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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없는 나의 기억들
리베카 솔닛 지음, 김명남 옮김 / 창비 / 2022년 3월
평점 :
결국 나는 갑옷을 만져보지도 못했다. 어차피 그것은 현실적 해법이 아니라 몽상적 해법이었다. 엄밀히 따지자면, 갑옷이란 나와 함께 움직이는 철장일 뿐 아니겠는가? 그래도 만약 갑옷을 입을 수 있었다면, 어떤 면에서는 자유로웠을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그 시절에 나는 실제로 갑옷을 입었고 그래서 자유와 옥죄임을 둘 다 느끼면서 살았는지도 모른다. 요즘도 가끔 그렇지만, 그 시절에 나는 정말로 딱딱하고 빛을 반사하고 안을 보호하는 갑옷 같은 존재였다... 스스로 갑옷이 되기란 오늘날에도 쉽게 일어나는 일이다. 우리는 죽임당하지 않기 위해서 줄곧 스스로 죽는다. p.91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 <걷기의 인문학>, <멀고도 가까운>등의 저서로 동시대 여성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존재가 된 리베카 솔닛의 첫 회고록이다. '우리 시대 가장 대담하고 독창적인 작가'라고 불리는 솔닛이 집을 떠난 19세부터 지난 40여년의 시간을 되돌아본다. 솔닛은 한국의 독자들에게 보낸 서문에서 이 책에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을 담았지만, 그것을 모든 여성이 겪는 집단적 경험의 맥락 속에서 서술했다고 밝히고 있다. '여성이 침묵하기를 바라고 여성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기를 선호하는 사회'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갖고자 하는 여성의 분투는 그렇게 사적인 경험을 넘어 사회에 대한 이야기로 해석된다.
지금은 전세계 여성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존재가 된 솔닛도 어리고 불안정했던 시절이 있었다. 세상에 서툰 부적응자, 몽상가, 쉴 새 없이 떠도는 방랑자였던 깡마른 젊은 여성이 어떻게 작가이자 활동가로서 각종 사회운동에 참여하고,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는 존재가 되었는지에 대한 과정은 1980~90년대 여성의 성장 기록이지만 2022년 현재와 교차되는 부분이 꽤 많다. 이는 꽤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사회의 오래된 불평등과 만연한 폭력과 여러 구조들은 현재 진행형이기 때문일 것이다.
최선의 형태일 때, 논픽션은 세상을 도로 짜맞추는 행위다. 혹은 세상의 한조각을 뜯어냄으로써 세상의 통설과 관행 밑에 무엇이 숨어 있는지를 살펴보는 행위다. 이런 의미에서 창조는 파괴와 비슷한 데가 있다. 그리고 그 과정은 열렬히 흥분되는 것일 수 있다. 뜻밖의 정보를 발견해서 그럴 수도 있고, 조각들을 조립해보니 차차 어떤 패턴이 드러나서 그럴 수도 있다. 잘 몰랐던 무언가가 차츰 또렷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세상이 새로운 방식으로 이해되기 시작한다. 혹은 기존의 통설에서 틀린 것이 발견되고, 그래서 내가 새로 쓰게 된다. p.188
이 책의 첫 페이지에는 화장대처럼 생긴 작은 책상 사진이 수록되어 있다. 이 책상은 솔닛과 함께 세 번 이사했고, 그녀는 그 책상 위에서 수백 만개의 단어를 썼다. 스무 권이 넘는 책, 리뷰, 에세이, 연애편지, 이메일 등과 학생으로서, 선생으로서 숙제를 했다. 그 '책상은 세상으로 난 문이자 솔닛이 바깥으로 도약하거나 내면으로 잠수할 때 딛는 단상'이기도 했다. 그 책상은 한 친구가 솔닛에게 선물로 준 것인데, 그 친구는 책상을 주기 1년쯤 전 헤어난 남자친구가 휘두른 칼에 열다섯 군데를 찔려 과다출혈로 거의 죽다 살았다. 친구는 목숨을 건졌고, 당시 여느 피해자들처럼 그 일로 비난 받았다. 살인미수자는 법적 처분을 전혀 받지 않았고, 친구는 일이 벌어진 곳으로부터 멀리 이사했다. 가해자가 당당하게 세상을 활보하는 동안, 왜 피해자는 세상으로부터 숨어야 하는가. 여성의 안전도, 자유도, 권리도 과거와 비교해서 지금이 더 나아졌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솔닛은 '남자에게 살해당할 뻔했던 여성으로부터 받은' 책상에 앉아서 이 책을 비롯해 많은 글들을 썼다. 여성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밖에 없었기 때문에, 글을 통해 사회에서 지워진 이들의 이야기를 찾아주고, 집단과 사회의 지배서사를 조금씩 바꿔나가기 위해서 말이다. 이 책은 솔닛이 젊은 여성들에게 보내는 편지이기도 하다. 세상에서 살아남고자 하는, 자신만의 목소리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든 이들에게 추천해주고 싶다. 그리고 사적인 에세이와 페미니즘과 정치, 환경비평까지 분야를 망라하며 유려한 글을 썼던 솔닛의 30여권에 달하는 전작을 모두 다 품고 있는 책이기도 하니, 지금껏 솔닛의 작품을 읽어 왔던 독자라면 이 책은 놓치지 말고 읽어보길 권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