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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체 0 : 구상섬전
류츠신 지음, 허유영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8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고요한 가을밤, 별이 가득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에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아름다운 인생을 살아가는 비결은, 무언가에 깊이 매료될 수 있느냐에 달린 거란다.' 나는 이제 아버지의 말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 내 삶에는 빠르게 상공을 날아가는 미사일처럼 목표물을 폭파하고 싶다는 갈망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것은 출세나 성공을 위한 목표가 아니라 내 삶의 완결을 의미했다. 나는 내가 왜 거기에 가려는지 이유도 모른 채 그냥 가고 싶었다. 그곳에 도달하는 것 자체가 목표였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p.23
천둥 번개가 몰아치고 있던 밤이었다. 그날은 열네 살 소년 천의 생일이었다. 천은 날씨 덕분에 온 우주가 곳곳에서 번쩍이는 번개와 자신의 집만으로 이루어진 듯한 착각이 들었다. 저녁 무렵부터 내리기 시작한 폭우는 갈수록 심해졌고, 사나운 폭우가 몰아치는 밤이라는 배경이 집을 더 소중하게 느껴지도록 만들었다. 평소에 늘 바쁘던 부모님이었지만 그날은 케이크에 초를 켜고 둘러앉아 천의 생일을 축하해주었다. 아버지는 천에게 '결국 아름다운 인생을 살아가는 비결은, 무언가에 깊이 매료될 수 있느냐에 달린 거'라고 말한다. 아버지는 케이크에 꽂힌 초를 가리키며, 이런 게 바로 생명이고 인생이라고, 미풍도 견디지 못할 만큼 약하고 불안정한거라고 말한다. 그떼 갑자기 번개가 번쩍이며 창밖이 대낮처럼 환해졌다. 그리고 그것이 날아들어 왔다.
농구공만한 크기에 희미하게 붉은빛을 띤 그것은 검붉은 화염 같은 긴 꼬리를 매달고 있었다. 그리고 눈을 뜰 수 없는 섬광과 귀를 찢을 듯한 굉음과 함께 천의 부모님은 한순간 재로 변해 버렸다. 이상한 것은 주변의 다른 어떤 것도 불탄 흔적이 없었다는 거다. 부모님이 앉았던 나무 의자는 흠집조차 없이 멀쩡했고, 재를 떨어내자 얼음장처럼 차갑기까지 했다. 천은 구 형태의 기묘한 번개인 ‘구상섬전(Ball Lightning)’에 완전히 매료되어 버렸고, 그것의 비밀을 풀어내겠다고 다짐한다. 아버지가 이야기한 '아름다운 인생'을 살아가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천이 물리학자가 되어 구상섬전에 대해 집요하게 탐구해 나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 것이 이 작품의 주요 서사이다. 구상섬전의 실체에 가까워질수록 기존의 물리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들이 잇따라 나타나는데, 과연 기존의 물리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것의 정체는 대체 무엇일까. 천은 부모님을 한순간에 데려가 버린 그것의 비밀을 밝혀낼 수 있을까.

"파커 박사님, 아주 중요한 연구가 될 겁니다. 만약 정말로 우리 세계를 관측하는 초월적인 관측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증명된다면 인류의 행동은 훨씬 더 신중해질 겁니다....... 비유하자면 인류 사회 전체도 불확정적인 양자 상태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죠. 그렇지만 그런 초월적 관측자가 있다면 인류 사회를 다시 합리적이고 안정적인 상태로 '붕괴' 시킬 수 있을 겁니다."
"그 초월적 관측자를 더 일찍 발견했더라면 지난 전쟁도 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p.449
이 작품은 아시아 작가 최초로 ‘SF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휴고상을 수상하며 전 세계에 ‘삼체 신드롬’을 일으킨 SF 거장 류츠신의 두 번째 작품이다. 이 작품이 2005년에 출간되었고, <삼체> 3부작이 2006년부터 연재가 되었으니, 프리퀄 격인 작품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삼체>는 전체 3권을 합하면 거의 이천 페이지 가까이 되는 압도적인 페이지라 엄청난 분량의 압박을 견뎌야 하는 작품이다. 최근에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삼체> 시즌 1도 8부작이나 되어서, 이 시리즈가 궁금했다면 이번 작품으로 시작해 보아도 좋을 것 같다. 넷플릭스 시리즈로는 시즌 2와 시즌 3가 제작될 예정이라고 하고, 영화화도 진행 중이라고 한다. 1960년대 문화 대혁명부터 시작해 텐안먼 사태, 양탄 공정 등 중국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을 거쳐 수백 년 후 외계 함대와의 마지막 전쟁까지 이어지는 방대한 스토리라 영상화 되어도 분량이 많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삼체> 시리즈는 단순히 몇 줄의 줄거리 요약으로는 정리할 수 없을 만큼 우주에 관한 놀라운 상상력과 시간의 본질과 창세의 비밀에 통찰력이 압도적인 작품이었다. 작가의 방대한 과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천체 물리학과 수학이라는 학문의 매우 리얼한 미래를 보여주었던 <삼체> 3부작만큼 프리퀄 격인 <삼체 O 구상섬전>도 과학적인 정보와 놀라운 상상력, 탄탄한 구성과 서사로 시선을 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이 작품은 부모를 잃은 과학자 천이 그 비밀을 밝히기 위해 무기에 매혹된 장교 린윈, 물리학자 딩이와 함께 집요하게 탐구해 나가는 과정을 주요 서사로 냉전 시대의 역사적 상흔과 과학적 열망이 전쟁과 폭력의 도구로 전락하고 마는 아이러니를 함께 그려내고 있다. 인류 문명 전체가 직면한 위기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담고 있으면서도, 흘러가는 서사 자체가 굉장히 스릴 넘치고 흥미진진해서 누구나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만한 작품이기도 했다. <삼체> 3부작과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으며, 공통으로 등장하는 인물도 있기 때문에 함께 읽어 보면 더 좋을 것 같다. 혹은 <삼체> 시리즈의 유명세는 알고 있었지만 방대한 분량 때문에 선뜻 시작하지 못했다면, 이번 작품이 그 세계로 향하는 완벽한 입문서가 되어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