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움직인 열 가지 프레임 - 현대 문명의 본질과 허상을 단숨에 꿰뚫는 세계사
수바드라 다스 지음, 장한라 옮김 / 북하우스 / 2024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장전된 총이 공기를 가로질러 총알을 전달하듯이, 글로 쓰인 말은 기술, 사상, 정보를 전달하는 도구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누가 썼는가라는 흥미로운 사안을 제기할 수 있었던 까닭은, 어느 정도는 그가 문서 기록에는 비교적 등장하지 않았다는 점 때문에 가능했다. 이렇게 남은 공백은 다른 사람들의 생각으로 채워질 수가 있었다. 스스로의 글을 발표할 수 있는 사람들의 생각도 포함해서 말이다. 이런 점은 글이 지닌 힘과 생각의 본성에 관해 무언가를 알려준다. 살아남는 생각, 전해지는 이야기, 그리고 더 중요하게는 그렇게 되지 못하는 것들에 관해서 말이다. 현실에서는 글은 글 자체만을 들려주는 것이 아니다.             p.98~99


누구의 말도 그대로 믿지 말라, 아는 것이 힘이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 정의의 여신은 눈을 가리고 있다, 시간은 돈이다, 죽음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다 등 누구나 한번쯤 들어봤을 법한 말들이다. 게다가 이러한 말들은 누구도 그 개념을 믿어 의심치 않는 확고한 진리처럼 통용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잠시 생각해보자. 이 신념들이 사실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문명의 핵심에 자리 잡고 있는 이러한 생각들은 믿을 수 있는 것일까? 이 책은 그렇게 오랜 시간 지켜온 신념으로 공유되는 열 가지 핵심 가치의 이면을 살펴보고, 그러한 개념들의 생성 과정을 탐구한다. 


과학, 교육, 문자, 법, 민주주의, 시간, 국민, 예술, 죽음, 공동선이라는 중요한 가치를 통해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보는지, 우리가 서로를 어떻게 보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이기도 하다. 셰익스피어를 둘러싼 음모론, 잉카제국의 문자가 역사에서 삭제된 이유, 불평등과 불공정함으로 가득 찬 세상, 단 한 번도 국민에게 권력이 주어진 적이 없었던 민주주의라는 허상, 과학을 독차지한 자들, 서구의 시간 개념이라는 덫 등 우리가 문명화의 증거라 믿었던 것들, 아무런 의심 없이 수용했던 가치들 속에 어떤 권력의 프레임이 숨겨져 있는지 알게 된다면 놀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가 세운 문명화의 기준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누가 확립했으며, 결정적으로 누가 이익을 보고 있는지 말이다. 





이 재밌는 이야기를 망치는 것 같아 아쉽지만 사실관계를 확실히 하는 게 역사학자인 나의 임무다. 클레리지스 호텔의 스위트룸이 하루 동안 유고슬라비아가 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기록은 아무것도 없다. 내가 보기에 이 이야기는 기껏해야 희한한 동화 정도로 보인다. 난관에 부닥친 왕족이라는 전형적인 등장인물들이, 국민적인 영웅이자 요정인 대부의 너그러운 변덕 덕분에 외교술이라는 마법을 통해서 구원받았다는 동화 말이다. 그렇지만 이 모든 얘기 외에도 클레리지스 호텔 스위트룸 212호 이야기 속에는 우리가 흥미를 품을 만한, 그리고 지금 논의하고 있는 주제와 관련된 또 다른 요소가 있다. 바로 국민이다.                  p.256~257


대부분의 세계사를 다루고 있는 책들이 연대, 사건, 인물과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는 반면에, 이 책은 개념과 생각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어 신선했다. 서양 문명의 역사적 기원을 추적해 거짓말이 지탱하고 있던 세계사라는 파격적인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으니 말이다. 1장에서 다루고 있는 것은 과학이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했던 내용이었는데, '인종'이라는 개념을 정립하는 데 과학과 합리적 사고라는 마법이 어떻게 사용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우생학을 거쳐 홀로코스트 유대인 학살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인종적 특징으로서의 문명이 겉으로 보기에는 객관적인 과학적 진리라는 사실이 이른바 문명사회라는 곳 도처에서 보이는 사회적 불평등의 존재 이유에 대한 답이 되어준다니... 커튼으로 가리고 있던 세계의 한 단면을 마주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2장에서는 이론으로서의 교육과 실제 교육은 서로 다르다는 이야기로 시작해 중립적 교육이라는 환상을 넘어 교육의 핵심이 무엇인지에 이른다. 


3장은 특히나 흥미로웠는데, 셰익스피어가 쓴 것으로 알려진 연극과 시를 누군가 다른 사람이 섰다고 발표한 연구들이 상당히 많이 존재한다는 것으로 시작해 대문호를 둘러싼 음모론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오기 때문이다. 역사학자, 사회학자, 인류학자가 변태적으로 집착하는 대상이 있다면 바로 '글'이라고 하면서 모든 것을 표현하는 게 가능한 마법 같은 수단인 '글'에 대해 잉카 문명부터 시작해 두루 살펴본다. 이후 법과 정의, 민주주의의 역사, 시간과 국민에 대한 개념, 예술과 문화유산, 죽음 문화의 변천사, 그리고 공동선과 개인의 행복에 대해 살펴본다. 어떤 역사 책에서도 다루지 않는 관점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이야기라 매우 흥미롭게 읽었다. 이 책은 근대화 과정에서 서구 세계가 만든 거대한 억압과 착취의 구조를 통해 역사를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역사를 보는 자신만의 관점을 얻고 싶다면, 권력의 프레임에서 벗어나 다른 세상을 상상할 수 있는 힘을 되찾고 싶다면 이 책을 만나 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