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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튼 뒤에서
사라 델 주디체 지음, 박재연 옮김 / 바람북스 / 2024년 4월
평점 :
어떤 말들은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 이상한 기분이 든다.
머릿속에서 하루도 쉬지 않고 맴돌던 말들인데 말이다.
한번 내뱉어진 단어들이 갖게 되는 돌이킬 수 없는 의미 때문에 소름이 돋았다. p.40
1937년 프로방스에 살던 유태인 가족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 이 작품은 어린이의 눈에 비친 전쟁의 혼란과 고통을 그려 보여주고 있다. 여덟 살 소녀 야엘은 자신의 생일파티에 모인 어른들의 대화를 듣고 엄마에게 물어 보지만, 유태인이 아닌 사람들을 뜻하는 '고이'라는 말이 아빠를 가리키는 비난의 뜻이 된다는 것을 아직은 이해하지 못한다. 이후 몇 달 동안 엄마가 병을 앓고 있을 때 커튼 뒤에서 아빠와 함께 있던 금발의 여성이 누구인지도 알 수 없었지만 본능적으로 엄마가 알면 단 된다는 생각을 한다. 이후 엄마는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아빠의 재혼으로 새엄마가 생기지만 그녀가 커튼 뒤에 있던 여자와 같은 사람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유태인 엄마와 비유태인 아빠 사이에서 태어난 야엘에게 세상은 이해할 수 없는 일들 투성이였다. 새엄마의 능숙하고 친절한 엄마 노릇이 너무 힘들었고, 엄마 생각이 나서 괴로웠다. 그래서 틈만 날때마다 새엄마로부터 도망다니고, 골탕 먹이고, 말썽을 부리기도 하지만 새엄마는 아이들이 자신을 놀리고 있다는 것을 한번도 눈치채지 못한다. 야엘은 새엄마가 어딘가 좀 모자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어쩌면 그만큼 너그러운 마음을 가진 어른이었던 걸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히틀러라는 남자에 대해 모든 어른들이 이야기하고, 군부대로 소집된 오백만 명의 남자들과 함께 아빠도 치과 의사 가운 대신 군복을 입고 전선으로 가게 된다. 아빠가 떠나고 난 뒤 매일 밤 라디오 뉴스에 귀를 기울였고, 독일군이 진경하고, 프랑스군이 공격을 개시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렇게 전쟁이라는 일상을 겪으며 어린 소녀는 살아 있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죽는 것은 또 얼마나 쉬운 것인지에 대해 점차 알게 된다.
지금 나는 커튼 뒤에 있다. 다 괜찮아질 거라는 말은 프티 아줌마도 믿고 있지 않을 거다.
내가 에밀리에게 엄마는 돌아가시지 않을 거라고 이야기한 것과 비슷한 거겠지.
사람들은 왜 상황이 최악으로 치달을수록, 희한하게도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처럼 행동하는 걸까? p.116
프랑스와 독일의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고, 프랑스는 독일의 지배를 받게 된 북부와 남부로 나뉘게 된다. 유태인 법령이 발표되고, 유태인을 욕하는 게 새로운 국민 스포츠가 되어간다. 야엘의 아빠는 유태인이 아니었지만, 유태인 엄마는 이미 죽었고, 외가 친척들도 다 외국으로 떠나 버리고 교류가 없었지만, 야엘은 항상 자신이 유태인이라고 생각해왔다. 법적으로는 아니지만, 마음 깊은 곳부터 유태인으로 자라왔으니 말이다. 하지만 아이들은 법이 간주하는 것과는 별개로 유태인에 대한 핍박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고, 사회적으로 점차 '유태인인지 아닌지'가 중요한 문제가 되어간다. 죄없는 사람들이 줄줄이 끌려가 죽임을 당하는 것이 일상인 세계에서, 야엘은 무사히 자라서 어른이 될 수 있을까.
야엘 자매를 찾으러 온 경찰들을 피해 커튼 뒤에 숨어 있는 마지막 장면에선 함께 조마조마한 마음이었다. 그 속에서 야엘은 이런 저런 생각을 한다. 만약 내가 죽으면 엄마를 다시 볼 수 있을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면 아빠가 무지 슬퍼할 거야, 프티 아줌마는 다 괜찮아질 거라고 말했지만 결코 사실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갑자기, 커튼이 열린다'는 문장에서 이 이야기는 끝이 나지만, 뒤에 이어질 장면들을 상상해본다. 비극이 아니라, 기적이 일어났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무겁고 어두운 이야기지만, 아이의 순수함과 천진난만함으로 담백하게 그려내고 있어 누구나 부담없이 읽을 수 있는 작품이었다. 고통과 괴로움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어야만 그 무게가 느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새삼 깨달으며, 홀로코스트라는 비극을 잊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해 본다. 우리는 여전히 전쟁과 죽음이 현재 진형형이고 미움과 차별이 존재하는 세상 속에서 살고 있다. 사랑스러운 아이의 시선을 통해 그려지는 이 먹먹한 이야기를 통해서 평화로운 세상이라는 기적을 언젠가는 만날 수 있기를 바래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