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산의 사랑 거장의 클래식 6
딩옌 지음, 오지영 옮김 / 글항아리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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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융춰는 눈물을 흘리며 말없이 마젠을 향해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마전을 바라보았다. 마전은 뻣뻣하게 서서 그녀의 눈물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눈물 속에서 자신을 보았고 자신과 그녀의 관계를 보았다. 그것은 환상 속에 투영된 상상이었다. 환상 속 만물은 각자의 궤적에 따라 자라고 움직였다. 상상은 쓸데없는 것이었다. 실현할 길이 없었다. 그에게는 길이 없었고 그녀에게도 길이 없었다. 두 사람은 그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기에 둘 다 길을 찾으려고 하지 않았다.              - '설산의 사랑' 중에서, p.170~171


린탄에서 명성이 자자한 마씨 집안은 티베트 골동품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그러다 큰 화재가 발생해 전부 타버렸는데 불행하게도 점원으로 일하던 티베트인 청년이 목숨을 잃었다. 양측은 목숨값으로 합의를 보았지만, 화재로 인한 손실이 막대해 비싼 보장금을 당장 내놓을 길이 없었다. 그래서 마씨 집안의 막내아들 마전이 죽은 남자의 여동생과 할머니가 사는 집에 ‘인질’로 들어가게 된다. 마전이 할 일은 집안에 돈이 돌아 보상금을 지불할 수 있을 때까지 그곳에서 조용히 지내는 거였다. 그렇게 티베트식 가옥의 가장 아래층에 머물게 된 마전은 자신을 전혀 반기지 않는 두 사람과 함께 지내게 된다. 티베트족 여성인 융춰와 회족 출신인 마전, 두 사람은 알라의 모스크와 불교 사원의 오래된 벽화만큼이나 먼 거리에 있었다. 


마전은 그들에게 아버지를 대신해 사죄하는 마음으로 매일 과일을 사다 문 앞에 놓지만, 융춰는 과일을 봉지째 쓰레기통에 처박는다. 그렇게 두 사람 사이에서는 무관심과 혐오, 그리고 호기심과 호감이라는 감정이 보일듯 보이지 않게 쌓여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들의 마음은 끝까지 서로에게 표현되지 않는다. 이 작품의 표제작인 <설산의 사랑>은 영하 20도를 훨씬 밑도는 눈 내리는 겨울을 배경으로 조용한 폭발력을 보여준다. 딩옌은 적막 속 은은한 분위기와 아직 녹지 않은 주변의 하얀 눈, 서로가 적대적인 두 집안 사이에서 오가는 은근한 긴장감과 완전히 다른 두 종교를 가진 두 사람의 일상이 차곡차곡 쌓이면서 시종일관 짙은 슬픔을 배어 나오게 만든다. 사물과 풍경을 주의 깊게 파고들어 인물들의 감정을 은유하는 우아한 문장의 힘이 엄청난 몰입감을 불러 일으키며,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아주 특별한 사랑의 감각을 느끼게 한다. 두 사람의 감정을 '사랑'이라고 불러도 될까 싶을 정도로 서로에게 닿을 수 없는 것이라 더욱 먹먹한 여운을 남겨주는 작품이었다. 




튀쥔은 진실과 인내심은 언젠가 보상받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일찌감치 현실에 의식을 빼앗긴 기분이었다. 감정을 둘 곳이 없었다. 싫은 동료와 어쩔 수 없이 함께 지내야 했고 싫은 친구와 연락을 유지해야 했다. 싫은 일도 울며 겨자 먹기로 계속 해야 했다. 싫은 삶은 다른 사람이 그에게 어설프게 씌운 올가미 같았다. 어두운 늪에서 발버둥 쳐도 빠져나올 기력이 없는 것처럼 그의 상태는 점차 무감각해졌고 삶에 대한 동경이나 자신에 대한 존중도 사라진 지 오래였다.                - '아프리카봉선화' 중에서, p.191~192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작가 딩옌은 위화, 옌롄커 등으로부터 “젊은 세대 중 최고의 작가”라는 찬사를 받았다. 딩옌은 이슬람교를 믿는 소수민족 둥샹족 출신으로, 중국 북서쪽 칭하이와 티베트의 탁 트인 땅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써낸다.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 속 이야기를 그리고 있지만, 히잡을 쓴 무슬림이 등장하고 이슬람교와 불교 신자들이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풍경 속에서 낯설고, 이국적인 분위기가 작품 전체에 스며들어 있다. 서사 자체는 복잡하지 않지만, 그것을 통과하는 인물들의 내면이 너무도 섬세하게 그려져 있어 페이지마다 감정을 쥐고 흔드는 힘이 대단하다. 특히나 배경 묘사를 통해 인물들의 감정과 마음 상태가 드러나도록 쓰인 문장들이 너무도 아름다웠다. 


딩옌은 속세의 우여곡절이나 허무함을 세찬 바람이 불어 눈밭에 찍힌 발자국을 삽시간에 지워버리는 광경으로, 자신도 모르게 서서히 스며들었던 감정을 깨닫게 되는 순간을 벽화 속 화염이 천천히 다가와 몸에 옮겨 붙은 것 같았다는 느낌으로, 애틋한 감정을 억누르며 예의를 갖춰 말하는 작은 목소리를 새 떼가 수면을 스쳐 일으킨 잔물결이 조금씩 넘실대며 수면 위의 평온을 깨뜨리는 것 같았다는 기분으로 그려낸다. 단 한 번도 고백되지 않는 사랑, 애써 유지하며 붙잡고 있던 것들로부터 벗어나는 순간, 정답이 없는 상태에서도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희망, 이 쓸쓸한 세상을 견디게 해준 짧은 만남 등 수록된 일곱 편의 작품 모두 수준급이다. 딩옌은 '삶은 극적인 감각으로 충만할 때도 있지만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라고, 삶의 무정함은 연극의 편집과 연출보다 훨씬 더 강렬하다'고 말한다. 그만큼 강렬한 여운을 남겨주는 작품이었다. 딩옌의 다른 작품도 꼭 국내에 번역되어 만날 수 있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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