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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나, 두 개의 세계에서
전혜진 지음 / 구픽 / 2025년 6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뭔가를 빼앗겼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들이 아무리 우리들에게 친절해도, 그 친절에는 중요한 것이 결여되어 있었다. 우리의 선택이라는 것이. 물론 슈슬리사는 우리에게 프로메테우스의 불처럼 새로운 기술을 가져다주었도, 모든 사람들에게 평등한 기회와 어떤 정부도 해내지 못한 훌륭한 복지를 제공했다. 어떤 이유로든 특권층에 대한 불만과 분노가 가득했던 사람들은 지금의 세상에 만족하며, 이전으로는 되돌아갈 수 없다고 말할 것이다. p.58~59
외계인이 지구에 나타나면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우리의 상상력은 대부분 SF영화나 소설을 통해서 만나온 외계인이라는 존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외계인이 지구를 박살내거나, 인간을 모두 노예로 삼거나, 인간을 식량자원으로 활용한다거나, 전쟁이 일어나거나, 혹은 외계 바이러스로 인해 인류가 몰살당하는 그런 엔딩같은 거 말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조금 다른 상상력을 보여준다.
어느 날 갑자기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둥글둥글 알사탕 같은 외계인 함대가 하늘을 가득 뒤덮으며 나타난다. 하늘에 둥그런 우주선들이 잔뜩 떠 있는, 마치 택배 포장할 때 쓰던 뽁뽁이 비닐처럼 보이는 풍경이었다. 그리고 한 달, 외계인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도 사그러들고, 주가들이 곤두박질친 것 빼고는 이전과 크게 다를 게 없는 일상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렇다면 외계인들이 지구에 온 이유는 뭘까. 외계 문명 슈슬리사는 지구인들에게 선언한다. 수많은 약자들이, 차별받고 굶주리고 폭력에 시달리고, 때로는 살 권리조차 보호받지 못한 채로 어렵게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지구의 문명을 발전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고. 억압받던 사람들이 자유로워지고, 소외되었던 사람들이 자신의 의지로 발전할 수 있도록 돕겠다고 말이다. 그렇게 청와대 자리에 외계인의 총독부, 일명 진화가속연구소가 들어선다. 앞으로 지구는 어떻게 될까.

그 아이는 그래서, 정말 무엇이었을까. 바이블에 나오는 예언자, 선지자, 혹은 구세주였을까. 아니면 그저 외계인들의 과학이 빚어 낸 우연이었을까. 어느 쪽이라 해도 그 아이에게는 그동안 누구도 그런 말을 해 주었던 사람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너는 괜찮다고, 너의 선택이라고. 그 누구도 처음부터 자신을 알지는 못한다고, 사랑하는 법도 배워야 한다고. 하지만 우리는 말은 하지 않아도 깨달았다. 바로 그 아이를 만난 덕분에. 우리가 이곳에서 길 건너를 바라보던 지난 40년이, 아주 아무것도 아닌 일은 아니었으리라고, 부질없는 고집도, 시간낭비도 아니었다고. p.245
외계인들은 지구를 더 나은 세상으로 만들기 위한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온 존재들처럼 군다. 그들은 평화를 사랑했고, 지구인들의 사상과 신체의 자유를 존중했으며, 모든 지구인은 평등하니 차별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꿈같은 이야기였다. 누구나 잘 살 수 있는 사회라니 말이다. 그렇게 지구는 진화 가속 기술 아래 새로운 질서로 재편된다. 전쟁은 사라지고 기아와 환경파괴도 제어할 수 있는 누구에게나 평등한 사회. 외계인들은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가 낳은 어떤 정복자나 독재자보다도 관대했다. 아낌없이 선물을 풀어 주는 산타클로스와도 같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들은 자연 출산이 아니라 진화 자궁에서 진보한 생명체를 태어나도록 했다. 마치 식물들 종자 개량하는 것과 같이. 덕분에 지금까지의 상식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총명한 아이들이 태어났고, 사람들은 곧 그 시스템에도 익숙해진다. 그러한 사회 속에서 아주 희박한 확률의 자연 출산을 통해 태어난 이사나는 이질적인 존재로 주목을 받는다. 이 작품은 이사나를 둘러싼 사회 속 다양한 인물들의 시선을 통해 외계 문명이 지구에 도착한, 진화 이후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
<280일>, <달의 뒷면을 걷다>, <규방에 미친 여자들>, <김밥천국 가는 날> 등의 다양한 장르를 선보여온 전혜진 작가의 신작이다. 이 작품은 작가가 13년 전 네이버 <오늘의 문학>을 통해 발표한 후 단행본 『홍등의 골목』에 수록했던 ‘이시나’ 시리즈를 개작과 신작을 더해 처음으로 완결된 형태로 선보이는 것이다. 단편소설처럼 각기 다른 인물을 주인공으로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며 펼쳐지는 연작이다. 슈슬리사의 인공 자궁에서 사람이 태어나기 시작한 지 고작 15년 만에 사람들은 자연 출산으로 태어난 아이를 뭔가 비정상적이고 불결한 존재인 듯 취급한다. 진화와 발전, 효율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세계는 과연 진보된 사회가 맞는 것인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시나라는 존재로 인해 생긴 윤리적 딜레마와 시스템의 모순에 대해서 고민하게 만들어 준다. 여섯 편의 이야기는 외계인들이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그들이 오고 나서 40년이 흐르는 시간 동안을 그려내고 있다. 외계 문명이 등장하는 ‘미래'이지만, 너무도 천연덕스럽게 현실에 말을 딛고 있는 이야기라 어쩌면 근미래의 우리가 마주하게 될 세계가 아닐까 싶기도 했던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