딩씨 마을의 꿈
옌롄커 지음, 김태성 옮김 / 자음과모음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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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혈액 주머니는 마치 더운물 주머니에 물을 가득 채워놓은 것처럼 움직일 때마다 찰랑찰랑 흔들렸다. 서서히 잿빛으로 물들어가는 들판 위로 진한 피비린내가 퍼져가고 있었다. 막 나무에서 떨어진 여린 대추를 물속에 넣고 끓일 때 나는 냄새 같았다. 리싼런의 구부린 팔 안쪽에서 바늘을 빼낸 다음 혈액 주머니를 거두면서 아버지는 그에게 피값으로 백 위안을 건넸다.    p.164

딩씨 마을은 살아 있지만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사람들은 집 안에 틀어박혀 밖으로 나오지 않았고, 십 년 전 피를 팔았던 사람들은 열병에 걸려 있었다. 이 열병의 정확한 학명은 에이즈였다. 딩씨 마을에서는 매달 거의 모든 집에서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열두 살 소년 샤오창의 아버지는 십 년 전, 상부의 주도로 마을에서 대대적으로 일어난 매혈 운동의 우두머리였다. 그는 인근 열여덟 개 마을에서 가장 많은 피를 사고 팔았던 피의 왕이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복수로 누군가 마을 어귀에 놓아둔 독이 묻은 토마토를 먹고 소년 역시 죽게 된다. 이 작품의 화자는 바로 그 비극적인 현실 속에서 이미 죽은 소년이다.

이 상태로 가다가는 딩씨 마을 사람들 거의 전부가 죽게 될 것이었다. 상부에서는 피를 팔지 않은 사람들에게까지 열병이 전염될 것을 우려하여, 병에 걸린 사람들을 한곳에 모아 거주하게 하라는 지시를 내릴 예정이었다. 할아버지는 손자가 죽었고, 아들이 피의 왕이었다는 사실만 생각하면 지금이라도 그에게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개두를 해야 한다고, 그러고 나면 죽어버리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자신이 매혈의 우두머리였던 게 뭐 어떻다고 그러느냐며 오히려 반문하고, 할아버지는 병든 사람들을 학교로 모아 함께 지낼 수 있도록 한다. 하지만 곧 죽을 사람들이라도 그 속에서 양심 없고, 부도덕한 행동들을 일삼기는 마찬가지였고, 생명의 연약함과 탐욕의 강대함이 공존하는 그곳은 마치 지옥의 축소판도 같았다. 

죽은 사람은 죽은 닭이나 죽은 개와 마찬가지였다. 발에 밟혀 죽은 개미나 다름없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소리 내어 울지도 않았고, 흰 종이로 대련을 써 붙이지도 않았다. 사람이 죽으면 그날을 넘기지 않고 파묻었다. 관은 일찌감치 마련되어 있었다. 무덤 역시 사람들이 죽기 전에 다 파놓았다. 날이 너무 무더워 사람이 죽은 다음에 무덤을 파면 이미 때가 늦기 때문이었다. 하루만 지나면 시신이 부패되어 지독한 냄새가 났기 때문에 미리 관을 준비하고 무덤을 파놓았다가 사람이 죽으면 후다닥 순식간에 매장해버리는 것이었다.     p.521

이 작품은 중국의 경제 발전이 가져온 인간의 물질적인 욕망이 빚어낸 비극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옌롄커는 중국의 한 마을에서 비위생적인 헌혈 바늘을 사용해 에이즈에 집단 감염된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자본주의라는 유토피아적 환상이 처참하게 붕괴되는 풍경을 세밀하게 묘사해냈다. '매혈'이라고 하면 역시나 중국 작가인 위화의 '허삼관 매혈기'가 바로 떠오를 것이다. 그 작품이 한평생 피를 팔아 가족을 위기에서 구해낸 속 깊은 아버지 허삼관의 이야기를 익살과 해학을 통해서 그려냈던 것에 비해, 옌롄커의 작품은 보다 비극적인 현실을 그리고 있다. 위화가 평범한 사람들의 진실한 휴머니즘에 착안을 두었던 것에 비해, 옌롄커는 인간의 욕망과 문명이 빚어낸 비극적인 현상들에 천착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리하여 이 작품은 옌롄커의 전작인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사서>와 마찬가지로 국가의 명예를 손상시켰다는 이유로 중국 정부로부터 판매 금지 조치를 당하기도 했다.

옌롄커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이 작품은 '한 편의 소설에 불과하지만 그 안에는 어떤 몸부림과 그 몸부림으로 인한 울음이 가득 차 있다'고 말했다. 그러니 이 작품을 읽기 전에 먼저 강한 심장을 준비하라고, 그리고 새의 몸부림을 느끼고 몸부림에서 쏟아져 나오는 피울음과 잠꼬대를 경청해달라고 부탁하고 있다. 그러한 작가의 진지함과 피를 토하는 날카로운 외침이 작품 전반에서 묵직하게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피를 사고파는 과정에서 딩씨 마을 전체가 에이즈에 점령당하게 된 현실의 풍경 자체도 지독했지만, 그것을 이미 죽어 땅에 묻힌 열두 살 소년의 시선으로 그려내면서 리얼리즘과 판타지를 결합시키고 있으니, 이 작품은 독자 입장에서 읽는 시간 또한 만만치가 않을 수밖에 없었다. '인성의 가장 후미진 구석에 자리한 욕망의 그 꺼지지 않고 반짝이는 빛'을 쓰고자 했다는 작가의 말이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서도 오래도록 머릿속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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