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튼 뒤에서
사라 델 주디체 지음, 박재연 옮김 / 바람북스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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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말들은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 이상한 기분이 든다.

머릿속에서 하루도 쉬지 않고 맴돌던 말들인데 말이다.

한번 내뱉어진 단어들이 갖게 되는 돌이킬 수 없는 의미 때문에 소름이 돋았다.           p.40


1937년 프로방스에 살던 유태인 가족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 이 작품은 어린이의 눈에 비친 전쟁의 혼란과 고통을 그려 보여주고 있다. 여덟 살 소녀 야엘은 자신의 생일파티에 모인 어른들의 대화를 듣고 엄마에게 물어 보지만, 유태인이 아닌 사람들을 뜻하는 '고이'라는 말이 아빠를 가리키는 비난의 뜻이 된다는 것을 아직은 이해하지 못한다. 이후 몇 달 동안 엄마가 병을 앓고 있을 때 커튼 뒤에서 아빠와 함께 있던 금발의 여성이 누구인지도 알 수 없었지만 본능적으로 엄마가 알면 단 된다는 생각을 한다. 이후 엄마는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아빠의 재혼으로 새엄마가 생기지만 그녀가 커튼 뒤에 있던 여자와 같은 사람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유태인 엄마와 비유태인 아빠 사이에서 태어난 야엘에게 세상은 이해할 수 없는 일들 투성이였다. 새엄마의 능숙하고 친절한 엄마 노릇이 너무 힘들었고, 엄마 생각이 나서 괴로웠다. 그래서 틈만 날때마다 새엄마로부터 도망다니고, 골탕 먹이고, 말썽을 부리기도 하지만 새엄마는 아이들이 자신을 놀리고 있다는 것을 한번도 눈치채지 못한다. 야엘은 새엄마가 어딘가 좀 모자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어쩌면 그만큼 너그러운 마음을 가진 어른이었던 걸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히틀러라는 남자에 대해 모든 어른들이 이야기하고, 군부대로 소집된 오백만 명의 남자들과 함께 아빠도 치과 의사 가운 대신 군복을 입고 전선으로 가게 된다. 아빠가 떠나고 난 뒤 매일 밤 라디오 뉴스에 귀를 기울였고, 독일군이 진경하고, 프랑스군이 공격을 개시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렇게 전쟁이라는 일상을 겪으며 어린 소녀는 살아 있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죽는 것은 또 얼마나 쉬운 것인지에 대해 점차 알게 된다. 




지금 나는 커튼 뒤에 있다. 다 괜찮아질 거라는 말은 프티 아줌마도 믿고 있지 않을 거다.

내가 에밀리에게 엄마는 돌아가시지 않을 거라고 이야기한 것과 비슷한 거겠지.

사람들은 왜 상황이 최악으로 치달을수록, 희한하게도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처럼 행동하는 걸까?              p.116


프랑스와 독일의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고, 프랑스는 독일의 지배를 받게 된 북부와 남부로 나뉘게 된다. 유태인 법령이 발표되고, 유태인을 욕하는 게 새로운 국민 스포츠가 되어간다. 야엘의 아빠는 유태인이 아니었지만, 유태인 엄마는 이미 죽었고, 외가 친척들도 다 외국으로 떠나 버리고 교류가 없었지만, 야엘은 항상 자신이 유태인이라고 생각해왔다. 법적으로는 아니지만, 마음 깊은 곳부터 유태인으로 자라왔으니 말이다. 하지만 아이들은 법이 간주하는 것과는 별개로 유태인에 대한 핍박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고, 사회적으로 점차 '유태인인지 아닌지'가 중요한 문제가 되어간다. 죄없는 사람들이 줄줄이 끌려가 죽임을 당하는 것이 일상인 세계에서, 야엘은 무사히 자라서 어른이 될 수 있을까. 




야엘 자매를 찾으러 온 경찰들을 피해 커튼 뒤에 숨어 있는 마지막 장면에선 함께 조마조마한 마음이었다. 그 속에서 야엘은 이런 저런 생각을 한다. 만약 내가 죽으면 엄마를  다시 볼 수 있을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면 아빠가 무지 슬퍼할 거야, 프티 아줌마는 다 괜찮아질 거라고 말했지만 결코 사실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갑자기, 커튼이 열린다'는 문장에서 이 이야기는 끝이 나지만, 뒤에 이어질 장면들을 상상해본다. 비극이 아니라, 기적이 일어났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무겁고 어두운 이야기지만, 아이의 순수함과 천진난만함으로 담백하게 그려내고 있어 누구나 부담없이 읽을 수 있는 작품이었다. 고통과 괴로움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어야만 그 무게가 느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새삼 깨달으며, 홀로코스트라는 비극을 잊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해 본다. 우리는 여전히 전쟁과 죽음이 현재 진형형이고 미움과 차별이 존재하는 세상 속에서 살고 있다. 사랑스러운 아이의 시선을 통해 그려지는 이 먹먹한 이야기를 통해서 평화로운 세상이라는 기적을 언젠가는 만날 수 있기를 바래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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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주식회사
잭 런던 지음, 한원희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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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얘기를 듣고 있던 윈터 홀의 머릿속에 별안간 기막힌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너무 기발하고 터무니없다시피 해서 그는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생각에 홀딱 빠지고 말았다.

"선생은 참으로 윤리적인 사람이군요." 그가 입을 뗐다. "일종의 ...... 도덕광이라고 할까요."

"도덕에 환장했다고 할 수 있지." 드라고밀로프가 유쾌하게 대꾸했다. "맞아, 내겐 그런 경향이 있지."

"옳다고 여기는 일이 있으면 무슨 일이라도 하시겠군요."           p.59


부패한 노동조합 간부, 리틀 경찰서장, 거물급 후원자, 목화 왕, 세철리 조사관 등 권력과 부패의 정점에 있던 사회계 인사들이 차례로 변을 당한다. 그리고 그 사건들 뒤에는 무시무시한 암살주식회사가 있었다. 암살국의 수장인 드라고밀로프는 죽어 마땅한 악인을 법의 테두리 밖에서 처단하는 일을 한다. 왕부터 가난한 농민까지 대상을 가리지 않고 어떤 의뢰든 받지만, 그 전에 조사를 통해 사회적으로 그 죽음이 정당하다는 결론이 나와야만 처리가 가능하다는 것이 유일한 규칙이다. 그러던 어느 날, 암살국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백만장자 청년 윈터 홀이 나타나 자신에 대한 암살 의뢰를 하고, 그가 제시하는 도덕적 근거에 설득당한 드라고밀로프는 암살국 해체뿐만 아니라 그곳의 수장인 자기 자신 또한 제거되어야 옳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게다가 하필 윈터 홀은 드라고밀로프의 딸인 그루냐 콘스탄틴의 애인이기도 했다. 그루냐는 자신을 삼촌으로 알고 있었지만, 사실은 그의 딸이라는 사실을 비롯해 앞으로 자신의 딸을 잘 부탁한다는 말까지 건네며 드라고밀로프는 홀에게 뒷일을 맡긴다. 하루아침에 암살 표적이 되어 조직원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었음에도 그는 자신만만한데, 직접 사람을 죽여본 적이 없는 그는 대체 뭘 믿고 이 일을 수락한 것일까. 자, 과연 조직이 창조자를 죽일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창조자가 그보다 한 수 앞서나갈 수 있을 것인가. 이야기는 점점 더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얘야, 그루냐." 드라고밀로프가 애원했다. "아름다운 광기가 아니더냐? 꼭 광기라는 단어를 고집한다면 말이다. 여기에서는 사유와 도덕이 지배한단다. 내 눈에는 그게 가장 고결한 합리이자 통제로 보이는구나. 사람이 하등동물과 다른 점은 통제력이야. 지금 이 상황만 해도 그렇잖니. 저기 날 죽이려고 하는 일곱 명의 사내들이 있어. 여기엔 저들을 죽이려는 내가 있고. 하지만 대화라는 기적을 통해 우리는 휴전에 합의했다. 신뢰하는 거지. 고결한 도덕적 통제를 아름답게 보여주는 예시가 아니겠니?"            p.181~182


<야성의 부름>으로 잘 알려진 작가 잭 런던의 미발표 유작이다.  이 작품의 줄거리는 잭 런던이 1910년 3월 11일 당시 무명 작가였던 싱클레어 루이스(1930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에게 70달러를 주고 사들인 열네 개의 이야기 개요 중 하나였다고 한다. 그는 2만 단어 분량의 내용을 쓴 뒤 1910년 6월 말 소설의 결말을 논리적으로 끝맺지 못하겠다는 이유로 집필을 중단했다. 전체 286페이지인 이 작품에서 잭 런던의 원고는 198페이지의 중반 이후에서 멈춘다. 그리고 이 작품은 1963년 가을, 추리소설가인 로버트 L.피시가 뒤를 이어 마무리해서 출간이 되었다. 하지만 ‘소설을 완성하기 위해 잭 런던이 남긴 메모’와 ‘차미언 런던(런던의 두번째 아내)이 구상한 결말’이 함께 수록되어 미완성 결말에 대한 흥미로운 상상의 여지를 남겨준다. 


'법의 테두리 밖에서 악인을 처단하는 것은 정의구현인가, 또다른 범죄인가'에 대한 문제를 이렇게 오래 전에도 작품 속에서 고민했었다는 점도 흥미롭고, 미국 역사상 최초로 전 세계적인 인기를 누린 소설가이자 대중잡지 소설 황금기의 개척자 잭 런던조차 그에 대한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는 점도 인상적인 작품이다. 세상에서 가장 철학적인 킬러들이 등장하는 색다른 고전 문학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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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몬은 어떻게 나를 움직이는가 - 순간의 감정부터 일생의 변화까지, 내 삶을 지배하는 호르몬의 모든 것
막스 니우도르프 지음, 배명자 옮김 / 어크로스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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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하게도 이 아름다운 뇌는 심각한 과체중을 부추기는 해로운 역할을 한다. 그리고 그것은 약간 특이한 현상과 관련이 있는데, 인간은 고칼로리 음식을 '맛있다'고 인식한다. 뭔가 달콤하거나 맛있는 걸 먹으면 우리의 뇌는 올바른 결정에 대한 보상으로 좋은 기분을 만든다. 동물의 세계에서 이것은 비교적 낯선 현상이다. 굶주린 하이에나는 썩어가는 얼룩말을 가죽이며 털이며 글자 그대로 닥치는 대로 먹는다. 맛이 있냐 없냐는 중요하지 않다. 뭐든 먹기만 하면 주린 배를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호모 사피엔스는 달랐다.             p.214


푹 자고 일어나도 여전히 피곤하고, 매사에 우울하고 무기력하며, 나이를 먹을수록 늘어난 체중은 줄지 않고, 내 몸이 좀처럼 마음대로 따라주지 않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 이 모든 것이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면 어떨까. 우리 몸의 신진대사와 감정 변화 뒤에는 언제나 '호르몬'이 있다. 


세계적인 내분비 전문의인 막스 니우도르프 교수는 이 책에서 우리의 생애주기에 따른 호르몬의 역할과 그로 인한 신체적, 정신적 변화에 대해 체계적으로 알려 준다. 임신과 출산에서 생명의 탄생을 위해 호르몬이 하는 일부터 사춘기의 성장 호르몬, 남성과 여성을 구분짓는 성 호르몬과 과체중과 식습관을 좌우하는 호르몬의 역할과 각종 질병, 그리고 스트레스, 갱년기 장애 등 삶의 각 단계마다 호르몬이 어떻게 신체 기능을 활성화하고 지시하는지 보여준다. 호르몬은 새 생명의 탄생 과정에서 없어서는 안 될 핵심 역할을 하고, 뇌의 깊은 곳에서 우리 몸을 조종한다. 이 작은 화학물질의 균형이 조금만 흐트러져도 몸 곳곳에서 경고 알람이 울리기 시작하기 때문에, 호르몬이 우리의 몸과 마음을 지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저 호르몬의 명령에 따르는 수밖에 없는 것일까? 




대부분은 '호르몬'이라는 단어에서 남성과 여성의 모든 차이점을 떠올리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대다수 차이점이 실제로 성호르몬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노년에는 뭔가 특이한 일이 일어난다. 나이가 들수록 남성과 여성의 호르몬 차이가 서서히 사라진다. 폐경 후 여성의 에스트로겐은 급격히 감소하는 반면 노인 남성의 테스토스테론은 천천히 감소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생화학적으로 볼 때 남성과 여성은 점차 닮아간다. 여성은 사춘기 이후부터 에스트로겐이 지휘하지만 60세가 되면 호르몬의 근무 교대가 일어난다. 난소와 부신에서 나오는 테스토스테론이 그 지휘봉을 넘겨받는다.            p.349~350


뚱뚱한 사람들이 주변의 날씬한 사람들로부터 이해받기란 쉽지 않다. 날씬한 사람 눈에는 뚱뚱한 사람이 누구나 걸릴 수 있는 암, 담석, 골반골절 같은 '진짜' 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과체중 역시 진짜 질환이라고, 이 책은 말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호르몬이 과체중에 미치는 영향을 잘 알지 못한다. 나 역시 이 책을 통해서 처음 알게 된 사실이다. 배고픔이라는 생명의 가장 오래된 욕구를 만들어 내는 것이 바로 호르몬 때문이라는 것을 말이다. 지나친 식욕은 위와 뇌 사이의 호르몬 및 신경 자극 조절 장애로 생긴다고 한다. 뚱뚱한 사람의 위가 다른 사람의 위보다 더 크기 때문이 아니고, 그들이 먹는 양을 조절하지 못하는 의지의 문제가 아니란 말이다. 음식을 먹게 하고, 칼로리 욕구를 높여 늘어난 체중을 유지하려고 하는 호르몬이라니... 그야말로 놀라운 이야기였다.


이 책은 이렇듯 중요하지만 잘 알려지지 않았던 호르몬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돕고, 일반인이 가진 호르몬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고, 우리 몸을 제대로 알아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 갑상선과 당뇨병은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잇는 흔한 질환 중 하나이다. 또한 사춘기와 폐경기 역시 모든 사람들이 겪는 과정이다. 이 모든 것들이 모두 호르몬 때문에 생기는 것이고, 나이가 들수록 호르몬과 관련된 질환에 걸릴 확률이 높아진다. 현대인들의 삶과 뗄레야 뗄 수 없는 스트레스 역시 호르몬의 영향으로 인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호르몬에 대해서 제대로 알게 된다면, 올바른 방식으로 그것을 관리할 수도 있게 될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는 저절로 조절되는 훌륭한 호르몬 프로그램이 있고, 이 프로그램은 신체 기능이 정상적으로 작동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분주하게 일하고 있다. 그러니 몸과 마음의 균형이 필요할 때 호르몬이 우리에게 어떤 신호를 보내는지 알아야 한다. 건강의 악순환을 끊어내고, 우리 몸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통해 삶의 주도권을 되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갈수록 몸이 예전 같지 않다고 생각해 본 적이 있다면, 이 책을 통해 '호르몬'의 변화에 대해 알아보고, 어떻게 대비해야 할지에 대한 과학적 해답을 얻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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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루프 창비교육 성장소설 11
박서련 지음 / 창비교육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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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학교에 가면서 솔직히 이런 기대도 조금은, 아주 조금은 품고 있었다. 그래도 어쩌면 한두 명쯤은, 도대체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물어봐 줄지도 모른다는 기대... 죄다 말해 줄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지만, 누가 물어만 봐 주면 그거 다 오해라고 하면서 우는 모습 정도는 보여 줄 생각이었다. 딱 한 명만 내게 말을 걸어 준다면 나는 그 앞에서 울어 줄 수 있고, 울고 나면 분위기가 바뀔 거라고. 적어도 우리 반만은. 우리 학교만은. 우리 동네만은.           - '솔직한 마음' 중에서, p.24


6인조 아이돌 그룹에서 막내였던 나는 자신이 원래부터 사랑받게끔 타고난 사람들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인기있는 그룹은 아니었지만 팬층은 나름대로 돈독해서 그럭저럭 팔리는 걸 그룹이었고, 막내라는 포지션 또한 못해도 중간은 가는 편이라 편했고 말이다. 그런데 한 달 전, 메인 보컬 언니가 그룹 내 왕따 폭로 글을 올리고 세상이 완전히 달라져 버린다. 우리 그룹에 무슨 왕따가 있느냐는 생각부터 들었을 정도로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지만, 가만이 있던 자신가지 덩달아 방관자, 가해자가 되어 버린 것이다. 모든 인터넷 언론사가 기사를 냈고, 팬은 꽤 있지만 안티는 없었던 그들 그룹은 그야말로 국민 왕따가 되어서 망했다. 그렇게 돌아온 학교 생활 역시 편할 수 없었다. 아무도 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봐 주지 않았고, 그저 보도된 대로 그룹 내 멤버를 왕따시킨 가해자로 학습 내 왕따가 되어 버리고 만다. 나는 '원래 왕따'였던 원따와 친구가 되어 보고자 하지만, 그것조차 결코 쉽지 않다. 


이 책에는 친구를 사귀고 싶은 아이돌 소녀의 고군분투기외에도, 다양한 상황에 놓인 소녀들의 성장기가 담겨 있다. 개인적으로는 표제작이기도 한 <고-백-루-프>를 흥미롭게 읽었다. 모두의 선망을 받는 1학년 보컬 우지현이 현지에게 축제 전야제에 오라고 초대를 한다. 자신의 노래를 들으러 오라고, 신신당부를 하는 지현을 보며 현지는 생각한다. 가능성은 반반이라고, 진짜 고백을 하려는 거, 아니면 그냥 엿 먹이는거. 그래서 축제 전야제에 가야 할까, 말아야 할까 고민 중이다. 애초에 사람 많고 시끄러운 건 딱 질색이고, 누가 가요제에서 우승하든 내 관심사는 아니었으니 말이다. 망설이다 지현의 초대를 외면하고 하교를 해 버린 다음 날, 현지에게 어제와 똑같은 일들이 연달아 일어났고, 오늘의 날짜가 어제랑 같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특정한 하루가 구간 반복되는 상황, 소위 '루프'에 갇히게 된 것이다. 그렇게 반복되는 루프 속에서 현지는 지현을 진심과 자신의 마음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을 갖게 된다. 게다가 알고 보니 일상은 엄청나게 불확실하고 예상 불가능한 것이라는 것을, 반복되는 루프를 겪으며 깨닫게 된 것이다. 풋풋하고, 귀여운 이야기였다. 




내가 겪은 불가사의한 루프를 비밀로 하는 건 쉬웠다. 설명하려고 노력해 봤자 이해 못 할 게 뻔하니까. 하지만 언젠가는, 가능하면 바로 지금, 말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순간에 도달하기 위해 내가 어떤 시간들을 통과해 왔는지를 우지현이 이해해 줬으면 했다. 대답 대신 그 시간들을 내밀고 싶다는 충동이 자꾸 튀어나왔다. 나는 숨을 고르고 우지현에게 손을 내밀었다. 우지현이 좋아하는 작고 하얀손. 내가 싫어하는 통통하고 손마디 굴은 손.

"앞으로 잘 부탁해."                   - '고-백-루-프' 중에서, 


<체공녀 강주룡>, <더 셜리 클럽>, <마법소녀 은퇴합니다> 등의 작품으로 만나온 박서련 작가의 첫 청소년소설집이다. 작가가 등단 후 창작한 청소년소설 다섯 편과 청소년 시절 쓴 소설 두 편이 각 작품의 창작 후기와 함께 수록되어 있다. '청소년은 소설을 쓸 수 있고, 소설 쓰던 청소년이 결국 소설가가 되는 일도 드물지 않게 일어난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는 작가의 말처럼, 이 책을 읽으며 그 시절의 작가를 상상해 본다. 야간 자습 시간에 연필로 소설을 쓰고 집에 가서는 그걸 컴퓨터에 옮긴 후 밤새 이어 가며 소설을 썼던 청소년 시절이 있었기에, 한겨레문학상, 문학동네 젊은작가상, 이상문학상을 받으며 믿고 보는 작가로 사랑받는 지금의 모습이 있는 것일테니 말이다. 


친구를 사귀고 싶은 아이돌 소녀의 이야기, 폐업을 앞둔 극장 매표소를 지키며 고향에서 벗어나고픈 소녀의 이야기, 타임루프에 갇히게 되면서 자신의 마음과 친구의 고백을 확인하는 소녀의 이야기 등 청소년들이 고민하고, 겪고 있을 법한 상황들이 다채로운 상황 속에서 그려지고 있다. 무한대로 확장하는 상상력을 통해서 SF적인 설정이 가미된 스토리도 있었고, 타임루프라는 장치를 사용한 이야기도 있었으며, 가족들간의 갈등을 다루고 있는 현실적인 작품도 있었다. 박서련 작가가 그 동안 여러 작품에서 보여준 여성들의 서사들이 이러한 이야기들을 통해서 탄생하게 되었구나 싶은 작품들도 있었다. 작가는 아직 소설을 써 본 적 없는 어떤 청소년이 이 작품들을 보고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해 준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고, 말했다. 그래서 더욱 더 청소년들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책이기도 하다. 조금은 서툴지만 그 부족함이 미래로 향하는 더 큰 발걸음이 될 수 있는 가능성으로 가득찬 청소년들의 세계를 만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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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 현대문학 핀 시리즈 장르 3
이희영 지음 / 현대문학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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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말하는 명확한 원인과 결과는 과학에서나 통용된다. 인간의 삶에서는 이것이다, 할 수 있는 정확한 공식과 법칙이 성립될 수 없다. 악한이 꼭 벌을 받는 것도 아니다. 솔직히 그냥 재수가 없거나 운이 나쁘면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는 게 우리네 삶이다... 나는 왜 내 얼굴을 볼 수 없을까? 원인이 뭘까? 무슨 이유 때문일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당장에 뾰족한 결론에 도달할 수 없다. 아마 앞으로도 찾 기 힘들 것이다. 그러니 남들은 멀쩡히 잘만 가는데 나 혼자 넘어졌다고 화낼 필요가 없다. 그래 봤자 달라지는 건 없으니까. 그냥 지지리 재수 없었다, 생각하며 툭툭 털어낼 수밖에.            p.25~26


만약 내 얼굴을 나만 볼 수 없다면 어떨까. 다른 모든 것은 다 보이는데 자신의 얼굴만 안 보이는, 그야말로 이해할 수 없는 상태. 거울에 비친 모습도 자신을 그린 그림도 사진도 모두, 얼굴과 관계된 것은 다 볼 수 없다면 말이다. 이 작품 속 주인공 인시울은 여섯 살 때 어느 날, 자신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거울 속에서 보이는 건 안개처럼 흐릿했다가, 색색의 블록으로 보이다가, 먹물을 엎어버린 모습으로 보이기도 한다. 병원을 다녀봤지만 안구나 시력에는 문제가 없었고, 어떤 병원에서도 명확한 원인을 파악할 수 없었다. 


시울은 부모의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 자신의 얼굴이 보인다는 거짓말로 상황을 모면했고, 이후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평범하게, 정상인 것처럼. 그런데 고등학교 2학년 어느 날, 교실에서 작은 사고가 생긴다. 하필 그날 사물함을 새로 교체했고, 묵재가 친구들에게 던진 농구공에 맞은 시울이 쓰러지면서 사물함 모서리에 이마를 찍힌 것이다. 상처는 무려 스무 바늘이나 꿰매야 하는 것이었고, 그렇게 시울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얼굴에 상처가 난다. 그렇게 보기 싫은 흉터가 이마에 생기고 난 뒤, 거울을 보다가 시울은 새된 비명을 지른다. 그 흉터가 시울의 눈에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시울은 난생처음으로 진짜 자신의 얼굴과 마주하게 된다. 천천히 손을 들어 흉터를 만져보고, 그 작은 흉터에게 인사를 하는 시울의 마음은 어땠을까.  





라미가 자신의 진짜 매력을 모르듯, 사람들이 할머니의 소녀 같은 호기심을 못 보듯, 우리는 어쩌면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 백지보다 귀퉁이의 작은 얼룩에만 집중하는지도 모른다. 비록 나는 내 얼굴을 볼 수 없지만, 세상은 볼 수 있다. 그리고 언젠가 때가 되어 기적처럼 내 얼굴과 마주하는 날이 온다면, 그때의 나에게 미안해하지 않을 정도의 얼굴을 만들어가고 싶다. 표독하지 않은 표정과 웃는 주름이 많은 편안한 얼굴이 되길 바란다. 그 얼굴과 마주하는 건 오직 내 노력 여하에 달렸다. 그래서 다행이고 한편으로는 두렵다. 눈에 보이는 것들을 위해 정작 보이지 않는 것들을 놓치게 될까봐.               p.172~173


시울에게 상처를 만들어준 묵재는 중2때 엄마가 돌아가신 뒤로 꽤 유명했었는데, 이유는 엄마가 알코올중독자로 술에 취해 맨발로 길을 건너다 차에 치였기 때문이다. 이후 묵재는 아빠와 단 둘이 지내고 있는데, 고등학교 1학년 때는 집을 가출해 한 번 더 학교를 뒤집어놓은 적이 있다. 그 뒤로는 교실 뒤 사물함처럼 조용히 학교에 다니고 있는 데 시울 역시 제대로 말 한 번 해본 적이 없다. 분명 있는데 전혀 없는 것처럼 그런 존재였던 묵재는 시울에게 상처를 만들어 주고는, 갑자기 존재감이 생겨 버린다. 얼굴에 생긴 흉터가 미안한 묵재는 죄책감을 느끼고 시울에게 사과하지만, 사실 시울이는 흉터를 빨리 지우거나 어떻게든 없애야 하는 그런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묵재에게 전에는 보지 못했던, 보이지 않던 내 얼굴의 아주 작은 부분이 보이기 시작했다고는 말할 수 없고, 말해줘도 이해 못하겠지만 시울은 자신이 흉터와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다고 말한다. 그렇게 묵재와 시울은 자신의 이야기를 조금씩 나누게 되고, 엄마가 죽었을 때 어떤 기분이었는지 아빠와 남게 된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들으며 시울은 생각한다. 아무도 상대를 완벽히 알 수 없다고. 설령 가족이라 해도 말이다. 그렇게 상처 자국을 통해서만 스스로를 볼 수 있게 된 시울을 통해 작가는 우리가 진짜 제대로 보아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누구나 자신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기 위해 애쓰지만, 정작 마주해야 하는 것 앞에서는 못 본 척 외면하면서 살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스스로에 대해서든 타인에 대해서든 보여지는 것 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여유를 가져야겠다고 생각해 본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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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4-04-19 0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소설 궁금했는데,,,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