딩씨 마을의 꿈
옌롄커 지음, 김태성 옮김 / 자음과모음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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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혈액 주머니는 마치 더운물 주머니에 물을 가득 채워놓은 것처럼 움직일 때마다 찰랑찰랑 흔들렸다. 서서히 잿빛으로 물들어가는 들판 위로 진한 피비린내가 퍼져가고 있었다. 막 나무에서 떨어진 여린 대추를 물속에 넣고 끓일 때 나는 냄새 같았다. 리싼런의 구부린 팔 안쪽에서 바늘을 빼낸 다음 혈액 주머니를 거두면서 아버지는 그에게 피값으로 백 위안을 건넸다.    p.164

딩씨 마을은 살아 있지만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사람들은 집 안에 틀어박혀 밖으로 나오지 않았고, 십 년 전 피를 팔았던 사람들은 열병에 걸려 있었다. 이 열병의 정확한 학명은 에이즈였다. 딩씨 마을에서는 매달 거의 모든 집에서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열두 살 소년 샤오창의 아버지는 십 년 전, 상부의 주도로 마을에서 대대적으로 일어난 매혈 운동의 우두머리였다. 그는 인근 열여덟 개 마을에서 가장 많은 피를 사고 팔았던 피의 왕이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복수로 누군가 마을 어귀에 놓아둔 독이 묻은 토마토를 먹고 소년 역시 죽게 된다. 이 작품의 화자는 바로 그 비극적인 현실 속에서 이미 죽은 소년이다.

이 상태로 가다가는 딩씨 마을 사람들 거의 전부가 죽게 될 것이었다. 상부에서는 피를 팔지 않은 사람들에게까지 열병이 전염될 것을 우려하여, 병에 걸린 사람들을 한곳에 모아 거주하게 하라는 지시를 내릴 예정이었다. 할아버지는 손자가 죽었고, 아들이 피의 왕이었다는 사실만 생각하면 지금이라도 그에게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개두를 해야 한다고, 그러고 나면 죽어버리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자신이 매혈의 우두머리였던 게 뭐 어떻다고 그러느냐며 오히려 반문하고, 할아버지는 병든 사람들을 학교로 모아 함께 지낼 수 있도록 한다. 하지만 곧 죽을 사람들이라도 그 속에서 양심 없고, 부도덕한 행동들을 일삼기는 마찬가지였고, 생명의 연약함과 탐욕의 강대함이 공존하는 그곳은 마치 지옥의 축소판도 같았다. 

죽은 사람은 죽은 닭이나 죽은 개와 마찬가지였다. 발에 밟혀 죽은 개미나 다름없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소리 내어 울지도 않았고, 흰 종이로 대련을 써 붙이지도 않았다. 사람이 죽으면 그날을 넘기지 않고 파묻었다. 관은 일찌감치 마련되어 있었다. 무덤 역시 사람들이 죽기 전에 다 파놓았다. 날이 너무 무더워 사람이 죽은 다음에 무덤을 파면 이미 때가 늦기 때문이었다. 하루만 지나면 시신이 부패되어 지독한 냄새가 났기 때문에 미리 관을 준비하고 무덤을 파놓았다가 사람이 죽으면 후다닥 순식간에 매장해버리는 것이었다.     p.521

이 작품은 중국의 경제 발전이 가져온 인간의 물질적인 욕망이 빚어낸 비극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옌롄커는 중국의 한 마을에서 비위생적인 헌혈 바늘을 사용해 에이즈에 집단 감염된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자본주의라는 유토피아적 환상이 처참하게 붕괴되는 풍경을 세밀하게 묘사해냈다. '매혈'이라고 하면 역시나 중국 작가인 위화의 '허삼관 매혈기'가 바로 떠오를 것이다. 그 작품이 한평생 피를 팔아 가족을 위기에서 구해낸 속 깊은 아버지 허삼관의 이야기를 익살과 해학을 통해서 그려냈던 것에 비해, 옌롄커의 작품은 보다 비극적인 현실을 그리고 있다. 위화가 평범한 사람들의 진실한 휴머니즘에 착안을 두었던 것에 비해, 옌롄커는 인간의 욕망과 문명이 빚어낸 비극적인 현상들에 천착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리하여 이 작품은 옌롄커의 전작인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사서>와 마찬가지로 국가의 명예를 손상시켰다는 이유로 중국 정부로부터 판매 금지 조치를 당하기도 했다.

옌롄커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이 작품은 '한 편의 소설에 불과하지만 그 안에는 어떤 몸부림과 그 몸부림으로 인한 울음이 가득 차 있다'고 말했다. 그러니 이 작품을 읽기 전에 먼저 강한 심장을 준비하라고, 그리고 새의 몸부림을 느끼고 몸부림에서 쏟아져 나오는 피울음과 잠꼬대를 경청해달라고 부탁하고 있다. 그러한 작가의 진지함과 피를 토하는 날카로운 외침이 작품 전반에서 묵직하게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피를 사고파는 과정에서 딩씨 마을 전체가 에이즈에 점령당하게 된 현실의 풍경 자체도 지독했지만, 그것을 이미 죽어 땅에 묻힌 열두 살 소년의 시선으로 그려내면서 리얼리즘과 판타지를 결합시키고 있으니, 이 작품은 독자 입장에서 읽는 시간 또한 만만치가 않을 수밖에 없었다. '인성의 가장 후미진 구석에 자리한 욕망의 그 꺼지지 않고 반짝이는 빛'을 쓰고자 했다는 작가의 말이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서도 오래도록 머릿속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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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쓸모 - 자유롭고 떳떳한 삶을 위한 22가지 통찰
최태성 지음 / 다산초당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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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역사를 알리는 사람으로서 일연 스님과 같은 역할을 하고 싶어요. 일연 스님은 휴지 조각처럼 버려진 이야기들을 주워 잘 펴서 우리에게 남겨준 분이잖아요. 저도 사람들이 쓸데없다고 생각하는 역사, 잘 모르고 관심도 없는 역사를 재미있게 전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끊임없이 생명력을 불어 넣고, 이 시대에 맞는 의미를 찾아내서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것이지요. "! 이것 봐! 휴지 조각인 줄 알았는데 보물 지도지? 역사가 그런 거야!" 이렇게 보여주려 합니다.    p.27

학창 시절에 내가 가장 지루해했던 과목은 바로 국사와 역사였다. 단순한 사실의 기록을 그저 외워야 하는 학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체 수백 년 전, 혹은 수천 년 전의 문화와 삶을 이해하고, 암기하는 것이 지금의 우리에게 무슨 커다란 의미가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느끼기도 했다. 당시의 교육 방식이 주입식, 암기 위주로 진행되어서 그랬을 수도 있고, 내가 역사라는 것에 대해 잘못 이해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 요즘은 나도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역사는 사람을 만나는 인문학'이라는 생각에 나 역시 동의하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는 말한다. '역사는 나보다 앞서 살았던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나는 어떻게 살 것인지를 고민하고 실천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존재'라고 말이다.

이 책은 누적 수강생이 500만 명에 달하는 손꼽히는 역사 강사 최태성, 그가 역사에서 찾은 자유롭고 떳떳한 삶을 위한 22가지 통찰을 담고 있다. 수백 년 전 이야기로 오늘의 고민을 해결하는 세상에서 가장 실용적인 역사 사용법이라 그런지, 딱딱하거나 어렵지 않고 역사를 굉장히 대중적인 방식으로 풀어내고 있어 쉽게 읽힌다. 그는 역사를 배워서 어디에 쓰냐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반박이라도 하듯, 오직역사를 공부하면 무엇이 좋은가에 답하는 것으로 목표로 삼았다고 한다. 삶을 바로잡고 싶을 때마다 역사 속으로 시간 여행을 떠났다고 말하는 그의 이야기를 만나 보자. 100년 전, 1000년 전에 살았던 사람도 지금의 우리와 같은 고민을 하고 비슷한 위기를 겪고, 또 극복해낸다는 사실이 시사하는 바가 큰 책이다.

여기 집안도 별 볼 일 없고, 돈도 없고, 심지어 직장에서도 쫓겨난 남자가 있습니다. 그래도 뭔가 해보겠다고 일을 벌이는데 족족 망합니다. 성격은 또 얼마나 깐깐한지 타협이라곤 모릅니다. 그러면서 세상을 탓합니다. 세상이 잘못돼서 자기가 이렇게 산다는 거죠. 세상뿐 아니라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은 죄다 욕합니다. 딱 사회 부적응자의 모습이죠. 그런데 잘못된 세상이라고 욕만 하는 게 아니라 아예 잘못된 세상을 뒤집어엎겠다고 나섭니다. 그의 이름은 정도전. 자신의 이름처럼 '도전'의 연속인 삶을 살다 간 인물입니다.   p.170~171

우리는 참 재미없게 역사를 배워왔다. 연도별로 일어난 사건을 외우고, 그 사건을 일으킨 사람을 외우고.. 그러니 성인이 되어서 기억에 남는 것도 없고 말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쓸데없다고 생각하는 역사, 잘 모르고 관심도 없는 역사를 재미있게 들려 준다면 어떨까. 게다가 역사를 과거의 박제처럼 바라볼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생명력을 불어 넣어 동시대성을 찾아내어 알려 준다면 말이다. 역사를 연도나 사건, 사람 이름을 외워야 하는 학문이 아니라 그 시대의 사람을 만나는 일로 생각해 본다면 역사도 참 재미있게 느껴지지 않을까.

책을 읽고 나니 이 책이 역사를 재미있게 풀어주는 책이 아니라, 오히려 수백 년 전 이야기로 오늘의 고민을 해결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역사 사용 설명서에 가깝다라는 문구가 확 와 닿았다. 이제 더 이상 역사가 외울 것이 많은 골치 아프고 지루한 암기 과목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구텐베르크가 개발한 대량 인쇄 기술과 세종대왕이 창제한 훈민정음을 스티브 잡스가 만든 아이폰과 엮어 세상을 바꾸는 생각의 조건을 알아보고, 대제국 몽골에 항복하면서도 고려의 전통을 지킬 수 있도록 끝까지 협상한 고려 원종의 사례로 하나를 내어주고 둘을 얻는 협상의 기술을 배우는 등 한국사와 세계사를 넘나들며 펼쳐지는 이야기 자체가 너무 재미있기도 했다. 현장에서 직접 강의를 듣고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저자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담겨 있는 책이라 500만 명의 가슴을 울린 인문학 명강의를 책을 통해 만날 수 있다는 점도 너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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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구의 사랑 오늘의 젊은 작가 21
김세희 지음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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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에게도 그 시절의 이야기를 해 본 적이 없다. 그것을 부끄럽게 여겼기 때문일까. 아니면 하찮은 것이라 확신했기 때문일까. 그 시절의 일들이 내가 스무 살 이후 들어간 세상에서 하찮은 것으로 여겨진다는 건 똑똑히 알 수 있었다. 자랑스레 떠들 일은 아니었다. 더 이상 받아들여지지 않는 일. 말한다 해도 제대로 이해되지 않을 일. 어쩌다 언급한다 하더라도 내가 지금은 그 일들을 바보같이 여긴다는 뉘앙스를 담아야 한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p.51~52

 

언젠가부터 성별을 뛰어넘은 동성 간의 사랑을 다룬 퀴어 소설들이 독자들에게 거부감 없이 공감을 얻고 있는 것 같다.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캐롤>, 안드레 애치먼의 <그해, 여름 손님> 정도의 작품만 읽어 봤었는데, 작년에 화제였던 김봉곤 작가의 <여름, 스피드>도 궁금하긴 했다. 그가 커밍아웃한 첫 게이 소설가라는 수식어를 가지고 있기도 하고, 섬세하고 감성적이면서도 노골적인 묘사까지 마다하지 않는 작품이라고 하니 말이다. 어쨌건 개인적으로 퀴어 소설들에 반감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지만, 그다지 많이 읽어본 건 아니라서 잘 안다고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래서 이번에 만난 김세희 작가의 <항구의 사랑> 10대 소녀들의 첫사랑 이야기로 풀어내고 있어, 가장 풋풋하고, 예쁜 퀴어 소설이 아니었나 싶다.

여중, 여고로 이어지는 학창 시절을 보냈다면 누구나 공감할 수밖에 없는 부분 중 하나가 바로 중성적인 매력을 가진 여학생의 존재일 것이다. 대부분 키가 크고, 컷트 머리에, 운동을 잘한다거나, 성격이 털털하며 중성적인 매력을 가진 여학생이 인기가 많았다. 예쁘고, 얌전하고, 공부 잘하고 상냥한 여학생이 아니라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문화도 시대적인 차이는 어느 정도 있었던 것 같다. 이 작품의 이야기 속 배경인 2000년대 초반에는 아이돌 그룹의 멤버들을 향한 팬픽과 함께 여학생들 간의 동성애로 발전해있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이러한 시절을 겪지 못한 나로서는 이들의 문화가 조금 낯설기도 했다. 팬픽 이반이니, 레즈비언인 척하는 유행이니 하는 것들이 말이다. 하지만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고 그들의 미성숙한 감정과 관계들을 이해는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때 나는 과거에 머물러 있는 인희를 한심하다고 여겼다. 과거를 그리워하며 적응하지 못하는 그 애를 비웃었다. 그건 그저 유행이었다고, 그뿐이었다고 못받아 주고 싶었다. 여자 아이들 집단에서 너는 남자와 비슷하다는 이유로 인기를 얻었던 거라고 말이다. 나는 또 이렇게도 말해 주고 싶었다. 정신 차리라고, 현실을 직시하라고. 이제 우리 주변에는 진짜 남자들이 있으니 남자 흉내는 그만두라고. 아무리 흉내를 내려해도 진짜 남자를 따라갈 수는 없을 거라고. 너의 꼴은 우스꽝스럽고, 보는 것만으로도 부끄러워진다고.   p.158

 

2000년대 초 항구도시 목포, 초등학교 내내 언제나 반에서 가장 작고 미숙한 아이였던 ''는 같은 반 체육부장이었던 인희와 친해진다. 친구보다는 보호자처럼 느껴졌던 인희는 늘 나를 보살펴 주었다. 중학생이 되어 처음 <데미안>을 읽었을 때 바로 인희를 떠올렸을 정도로, 인희는 유년 시절의 데미안 같은 존재였다. 그런 인희와 다시 만나게 된 건 고등학교 입학식이 끝난 뒤였는데, 그 동안 인희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칼머리에 체육복 바지를 입고, 주머니에 손을 넣고 짝다리를 짚고 선 모습이 꼭 남자 같았다. 당시에는 여자끼리 사귀는 아이들을 전부 이반이라고 불렀는데, 인희 역시 남자 흉내를 내며 여자와 사귀는 아이가 되어 있었다. 나에게는 규인이라는 성숙하고 침착한 친구가 있었고, 그녀를 통해 연극 동아리에 가입하면서 당시 연극의 주인공이었던 민선 선배와 가까워지게 된다. 그리고 민선 선배에게 남다른 감정을 품게 되는데, 내가 품었던 마음은 동경이었을까, 사랑이었을까.

한때 아이돌에 열광하고, 그들이 등장하는 팬픽을 쓰고, 진심으로 연예인들에 대한 마음을 키웠더라도, 그러한 감정이 계속 지속될 수는 없을 것이다. 일상을 살아 내려면 좋아하는 것만 바라보며 살 수는 없으니까, 어른이 된다는 것은 현실과 어느 정도 타협해야 된다는 말이니까 말이다. 극중 주인공이 스무 살이 되어 목포에서 서울로 올라가고, 대학생이 되면서 자신이 한때 가졌던 마음과 열정들을 모두 부끄러워 하거나 하찮은 것이라 치부하듯이, 우리는 그렇게 잊어 버릴 수 없는 것들을 시간의 너머에 놓아 두고 내일을 바라보며 살아 간다.

 

"우리 고등학교 때 말이야. 그건 다 뭐였을까?"

"그땐 다 미쳤었어."

 

하지만 그 감정들은 결코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었다. 비록 지금은 그 모든 시간들을 부정하게 되더라도 말이다. 이 작품은 작가의 자전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쓰였기에 더욱 진솔하고, 애틋하게 느껴진다. 아이돌, 팬픽, 그리고 동성 친구들을 사랑했던 소녀들이 자라서 성숙한 어른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그리고 있는 이 작품은 아마도 대부분의 여성들에게 공감과 향수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우리 모두 한때 그런 소녀들이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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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미션 - 죽어야 하는 남자들
야쿠마루 가쿠 지음, 민경욱 옮김 / 크로스로드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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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여자를 죽이고 싶다―. 온몸의 혈관에 매혹적인 독소가 내달리기 시작한 듯, 몸도 마음도 그 욕망에 매였다. 지금이라면…… 이 욕망을 풀어놓을 수 있지 않을까. 더는 주저할 게 없다. 자신은 곧 죽는다. 경찰에 잡히는 것은 두렵지 않다. 와카쓰키학원 아이들의 모습이 머리에 떠올랐으나 욕망에 저항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제 곧 자신은 죽는다. 적어도 이 세상에서 사라지기 전에 내내 자신을 괴롭혔던, 내내 봉인해 왔던 욕망을 풀어버리고 싶었다.    p.50~51

사카키는 데이 트레이더로 젊은 나이에 주식으로 큰 돈을 벌어 모두가 부러워하는 삶을 살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위암 말기라는 시한부 판정을 받게 되고, 절망하기 보다는 남은 시간 동안 자신의 욕망에 충실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오래 전부터 살인에 대한 욕망이 있었는데, 여자를 안을 때면 결정적인 순간에 여자를 죽이고 싶다는 강렬한 살인 충동을 느꼈던 것이다. 그 동안은 그러한 욕망을 억지로 누르면서 살아 왔지만, 어차피 이제 자신은 곧 죽게 된다. 그러니 경찰에 잡히는 것 따위는 두렵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세상에서 사라지기 전에 내내 자신을 괴롭혔던, 봉인해 왔던 욕망을 풀어 버리기로 마음 먹게 되고, 살인에 대한 욕망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한다.

형사 아오이는 3년 전에 조기 위암 판정을 받고 수술해 회복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위 상태가 좋지 않았고, 병원에서 암이 재발했고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시한부 선고를 받게 된다. 일 때문에 위독한 아내를 돌보지도 못했고 그녀의 마지막을 지켜주지도 못했던 그였다. 그 이후로 자녀들과의 관계도 틀어져 버린 중년의 형사는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시간을 살인범의 체포에 바치겠다고 다짐한다. 이제 곧 두 자녀들은 부모 없이 세상에 홀로 남겨질 테고, 이런 경우 남은 시간을 가족과 함께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게 자연스러울 텐데 말이다. 그렇게 비슷한 시기에 시한부 판정을 받게 된 두 남자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한 남자는 남은 시간 동안 연쇄 살인을 시작하고, 나머지 한 남자는 자신의 남은 목숨을 걸고 범인을 체포하려고 하는 것이다. 죽음이라는 동일한 운명 속에서 상반된 선택을 향해 달려가는 두 남자의 최후의 대결은 놀라운 흡입력으로 이야기를 끌고 나간다.

재미있군―.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사람을 죽이고 싶다는 오랜 바람을 이룬 자신과 생명이 다할 때까지 그 범인을 잡으려고 하는 형사라. 이토록 재미있는 만남이 또 있을까. 사카키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나는 이 눈으로 범인이 체포되는 것을 보고 싶어. 언젠가 사형대에 매달릴 그 녀석에게 꼭 해 주고 싶은 말이 있어―. 그 형사는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자신이 사형대에 매달릴 일은 없을 것이다. 그때쯤 자신은 이미 죽어 버렸을 테니까.    p.261

사회파 추리의 강자 야쿠마루 가쿠는 매번 묵직한 미스터리를 그려냈었다. 가해자와 피해자, 그리고 용서와 복수라는 다소 어둡고 무거운 주제가 이렇게 술술 읽혀도 되나 싶을 만큼 쉽게 읽히고, 가슴으로 다가오는 것이 그의 작품이 가진 가장 큰 매력이었다. 또한 사회성 짙은 소재를 다루면서도 불합리한 현실에 대한 장황한 설교를 늘어 놓아 지루하게 만들지 않고, 미스터리와 추리적 요소와 스릴러적인 템포로 이야기 자체에 집중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점도 야쿠마루 가쿠만의 장점이다. 한마디로 '한번 읽기 시작하면 절대로 쉽게 손에서 놓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이번 작품 역시 가독성은 나무랄 데 없이 뛰어났다. 다만, 다소 작위적이라고 느껴질 만큼 개연성이 떨어지는 전개들이 눈에 띄어 아쉬웠다.

물론 굳이 따지자면, 애초에 연쇄 살인을 시작한 남자와 그를 체포하려는 형사를 같은 병원에 다니는, 말기 위암 시한부 환자로 설정한 것부터 지나치게 작위적인 설정이었음은 어쩔 수 없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거기에 더해 결정적으로 남자 친구의 비밀스러운 삶을 알아낸 여자가 그를 신고하려는 찰나에 갑자기 교통 사고를 당해 죽어 버린다는 설정 또한 너무 뜬금없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아오이가 수사를 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사실을 알아낼 때마다 그저 '형사의 감'이라는 말로 뭉뚱그려 표현되고 있어 그 맥락없음에 의아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가 재미있다는 것 또한 아이러니지만 말이다. 이렇게 아쉬운 부분들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한 번 읽기 시작하면 손에서 쉽게 놓을 수 없을 정도로 가독성이 뛰어나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밖에 없는 작품이다. 그리고 마지막 결정적인 한 방은 정말 인상적이었다. 죽음을 앞둔 범인에게 형사처벌 보다 더한 대가를 치르게 한 것이니 말이다. 야쿠마루 가쿠는 '범인을 잡는 과정보다 잡은 후 형사처벌 이외의 요소로 어떻게 대가를 치르게 할지에 중점을 두었다'고 말했는데, 그래서인지 마지막 결말 부분은 짧게 지나감에도 불구하고 매우 임팩트있는 여운을 남겨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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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마스터
카린 지에벨 지음, 이승재 옮김 / 밝은세상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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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내 삶을 송두리째 뒤바꿔 놨어. 당신 때문에 내 삶은 끔찍한 지옥이 돼 버렸어. 당신 때문에 난 7년이라는 시간 동안 불행 속에서 지내야 했어. 내 열정을 포기해야 했고,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하루하루를 고통 속에서 허우적대야 했어. 당신은 그게 어땠는지 상상도 못 할 거야. 그러다 결국, 난 죽음을 맞이하게 됐어. 당신이 날 죽인 거야.    p.56~57

유명 여배우 모르간 아고스티니는 어느 날 생면부지 남자의 상속인이 되었다는 연락을 받는다. 고인의 가족들이 모여 있는 장소에서 변호사는 유언장을 낭독하고, 고인은 여동생에게 아파트 한 채와 오래된 자동차 한대, 형에게는 카메라와 컴퓨터 장비, 어머니에게는 물질적인 값어치가 거의 없어보이는 장비들을 남겼다. 그리고 모르간에게는 아르데슈에 있는 주택 한 채를 남겼다. 보잘 것 없는 유산을 받은 고인의 형은 분노가 가득 찬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고, 그녀는 당황스러웠지만 아들이 남긴 마지막 유언을 존중해야 한다는 고인의 어머니의 말에 결국 그 집을 받기로 한다.

고인이 남긴 편지에는 당신의 영화 인생을 쭉 지켜봐 왔으며, 당신이 내게 준 감동에 대한 대가로 무언가를 남기고 싶었다는 이야기가 쓰여 있었다. 그리고 아르데슈의 집에 당신을 위한 깜짝 선물을 준비해뒀으니 직접 가서 보라고 되어 있었다. 그녀는 남편과 함께 숲으로 둘러싸인 낡은 빈집으로 향하고, 고인이 그녀를 위해 준비한 복도 맨 끝에 있는 방에 가게 된다. 어두컴컴한 집 안에 있는 방에서 마주하게 되는 것은 대체 뭘까. 모르간은 남편과 사이가 좋지 않아 보이고, 그녀는 그 집으로 향하면서 이유 없이 불안해했다. 과연 고인이 된 남자는 단순히 여배우의 팬이라서 그녀에게 유언을 남긴 것일까. 그가 남겨준 마지막 선물은 무엇일까. 짧은 이야기였지만,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임팩트 있는 한 방을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그러고 나서야 모두의 눈에 내가 보이기 시작한 것 같더라고. 그때부터 난 인간인 '누군가'가 될 수는 없었지만 괴물 같은 '무언가'가 될 수 있었어.

내가 바로 공포라는 존재란다.   p.148

이 책은 국내에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되는 카린 지에벨의 단편 소설집으로, <죽음 뒤에> <사랑스러운 공포> 단 두 편이 수록되어 있다. 국내에 출간된 카린 지에벨의 작품들을 대부분 읽어 보았기 때문에 단편은 어떨지 너무 궁금했다. 소설집이라 여러 편이 수록되어 있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단 두 편의 짧은 이야기만으로 그녀의 새로운 매력을 보여주기에는 충분했던 것 같다. 한 편당 100쪽 남짓한 분량으로 딱 필요한 이야기만 군더더기 없이 쓰여 있는 데다, 단편만이 줄 수 있는 결말의 여운까지 인상적인 이야기였다.

카린 지에벨 하면 인간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심리적 요소들을 끄집어 내어 복잡다단한 심리변화를 포착해내는 작가로 유명한데, 그래서인지 기존 장편 소설들은 분량이 꽤나 두꺼운 편이었다. 아무래도 '심리 스릴러'라는 장르의 특성 상 각각의 인물들의 내면에 집중하다 보니, 빠른 전개보다는 풍부한 내면의 목소리를 통한 갈등을 부각시키는 부분들이 많았고, 그래서 다소 루즈하고 지루한 면도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물론 욕망, 불안, 집착, 죄의식, 피해의식, 열등감 등 인간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심리적 요소들을 끄집어내어 실력만큼은 탁월한 작가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지만 말이다. 이번에 그녀의 작품을 단편으로 만나 보니, 기존 작품들의 원형이 되는 이야기를 만난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리뷰어스 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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