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심장 스토리콜렉터 100
크리스 카터 지음, 서효령 옮김 / 북로드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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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엔은 '한 번에 맞혔어, 로버트'라고 말하는 듯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 "그 이론들을 시험해보고 싶었어." 그는 몸을 약간 앞으로 숙였다. "로버트, 넌 흥미를 느끼지 않아? 그렇게 열성적이었던 학생이, 살인자의 머릿속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을 알고 싶지 않았다고? 그들이 그런 행동을 하는 진짜 이유가 궁금하지 않았던 거야? 우리가 배웠던 이론들이 진실인지, 아니면 멍청한 심리학자들의 허튼 추측에 불과할 뿐인지 정말로 알고 싶지 않았어?"        p.228

 

와이오밍주의 남동부 휘틀랜드 외곽에 있는 휴게소 식당은 달콤한 파이로 유명했다. 폭풍우가 심했던 여름이었고, 막 아침 6시가 지난 시간이라 가게는 평소보다 덜 붐볐다. 사람들은 커피와 도넛, 갓 구운 파이 등으로 아침을 먹는 중이었는데, 갑작스레 커다란 유리창 밖에서 픽업 트럭 한대가 가게를 향해 곧장 달려오다 단 몇 미터 앞에서 방향을 틀어 건물을 비껴갔다. 그러고는 주차돼 있던 차를 치고 옆 건물을 들이받으며 겨우 멈춰선다. 마침 식당에는 보안관과 보안관보가 있었기에, 서둘러 사고를 수습하러 달려 나왔는데 심장마비를 일으킨 운전자 외에 다친 사람은 없었다. 문제는 트럭과 충돌해 주차되어 있던 차의 트렁크가 열렸는데, 그 속에 있던 아이스박스가 쓰러지면서 속에 있던 여성의 절단된 머리가 발견된 것이다.

 

해당 차의 주인은 용의자로 즉시 체포되어 FBI에 구금되었지만, 끈질기게 묵비권을 행사하다 마침내 입을 연다. "로버트 헌터, 난 그 사람한테만 말할 겁니다'라고. FBI는 로스앤젤레스 경찰국의 강력계 형사인 로버트 헌터에게 협조를 요청하고, 그는 용의자가 구류되어 있는 콴티코의 FBI 아카데미로 향한다. 용의자인 루시엔 폴터는 사실 로버트 헌터의 대학교 시절 친구이자 범죄심리학도로서 라이벌이었다. 루시엔은 자신이 한 짓이 아니라며 이야기를 시작하지만, 점점 사이코패스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며 옛친구와 FBI 모두를 경악하게 만든다.

 

 

 

“글쎄. 그 미친 생각은 실제가 됐어, 로버트. 그리고 그 책 속 정보는 FBI, 국립 강력범죄분석센터, 그리고 BAU, 아니 전 세계 사법기관들의 잔혹한 연쇄살인 범죄에 대한 시각을 완전히 바꿔놓을 거야. 이제껏 아무도 하지 않았던 것들, 내가 하지 않았다면 이 세계는 절대 모를 부분까지 이해하게 해줄 테지. 한 번도 설명되지 않은 은밀한 행위와 생각들 말이야. 그런 범죄자들을 잡을 확률을 기하급수적으로 높일 수 있어. 그건 너와 이 엉망진창인 세상에 내가 주는 선물이야. 내 연구와 그 책들은 앞으로 대대로 분석되고 참고될 거야.”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니 연구 명목으로 목숨 몇 개 앗아 간들 무슨 상관이야? 지식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이야, 로버트. 그리고 어떤 것들은 다른 것들보다 훨씬 비싸.”         p.501

 

로버트 헌터는 연쇄살인을 추적하는 연방 특수요원이 아니라 로스앤젤레스 경찰의 일개 형사이다. 하지만 FBI 국장까지 헌터가 오래 전에 썼던 <범죄행위에 관한 고급 심리 연구>라는 박사 논문을 읽었고, 그가 최고의 프로파일러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었다. 여러 차례 자신의 팀원으로 뽑으려고 시도했을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헌터는 연방요원직에 전혀 흥미를 보이지 않았고, 특수강력범죄수사대의 팀장으로서 자기 분야에서 최고였다. 루시엔은 그런 헌터가 자신이 만나본 가장 똑똑한 사람 중 하나였다고 말하는 옛 친구이다. 기숙사의 룸메이트로서 꽤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던 그들은 졸업 이후로 연락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한때 범죄심리학을 함께 공부했던 두 친구가 강력계 형사와 연쇄살인마가 되어 마주하게 된 것이다. 이들의 두뇌 싸움에 많은 페이지를 할애하고 있는 이 작품은 사이코패스의 정신세계를 굉장히 밀도 있게 보여준다.

 

루시엔은 자신이 데려왔던 사람들과 장소들, 사용했던 범행 수법들을 전부 기록해 두었고, 피해자들의 신체 일부나 피부를 기념품으로 보관하고 있었으며, 체포된 상황에서도 모든 것을 통제하고 FBI와 자신만의 방식으로 게임을 시작한다. 사이코패스가 무엇 때문에 감정이나 가책 없이 살인하게 되는지에 대한 호기심으로 시작된 그의 범행은 오랜 시간에 걸친 학습과 실험으로 이루어졌다. 덕분에 우리는 그 어디서도 볼 수 없었던, 결코 알고 싶지 않았던 사이코패스의 내면을 만나게 된다. 이 작품은 국내에는 처음 소개되는 작가 크리스 카터의 대표작이다. 작가가 실제 미시간주 검찰청의 형사심리팀에 근무하며 종신형을 선고받은 중범죄자들을 인터뷰하고, 연구했던 이력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인텔리 사이코패스 캐릭터는 <양들의 침묵> 속 살인마 '한니발 렉터'에 버금가는 오싹함을 안겨준다. 크리스 카터는 범죄심리학자 출신의 형사 '로버트 헌터' 시리즈로 '제프리 디버와 어깨를 견줄 만하다'는 평을 받았다고 한다. 앞으로 이어질 시리즈의 다음 작품도 기대해본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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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쿠로스의 네 가지 처방 - 불안과 고통에 대처하는 철학의 지혜
존 셀라스 지음, 신소희 옮김 / 복복서가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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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쾌락주의와 동의어로 여겨지면서 오랜 세월 많은 오해와 폄하를 받아온 에피쿠로스 철학에 현대적 해석으로 다시 들려주는 책이다. 에피쿠로스 철학은 무신론, 부도덕, 감각적 탐닉과 결부되어 오랫동안 위험하고 부패한 사상으로 죄악시되었다. 하지만 실상은 전혀 다르다니 매우 흥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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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 아주 작은 수고로 생애 최정점의 건강을 유지하는 방법
이승훈 지음 / 북폴리오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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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국민의 눈이 집중되는 사건에서도 뇌졸중이 등장할 만큼 뇌졸중에 대한 일반인의 공포감은 정말 대단한 것 같다. 사실 내가 2020년 8월에 뇌졸중 전문의로서 <유 퀴즈 온 더 블럭>에 출연했을 때의 주제도 '살면서 안 만나면 좋을 사람' 특집이었으니 뭐 이상할 것도 없다. 그런데 정말 뇌졸중이 그 정도로 공포스러운 병일까? 뇌졸중 전문의로서 20년 가까이 환자를 살펴본 경험으로 볼 때, 이 공포는 반은 사실이고 반은 과장된 것이다.       p.131

 

누구나 살면서 병에 걸린다. 하지만 병에 걸리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어떤 질병이 생기는 초기 신호를 많은 사람들이 외면하거나 부인한다. 그런다고 해서 그 병에 걸리지 않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서울대병원 신경과 이승훈 교수는 <유 퀴즈 온 더 블럭>에 출연 당시 스스로 진단한 병이 스무 가지가 넘는다고 해서 진행자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 말한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도 다양한 병이 있는데, 자신들만 모를 뿐이라고. 무서워서 병원에 안 가거나 무시하는 경우도 많다고 말이다.

 

 

이 책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마주하게 될 수밖에 없는 다양한 질병들을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고, 한 개인으로서 이에 대한 대처 방식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고 이야기해준다. 저자는 질병의 본질을 고찰하고 이를 받아들여 최대한 건강하게 살아갈 방법에 대해 직관적으로 알기 쉽게 설명한 책은 찾기 힘들었기 때문에, 이 책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병이 곧 우리의 적은 아니라는 사실, 그리고 우리는 병과 함께 살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점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는 그는 어차피 질병을 안고 살 수밖에 없다면, 길들여 공생하는 것이 자신의 몸을 위해 가장 적절한 태도라고 말한다.

 

 

위험 요인에 대해 각론을 이야기하기 전에 이 말을 먼저 하려고 한다. 제발 좀 약을 드시라고. 고혈압, 당뇨, 고지혈증, 심방세동을 가진 분들은 항혈전제와 함께 각각을 조절하는 약물을 복용해야 한다. 물론 위험 요인 발생 초기엔 약물 없이 생활습관 개선을 시도하는 것이 원칙이다. 하지만 그 단계를 넘어서 약물이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경우에는 거부감을 느끼지 말고 약을 잘 챙겨 먹는 것이 훨씬 이롭다. 투약 여부는 처음에 신중하게 결정하되 결정된 다음부터는 확실하게 잘 먹어야 한다는 뜻이다. 약을 꾸준히 잘 먹는 사람은 위험 요인이 더 발전하지 않는다.           p.247

 

이 책은 우리 몸의 내장, 즉 오장육부에서 시작해 인간의 장기가 작동하는 원리에 대해서 차곡차곡 설명을 시작한다. 호흡과 순환, 섭취, 소화, 흡수, 배설, 그리고 대사의 중추, 간, 뇌에 이르기까지의 기능에 대해 알기 쉽게 알려 준다. 이어 질병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정리하고, 이승훈 교수만의 새로운 질병분류법에 따라 각각의 질병들에 대해 보여준다.

 

저자의 전공인 뇌졸중에 대해서는 꽤 많은 분량을 할애해서 알려 주는데, 뇌졸중은 우리나라 사망률 4위 질환으로 높은 사망률과 장애율을 보여주고 있어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뇌졸중은 5분에 한 명씩 발병하고 15분에 한 명씩 사망하며 연간 5조 원씩 사회적 비용이 드는 비용이라고 하니 말이다. 저자는 뇌졸중 전문의로서 20년 가까이 환자를 살펴본 경험을 토대로 뇌졸중에 대한 일반인들의 공포감을 해소시켜줄 만한 비밀을 알려 준다. 평소 간단한 예방 조치를 취하는 것만으로 뇌졸중 발생 자체를 막거나, 발생한다고 해도 매우 약한 뇌졸중으로 오게 할 수 있는 생활 습관이 있다고 하니 놀라웠다.

 

 

그 외에도 암과 당뇨, 고혈압 등의 질병에 대해, 그리고 가장 친숙한 병이기도 한 감기에 대한 이야기도 들려준다. 감기 바이러스로 코로나19를 이해할 수 있다는 대목도 매우 흥미로웠다. 누구나 자신의 몸은 자기가 제일 잘 안다고 말하지만, 사실 우리 몸은 어떤 장기에 문제가 발생했다고 해도 해당 장기의 기능이 떨어지지 않았다면 그 이상 여부를 알아챌 방법이 거의 없다고 한다. 통증이 없는 작은 암이 생겼어도 해당 장기의 기능에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절대로 암의 존재를 알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내가 내 몸을 모른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평소에 건강한 생활 습관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적당한 운동, 적절한 체중 관리, 금연, 절주, 딱 네 가지만 잘 지켜도 우리 장기와 면역 시스템이 최선의 컨디션을 유지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된다고 한다.

 

도대체 질병이란 무엇인지, 이를 받아들여 최대한 건강하게 살아갈 방법이란 어떤 건지 궁금하다면 이 책을 만나 보자. 이승훈 교수가 직접 실천하고 있는 예방법 및 치료법, 의료 통계 데이터와 최신 연구자료들을 모두 담고 있고, 일상적으로 쉽게 실천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안이 가득해서, 내일의 건강을 위해 질병을 대처하는 태도가 달라질 수 있도록 도와줄 테니 말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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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2-03-28 15: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접시의 음식은 이런 책을 읽으시면서 안넘어갈듯요^^

피오나 2022-03-28 17:17   좋아요 1 | URL
ㅎㅎ 나름 건강한 음식입니다만 ㅋㅋ
 
연필 한 자루로 시작하는 느낌 있는 인물 그리기 - 논리적 데생 기법 그리다
OCHABI Institute 지음, 김재훈 옮김 / 영진.com(영진닷컴)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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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아이들은 틈만 나면 이곳 저곳에 자신만의 그림을 그린다. 공부하다가도, 책을 읽다가도, 신문지에, 모래 바닥에, 돌멩이에..  어느 곳이든 틈만 나면 그림을 그려댄다. 그림 실력이 있고, 없고에 상관없이 말이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 가면서 점점 여기저기 끄적이던 그림이 줄어들기 시작한다. 잘 그린 그림에 대한 기준이 생긴데다, 제대로 된 도구가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는 그림을 그리겠다는 생각 자체를 안 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사실 종이와 연필만 있다면 누구나 그림을 그릴 수 있다.

 

 

이 책은 그림 초보들도 쉽게 도형, 인체를 그릴 수 있도록 도와준다. 준비물은 종이와 연필 뿐이다. 연필 한 자루로 시작할 수 있기 때문에, 누구나 인체 드로잉과 연필 드로잉의 세계에 입문할 수 있다. 연필 쥐는 법, 선을 긋는 법부터 시작해서 명암을 그리고, 얼굴의 형태를 잡고, 선으로 소리와 촉감을 표현하는 연습을 거쳐 인체를 평면적으로, 입체적으로 그리는 법에 대해 알려 준다.

 

 

인체의 비율을 알려주고, 뼈와 관절의 위치를 잡아 골격을 표현하고, 그 비율을 참고해 사람의 형태를 그리는 과정이 굉장히 간단하면서도 놀라웠다. 특히나 움직임이 있는 자세의 중심선과 골격 잡는 법이 재미있었다. 움직임이 있어 더 생동감있게 느껴졌고, 정면을 지나 반측면의 인체를 그리는 단계가 되면 더 강한 약동감과 스토리가 느껴져서 나도 그림을 잘 그릴 수 있다는 자신감도 생길 것이다.

 

 

마지막 장의 인물이 있는 풍경 그리는 단계가 되면, 그림 그리는 것이 점점 더 재미있어 진다. 인물과 함께 건물과 차, 나무와 구름 등 우리 주변의 사물들을 단순한 형태로 변환해 평면적으로 표현하는 풍경 그림은 다양한 요소가 있어 그리는 동안 재미도 있고, 무엇보다 결과물이 놀라울 정도로 만족스럽다. 1점투시도법으로 방 안을 그려보고, 음영을 넣어 시간의 흐름과 분위기를 표현해보자.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뭐야 나도 그림을 꽤 잘 그리는데? 하는 말이 나오게 될 것이다.

 

 

이 책은 그림에 관심 있지만, 전혀 그려본 적이 없는 사람부터, 더 잘 그리고 싶은 사람까지 만족시킬 수 있도록 어렵지 않게 기본기를 다질 수 있도록 도와준다. 디자인이나 기획 업무로 그림을 그릴 기회가 많거나, 만화가나 일러스트레이터가 목표인 사람, 그리고 인물 데생의 기초를 배워보고 싶은 이들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책이다. 이 책 한 권이면 누구나 연필 한 자루로 인물과 풍경을 꽤 그럴듯하게 그려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림을 그리는 목적은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인물을 그리는 것은 유독 어려워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 알려주는 '대상의 형태를 잡는 방법'만 제대로 익히더라도, 쉽고, 재미있게 데생 실력을 키울 수 있을 것 같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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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없는 나의 기억들
리베카 솔닛 지음, 김명남 옮김 / 창비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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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나는 갑옷을 만져보지도 못했다. 어차피 그것은 현실적 해법이 아니라 몽상적 해법이었다. 엄밀히 따지자면, 갑옷이란 나와 함께 움직이는 철장일 뿐 아니겠는가? 그래도 만약 갑옷을 입을 수 있었다면, 어떤 면에서는 자유로웠을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그 시절에 나는 실제로 갑옷을 입었고 그래서 자유와 옥죄임을 둘 다 느끼면서 살았는지도 모른다. 요즘도 가끔 그렇지만, 그 시절에 나는 정말로 딱딱하고 빛을 반사하고 안을 보호하는 갑옷 같은 존재였다... 스스로 갑옷이 되기란 오늘날에도 쉽게 일어나는 일이다. 우리는 죽임당하지 않기 위해서 줄곧 스스로 죽는다.        p.91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 <걷기의 인문학>, <멀고도 가까운>등의 저서로 동시대 여성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존재가 된 리베카 솔닛의 첫 회고록이다. '우리 시대 가장 대담하고 독창적인 작가'라고 불리는 솔닛이 집을 떠난 19세부터 지난 40여년의 시간을 되돌아본다. 솔닛은 한국의 독자들에게 보낸 서문에서 이 책에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을 담았지만, 그것을 모든 여성이 겪는 집단적 경험의 맥락 속에서 서술했다고 밝히고 있다. '여성이 침묵하기를 바라고 여성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기를 선호하는 사회'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갖고자 하는 여성의 분투는 그렇게 사적인 경험을 넘어 사회에 대한 이야기로 해석된다.

 

지금은 전세계 여성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존재가 된 솔닛도 어리고 불안정했던 시절이 있었다. 세상에 서툰 부적응자, 몽상가, 쉴 새 없이 떠도는 방랑자였던 깡마른 젊은 여성이 어떻게 작가이자 활동가로서 각종 사회운동에 참여하고,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는 존재가 되었는지에 대한 과정은 1980~90년대 여성의 성장 기록이지만 2022년 현재와 교차되는 부분이 꽤 많다. 이는 꽤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사회의 오래된 불평등과 만연한 폭력과 여러 구조들은 현재 진행형이기 때문일 것이다.

 

 

 

최선의 형태일 때, 논픽션은 세상을 도로 짜맞추는 행위다. 혹은 세상의 한조각을 뜯어냄으로써 세상의 통설과 관행 밑에 무엇이 숨어 있는지를 살펴보는 행위다. 이런 의미에서 창조는 파괴와 비슷한 데가 있다. 그리고 그 과정은 열렬히 흥분되는 것일 수 있다. 뜻밖의 정보를 발견해서 그럴 수도 있고, 조각들을 조립해보니 차차 어떤 패턴이 드러나서 그럴 수도 있다. 잘 몰랐던 무언가가 차츰 또렷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세상이 새로운 방식으로 이해되기 시작한다. 혹은 기존의 통설에서 틀린 것이 발견되고, 그래서 내가 새로 쓰게 된다.       p.188

 

이 책의 첫 페이지에는 화장대처럼 생긴 작은 책상 사진이 수록되어 있다. 이 책상은 솔닛과 함께 세 번 이사했고, 그녀는 그 책상 위에서 수백 만개의 단어를 썼다. 스무 권이 넘는 책, 리뷰, 에세이, 연애편지, 이메일 등과 학생으로서, 선생으로서 숙제를 했다. 그 '책상은 세상으로 난 문이자 솔닛이 바깥으로 도약하거나 내면으로 잠수할 때 딛는 단상'이기도 했다. 그 책상은 한 친구가 솔닛에게 선물로 준 것인데, 그 친구는 책상을 주기 1년쯤 전 헤어난 남자친구가 휘두른 칼에 열다섯 군데를 찔려 과다출혈로 거의 죽다 살았다. 친구는 목숨을 건졌고, 당시 여느 피해자들처럼 그 일로 비난 받았다. 살인미수자는 법적 처분을 전혀 받지 않았고, 친구는 일이 벌어진 곳으로부터 멀리 이사했다. 가해자가 당당하게 세상을 활보하는 동안, 왜 피해자는 세상으로부터 숨어야 하는가. 여성의 안전도, 자유도, 권리도 과거와 비교해서 지금이 더 나아졌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솔닛은 '남자에게 살해당할 뻔했던 여성으로부터 받은' 책상에 앉아서 이 책을 비롯해 많은 글들을 썼다. 여성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밖에 없었기 때문에, 글을 통해 사회에서 지워진 이들의 이야기를 찾아주고, 집단과 사회의 지배서사를 조금씩 바꿔나가기 위해서 말이다. 이 책은 솔닛이 젊은 여성들에게 보내는 편지이기도 하다. 세상에서 살아남고자 하는, 자신만의 목소리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든 이들에게 추천해주고 싶다. 그리고 사적인 에세이와 페미니즘과 정치, 환경비평까지 분야를 망라하며 유려한 글을 썼던 솔닛의 30여권에 달하는 전작을 모두 다 품고 있는 책이기도 하니, 지금껏 솔닛의 작품을 읽어 왔던 독자라면 이 책은 놓치지 말고 읽어보길 권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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