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도 없는 사이
시몬 드 보부아르 지음, 백수린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색한 침묵이 감돌고, 기트 언니가 쌀쌀맞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린애들은 자기가 이해하지도 못하는 것에 대해서 말하는 게 아니야.”

앙드레는 대답하지 않고 다시 웃었다. 나는 난처해하며 앙드레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걸까? 내가 이해하는 사랑은 하나밖에 없었다. 앙드레를 향해 내가 품고 있던 사랑.             p.46


오랜 시간 동안 '둘도 없는 사이'로 지내는 관계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초등학교 때 친구일 수도 있고, 대학 때 만난 사이일 수도 있고, 사회 생활을 하며 만나게 된 관계일 수도 있다. 우리는 평생 누군가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고, 때로 그 관계는 나를 변화시키고, 가치관을 완성시켜주고, 삶을 달라지게 만들기도 한다.


이 작품 속 두 주인공, 실비와 앙드레는 아홉 살에 학교에서 처음 만난 단짝 친구다. 실비는 처음부터 앙드레가 마음에 들었다. 다른 모든 아이들이 자신을 지겹게 한데 비해, 앙드레는 자신을 웃게 만들었다고 그 순간을 기억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게 실비는 앙드레의 집에 드나들기 시작하고, 방학 동안에는 엽서를 쓰고, 그러면서 조금씩 변하기 시작한다. 모범생이었던 실비는 선생님들이 정말 바보 같다고 생각하기 시작했고 그들이 곤란해할 질문들을 던지는 것을 즐겼으며 반항을 하거나 선생님들의 충고를 건방진 태도로 받아들였다. 살면서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질 수도 있다는 말처럼, 어떤 친구를 사귀느냐에 따라 삶의 많은 부분들이 바뀌게 마련이다. 그렇게 두 사람은 아주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고, 둘도 없는 친구 사이로 우정을 나눈다. 하지만 실비 앞에 무한한 세계가 열리는데 반해, 앙드레는 죽음을 향해 간다. 영원히 지속되는 관계란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앙드레가 위험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으면 앙드레를 대신해 네가 결정해서는 안 되지." 내가 말했다.

"아냐, 앙드레 자신으로부터 앙드레를 지켜 주는 게 내 역할이야. 앙드레는 너무 관대하니까 사랑 때문이라면 지옥에라도 떨어지려 할 거야."

"불쌍한 앙드레! 모든 사람들이 앙드레를 구원받게 하고 싶어 하는구나. 앙드레가 그토록 원하는 것은 이 지상에서 조금이라도 행복해지는 것인데!"               p.166~167


이 작품은 시몬 드 보부아르의 미발표 유작이다. 생전에 출간되지 못했다가 그녀의 입양 딸인 실비 르 봉 드 보부아르에 의해 2020년에야 비로소 세상에 공개되었다. 사후 40년 가까이 흐른 지금, 소설가 백수린의 국내 첫 완역으로 만나보게 되었다.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라는 말을 했던 보부아르는 현대 페미니즘의 선구적 역할을 한 작가이다. 국내에는 <제2의 성>을 비롯해 공쿠르상을 수상한 <레 망다랭> 등의 작품으로 소개가 되었다. 보부아르는 소설가이기도 했지만 고등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친 선생님이었고, 사르트르와 함께 정치철학 잡지를 창간한 저널리스트이자 극작가, 페미니즘 사상가 등 다양한 모습으로 정열적으로 활동했던 걸로도 유명하다.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와는 계약 결혼 관계를 맺고, 서로를 구속하지 않는 연인이자 지적 동반자이기도 했다. 그런 보부아르가 사르트르를 만나기 전, 사랑과 동경의 대상이었던 친구이자 둘도 없는 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은 그리 많이 알려진 사실이 아니다. 그래서 이 작품이 더욱 특별한 것이고 말이다. 


극중 실비와 앙드레는 보부아르 자신과 실제 단짝 친구였던 자자를 그린 것이고, 자자는 스물한 살이라는 이른 나이에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했다. 일명 ‘자자’라고 불렸던 보부아르의 단짝 친구는 엘리자베스 라쿠앵으로 재기발랄한 성격과 다양한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두 사람은 엄격한 가톨릭 명문이었던 데지르 학교에서 처음 만나 친구가 되었다. 보부아르는 지우고 고쳐 쓴 여러 버전으로 이 소설의 원고를 평생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미발표된 젊은 시절의 소설들과 단편집, <레 망다랭>의 삭제된 페이지까지 총 네 번에 걸쳐서 자자라는 캐릭터를 부활시키려 했었다고 한다. 결국 짧은 소설의 형태로 자자의 이야기를 그린 이 원고만 남았고, 2020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세상에 공개된 것이다. 그만큼 사랑과 동경의 대상이었던 친구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자전 소설인 이 작품은 그가 마지막까지 쥐고 있었던, 그리고 마지막으로 공개된 미발표 유작으로서 가치가 있다. 특히나 국내 번역본에는 책의 후반부에 실존 인물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과 친필 편지가 부록으로 구성되어 애틋한 마음과 감정들이 시대와 장소를 초월해서 느껴지도록 했다. 보부아르가 오랜 세월에 걸쳐 쓰고 간직했던, 영혼의 단짝과의 아주 특별한 우정 이야기를 만나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