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도 없는 사이
시몬 드 보부아르 지음, 백수린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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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색한 침묵이 감돌고, 기트 언니가 쌀쌀맞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린애들은 자기가 이해하지도 못하는 것에 대해서 말하는 게 아니야.”

앙드레는 대답하지 않고 다시 웃었다. 나는 난처해하며 앙드레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걸까? 내가 이해하는 사랑은 하나밖에 없었다. 앙드레를 향해 내가 품고 있던 사랑.             p.46


오랜 시간 동안 '둘도 없는 사이'로 지내는 관계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초등학교 때 친구일 수도 있고, 대학 때 만난 사이일 수도 있고, 사회 생활을 하며 만나게 된 관계일 수도 있다. 우리는 평생 누군가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고, 때로 그 관계는 나를 변화시키고, 가치관을 완성시켜주고, 삶을 달라지게 만들기도 한다.


이 작품 속 두 주인공, 실비와 앙드레는 아홉 살에 학교에서 처음 만난 단짝 친구다. 실비는 처음부터 앙드레가 마음에 들었다. 다른 모든 아이들이 자신을 지겹게 한데 비해, 앙드레는 자신을 웃게 만들었다고 그 순간을 기억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게 실비는 앙드레의 집에 드나들기 시작하고, 방학 동안에는 엽서를 쓰고, 그러면서 조금씩 변하기 시작한다. 모범생이었던 실비는 선생님들이 정말 바보 같다고 생각하기 시작했고 그들이 곤란해할 질문들을 던지는 것을 즐겼으며 반항을 하거나 선생님들의 충고를 건방진 태도로 받아들였다. 살면서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질 수도 있다는 말처럼, 어떤 친구를 사귀느냐에 따라 삶의 많은 부분들이 바뀌게 마련이다. 그렇게 두 사람은 아주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고, 둘도 없는 친구 사이로 우정을 나눈다. 하지만 실비 앞에 무한한 세계가 열리는데 반해, 앙드레는 죽음을 향해 간다. 영원히 지속되는 관계란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앙드레가 위험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으면 앙드레를 대신해 네가 결정해서는 안 되지." 내가 말했다.

"아냐, 앙드레 자신으로부터 앙드레를 지켜 주는 게 내 역할이야. 앙드레는 너무 관대하니까 사랑 때문이라면 지옥에라도 떨어지려 할 거야."

"불쌍한 앙드레! 모든 사람들이 앙드레를 구원받게 하고 싶어 하는구나. 앙드레가 그토록 원하는 것은 이 지상에서 조금이라도 행복해지는 것인데!"               p.166~167


이 작품은 시몬 드 보부아르의 미발표 유작이다. 생전에 출간되지 못했다가 그녀의 입양 딸인 실비 르 봉 드 보부아르에 의해 2020년에야 비로소 세상에 공개되었다. 사후 40년 가까이 흐른 지금, 소설가 백수린의 국내 첫 완역으로 만나보게 되었다.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라는 말을 했던 보부아르는 현대 페미니즘의 선구적 역할을 한 작가이다. 국내에는 <제2의 성>을 비롯해 공쿠르상을 수상한 <레 망다랭> 등의 작품으로 소개가 되었다. 보부아르는 소설가이기도 했지만 고등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친 선생님이었고, 사르트르와 함께 정치철학 잡지를 창간한 저널리스트이자 극작가, 페미니즘 사상가 등 다양한 모습으로 정열적으로 활동했던 걸로도 유명하다.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와는 계약 결혼 관계를 맺고, 서로를 구속하지 않는 연인이자 지적 동반자이기도 했다. 그런 보부아르가 사르트르를 만나기 전, 사랑과 동경의 대상이었던 친구이자 둘도 없는 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은 그리 많이 알려진 사실이 아니다. 그래서 이 작품이 더욱 특별한 것이고 말이다. 


극중 실비와 앙드레는 보부아르 자신과 실제 단짝 친구였던 자자를 그린 것이고, 자자는 스물한 살이라는 이른 나이에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했다. 일명 ‘자자’라고 불렸던 보부아르의 단짝 친구는 엘리자베스 라쿠앵으로 재기발랄한 성격과 다양한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두 사람은 엄격한 가톨릭 명문이었던 데지르 학교에서 처음 만나 친구가 되었다. 보부아르는 지우고 고쳐 쓴 여러 버전으로 이 소설의 원고를 평생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미발표된 젊은 시절의 소설들과 단편집, <레 망다랭>의 삭제된 페이지까지 총 네 번에 걸쳐서 자자라는 캐릭터를 부활시키려 했었다고 한다. 결국 짧은 소설의 형태로 자자의 이야기를 그린 이 원고만 남았고, 2020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세상에 공개된 것이다. 그만큼 사랑과 동경의 대상이었던 친구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자전 소설인 이 작품은 그가 마지막까지 쥐고 있었던, 그리고 마지막으로 공개된 미발표 유작으로서 가치가 있다. 특히나 국내 번역본에는 책의 후반부에 실존 인물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과 친필 편지가 부록으로 구성되어 애틋한 마음과 감정들이 시대와 장소를 초월해서 느껴지도록 했다. 보부아르가 오랜 세월에 걸쳐 쓰고 간직했던, 영혼의 단짝과의 아주 특별한 우정 이야기를 만나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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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움직인 열 가지 프레임 - 현대 문명의 본질과 허상을 단숨에 꿰뚫는 세계사
수바드라 다스 지음, 장한라 옮김 / 북하우스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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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전된 총이 공기를 가로질러 총알을 전달하듯이, 글로 쓰인 말은 기술, 사상, 정보를 전달하는 도구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누가 썼는가라는 흥미로운 사안을 제기할 수 있었던 까닭은, 어느 정도는 그가 문서 기록에는 비교적 등장하지 않았다는 점 때문에 가능했다. 이렇게 남은 공백은 다른 사람들의 생각으로 채워질 수가 있었다. 스스로의 글을 발표할 수 있는 사람들의 생각도 포함해서 말이다. 이런 점은 글이 지닌 힘과 생각의 본성에 관해 무언가를 알려준다. 살아남는 생각, 전해지는 이야기, 그리고 더 중요하게는 그렇게 되지 못하는 것들에 관해서 말이다. 현실에서는 글은 글 자체만을 들려주는 것이 아니다.             p.98~99


누구의 말도 그대로 믿지 말라, 아는 것이 힘이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 정의의 여신은 눈을 가리고 있다, 시간은 돈이다, 죽음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다 등 누구나 한번쯤 들어봤을 법한 말들이다. 게다가 이러한 말들은 누구도 그 개념을 믿어 의심치 않는 확고한 진리처럼 통용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잠시 생각해보자. 이 신념들이 사실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문명의 핵심에 자리 잡고 있는 이러한 생각들은 믿을 수 있는 것일까? 이 책은 그렇게 오랜 시간 지켜온 신념으로 공유되는 열 가지 핵심 가치의 이면을 살펴보고, 그러한 개념들의 생성 과정을 탐구한다. 


과학, 교육, 문자, 법, 민주주의, 시간, 국민, 예술, 죽음, 공동선이라는 중요한 가치를 통해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보는지, 우리가 서로를 어떻게 보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이기도 하다. 셰익스피어를 둘러싼 음모론, 잉카제국의 문자가 역사에서 삭제된 이유, 불평등과 불공정함으로 가득 찬 세상, 단 한 번도 국민에게 권력이 주어진 적이 없었던 민주주의라는 허상, 과학을 독차지한 자들, 서구의 시간 개념이라는 덫 등 우리가 문명화의 증거라 믿었던 것들, 아무런 의심 없이 수용했던 가치들 속에 어떤 권력의 프레임이 숨겨져 있는지 알게 된다면 놀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가 세운 문명화의 기준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누가 확립했으며, 결정적으로 누가 이익을 보고 있는지 말이다. 





이 재밌는 이야기를 망치는 것 같아 아쉽지만 사실관계를 확실히 하는 게 역사학자인 나의 임무다. 클레리지스 호텔의 스위트룸이 하루 동안 유고슬라비아가 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기록은 아무것도 없다. 내가 보기에 이 이야기는 기껏해야 희한한 동화 정도로 보인다. 난관에 부닥친 왕족이라는 전형적인 등장인물들이, 국민적인 영웅이자 요정인 대부의 너그러운 변덕 덕분에 외교술이라는 마법을 통해서 구원받았다는 동화 말이다. 그렇지만 이 모든 얘기 외에도 클레리지스 호텔 스위트룸 212호 이야기 속에는 우리가 흥미를 품을 만한, 그리고 지금 논의하고 있는 주제와 관련된 또 다른 요소가 있다. 바로 국민이다.                  p.256~257


대부분의 세계사를 다루고 있는 책들이 연대, 사건, 인물과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는 반면에, 이 책은 개념과 생각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어 신선했다. 서양 문명의 역사적 기원을 추적해 거짓말이 지탱하고 있던 세계사라는 파격적인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으니 말이다. 1장에서 다루고 있는 것은 과학이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했던 내용이었는데, '인종'이라는 개념을 정립하는 데 과학과 합리적 사고라는 마법이 어떻게 사용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우생학을 거쳐 홀로코스트 유대인 학살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인종적 특징으로서의 문명이 겉으로 보기에는 객관적인 과학적 진리라는 사실이 이른바 문명사회라는 곳 도처에서 보이는 사회적 불평등의 존재 이유에 대한 답이 되어준다니... 커튼으로 가리고 있던 세계의 한 단면을 마주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2장에서는 이론으로서의 교육과 실제 교육은 서로 다르다는 이야기로 시작해 중립적 교육이라는 환상을 넘어 교육의 핵심이 무엇인지에 이른다. 


3장은 특히나 흥미로웠는데, 셰익스피어가 쓴 것으로 알려진 연극과 시를 누군가 다른 사람이 섰다고 발표한 연구들이 상당히 많이 존재한다는 것으로 시작해 대문호를 둘러싼 음모론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오기 때문이다. 역사학자, 사회학자, 인류학자가 변태적으로 집착하는 대상이 있다면 바로 '글'이라고 하면서 모든 것을 표현하는 게 가능한 마법 같은 수단인 '글'에 대해 잉카 문명부터 시작해 두루 살펴본다. 이후 법과 정의, 민주주의의 역사, 시간과 국민에 대한 개념, 예술과 문화유산, 죽음 문화의 변천사, 그리고 공동선과 개인의 행복에 대해 살펴본다. 어떤 역사 책에서도 다루지 않는 관점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이야기라 매우 흥미롭게 읽었다. 이 책은 근대화 과정에서 서구 세계가 만든 거대한 억압과 착취의 구조를 통해 역사를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역사를 보는 자신만의 관점을 얻고 싶다면, 권력의 프레임에서 벗어나 다른 세상을 상상할 수 있는 힘을 되찾고 싶다면 이 책을 만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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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사피엔스 - 인류를 지배종으로 만든 문화적 진화의 힘
조지프 헨릭 지음, 주명진.이병권 옮김 / 21세기북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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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지구 육지의 표면을 3분의 1도 넘게 변화시켜 왔다. 우리는 다른 육상생물이 순환시키는 질소를 모두 합한 것보다 더 많은 질소를 순환시키며 지금까지 지구의 강 셋 가운데 둘의 흐름을 바꿔놓았다. 우리 종은 지금껏 살았던 어떤 대형 종보다도 100배나 더 많은 생물자원을 사용한다. 우리가 키우는 어마어마한 가축 떼를 포함시키면, 우리는 육상 척추 동물 생물자원을 98퍼센트도 넘게 차지하는 셈이 된다. 따라서 우리가 지구상에서 생태적으로 우세한 종이라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거의 없다. 그럼에도 한 가지 의문에는 답을 주지 않는다. 왜 우리일까? 무엇이 우리 종의 생태적 우세함을 설명해줄까? 우리가 성공한 비밀은 무엇일까?           p.38


만약 인간 50명과 꼬리감는원숭이 50마리를 데리고 서바이벌 게임을 한다고 가정해보자. 두 영장류 팀은 낙하산을 타고 중앙아프리카의 외딴 열대림에 도착한다. 그리고 2년 뒤에 생존자가 더 많은 팀이 이기는 것이다. 당연히 그 어떤 장비도, 물건도 허용되지 않는다. 생소한 밀림 환경에서 2년 동안 누가 더 살아남기에 유리할까. 객관적으로 판단하건데, 인간 팀이 질 공산이 크다. 그렇다면 우리 종이 진화한 대륙인 아프리카에서 수렵채취인으로 살아남는 데에도 쓸모가 없다면, 대체 우리의 커다란 뇌는 무엇에 쓰자는 것일까. 우리 종이 이처럼 번영할 수 있었던 비밀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사실 인간은 몸집과 식성이 비슷한 다른 포유류에 비해 몸도 약하고, 느린데다, 힘도 없다. 독성 식물을 해독하는 능력도 없으며, 구별하는 방법도 알지 못한다. 게다가 엄청나게 큰 뇌에도 불구하고 선천적으로 영리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현재의 인류는 생존에 성공하고, 지구상의 지배종이 된 것일까. 


하버드대학교 인간진화생물학과 조지프 헨릭 교수는 그에 대한 의문에 대해 인류학과 생물학, 심리학 등 여러 분야를 넘나들며 탐구한 결과를 이 책으로 보여준다. 그는 우리 종이 성공한 비밀이 우리 개개인이 지닌 마음의 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공동체의 집단두뇌에 있다고 말한다. 집단두뇌는 우리의 문화적 본성과 사회적 본성의 통합에서 생겨나는데, 우리 종의 혁신이 지능보다 사회성에 더 의존한다는 점은 대단히 흥미로운 부분이다. 수많은 실험과 사례들을 통해 얻어낸 결론은 인간이 먹을 것과 쉴 곳을 찾아내는 본능적 능력에 의해 살아남는 것도 아니고, 국지적 환경의 난관에 대해 '즉흥적으로' 해결책을 찾아내는 개인적 역량에 의해 살아남는 것도 아니라는 것에 이른다.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문화적 진화의 선택 과정들이 여러 세대에 걸쳐 도구, 관행, 기법을 포함한 문화적 적응물의 묶음들을 조립해 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은 그렇게 여러 세대에 걸쳐 문화적 적응물을 쌓아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왜 인간은 다른가’에 대한 답은, ‘우리는 루비콘강을 건넜다’는 것이다. 문화적 진화가 누적적이었고, 그런 다음 이 축적되고 있는 정보 덩어리와 그것의 문화적 산물 모두가, 불과 식량 공유 규범처럼, 인간의 유전적 진화에서 중심적인 추동력으로 발전했다. 우리가 이토록 독특해 보이는 이유는, 다른 어떤 현생 동물도 이 길을 밟지 않았고, 이 길을 밟았던 자들은 네안데르탈인이 그랬듯 우리 종이 여러 번에 걸쳐 확장하던 어느 한 기간에 대체되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우리의 독특함을 이해하는 핵심은 그 과정을 이해하는 데에 있으며, 그 과정의 특정 산물인 언어, 협력, 도구 따위를 강조하는 데에 있지 않다.                 p.478~479


이 책은 <위어드>라는 작품으로 만났던 하버드대학교 인간진화생물학과 조지프 헨릭 교수의 신작이다. 최재천 교수가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총,균,쇠>,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 에드워드 윌슨의 <지구의 정복자>를 잇는 책이라고 극찬했던 <위어드>는 ‘WEIRD’ 라는 5가지 키워드를 통해 인간의 심리와 사회의 진화론을 파헤치는 흥미로운 책이었다. 오늘날 국제 사회의 주류라고 여겨지는 인구통계학적 특성을 가진 위어드라는 집단에 대한 설정도 인상적이었고 말이다. 그래서 이번 신작도 기대가 되었는데, 알고보니 국내에는 <호모 사피엔스>가 먼저 소개되었고, 이번에 새로운 옷으로 개정판으로 출간되었다고 한다. 분량이 꽤 많은 편이기에, 튼튼한 양장본으로 제작되어 내구성도 좋고, <위어드>와 시리즈처럼 같은 판형으로 출간되어 더 마음에 든다. 


<호모 사피엔스>의 추천평은 정재승 교수가 썼는데, 이 책이 KAIST 융합인재학부의 필독서 중 하나라고 한다. 언젠가 방송에서도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 KAIST 융합인재학부는 학부를 졸업할 때까지 인간, 사회, 우주, 생명, 테크놀로지, 예술 등 여섯 개 분야에서 100권의 책을 읽고 토론하는 수업을 여섯 학기 동안 진행한다고 한다. 이 책은 그 100권의 리스트 에서 학생들이 가장 즐기는 책 중 하나이며, 수업에서도 가장 열띤 토론이 벌어지는 저작이라고 하는데, 책을 읽어보니 그럴 만도 하나는 생각이 들었다. 경제학과 인류학, 심리학과 뇌과학, 역사학 등 다양한 분야를 넘나들며 인류 문명에 대해서 새로운 시각과 통찰력을 보여주는 책이니 말이다. 물론 내용이 결코 쉽지 않으며, 분량 또한 수월하게 읽을 만하지는 않지만 책장에 두고두고 함께하며 시도 때도 없이 꺼내 읽어야 할 명저임에는 분명하다. 인간의 행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심리, 생물학, 문화, 유전자, 역사가 서로 얽혀 있는 방식들을 풀어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이 책은 오늘날 인간의 삶과 사회를 이해하고 수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놀라운 통찰력이 궁금하다면, 인간의 삶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한 탐구에 관심이 있다면 이 책을 놓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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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오리배 - 우리의 긴 이야기
이주희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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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반복되는 하루, 수없이 마주하는 익숙한 풍경 속에서 벗어나고픈 마음이 들 때가 있다. 유난히 힘들고 지겹게 느껴지는 어느 날, 익숙한 길을 벗어나 마음이 이끄는 대로 가본 것이다. 그곳에서 '나'는 '너'를 만난다. 퇴근하는 버스 창 밖으로 스치는 풍경을 보다가,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가다 같은 풍경을 보고서 말이다. 한강, 오리배 타는 곳에서 그렇게 '나'와 '너'가 마주하게 된다. 


세상에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 중에, 너와 내가 하필 그날 그곳에서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될 확률은 얼마나 될까. 애초에 누군가 그랬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게 되는 일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라고. 이 작품은 바로 그 마법같은 순간을 사랑스럽고, 엉뚱한 상상 속 세계로 펼쳐 보인다.




우연히 만난 두 사람이 서로를 꼭 닮은 캐릭터로 변신해 나란히 오리배에 올라타면, 책 속의 책이 펼쳐진다. 두 사람은 매일매일 만나 함께 시간을 보낸다. 그럼에도 매일 서로를 생각한다. 아침에 머리를 감을 때나, 거리에서 상대가 좋아하는 노래가 흘러나올 때, 퇴근 길 지하철에서, 잠이 들 때까지 서로를 생각한다. 사랑에 빠지면 모든 순간에서 상대의 모습을 바라보게 되니 말이다.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일도, 네가 좋아하니까 같이 하고 싶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공감하고 싶어지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물론 매일이 좋기만 할 수는 없다. 다투기도 하고, 서운해하기도 하며, 오해가 쌓이고, 외로워지는 순간도 분명 생긴다. 하지만 그 모든 순간조차 차곡차곡 쌓여서 각자의 이야기가 만들어 진다. 재미있는 것은 이 이야기가 꼭 연인들의 사랑에 한정되어 있는 건 아니라는 거다. 부모와 자식 사이의 사랑이 될 수도 있고, 친구 사이의 우정이 될 수도 있고, 그 밖에 우리가 사랑을 주는 그 어떤 대상과의 이야기도 될 수 있다. 


책장 가득 놓여진 책들 사이에서 우리의 이야기는 어떤 이야기가 될지 찾아보는 재미도 있다. <오리의 탄생과 죽음>, <슈퍼히어로 오리봇>, <오리오와 줄리엣> 등 귀여운 제목들도 눈에 띈다. 알을 깨고 나오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기나긴 일대기일수도, 사악한 악당이 등장하는 액션 활극일지도, 혹은 시간이 지나도 영원한 고전소설처럼 자꾸자꾸 읽고 싶은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다양한 동화책 속 그림으로 만났던 이주희 작가는 매일을 그림 한 컷으로 남기는 작업을 10년 넘게 계속해 오고 있다고 한다. 그렇게 차곡차곡 그림으로 완성한 너와 나의 하루가 99장 모였을 때, 이 작품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오랜 시간 쌓아온 진심이 느껴지는 예쁜 작품이 만들어 진 것 같다. 나와 너는 선인장과 외계인이라는 캐릭터로 형상화하고, 둥글고 단단한 오리배는 그들이 함께 만들어 가는 세계의 모습을 상징한다. 사계절을 함께 보내고, 야구장에 가고, 바닷가로 여행을 떠나고, 낚시를 즐기고, 책방에서, 공원에서.. 그렇게 매일을 만난 두 사람. 함께라면 뭐든 될 수 있고, 어디로든 갈 수 있다고 생각했던 그 시간들이 아기자기하고, 귀엽게 그려져 있다. 이 책을 통해 연인, 가족, 친구, 반려동물 등 곁의 소중한 누군가를 떠올려 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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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슐츠 씨 - 오래된 편견을 넘어선 사람들
박상현 지음 / 어크로스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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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문제는 남성과 여성 중 남성만이 기능하는 옷을 입을 수 있고 입게 될 것을 당연하게 기대하고 그걸 요구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여자가 할 수 있는 사회적, 경제적 기여는 제한적이라는 사고방식, 여자를 전통적인 위치에 묶어두려는 태도가 여자의 옷을 만드는 데 반영된다. “옷은 사회적 산물”이라고 했던 페미니스트 작가 샬럿 퍼킨스 길먼(Charlotte Perkins Gilman)의 말이 맞다면 주머니가 없는 여자의 옷은 여성이 해야 할 일과 여성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우리 사회의 기대를 반영하는 것이다. 그게 주머니 문제의 핵심이다.            p.123 


1950년부터 연재되었던 만화 <피너츠>에는 여자아이가 스포츠를 잘하고 좋아하는 것으로 나오며, 흑인 캐릭터도 등장한다. 당시만 해도 스포츠는 남학생들의 전유물이었으며 미국은 인종분리 정책이 합법이던 사회였다는 것을 고려하면 아주 파격적인 설정이 아닐 수 없다. 그의 만화 자체가 워낙 부드러운 톤을 갖고 있어서 사회적 통념과 배치된 내용을 그려도 사람들이 반발하지 않고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하니 여성들의 스포츠 활동과 인종 다양성에 대한 인식을 바꿔주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슐츠가 작품에 흑인 캐릭터를 등장시키게 된 것에는 특별한 계기가 있었다. 어느 날 그는 한 여성으로부터 편지를 한 장 받는다. 흑인 민권운동이 뜨겁게 달아오르던 시절이었고, 마틴 루서 킹 목사가 백인이 쏜 총에 사망한 즈음이었다. 교사로 일하며 세 아이를 키우던 여성은 미국 사회가 변화해서 인종 사이의 편견을 극족하게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피너츠>가 아이들의 무의식적인 태도를 형성하는데 작은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말한다. 흑인 아이 캐릭터를 넣을 것을 제안한 그 여성은 워낙 인기 있는 만화의 작가가 자신에게 답장을 할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지만, 슐츠는 답장을 보낸다. 긍정적인 답장은 아니었지만, 진지하게 고민한 내용이었고, 두 사람은 몇 달에 걸쳐 여러 차례의 편지를 주고 받게 된다. 그 결과 <피너츠>에 첫 흑인 아이 캐릭터 '프랭클린'이 등장하게 된다. 이는 단순히 조연이 하나 등장한 것 정도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다. 슐츠는 이 캐릭터가 등장하는 장면과 대사를 깜짝 놀랄 정도로 세심하게 설계해서 당시 논란이 되던 문제들을 모두 다루면서도 독자들에게서 반발심이 아닌 공감을 이끌어 낸 것이다. 





이런 평가는 대중이 가진 '여성은 이래야 한다'는 틀을 벗어난 사람들이 받게 되는 일종의 사회적 판결이다. 인류 사회는 수천 년 동안 변함없이 이런 판결을 내려왔다... 단지 여성이라고 해서 좋은 사람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여성이라도 특이한 사람일 수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남의 감정을 배려할 줄 모르는 여성도 있다. 하지만 당신이 생각하는 '좋은 여성상'에서 어긋난다고 해서 그 사람이 마녀이거나 소시오패스인 것은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이 그 여성들이 그런 취급을 받아야 할 이유가 되는 것도 아니다.           p.219


이 책에는 차별에 맞서 싸우거나, 오래된 편견을 넘어선 이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장애인의 존재를 지우려는 사회에서 권리를 되찾기 위한 싸움에 나선 장애인 운동가, 의복의 발전사에서 여자 옷에 주머니가 없었던 이유, 미묘한 폭력이 횡행하는 촬영장에서 여자 배우의 목소리, 스포츠 선수로서 ‘정신력’과 국가대표로서 애국심을 강요하는 올림픽에서 기권한 체조 선수 등 차별과 편견, 그리고 다양성에 대한 인상적인 담론을 만날 수 있었다. 조니 뎁과 앰버 허드의 이혼 소송을 다루었던 법정 공방에 대해서 수백 년 전의 마녀 재판과 별 다를 게 없는 현실이 고스란히 보였다. 당시 소셜미디어에서는 재판이 끝나기도 전에 앰버 허드는 소시오패스, 라는 결론이 내려졌는데 사실 행동만 보자면 조니 뎁의 모습이 더 그것에 가까워보였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 이유는 대중의 너그러운 이해가 대개 백인 남성에게만 주어지기 때문이었고, 대중이 가진 여성의 틀에 완벽하게 들어맞지 않는 인물은 소시오패스로 여겨졌던 것이다. 하지만 누구나 알고 있듯이 흔히들 생각하는 '좋은 여성상'에서 어긋난다고 해서 마녀이거나 소시오패스인 것은 '당연히' 아닌데 말이다. 


이 책에 수록된 글들은 <오터레터>에 연재되던 다양성, 편견, 차별에 관한 이야기들을 골라 모은 것이다. 인류 사회에 만연한 차별과 배제 중 얼마나 많은 것들이 무지에서 비롯되었는지를 살펴보고, 차별이 일상인 세상 속에서 그러한 관습에 순응하기를 거부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인류의 오래된 습관들에 대해 말한다. 미국의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사실 지금의 한국 사회에 필요한 이야기들이기도 하다. '사회의 변화는 한 사람의 힘으로 만들어지지 않지만, 특별한 한 사람이 없으면 일어나기 힘들었을 변화도 있다'는 문장처럼 인위적인 노력 없이는 달라지기 어려운 일들에 대해 관심을 기울여야겠다고 생각해 본다. 국내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뉴스를 발굴하고 배경 지식과 맥락까지 더해 대중에게 알려온 〈오터레터〉의 발행인 박상현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우리 안의 차별과 해묵은 인식을 바꿔 준다. 인류의 오래된 습관을 깨고, 크고 작은 변화를 가져온 이들의 이야기를 만나 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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