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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슐츠 씨 - 오래된 편견을 넘어선 사람들
박상현 지음 / 어크로스 / 2024년 6월
평점 :
진짜 문제는 남성과 여성 중 남성만이 기능하는 옷을 입을 수 있고 입게 될 것을 당연하게 기대하고 그걸 요구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여자가 할 수 있는 사회적, 경제적 기여는 제한적이라는 사고방식, 여자를 전통적인 위치에 묶어두려는 태도가 여자의 옷을 만드는 데 반영된다. “옷은 사회적 산물”이라고 했던 페미니스트 작가 샬럿 퍼킨스 길먼(Charlotte Perkins Gilman)의 말이 맞다면 주머니가 없는 여자의 옷은 여성이 해야 할 일과 여성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우리 사회의 기대를 반영하는 것이다. 그게 주머니 문제의 핵심이다. p.123
1950년부터 연재되었던 만화 <피너츠>에는 여자아이가 스포츠를 잘하고 좋아하는 것으로 나오며, 흑인 캐릭터도 등장한다. 당시만 해도 스포츠는 남학생들의 전유물이었으며 미국은 인종분리 정책이 합법이던 사회였다는 것을 고려하면 아주 파격적인 설정이 아닐 수 없다. 그의 만화 자체가 워낙 부드러운 톤을 갖고 있어서 사회적 통념과 배치된 내용을 그려도 사람들이 반발하지 않고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하니 여성들의 스포츠 활동과 인종 다양성에 대한 인식을 바꿔주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슐츠가 작품에 흑인 캐릭터를 등장시키게 된 것에는 특별한 계기가 있었다. 어느 날 그는 한 여성으로부터 편지를 한 장 받는다. 흑인 민권운동이 뜨겁게 달아오르던 시절이었고, 마틴 루서 킹 목사가 백인이 쏜 총에 사망한 즈음이었다. 교사로 일하며 세 아이를 키우던 여성은 미국 사회가 변화해서 인종 사이의 편견을 극족하게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피너츠>가 아이들의 무의식적인 태도를 형성하는데 작은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말한다. 흑인 아이 캐릭터를 넣을 것을 제안한 그 여성은 워낙 인기 있는 만화의 작가가 자신에게 답장을 할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지만, 슐츠는 답장을 보낸다. 긍정적인 답장은 아니었지만, 진지하게 고민한 내용이었고, 두 사람은 몇 달에 걸쳐 여러 차례의 편지를 주고 받게 된다. 그 결과 <피너츠>에 첫 흑인 아이 캐릭터 '프랭클린'이 등장하게 된다. 이는 단순히 조연이 하나 등장한 것 정도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다. 슐츠는 이 캐릭터가 등장하는 장면과 대사를 깜짝 놀랄 정도로 세심하게 설계해서 당시 논란이 되던 문제들을 모두 다루면서도 독자들에게서 반발심이 아닌 공감을 이끌어 낸 것이다.
이런 평가는 대중이 가진 '여성은 이래야 한다'는 틀을 벗어난 사람들이 받게 되는 일종의 사회적 판결이다. 인류 사회는 수천 년 동안 변함없이 이런 판결을 내려왔다... 단지 여성이라고 해서 좋은 사람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여성이라도 특이한 사람일 수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남의 감정을 배려할 줄 모르는 여성도 있다. 하지만 당신이 생각하는 '좋은 여성상'에서 어긋난다고 해서 그 사람이 마녀이거나 소시오패스인 것은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이 그 여성들이 그런 취급을 받아야 할 이유가 되는 것도 아니다. p.219
이 책에는 차별에 맞서 싸우거나, 오래된 편견을 넘어선 이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장애인의 존재를 지우려는 사회에서 권리를 되찾기 위한 싸움에 나선 장애인 운동가, 의복의 발전사에서 여자 옷에 주머니가 없었던 이유, 미묘한 폭력이 횡행하는 촬영장에서 여자 배우의 목소리, 스포츠 선수로서 ‘정신력’과 국가대표로서 애국심을 강요하는 올림픽에서 기권한 체조 선수 등 차별과 편견, 그리고 다양성에 대한 인상적인 담론을 만날 수 있었다. 조니 뎁과 앰버 허드의 이혼 소송을 다루었던 법정 공방에 대해서 수백 년 전의 마녀 재판과 별 다를 게 없는 현실이 고스란히 보였다. 당시 소셜미디어에서는 재판이 끝나기도 전에 앰버 허드는 소시오패스, 라는 결론이 내려졌는데 사실 행동만 보자면 조니 뎁의 모습이 더 그것에 가까워보였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 이유는 대중의 너그러운 이해가 대개 백인 남성에게만 주어지기 때문이었고, 대중이 가진 여성의 틀에 완벽하게 들어맞지 않는 인물은 소시오패스로 여겨졌던 것이다. 하지만 누구나 알고 있듯이 흔히들 생각하는 '좋은 여성상'에서 어긋난다고 해서 마녀이거나 소시오패스인 것은 '당연히' 아닌데 말이다.
이 책에 수록된 글들은 <오터레터>에 연재되던 다양성, 편견, 차별에 관한 이야기들을 골라 모은 것이다. 인류 사회에 만연한 차별과 배제 중 얼마나 많은 것들이 무지에서 비롯되었는지를 살펴보고, 차별이 일상인 세상 속에서 그러한 관습에 순응하기를 거부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인류의 오래된 습관들에 대해 말한다. 미국의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사실 지금의 한국 사회에 필요한 이야기들이기도 하다. '사회의 변화는 한 사람의 힘으로 만들어지지 않지만, 특별한 한 사람이 없으면 일어나기 힘들었을 변화도 있다'는 문장처럼 인위적인 노력 없이는 달라지기 어려운 일들에 대해 관심을 기울여야겠다고 생각해 본다. 국내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뉴스를 발굴하고 배경 지식과 맥락까지 더해 대중에게 알려온 〈오터레터〉의 발행인 박상현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우리 안의 차별과 해묵은 인식을 바꿔 준다. 인류의 오래된 습관을 깨고, 크고 작은 변화를 가져온 이들의 이야기를 만나 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