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구의 사랑 오늘의 젊은 작가 21
김세희 지음 / 민음사 / 2019년 6월
평점 :
품절


 

 

나는 누구에게도 그 시절의 이야기를 해 본 적이 없다. 그것을 부끄럽게 여겼기 때문일까. 아니면 하찮은 것이라 확신했기 때문일까. 그 시절의 일들이 내가 스무 살 이후 들어간 세상에서 하찮은 것으로 여겨진다는 건 똑똑히 알 수 있었다. 자랑스레 떠들 일은 아니었다. 더 이상 받아들여지지 않는 일. 말한다 해도 제대로 이해되지 않을 일. 어쩌다 언급한다 하더라도 내가 지금은 그 일들을 바보같이 여긴다는 뉘앙스를 담아야 한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p.51~52

 

언젠가부터 성별을 뛰어넘은 동성 간의 사랑을 다룬 퀴어 소설들이 독자들에게 거부감 없이 공감을 얻고 있는 것 같다.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캐롤>, 안드레 애치먼의 <그해, 여름 손님> 정도의 작품만 읽어 봤었는데, 작년에 화제였던 김봉곤 작가의 <여름, 스피드>도 궁금하긴 했다. 그가 커밍아웃한 첫 게이 소설가라는 수식어를 가지고 있기도 하고, 섬세하고 감성적이면서도 노골적인 묘사까지 마다하지 않는 작품이라고 하니 말이다. 어쨌건 개인적으로 퀴어 소설들에 반감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지만, 그다지 많이 읽어본 건 아니라서 잘 안다고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래서 이번에 만난 김세희 작가의 <항구의 사랑> 10대 소녀들의 첫사랑 이야기로 풀어내고 있어, 가장 풋풋하고, 예쁜 퀴어 소설이 아니었나 싶다.

여중, 여고로 이어지는 학창 시절을 보냈다면 누구나 공감할 수밖에 없는 부분 중 하나가 바로 중성적인 매력을 가진 여학생의 존재일 것이다. 대부분 키가 크고, 컷트 머리에, 운동을 잘한다거나, 성격이 털털하며 중성적인 매력을 가진 여학생이 인기가 많았다. 예쁘고, 얌전하고, 공부 잘하고 상냥한 여학생이 아니라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문화도 시대적인 차이는 어느 정도 있었던 것 같다. 이 작품의 이야기 속 배경인 2000년대 초반에는 아이돌 그룹의 멤버들을 향한 팬픽과 함께 여학생들 간의 동성애로 발전해있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이러한 시절을 겪지 못한 나로서는 이들의 문화가 조금 낯설기도 했다. 팬픽 이반이니, 레즈비언인 척하는 유행이니 하는 것들이 말이다. 하지만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고 그들의 미성숙한 감정과 관계들을 이해는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때 나는 과거에 머물러 있는 인희를 한심하다고 여겼다. 과거를 그리워하며 적응하지 못하는 그 애를 비웃었다. 그건 그저 유행이었다고, 그뿐이었다고 못받아 주고 싶었다. 여자 아이들 집단에서 너는 남자와 비슷하다는 이유로 인기를 얻었던 거라고 말이다. 나는 또 이렇게도 말해 주고 싶었다. 정신 차리라고, 현실을 직시하라고. 이제 우리 주변에는 진짜 남자들이 있으니 남자 흉내는 그만두라고. 아무리 흉내를 내려해도 진짜 남자를 따라갈 수는 없을 거라고. 너의 꼴은 우스꽝스럽고, 보는 것만으로도 부끄러워진다고.   p.158

 

2000년대 초 항구도시 목포, 초등학교 내내 언제나 반에서 가장 작고 미숙한 아이였던 ''는 같은 반 체육부장이었던 인희와 친해진다. 친구보다는 보호자처럼 느껴졌던 인희는 늘 나를 보살펴 주었다. 중학생이 되어 처음 <데미안>을 읽었을 때 바로 인희를 떠올렸을 정도로, 인희는 유년 시절의 데미안 같은 존재였다. 그런 인희와 다시 만나게 된 건 고등학교 입학식이 끝난 뒤였는데, 그 동안 인희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칼머리에 체육복 바지를 입고, 주머니에 손을 넣고 짝다리를 짚고 선 모습이 꼭 남자 같았다. 당시에는 여자끼리 사귀는 아이들을 전부 이반이라고 불렀는데, 인희 역시 남자 흉내를 내며 여자와 사귀는 아이가 되어 있었다. 나에게는 규인이라는 성숙하고 침착한 친구가 있었고, 그녀를 통해 연극 동아리에 가입하면서 당시 연극의 주인공이었던 민선 선배와 가까워지게 된다. 그리고 민선 선배에게 남다른 감정을 품게 되는데, 내가 품었던 마음은 동경이었을까, 사랑이었을까.

한때 아이돌에 열광하고, 그들이 등장하는 팬픽을 쓰고, 진심으로 연예인들에 대한 마음을 키웠더라도, 그러한 감정이 계속 지속될 수는 없을 것이다. 일상을 살아 내려면 좋아하는 것만 바라보며 살 수는 없으니까, 어른이 된다는 것은 현실과 어느 정도 타협해야 된다는 말이니까 말이다. 극중 주인공이 스무 살이 되어 목포에서 서울로 올라가고, 대학생이 되면서 자신이 한때 가졌던 마음과 열정들을 모두 부끄러워 하거나 하찮은 것이라 치부하듯이, 우리는 그렇게 잊어 버릴 수 없는 것들을 시간의 너머에 놓아 두고 내일을 바라보며 살아 간다.

 

"우리 고등학교 때 말이야. 그건 다 뭐였을까?"

"그땐 다 미쳤었어."

 

하지만 그 감정들은 결코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었다. 비록 지금은 그 모든 시간들을 부정하게 되더라도 말이다. 이 작품은 작가의 자전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쓰였기에 더욱 진솔하고, 애틋하게 느껴진다. 아이돌, 팬픽, 그리고 동성 친구들을 사랑했던 소녀들이 자라서 성숙한 어른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그리고 있는 이 작품은 아마도 대부분의 여성들에게 공감과 향수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우리 모두 한때 그런 소녀들이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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