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이 깊은 바다
파비오 제노베시 지음, 최정윤 옮김 / 현대문학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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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을 심사숙고해서 계획을 세우고 모든 과정을 신중히 따져 보지만, 인생은 그저 내키는 대로 눈사태처럼 한꺼번에 쏟아져 어지러운 운명의 밑바닥으로 우리를 내동댕이친다. 이런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지만 모른 척하고 매일 아침 일어나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진지하게 다시 하던 일을 한다. 그 모습은 마치 세상에서 가장 꼴불견처럼 보이는 자신만만하고 확신에 찬 표정으로 지휘봉과 악보, 악보 받침대를 손에 들고 우아하게 무대에 오르는 오케스트라 지휘자 같다.    p.122

 

여섯 살 파비오는 학교에 간 첫날, 정확히는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알게 된다. 세상에는 내 또래의 아이들이 많다는 것과 이 아이들에게는 기껏해야 서너 명밖에 없는 할아버지가 자신에게는 열 명이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파비오는 아이들이 알고 있는 숨바꼭질이나 사방치기, 깃발 잡기 등의 놀이를 전혀 알지 못했고, 아이들은 파비오가 말하는 잉어 낚시나 꿩에 대해서 몰랐다. 그도 그럴 것이 파비오는 그 동안 열 명이나 되는 할아버지들과 함께 사냥이나 낚시 등을 하며 자랐기 때문이다. 그런 파비오에게 학교생활은 정말로 아주 멀고 불가사의한 우주에 온 듯 낯설기만 했고, 반 친구들은 꼬마 외계인처럼 느껴졌다.

 

파비오의 외할아버지에게는 결혼은 고사하고 여자와 손 한번 잡아 보지 못한 노총각 형제들이 많았다. 이런 대가족에서 태어난 아이가 딱 한 명이었기에, 파비오는 그들 모두의 손자이기도 했다. 오죽하면 월요일은 알도 할아버지와 낚시, 화요일은 아토스 할아버지와 사냥, 수요일은 아델모 할아버지와 아이스크림 먹기, 목요일은 아마리스 할아버지와 새 찾으러 가기 등으로 누가 파비오와 놀아줄지 정해놓았을 정도로 할아버지들은 하나뿐인 손자를 사랑했다. 하지만 그러던 어느 날, 알도 삼촌이 학교에서 쓸모 없는 것만 가리킨다며 교실로 쳐들어와 닭장 만드는 법을 가르치고 간 날, 파비오는 만치니 집안 남자들에게 걸린 저주에 대해 알게 된다. 바로 마흔 살이 되기 전까지 결혼하지 않으면 미치광이가 된다는 것이다. 집안의 괴짜 할아버지들은 모두 그 저주에 걸렸으니, 그들의 유일한 손자인 파비오 역시 저주에 걸릴 확률이 높았다. 과연 남들과 너무도 다른 파비오가 그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앞으로 어떤 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그건 나도, 그 누구도 모르는 것이지만 우리가 과거에 한 일은 알고 있다. 매일매일 우리가 해온 일, 우리가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지에 대한 위대한 이야기는 알고 있다. 우리는 매일 아침 일어나서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며, 우리의 이야기는 이런 짧고 바보 같은 발걸음을 거대한 것으로 전환시켜주는 마법이자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다. 어디로 가는지 분명치 않지만 일단은 나아간다. 이 마법은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를 뒤에서 밀어주고 있다.     p.432~433

 

이 작품은 2018년 이탈리아 비아레조상 수상작으로 열 명의 괴짜 할아버지가 있는 특이한 대가족에서 자란 소년 파비오가 여섯 살을 맞아 학교에 입학한 첫날부터 열세 살 사춘기에 접어들 무렵까지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토스카나주의 작은 해안 지방인 베르실리아를 배경으로, 이탈리아 바닷가의 정취와 아름다운 자연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소년의 이야기는 가족 드라마로, 성장 소설로, 그리고 한 편의 동화처럼 읽힌다. 항상 유쾌하고 소란스러운 할아버지들 마음에 남아 있는 전쟁의 비극과, 말수 없는 아버지가 폭풍처럼 쏟아내는 어린 시절의 이야기들, 그리고 나이 지긋한 할머니가 간직한 돌아가신 할아버지와의 로맨스들은 80년대의 추억과 시대의 아픔들을 뭉클하게 보여주고 있다. 천하무적 괴짜 대가족 속에서 좌충우돌 펼쳐지는 에피소드들을 순수한 소년의 목소리로 들려주어 더욱 파란만장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여덟 살이 된 파비오가 발이 닿지 않는 깊은 곳에서 하는 진짜 수영을 할 줄 몰라, 아빠에게 배우는 장면이 있다. 물에 닿으면 끝없이 깊은 어두운 바닷속으로 가라앉는 것 같은 느낌, 아무것도 없는데 발로 버둥거리며 디딜 곳을 찾고 가라앉으며 바닷물을 들이마시는 느낌은 끔찍했지만, 그러다 어느 순간 몸이 떠올라 숨이 쉬어진다. 파비오의 발 아래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아래로 가라앉지 않았고, 머리가 물 밖으로 나와 있고 몸은 발버둥치며 떠 있고, 그제야 어느 때보다 생기 넘치게 자신을 붙잡고 있는 삶이 보였다. 아마도 어린 소년이 험난한 세상에 첫발을 내딛는 기분도 이와 비슷할 것이다. 발이 닿지 않는 깊은 바다를 만나는 것 같은 기분이 들 테니 말이다. 하지만 파비오는 깨닫는다. '아무도 당신의 물고기를 잡아가지 않는다. 이상하게 헤엄치고 마구잡이로 헤엄쳐도 결국은 당신에게로 온다.'라고. 그리고 차츰 알게 된다. 세상 사람들 눈에는 그저 어수선하고 소란스럽기 그지없고 미치광이들처럼 보이더라도, 우리 가족은 멋지고 놀라운 것들이 넘치는 사랑스럽고 소중한 존재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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