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당신의 평온을 깼다면
패티 유미 코트렐 지음, 이원경 옮김 / 비채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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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스스로 목숨을 끊을 때는 아주 이상하고 심각한 상황이기 마련이므로 어떤 연유였는지 반드시 알아봐야 한다. 엄격하고 적절한 형이상학적 조사가 이뤄져야만 한다. 어쩌면 내 동생의 죽음을 조사함으로써 내 삶에 다시 활기가 생길 수도 있고, 최종적으로 알아낸 사실들을 양부모에게 알리면 그들의 삶도 안정되고 강해질지 모른다. 나는 내 생각이 합리적이고 의미 있다고 느꼈다. 나는 더 살기를 바라지 않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태도라고 혼잣말을 했다.    p.13

 

헬렌은 어느 날, 남동생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스물아홉인 남동생은 헬렌과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미국으로 입양된 입양아였다. 그들은 생물학적으로 다른 두 집안에서 따로따로 입양되었고, 그들의 양부모는 부유한 편이지만 지나칠 정도로 절약에 집착하는 구두쇠였다. 헬렌은 뉴욕에서 방과 후 학교에서 ‘문제아’로 불리는 학생들을 지도하는 일을 하며 악착같이 사는 동안 집에는 수년간 한 번도 발을 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동생의 사망 소식을 듣고는 뉴욕을 떠나 어린 시절의 집으로 향한다. 동생의 자살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을 것이고, 동생의 삶이 있던 그곳에 여기저기 단서와 실마리가 감춰져 있을 테니 말이다.

 

인간이 스스로 목숨을 끊을 때는 아주 이상하고 심각한 상황이기 마련이고, 가족 입장에서 그러한 죽음이 일어난 사정과 배경을 이해하고 싶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이들 가족은 뭔가 이상하다. 몇 년 만에 만난 양부모는 딸의 등장을 그다지 반가워하지 않고 오히려 당황한 눈치였으며, 헬렌은 그런 반응에 조금 상처를 받았다고 하지만 실제 행동은 전혀 개의치 않는 것처럼 보였으니 말이다. 양부모와의 서먹한 관계에도 굴하지 않고 헬렌은 동생의 삶을 추적하고 재구성하기 시작한다. 동생을 아는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고 동생의 방에서 잠을 자며, 그녀가 알게 되는 진실의 끝은 무엇일까.

 

 

복잡한 상황을 단순하게 정리하면 훨씬 수월해지는 법. 나는 그런 방식을 좋아했다. 단순성을 좋아했다. 빈틈없고 끝없는 단순성! 시간을 초월한 아름다움! 나는 동생이 세운 자살 계획의 조각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사진 열 장을 더 살펴보았다. 모든 사진 속에서 녀석은 오만상을 찌푸리거나 흐리멍덩한 표정이었다. 내 동생은 얌전한 사람이었다. 폭력을 쓴 적이 한 번도 없고, 늘 유순해 보였다. 반면, 나는 폭력적이고 분노로 가득 찼으며, 매일매일 평온을 위협하는 존재였다.     p.96~97

 

대단히 이상하지만 매혹적인 작품이었다. 일인칭 화자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이야기에서 화자의 시선이 불안정하거나, 믿을 수 없을 경우 독자 입장에서 따라가기가 굉장히 어려울 수밖에 없다. 이야기는 시종일관 동생의 죽음을 겪게 된 서른두 살 헬렌의 시선으로 진행된다. 5년을 떠나 있다가 집으로 돌아온 그녀와 양부모의 관계도 이상하고, 헬렌이 동생의 죽음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하게 되는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가 전부 정상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점이었다. 좀처럼 화자의 시선이나 감정을 이해하거나 공감하기 어려웠으니 말이다. 직장의 규율을 어기고, 실수를 연발하고, 아무 데서나 토하고, 분노를 못 참으며 불안한 말과 행동을 하던 사람에게 감정 이입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녀의 성격이나 성향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은 숱하게 많았다. 예를 들면 이런 문장들이다. '나는 늘 상대가 하기 싫어하는 일을 억지로 하게 만들었다', '나는 늘 윤리적 행위에 관심이 많았다', '나는 경쟁심이 충만했다. 나는 늘 극도의 질투를 경험했으며, 그것은 평온을 파괴하는 질투였다', '원래 나는 늘 뒤에 있는 걸 좋아했고, 내 삶의 영화에서 엑스트라이길 바랐지만, 장례식에서 그 검은 터틀넥 스웨터를 입으면 적어도 나를 쳐다보는 이들에게 이 심연이 내뿜는 불가사의한 기운이 전달될 것 같았다' 등등.. 그러나 이상한 것은 이렇게 구체적으로 표현된 문장들을 그러 모아도 헬렌이라는 한 인물의 정체성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녀는 구체적인 것, 틀림없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녀는 불확실하거나 모호한 것에 가까워 보였다. 그녀는 자신이 아주 행복했고, 줄곧 그래왔다고 말하고 있지만 양어머니는 유년기 내내 넌 왜 행복하지 않느냐고, 어째서 그토록 자신을 혐오하는 거냐고 물었다. 그녀는 스스로를 폭력적이고 분노로 가득 찼으며, 매일매일 평온을 위협하는 존재였다고 말하지만, 평정심을 가지려고, 끊임없이 평온을 원하는 것처럼 보인다. 누군가에게 사과할 때도 '내가 당신의 평온을 깼다면 미안해요'라고 말을 하는 것도 좀처럼 평범해 보이지는 않았다. 이렇게 파악하기 어려운 캐릭터는 처음이라, 그다지 두툼한 두께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읽는 데 상당한 시간을 소요해야 했다. 그리고 그 부분이 바로 이 작품만의 독특한 매력이자, 이야기에 밀도를 높여주는 요인이기도 했다.

 

이 작품은 작가인 패티 유미 코트렐의 자전적인 이야기에서 출발했다. 그녀 역시 극중 인물들처럼 한국에서 태어나 미국 중서부로 입양되었고, 함께 양부모에게 입양된 생물학적으로 관련이 없는 남동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동생의 사망 소식을 들었을 때는 가장 지쳐 있던 시기였지만, 그녀는 교사로 일하며 짬짬이 글을 썼고, 이 소설을 완성해냈다. 스스로는 이 소설이 자신의 회고록은 아니며, 대단히 사적이지만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염두에 두고 쓴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지만 말이다. 그녀는 이 작품으로 독립출판물이 받을 수 있는 거의 모든 상을 휩쓸며 영미권에서 가장 주목 받는 젊은 작가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우리는 어떻게 자신을 견디며 살아가는 걸까. 삶에 대해서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어 준 소설이었다. 매우 독창적이고 색다른 방식으로 쓰여진 이야기라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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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름이 습관이 되기 전에 - 자꾸 미루는 버릇을 이기는 7단계 훈련법
스티브 스콧 지음, 신예경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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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여러분의 할 일들을 언제나 방해한다는 생각이 든 적 있나요? 갑작스럽게 맞닥뜨리는 이런저런 문제들 탓에 인생은 끝없는 도전의 연속이란 생각도 듭니다. 재정적인 문제를 겨우 막아 내고 나면 인간관계 문제가 삐걱거리고, 삶이 좀 안정됐나 싶을 때 어김없이 건강에 이상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러다보면 누구나 한 번쯤 극심한 번아웃 상태에 빠집니다. 이런 상태는 도저히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고 할 수도 없는 무기력감을 동반합니다. 순식간에 방전되고 마는 것이죠.    p.28

 

누구나 당장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일을 뒤로 미루거나, 시간을 질질 끄는 행동을 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러다 보면 정작 중요한 것을 놓쳐 버리거나, 언제나 막판에 가서야 급하게 일을 처리하느라 정신이 없을 것이다. 사실 미루는 버릇은 사소한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미루는 버릇이 지속적으로 계속될 경우 삶에 아주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게으름을 떨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이며, 미루는 버릇을 고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책의 저자인 스티브 스콧은 작심삼일의 악순환을 단칼에 끊기 위해선 ‘결심’이 아니라 ‘습관’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습관에 관한 수많은 연구와 실험 결과를 공유하며, 전 세계 수많은 이들의 삶을 변화시킨 ‘습관 전문가’인 그가 제시하는 7단계 훈련법은 이렇다. 

 

1단계_ 일단 크고 작은 할 일들을 모두 적어 펼쳐 본다.
2단계_ 25-5 법칙에 맞춰 가장 중요한 딱 다섯 가지 일만 뽑는다.
3단계_ 3개월씩 스마트 목표를 세운다.
4단계_ 미루기 싫다면, 정중히 거절한다.
5단계_ 주간 계획표를 만들고 수시로 점검해 한 몸이 된다.
6단계_ 매일 실천하는 열네 가지 습관으로 게으름이 파고들 틈을 메운다.
7단계_ 미루는 버릇을 완전히 고치는 데 활용할 수 있는 단계별 계획을 완수한다.

 

 

지금껏 누누이 이야기했듯이, 사람들이 일을 미루는 이유 중 하나는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사실이 부담스럽기 때문입니다. 정신적 또는 육체적으로 자기 자신을 몰아붙여야 하므로, 그 일을 계속 미루고 즉각적인 만족감으로 도파민을 분출시키는 다른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힘겨운 업무를 시작하는 게 버거울 때가 많다면, 이 상황을 얼른 해결해야 합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작은 습관'을 만드는 것입니다....작은 습관이 효과를 거두는 이유는 동기 부여를 할 필요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p.204~205

 

새해가 시작된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1월의 마지막 날을 하루 앞두고 있다. 어느새 한 달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린 것이다. 우리가 계획을 세우고 지키든, 혹은 계획도 없이 막 살든, 또는 늘 목표만 세우고 실패하든 간에 시간은 변함없이 흘러간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 책을 읽는 시점에, 더 이상은 앞으로의 습관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는 것 아닐까. 올해 안에 달성하고 싶은 목표와 현재 몰두하는 일이 뭐가 있는지 모두 적어 보고, 앞으로의 1년 계획을 세워 보자. 이제 겨우 열두 달 중에 겨우 한 달이 지났을 뿐이니, 아직은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훨씬 많다. 목표를 세웠다면, 우선 단기 계획에서 출발해야 한다. 3개월의 목표는, 다시 주간 계획표로 만들고, 매일 실천하는 습관을 들이는 거다. 게으름이 파고들 틈이 없도록 만드는 견고한 시스템의 중추는 바로 '습관'이다. 특별한 동기 없이도, 거창한 노력 없이도 꾸준히 지속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습관의 힘이니 말이다. 매일의 습관이 쌓여 패턴화될 때, 자신을 변화시키는 시스템이 만들어질 테니 말이다.

 

올해에는 '나중에 해야지'로 시작되는 작심삼일에서 탈피해서 미루는 버릇을 완전히 없애 보자. 책 구매 시 초판 한정으로 90일 습관 플래너도 받을 수 있으니 '제때 하는 습관'을 익히고 실천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 작은 플래너에는 책 속의 내용이 간략하게 정리되어 있고, 각 단계별로 직접 연습해볼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게으름이 습관이 되기 전에>의 실전편인 셈이다. 그리고 주간계획표 란이 공란으로 비워져 있고, 작성 예시까지 나와있어 지금이라도 바로 책을 읽은 내용을 토대로 연습해볼 수 있다. '나중에 해야지' 하고서 진짜 했던 적이 있는지 잘 생각해봐야 한다. 이제는 '결심' 말고 '습관'을 해야 할 때다. 이 책을 통해 게으름 피우는 습관과는 완전히 결별할 수 있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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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이 깊은 바다
파비오 제노베시 지음, 최정윤 옮김 / 현대문학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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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을 심사숙고해서 계획을 세우고 모든 과정을 신중히 따져 보지만, 인생은 그저 내키는 대로 눈사태처럼 한꺼번에 쏟아져 어지러운 운명의 밑바닥으로 우리를 내동댕이친다. 이런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지만 모른 척하고 매일 아침 일어나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진지하게 다시 하던 일을 한다. 그 모습은 마치 세상에서 가장 꼴불견처럼 보이는 자신만만하고 확신에 찬 표정으로 지휘봉과 악보, 악보 받침대를 손에 들고 우아하게 무대에 오르는 오케스트라 지휘자 같다.    p.122

 

여섯 살 파비오는 학교에 간 첫날, 정확히는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알게 된다. 세상에는 내 또래의 아이들이 많다는 것과 이 아이들에게는 기껏해야 서너 명밖에 없는 할아버지가 자신에게는 열 명이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파비오는 아이들이 알고 있는 숨바꼭질이나 사방치기, 깃발 잡기 등의 놀이를 전혀 알지 못했고, 아이들은 파비오가 말하는 잉어 낚시나 꿩에 대해서 몰랐다. 그도 그럴 것이 파비오는 그 동안 열 명이나 되는 할아버지들과 함께 사냥이나 낚시 등을 하며 자랐기 때문이다. 그런 파비오에게 학교생활은 정말로 아주 멀고 불가사의한 우주에 온 듯 낯설기만 했고, 반 친구들은 꼬마 외계인처럼 느껴졌다.

 

파비오의 외할아버지에게는 결혼은 고사하고 여자와 손 한번 잡아 보지 못한 노총각 형제들이 많았다. 이런 대가족에서 태어난 아이가 딱 한 명이었기에, 파비오는 그들 모두의 손자이기도 했다. 오죽하면 월요일은 알도 할아버지와 낚시, 화요일은 아토스 할아버지와 사냥, 수요일은 아델모 할아버지와 아이스크림 먹기, 목요일은 아마리스 할아버지와 새 찾으러 가기 등으로 누가 파비오와 놀아줄지 정해놓았을 정도로 할아버지들은 하나뿐인 손자를 사랑했다. 하지만 그러던 어느 날, 알도 삼촌이 학교에서 쓸모 없는 것만 가리킨다며 교실로 쳐들어와 닭장 만드는 법을 가르치고 간 날, 파비오는 만치니 집안 남자들에게 걸린 저주에 대해 알게 된다. 바로 마흔 살이 되기 전까지 결혼하지 않으면 미치광이가 된다는 것이다. 집안의 괴짜 할아버지들은 모두 그 저주에 걸렸으니, 그들의 유일한 손자인 파비오 역시 저주에 걸릴 확률이 높았다. 과연 남들과 너무도 다른 파비오가 그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앞으로 어떤 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그건 나도, 그 누구도 모르는 것이지만 우리가 과거에 한 일은 알고 있다. 매일매일 우리가 해온 일, 우리가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지에 대한 위대한 이야기는 알고 있다. 우리는 매일 아침 일어나서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며, 우리의 이야기는 이런 짧고 바보 같은 발걸음을 거대한 것으로 전환시켜주는 마법이자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다. 어디로 가는지 분명치 않지만 일단은 나아간다. 이 마법은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를 뒤에서 밀어주고 있다.     p.432~433

 

이 작품은 2018년 이탈리아 비아레조상 수상작으로 열 명의 괴짜 할아버지가 있는 특이한 대가족에서 자란 소년 파비오가 여섯 살을 맞아 학교에 입학한 첫날부터 열세 살 사춘기에 접어들 무렵까지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토스카나주의 작은 해안 지방인 베르실리아를 배경으로, 이탈리아 바닷가의 정취와 아름다운 자연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소년의 이야기는 가족 드라마로, 성장 소설로, 그리고 한 편의 동화처럼 읽힌다. 항상 유쾌하고 소란스러운 할아버지들 마음에 남아 있는 전쟁의 비극과, 말수 없는 아버지가 폭풍처럼 쏟아내는 어린 시절의 이야기들, 그리고 나이 지긋한 할머니가 간직한 돌아가신 할아버지와의 로맨스들은 80년대의 추억과 시대의 아픔들을 뭉클하게 보여주고 있다. 천하무적 괴짜 대가족 속에서 좌충우돌 펼쳐지는 에피소드들을 순수한 소년의 목소리로 들려주어 더욱 파란만장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여덟 살이 된 파비오가 발이 닿지 않는 깊은 곳에서 하는 진짜 수영을 할 줄 몰라, 아빠에게 배우는 장면이 있다. 물에 닿으면 끝없이 깊은 어두운 바닷속으로 가라앉는 것 같은 느낌, 아무것도 없는데 발로 버둥거리며 디딜 곳을 찾고 가라앉으며 바닷물을 들이마시는 느낌은 끔찍했지만, 그러다 어느 순간 몸이 떠올라 숨이 쉬어진다. 파비오의 발 아래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아래로 가라앉지 않았고, 머리가 물 밖으로 나와 있고 몸은 발버둥치며 떠 있고, 그제야 어느 때보다 생기 넘치게 자신을 붙잡고 있는 삶이 보였다. 아마도 어린 소년이 험난한 세상에 첫발을 내딛는 기분도 이와 비슷할 것이다. 발이 닿지 않는 깊은 바다를 만나는 것 같은 기분이 들 테니 말이다. 하지만 파비오는 깨닫는다. '아무도 당신의 물고기를 잡아가지 않는다. 이상하게 헤엄치고 마구잡이로 헤엄쳐도 결국은 당신에게로 온다.'라고. 그리고 차츰 알게 된다. 세상 사람들 눈에는 그저 어수선하고 소란스럽기 그지없고 미치광이들처럼 보이더라도, 우리 가족은 멋지고 놀라운 것들이 넘치는 사랑스럽고 소중한 존재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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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king Marks 건축가의 스케치북
Will Jones 지음, 박정연 옮김 / 영진.com(영진닷컴)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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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책의 페이지에 활자로 적힌 정보 이외에도 책의 무게나 종이의 질감과 두께감, 빛이 반사되는 방식, 심지어 책의 냄새까지 느낄 수 있다. 디지털 장치를 통해 경험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빠르고 즉각적으로 촉감을 느낄 수 있다. 이것이 물리적 영역의 상호작용이 중요한 이유이며, 왜 우리가 디지털적인 삶에 완전히 빠지면 안 되는지에 대한 이유이다.    p.11

 

제목 그대로 건축가들의 스케치를 모아 놓은 책이다. 무려 60인 건축가들이 작업한 900여 장의 일러스트가 수록되어 있어 물리적으로도 묵직하고, 퀄리티가 뛰어나 소장가치도 있는 책이다. 연필, 펜과 잉크, 수채화, 색연필 등으로 그려진 다양한 스케치들은 건축에 대해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사람도 감탄하며 볼 수밖에 없을 정도로 매혹적이다.

 

 

이 책에 수록된 60인의 건축가들은 건축계의 떠오르는 스타부터 이미 명성이 자자한 건축가들까지 총 망라되어 있다. 스케치뿐만 아니라 핸드 스케치에 대한 인터뷰가 함께 수록되어 있어 더욱 흥미롭게 그들의 도면과 형태의 표현에 대해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지금은 펜과 연필과 슬라이드를 잘 다루는 실무자를, 컴퓨터를 잘 다루는 3D 시각화 전문가로 대체할 수 있는 세상이다. 과거에는 새로운 건물을 위한 설계의 모든 선이 그것을 손으로 그리는 한 개인으로부터 쏟아져 나왔지만, 이제는 대부분의 평면, 입면 및 단면이 플라스틱 마우스 부대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 책은 그러한 디지털 표현 방식보다 스케치가 직관적인 실제 형태의 아이디어를 표현할 수 있다고 믿는 건축가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건축가들은 스케치가 자신의 아이디어를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 생각하고, 아이디어를 머릿속에서 종이로 꺼내놓는 가장 직접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에 수록된 스케치들을 보다 보면 왜 이러한 것들이 3D 렌더링 된 조감도보다 훨씬 흥미로운지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스케치가 건축가들의 감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건축가들의 스케치가 모두 제각각이며, 각자의 개성을 표현 방식에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다. 똑같은 방식이 하나도 없는 것처럼 보였으니 말이다. 아마도 같은 건축물을 함께 그리게 하더라도, 건축가에 따라 완전히 다른 스케치들이 그려질 것이다.

 

 

"건물은 평면적, 단면적, 3차원적으로 거의 동시에, 그리고 각각이 서로 다른 도면에 영향을 주도록 설계할 필요가 있다. 건물을 만드는 것은 퍼즐을 푸는 것과 같으며, 스케치는 그 과정의 초기에 이뤄지는 일부분이다. 아이디어가 형성될 때 스케치의 직관적인 아이디어는 완벽하지만, 더 발전시킬 필요가 있을 때는 스케치 형태로 개발한 아이디어를 디지털 방식으로 탐색해가며 미세하게 조정할 수 있다."     p.207

 

손으로 그리는 드로잉은 설계 과정 내내 사용하는 언어라서 의사 소통할 때 유용하게 쓰인다고 말하는 건축가도 있었고, 스케치를 설계 과정에서 일반적 개념을 추출하고 디자인의 디테일을 만드는 용도로 활용한다고 말하는 건축가도 있었다. 스케치 또는 드로잉의 과정은 그 자체로 예술적인 과정이며, 마음속의 생각을 제3자에게 직접 전달할 수 있게 해준다고 말하는 건축가도 있었다.

 

 

세계 각국의 다양한 건축물들을 스케치를 통해서 구경하는 재미도 있다. 각각의 건축가들이 진행했던 주요 프로젝트의 성격이 다르고, 스케치 작업을 하는 방식 또한 각양각색이라 더욱 흥미롭다. 이 책 자체도 커다란 스케치북 사이즈라서 펼쳐놓고 보기에 딱 좋다.

 

어떤 건축가는 스케치와 도면이 함께 있는 경우도 있었다. 스케치를 바탕으로 도면을 그린 다음 또 스케치를 하는데, 종종 도면 위에 그리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설계와 재설계를 되풀이할 수 있다고 하는데, 건축가의 손과 연필이 마음과 이어져 있는 방식이 스케치로 차곡차곡 표현되어 있어 인상적이었다.

 

 

건축과는 전혀 상관없는 전공을 했고, 일을 했던 비전문가 독자인 내가 읽기에도 이렇게 흥미진진한데, 건축학과 학생들이나 실무자들에게는 이 책이 얼마나 도움이 될지 예상할 수 있었다. 건축스케치를 공부할 때 참고 자료로도 매우 훌륭할 것 같고, 그저 건축에 관심이 많아 취미로 보기에도 굉장히 소장가치가 있는 책이 될 것 같다.

 

이 책에 수록된 스케치와 드로잉을 통해 보여지는 빛나는 아이디어들을 구경하는 재미도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건축의 세계가 얼마나 놀랍고, 아름다운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건축과 인테리어에 관심이 있다면, 그리고 언젠가 건축 관련 일을 할 예정이거나 현재 공부 중이라면 이 책을 만나보길 추천한다. 소장가치 100프로의 아주 굉장한 자료가 되어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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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리 세계사 - 세상을 뒤흔든 역사 속 28가지 스캔들 현대지성 테마 세계사 3
그레이엄 도널드 지음, 이영진 옮김 / 현대지성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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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 다르크의 전체 전설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자기 이름을 겨우 쓸 정도로 문맹인 16세 시골 소녀가 시농성으로 말을 몰고 가서, 그녀를 시험하기 위해 신하들 사이에 숨어 있던 샤를 황태자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찾아내고, 자신이 두 성녀의 ‘목소리’를 들었으며 그들로부터 몇 가지 예언을 받았다고 얘기한 뒤, 전투 사령관이 되어 유유히 걸어 나오는 이야기를 믿어야만 한다. 황태자가 어수룩해서 그녀에게 군대를 내주었다고 해도, 전투 경험이 많은 군대들이 그녀의 깃발 아래 배속되어 전술과 무기도 모르는 그녀를 순순히 따랐다고 믿는 것이 현실적일까?     p.17

 

프랑스와 잉글랜드 사이에서 벌어진 백년전쟁의 후기에, 프랑스를 구원한 소녀 잔 다르크가 사실은 프랑스인들이 지어낸 국민 영웅이라면 어떨까. 신의 계시를 받고 온 소녀, 마녀로 몰려 꽃다운 나이에 화형 당한 비극의 아이콘, 오늘날까지 그 죽음의 비장미와 함께 세상을 바꾼 강인한 여성의 대명사로 불리는 여성 영웅인데 말이다. 이 책에 따르면 잔다르크는 실제로 프랑스인이 아니었고, 군대를 지휘하거나 전투에 출정한 적도 없으며, 마녀사냥으로 처형된 적도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그런 그릇된 사실들이 모여 이 우상적 인물을 창조하게 된 걸까?

 

이 책은 이렇게 우리가 숱하게 영화와 책으로 만나왔던 프랑스의 애국 소녀 잔 다르크 이야기의 진위성에 대한 숱한 의혹을 파헤치는 것으로 충격적인 포문을 연다. 검정색 도복을 입고 살금살금 다니는 치명적인 암살자 닌자가 사실은 보통 중년의 여성이었고, 대부분의 시간을 가사일로 보냈다면 어떨까. 하얀 얼굴에 매우 세련된 의상을 차려 입은 고수입 성 노예로 알고 있는 게이샤는 원래 모두 남성들이었으며, 성매매에 결코 관련된 적이 없었다면 어떨까. 클레오파트라 7세가 독사에 물려 죽은 것이 아니라면? 이집트 기자에 위치한 피라미드는 이집트인이 지었을까, 유대인이 지었을까? 세상을 뒤흔든 역사 속 중요한 사건과 인물에 얽힌 미스터리를 다루고 있는 이 책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던 이야기 중 많은 것이 실은 허위와 날조 위에 세워져 있다고 말하고 있다.

 

 

영국 범죄사에서 의사 홀리 하비 크리펜이 계속 명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 잭 더 리퍼 바로 다음으로 - 정말 미스터리이다. 그가 죽인 사람은 기껏해야 겨우 한 명이고, 그의 시대에는 현대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을 뿐 더욱 왕성한 살인자들이 존재했는데 말이다. 더구나 런던 홀로웨이 지구의 힐드롭 크레센트 39번지에 있는 그의 집 지하실에서 발견된 유골은 사실 그의 아내의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아내 살인죄로 1910년에 교수형에 처해졌다.    p.162

 

우리는 역사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그리고 우리가 안다고 믿고 있는 역사 중 사실 그대로의 진실을 전하는 것은 얼마나 될까. 역사는 언제나 승리하는 사람들의 것이었고, 그것을 기록한 자의 시각을 벗어나지 못했다. 옛 역사가들은 후원자의 입맛에 맞게 역사를 은폐하고 윤색시켰으니, 수많은 오해와 의도된 날조로 만들어졌다. 이 책의 저자는 이렇게 의도적으로 날조된 이야기부터 가짜 모험담, 추악한 살인 사건의 진상까지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을 한데 엮어 흥미진진하게 풀어내고 있다. 그리고 당시 과학기술로는 밝혀내지 못했던 미스터리가 현대에 와서 하나 둘씩 그 비밀이 드러나는 경우들도 함께 담고 있어,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역사의 숨겨진 진실을 만나게 해준다. 덕분에 우리는 교과서에서 만났던 딱딱하고 지루했던 역사가 아니라, 충격과 반전으로 버무려진 진짜 역사의 민낯을 경험하게 된다.

 

역사에 절대적 진리란 없다는 점이, 그래서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는 점이 무엇보다 가장 큰 매력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우리가 여전히 지나간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파헤치는 것일테고 말이다. 게다가 새로운 기록이 발견되거나 과학 기술이 발달하면서 이전에 진실이라 믿었던 것들이 뒤집히기도 하고, 이전에는 옳다고 여겨졌던 신념이 고루한 것으로 치부되기도 하는 반전이야말로 역사가 가진 미스터리일 것이다.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역사 속 28가지 미스터리의 진실을 만나면서, 충격적인 사실에서 놀라는 것이 그치지 않고 누가, 왜 그런 역사를 전했는지를 살펴보게 된다면 역사를 조금 더 깊이 있게 이해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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