤 예측 불가능한 일이 자신을 찾아왔고, 그렇게 이시봉을 만나게 되었다고. p.123
이기호 작가가 11년 만에 본격 장편소설로 돌아왔다. 오백 페이지가 넘는 분량의 서사를 펼쳐보이는 국내 작가가 흔치 않기에, 더욱 기대감을 불러 일으켰던 작품이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이시봉'으로 이기호 작가의 초기작부터 자주 언급되는 이름이기도 하다. 이시봉은 올해 만 네 살이 된 수컷 비숑 프리제로 시봉이라고 부르면 알은척을 안 하고, 꼭 이시봉이라고 성까지 불러야지 뒤돌아보거나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다. 아빠는 나주시 왕곡면까지 가서 이시봉을 데려왔고, 시봉, 시현 남매의 동생처럼 이시봉을 대했다. 아빠는 광주에 있는 한 타이어 공장에서 이십 년간 현장 노동자로 일하다 그만두고, 자신의 이름을 내건 피자집을 차렸다. 그리고 매일같이 이시봉을 데리고 출근했고, 열심히 일했다. 그러다 피자집 바로 앞 4차선 도로를 무단횡단하다 속도를 높여 달려오던 레미콘 차량에 그대로 치이고 말았다.
알고보니 아빠 이시봉을 구하기 위해 도로에 뛰어들었던 거였다. 아빠에게 이시봉은 우리집의 막내였고, 가족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아빠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뒤, 엄마는 이시봉의 존재에 대해 무심해졌다. 이시습은 아빠의 사고 이후 음주에 의지하며 강아지 이시봉에게만 마음을 붙이며 지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 찾아와 이시봉이 보통 비숑이 아니라, 프랑스에서 들여온 희귀한 혈통의 후손이라고 자신들이 오랫동안 찾아 왔다며 삼천만원을 제시한다. 내 작고 소중한 개가 고귀한 신분이라니.. 시습은 이시봉이 자신만 남겨두고 어디론가 떠나버릴 것만 같아서, 그게 억울하고 불안하고 원망스러워서 자꾸 화가 난다. 그들에게 가면 이시봉은 더 행복해질까? 이시봉은 나와 함께 있어서 행복했을까. 이시봉은 내가 없어도, 아니 나 없는 곳에서 더 명랑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게 아닐까? 고민하던 시습은 이시봉에 대해 더 알아보기로 한다. 아빠가 어떻게 이시봉과 만나게 된 것인지, 무슨 인연으로 그 먼 곳까지 가서 이시봉을 데려온 것인지, 직접 나주시 왕곡면에 가보기로 한 것이다.

고도이는 마구간에 갇혀 있는 그 순간까지도 모든 것을 자기 중심적으로, 터무니없는 감상과 그에 따른 상심으로 받아들였으나, 후에스카르 비숑 프리제의 혈통사적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실로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인간은 그런 식으로 오해하고 오독하면서 동물들의 삶에 관여한다. 그것이 인간의 유일한 장점이자, 집사로서의 자격 요건이다. 집사란 직위는 대개 그런 사람들, 자기애가 충만하지만 그걸 잘 모르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나가는 한 방식이다. p.468~469
그렇게 이야기는 이시봉이라는 이름에 얽힌 아버지의 비밀로, 스페인 왕가의 가계도로, 개 농장과 공장 노동조합으로 종횡무진 퍼져 나간다. 이시봉에 대한 이야기는 이상하게도 이시봉이 아닌, 그와 관계된 사람들의 비밀들을 하나둘씩 풀어내며 스페인과 프랑스, 한국을 잇는 파란만장한 대서사를 만들어 낸다. 이시봉이 '이시봉'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사연에는 어쩔 수 없이 동료를 배반하게 된 미안함이 있었고, 유럽 왕실에서 길러지던 개의 일종이 개 농장에 팔려가게 된 과정에는 꿈을 좇은 대가로 생활고에 시달리던 인간의 비참한 눈물이 있었다. 비숑 프리제 ‘이시봉’이 어느 가족의 삶에 깃들기까지의 여정이 그야말로 스펙터클하게 펼쳐진다.
자신을 원망하는 존재를 향해서 '어둠 속에서도 명랑함을 잃지 않고 계속' 꼬리를 흔드는 이시봉의 모습처럼, 이 작품은 어떤 상황에서도 명랑하고 유쾌하다. 아무리 가까운 관계라고 하더라도 사람이 개의 마음을 알수는 없다. 반대로 개도 사람의 마음을 몰라주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서로의 존재만으로 어쩐지 위로를 받은 듯한 기분이 되고, 계속 함께할 거라는 생각이 무언가를 견디게 해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그 관계는 의미있는게 아닐까 생각해 본다. 실제로 작가가 팔 년째 함께 살고 있는 강아지 이름 또한 이시봉이라고 하는데, 초판 한정으로 받을 수 있는 포토카드로도 만날 수 있다. 작가의 사인 옆에 이시봉의 발도장도 함께 인쇄되어 있어 더욱 사랑스러운 책이다. 내 곁의 작고 소중한 존재들을 돌아보게 만들어 주는 작품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