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당신의 평온을 깼다면
패티 유미 코트렐 지음, 이원경 옮김 / 비채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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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스스로 목숨을 끊을 때는 아주 이상하고 심각한 상황이기 마련이므로 어떤 연유였는지 반드시 알아봐야 한다. 엄격하고 적절한 형이상학적 조사가 이뤄져야만 한다. 어쩌면 내 동생의 죽음을 조사함으로써 내 삶에 다시 활기가 생길 수도 있고, 최종적으로 알아낸 사실들을 양부모에게 알리면 그들의 삶도 안정되고 강해질지 모른다. 나는 내 생각이 합리적이고 의미 있다고 느꼈다. 나는 더 살기를 바라지 않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태도라고 혼잣말을 했다.    p.13

 

헬렌은 어느 날, 남동생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스물아홉인 남동생은 헬렌과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미국으로 입양된 입양아였다. 그들은 생물학적으로 다른 두 집안에서 따로따로 입양되었고, 그들의 양부모는 부유한 편이지만 지나칠 정도로 절약에 집착하는 구두쇠였다. 헬렌은 뉴욕에서 방과 후 학교에서 ‘문제아’로 불리는 학생들을 지도하는 일을 하며 악착같이 사는 동안 집에는 수년간 한 번도 발을 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동생의 사망 소식을 듣고는 뉴욕을 떠나 어린 시절의 집으로 향한다. 동생의 자살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을 것이고, 동생의 삶이 있던 그곳에 여기저기 단서와 실마리가 감춰져 있을 테니 말이다.

 

인간이 스스로 목숨을 끊을 때는 아주 이상하고 심각한 상황이기 마련이고, 가족 입장에서 그러한 죽음이 일어난 사정과 배경을 이해하고 싶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이들 가족은 뭔가 이상하다. 몇 년 만에 만난 양부모는 딸의 등장을 그다지 반가워하지 않고 오히려 당황한 눈치였으며, 헬렌은 그런 반응에 조금 상처를 받았다고 하지만 실제 행동은 전혀 개의치 않는 것처럼 보였으니 말이다. 양부모와의 서먹한 관계에도 굴하지 않고 헬렌은 동생의 삶을 추적하고 재구성하기 시작한다. 동생을 아는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고 동생의 방에서 잠을 자며, 그녀가 알게 되는 진실의 끝은 무엇일까.

 

 

복잡한 상황을 단순하게 정리하면 훨씬 수월해지는 법. 나는 그런 방식을 좋아했다. 단순성을 좋아했다. 빈틈없고 끝없는 단순성! 시간을 초월한 아름다움! 나는 동생이 세운 자살 계획의 조각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사진 열 장을 더 살펴보았다. 모든 사진 속에서 녀석은 오만상을 찌푸리거나 흐리멍덩한 표정이었다. 내 동생은 얌전한 사람이었다. 폭력을 쓴 적이 한 번도 없고, 늘 유순해 보였다. 반면, 나는 폭력적이고 분노로 가득 찼으며, 매일매일 평온을 위협하는 존재였다.     p.96~97

 

대단히 이상하지만 매혹적인 작품이었다. 일인칭 화자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이야기에서 화자의 시선이 불안정하거나, 믿을 수 없을 경우 독자 입장에서 따라가기가 굉장히 어려울 수밖에 없다. 이야기는 시종일관 동생의 죽음을 겪게 된 서른두 살 헬렌의 시선으로 진행된다. 5년을 떠나 있다가 집으로 돌아온 그녀와 양부모의 관계도 이상하고, 헬렌이 동생의 죽음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하게 되는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가 전부 정상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점이었다. 좀처럼 화자의 시선이나 감정을 이해하거나 공감하기 어려웠으니 말이다. 직장의 규율을 어기고, 실수를 연발하고, 아무 데서나 토하고, 분노를 못 참으며 불안한 말과 행동을 하던 사람에게 감정 이입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녀의 성격이나 성향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은 숱하게 많았다. 예를 들면 이런 문장들이다. '나는 늘 상대가 하기 싫어하는 일을 억지로 하게 만들었다', '나는 늘 윤리적 행위에 관심이 많았다', '나는 경쟁심이 충만했다. 나는 늘 극도의 질투를 경험했으며, 그것은 평온을 파괴하는 질투였다', '원래 나는 늘 뒤에 있는 걸 좋아했고, 내 삶의 영화에서 엑스트라이길 바랐지만, 장례식에서 그 검은 터틀넥 스웨터를 입으면 적어도 나를 쳐다보는 이들에게 이 심연이 내뿜는 불가사의한 기운이 전달될 것 같았다' 등등.. 그러나 이상한 것은 이렇게 구체적으로 표현된 문장들을 그러 모아도 헬렌이라는 한 인물의 정체성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녀는 구체적인 것, 틀림없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녀는 불확실하거나 모호한 것에 가까워 보였다. 그녀는 자신이 아주 행복했고, 줄곧 그래왔다고 말하고 있지만 양어머니는 유년기 내내 넌 왜 행복하지 않느냐고, 어째서 그토록 자신을 혐오하는 거냐고 물었다. 그녀는 스스로를 폭력적이고 분노로 가득 찼으며, 매일매일 평온을 위협하는 존재였다고 말하지만, 평정심을 가지려고, 끊임없이 평온을 원하는 것처럼 보인다. 누군가에게 사과할 때도 '내가 당신의 평온을 깼다면 미안해요'라고 말을 하는 것도 좀처럼 평범해 보이지는 않았다. 이렇게 파악하기 어려운 캐릭터는 처음이라, 그다지 두툼한 두께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읽는 데 상당한 시간을 소요해야 했다. 그리고 그 부분이 바로 이 작품만의 독특한 매력이자, 이야기에 밀도를 높여주는 요인이기도 했다.

 

이 작품은 작가인 패티 유미 코트렐의 자전적인 이야기에서 출발했다. 그녀 역시 극중 인물들처럼 한국에서 태어나 미국 중서부로 입양되었고, 함께 양부모에게 입양된 생물학적으로 관련이 없는 남동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동생의 사망 소식을 들었을 때는 가장 지쳐 있던 시기였지만, 그녀는 교사로 일하며 짬짬이 글을 썼고, 이 소설을 완성해냈다. 스스로는 이 소설이 자신의 회고록은 아니며, 대단히 사적이지만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염두에 두고 쓴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지만 말이다. 그녀는 이 작품으로 독립출판물이 받을 수 있는 거의 모든 상을 휩쓸며 영미권에서 가장 주목 받는 젊은 작가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우리는 어떻게 자신을 견디며 살아가는 걸까. 삶에 대해서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어 준 소설이었다. 매우 독창적이고 색다른 방식으로 쓰여진 이야기라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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