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흉기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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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봐, 농담하지 마. 그럼 그게 여자가 한 짓이라는 거야? 여자가 경찰 목을 졸라 죽였다고?"

준야는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두 손을 들었다. 그러나 쇼코는 진지한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보통 여자가 아냐. 어릴 때부터 센도 밑에서 자랐어. 물론 평범하게 키우진 않았겠지. 너희들이 상상도 못 할 일이 그 아이에게 행해졌을 거야."

한밤중, 호숫가의 별장에 전직 국가대표였던 이들 네 명이 몰래 숨어 든다. 허들 육상선수였던 유스케, 체조선수였던 쇼코, 단거리 육상선수였던 준야, 역도 일본 챔피언인 다쿠마까지. 이들은 별장의 주인인 스포츠 닥터 센도가 가지고 있던 자료를 찾으려 하지만 우발적으로 센도를 살해하고 만다. 그들은 살인의 흔적과 함께 찾지 못한 자료도 없애기 위해 저택 전체를 태워버리자고 방화를 하고, 그 모든 것을 브라운관을 통해 지켜보고 있는 한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남자 셋, 여자 하나로 이루어진 침입자들의 얼굴을 바라본다.

이 자들이 그를 죽였다.... 죽이고, 불태웠다.

 

처음에는 단순한 절도범의 소행처럼 보였던 화재 사건은, 별장 뒤 편에 잠겨 있던 창고에서 경찰관이 살해당하면서 살인 사건으로 대대적인 수사가 시작된다. 체조용 매트와 바벨, 트레이닝 머신 들이 놓여 있어 체육관처럼 보이는 의문의 창고에는 누군가 살고 있던 흔적이 있었고, 그곳에서 사라진 것은 바로 센도가 비밀리에 키우던 강력한 헵태슬론 선수였다. 육상 7종 경기에 능숙한 신체로 실험을 통해 극한의 능력을 끌어올려 만들어진 괴물 같은 여자, 타란툴라. 이야기는 센도의 복수를 하기 위해 타란툴라가 네 명의 범인들을 쫓는 여정으로 이어진다.

 

그 남자가 말한 대로 하면서 실제로 오랜 염원을 이룰 수 있었다. 신기록, 일본 대표, 국제무대 등등……. 덕분에 준야는 명예와 안정된 생활을 손에 넣었다.

하지만 나는 도대체 무엇을 위해 달렸던 걸까. 준야는 생각했다.

자신의 능력을 시험하기 위해서? 그게 자신의 능력이었을까? 아니면 이기기 위해? 누가 누구를 이기기 위해……. 나는 이길 수 없었다. 아니, 어쩌면 달리지도 못했던 것인지 모른다.

타란툴라가 지나간 현장에서 발견된 흔적들이란 도저히 보통 인간의 힘으로 죽였다고는 할 수 없을 정도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하물며 여자가 한 짓이라는 걸 상상하기엔 어려울 정도로 엄청난 괴력을 보여주는 모습에, 네 명의 스타 스포츠 선수들은 자신들을 향해 점점 포위망을 좁혀 오는 그녀에 대해 공포를 느낀다. 마치 할리우드 액션 영화를 보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너무도 거침없이 사람을 죽이고, 괴력을 휘두르는 타란툴라의 모습은 센도가 남몰래 키워온 거구의 인간 병기를 마치 사이보그처럼 보이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니까, 세상에 적수가 없는, 천하 무적의 그것처럼 보였으니 말이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이 작품에서 운동선수들이 성적을 높이기 위해 자행하는 도핑을 주 소재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처음부터 범인을 밝혀 놓고 시작한 스토리인데다, 그 범인을 찾아 복수하려는 인물 또한 명백하게 보여주고 진행되고 있어 미스터리 보다는 서스펜스에 가까운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그야말로 '피도 눈물도 없는' 타란툴라의 복수의 여정 뒤에 함께 하는 것은 바로 과거 센도와 스포츠 선수들이 저질렀던 도핑과 관계된 배경이다. 센도는 단순한 도핑을 넘어서 나치의 인체 실험에 관한 자료를 바탕으로 인간의 육체를 개조하는 연구를 해왔던 걸로 보인다. 특히나 여자가 임신을 하면 근력을 증강시키는 물질이 평소보다 몇 배 더 분비되는 걸 알아내, 여자 선수를 일부러 임신시켜 근육이 붙기 쉬운 상태로 만들어 트레이닝하고 일정 시기가 되면 중절을 시켰다는 무시무시한 연구를 해왔다. 혈액 도핑보다 더한 악마의 실험이 아닐 수 없다. 출간된 지 30여 년이 지난 히가시노 게이고 초기 작품이지만, 지금 읽어도 여전히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힘이 있는 작품이다. 이번에 리커버 개정판으로 새로운 표지로 다시 만나게 되었는데, 내용만큼이나 강렬한 표지 이미지가 인상적이다. 속도감 있는 추격전이 일품이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페이지를 넘기게 만드는 작품이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남겨주는 여운은 인간의 광기 어린 욕망이 불러온 비극 이면의 그것을 보여주고 있어 여운을 남겨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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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특별판)
모리미 토미히코 지음, 서혜영 옮김 / 작가정신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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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주위를 보면, 국면 타개를 위해 조바심 치며 먹구름에 싸인 성으로 돌격하다가, 결국은 옥쇄하고 마는 바보들이 일일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들은 분명 사랑스러운 남자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만용은 있어도 용기는 없는 남자들이다...우선은 그녀가 나라는 보기 드문 존재에 익숙해져야 한다. 본체 공략은 그 뒤다.

5월의 어느 날, 주인공는 대학 선배의 결혼을 축하하는 술자리에 참석했다가 테이블 구석에 앉아 있던 '그녀'를 보게 된다. 클럽 후배인 그녀에게 첫눈에 반했는데, 워낙 어수룩한 성격 탓에 아직 친근하게 말 한번 주고받지 못했던 거다. 술자리가 끝나고 2차에 합류하지 않는 그녀를 쫓아 어떻게든 말을 건넬 기회를 노리고 따라갔는데, 그만 골목에서 그녀를 놓치고 만다. 그렇게 그는 이야기의 무대에서 의도와 상관없이 퇴장하고, 그녀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녀는 술자리에서 선배들 틈에 편하게 술을 마실 수 없었던 터라, 조심할 것 없이 술을 마셔보고 싶어 아는 사람이 가르쳐준 바로 향한다. 거기서 처음 보는 중년 아저씨가 불쑥 말을 걸어와 이야기를 나누다 자리를 옮기게 되고, 그녀의 가슴을 만지려는데 누군가 나타나 그녀를 구해주게 된다. 그렇게 키고 크고 늠름한 여성 하누키 씨와 색 바랜 유카타를 입은 히구치 씨를 알게 되어 그들과 또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윤기 있는 검은 머리를 단정하게 자른 아담한 체구의 귀여운아가씨'는 너무도 순수하고 맑고 천진난만해 현실에서는 전혀 없을 것 같은 캐릭터이다. 그래서 더욱 그녀에 대한 망상 가득한 한 남자의 짝사랑이 그럴 듯해 보이기도 하고, 생판 처음 만나는 이들과 너무도 잘 어울리고, 그들을 아무런 의심 없이 믿는 모습 때문에 이어지는 황당한 에피소드들이 이상하지 않게 느껴지는 건지도 모르겠다. 두 번째 에피소드인 헌책시장에서 생긴 일들은 더 재미있는데, 악랄한 수집가를 응징하기 위해 온 헌책시장의 신은 정말 기발한 설정이 아니었나 싶다. 책과 수집가의 만남을 이루어지게 하기도 하지만 맘에 안 들면 무시무시한 벌도 내린다는 헌책시장의 신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진짜 모습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한다.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헌책시장의 신이 어떤 모습인지는 직접 읽어 보시길. 어린 시절 애지중지 읽고 또 읽던 동화책을 찾으려고 하는 아가씨와 그 책을 구하기 위해 자극적인 냄새가 나는 뜨겁고 매운 냄비요리를 먹는, 그야말로 목숨을 건 처절한 시합에 나서게 된 ''는 과연 어떻게 될까. 그 외에도 대학축제에서 광란의 무대에 서게 된 이야기, 감기의 신을 퇴치하기 위해 맹활약하는 아가씨의 에피소드 등 그녀와의 우연한 만남을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우습지만 안타까운 청년의 사연이 이어진다.

 

그때 내 뇌리에 떠오른 건 '또 어쩌다 지나가던 길이었어'라는 말 한마디뿐이었다.

“어차피 꿈이야하고 훼방 놓는 후진 사람은 개한테나 먹혀버려라. 꿈이든 현실이든 그건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내 재능의 보물 상자는 확실히 바닥을 드러낸 듯했다. 그러나 아직 나에게는 전무후무한 재능이 남아 있었다. 망상과 현실을 뒤죽박죽으로 섞어버리는 재능!

오래 전에 모리미 토미히코의 <유정천 가족>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를 너무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어딘가 유쾌하면서도 기묘한, 그리고 현실을 넘나드는 매혹적인 판타지와 특유의 이야기꾼다운 문체와 스토리가 인상적이었다. 이번에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가 극장판 애니메이션으로 개봉을 하게 되면서, 특별판이 출간되었다. 표지도 애니메이션 버전으로 바뀌었고, 영화 포스터와 프레스키트도 함께 받을 수 있는 기회이다. 게다가 영화를 일본의 천재 애니메이터 유아사 마사아키 감독이 만들었고, 애니메이션 작품상을 수상하고 세계 유수의 영화제에도 초청받는 등 호평을 받았다고 하니 영화도 기대가 된다. 사실 만화적인 상상력이 돋보이는 너무 귀여운 스토리의 이야기라, 십 년 전에 이 작품을 읽을 때도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져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던 터라 더 기대가 되기도 한다.

사실 스토리는 매우 단순하다. 술자리에서 우연히 만난 '검은 머리의 귀여운 후배 여학생을 짝사랑하는 어수룩한 선배 남학생의 고군 분투기'라는 한 줄로도 설명 가능한 이야기니 말이다. 하지만 상투적이고 평범한 설정으로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상상력을 기반으로 종횡무진 마구 달려간다. 그야말로 상큼하고, 유쾌하고, 포복절도에, 아스라한 향수까지 불러온다고나 할까. 그야말로 현실과 비현실을 넘나드는, 상상력을 넘어서 망상력을 보여주는 전무후무한 작품이다. 게다가 너무도 상큼발랄한 스토리라 요즘 같은 봄에 읽기에 딱 좋은 작품이기도 하다. 벚꽃 날리는 밤 거리를 설레는 누군가와 걷는 느낌이 드는 이야기라 싱숭생숭해지는 봄 날씨에 데이트하는 기분이 들테니 말이다. 옆구리 허전한 당신에게, 뭔가 설레는 일 없을까 하는 당신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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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런하우스 - 너에게 말하기
김정규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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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행동의 얼마나 많은 부분들이 사실 껍질에 불과한 것인지, 우리는 내면의 상처들을 만나고 아파하고 눈물을 흘리고 치유가 되기 전까지는 그것을 온전히 깨닫기 어렵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상처들을 억압하여 내면 깊숙이 가둔다. 그것들을 직면하는 것이 아프고 두렵기 때문이다. 상처들은 껍질 속에 갇힌 채 우리의 존재로부터 소외된다. 하지만 그것들은 결코 그냥 없어지지 않는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불쑥불쑥 고개를 내밀어 우리를 불안에 빠뜨리거나 공허와 외로움에 허우적거리게 만든다.

독일에 유학을 온 지 벌써 40년이 다 되어가는 영민은 그 동안 박사학위를 받고 전임강사 자리를 얻어 교수의 꿈을 키워나갔지만, 어렵사리 얻은 자리에 사직서를 던지고 베를린으로 훌쩍 떠나 왔다. 그렇게 베를린에서 연인 한나와 함께 베를린 부부 가족치료 연구소를 열어 심리치료를 하기 시작한 것이 벌써 17년 전의 일이었는데, 그 동안 자신의 삶의 전부라고 여겨왔던 연구소와 한나를 떠나 고국으로 돌아가기로 돌연 결정한다. 모든 것이 안정되어 자리를 잘 잡아가는 시점마다 알 수 없는 감정들이 불쑥불쑥 고개를 내밀었던 것이다.

 

그 즈음 영민은 우연히 한국심리학회 구인광고란을 보게 되었고 셰어하우스인 '뉴런하우스'에서 전문심리치료사를 구한다는 소식을 발견한다. 그곳의 이한빈 대표는 심리치료를 하는 셰어하우스를 구상하게 된 이유로, 오늘날 뿔뿔이 흩어져 각자도생하며 사는 도시의 삶이 우리를 병들게 하고 있다는 생각에 치료공동체를 구상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뉴런이라는 이름도 신경 세포처럼 각각 독립적이면서도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살아있는 생명체, 살아 있는 공동체를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지은 것이라고.

 

자신이 벽을 쌓고 있는 줄도 모르고 사는 사람들이 참 많다. 외롭다고 호소하는 사람, 모두가 자기를 싫어한다고 생각하는 사람, 아무도 믿을 수 없다고 의심하는 사람, 세상이 무서운 곳잉라고 말하는 사람, 차라리 혼자 사는 것이 편하다고 믿는 사람..... 모두 스스로 벽을 쌓고 있지 않은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뉴런하우스’라는 이름의 셰어하우스는 대학로 인근 평범한 주택으로, 방값이 저렴한 대신 두 가지 조건이 있다.

첫째, 반드시 주 2 '창문 닦기 대화모임'에 성실히 참여할 것.

둘째, 입주 기간 동안 일체 자살 관련 행동을 하지 않을 것.

 

신청자들 대상으로 설명회를 하고, 면접을 진행한 다음 최종 선발된 인원은 모두 여덟 명의 남녀. 나이도, 직업도, 성격도, 살아온 환경도 너무 달라 각자의 뚜렷한 개성을 가지고 있는 그들과 집단 상담을 통해 이들을 관찰하고 치유하는 영민의 이야기가 소설처럼 진행되고 있다.

 

 

저자는 게슈탈트 심리학 국내 최고 권위자로 알려 졌는데, 그래서 소설 속 장면들이 모두 허구의 이야기만은 아니라는 점이 더욱 공감과 이해를 불러 일으킨다. 40년 가까이 사람들의 내면을 탐구하고 실제 상담을 통해서 닫힌 마음을 열고,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을 보아 왔기에 그 과정이란 매우 생생하고 리얼할 수밖에 없다.

 

소설로서의 기승전결이나 사건, 반전 등을 기대하기 보다는 독특한 형식의 심리학서로 읽는 다면 더욱 흥미롭게 이 책을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소설로 구성되어 있어 쉽게 술술 읽히지만, 그 속에서 현대인들의 심리와 상처 받은 내면을 숨기고 살고 있는 사람들의 벽을 느낄 수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부록으로 수록된 '마음 들여다보기'에서 조금 더 전문적인 심리학적 이론이 정리되어 있어 전체 소설 내용을 다시 한번 분석해주는 느낌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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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미래를 찾는 여행, 서울 - 일본의 북 디렉터가 본 서울의 서점 이야기 책의 미래를 찾는 여행
우치누마 신타로 & 아야메 요시노부 지음, 김혜원 옮김 / 컴인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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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에서 비행기로 2시간 반 정도 떨어져 있는, 도쿄와 마찬가지로 천 만 명이 사는 도시 서울에서는 지금 유례없는 서점 붐이 일고 있다. 특히 작년 여름 이후로동네 서점이라는 개인이 운영하는 서점이 일주일에 한 군데는 생겨나고 있다. 시집만 파는 서점, 온갖 고양이 책을 다루는 서점, 독서 모임에 특화된 서점까지 하나같이 개성적이다. 게다가 서점을 개업한 이들은 80년대생을 중심으로 한 젊은 세대이다...이러한 흐름은 스위치가 갑자기 켜진 듯이 급격해 보이기까지 한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작년 서울 국제 도서전에서 가장 멋진 기획이 바로 '서점의 시대'였다. 동네 책방들을 이렇게 한 곳에 모을 생각을 하다니... 여러 곳에 흩어져 있어 가보고 싶었지만 방문하지 못했던 책방들을 도서전을 통해서 만날 수 있어 너무 좋았던 기억이 난다. 도서전을 꽤 오래 다녀봤지만 확실히 작년엔 특히 분위기가 확실히 달라 인상적이었다. 문학 자판기, 필사 이벤트, 상담을 통해 책을 처방해주는 클리닉, 책 읽는 버스 등 독자들이 참여할 수 있는 부분들이 많아지고, 작은 출판사, 동네 서점들이 함께해 더 풍성해진 느낌이었다.

사실 도서전에서 동네 서점들에게 주목할만한 확실한 이유가 있었다. 작년부터 우리나라는 유례없는 서점 붐이 일고 있기 때문이다. 시집만 파는 서점, 온갖 고양이 책을 다루는 서점, 미스터리, 추리 소설들을 전문으로 파는 서점, 독서 모임에 특화된 서점까지 제각각 개성이 뚜렷하다. 이는 서점을 운영하는 이들이 80년대생을 중심으로 한 젊은 세대가 많기 때문이기도 하고, 독립출판물이라고 하는 개인이 만든 책도 꽤나 인기가 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이 모든 현상들이 바로 이 책의 출발점이 된다.

일본을 대표하는 북 디렉터와 여러 라이프스타일 베스트셀러를 기획한 편집자인 저자는 도서 출간 기념 강연차 한국을 방문했다가 우연히 이러한 놀라운 흐름을 마주하고 큰 충격을 받는다. 서울의 독립 서점 열풍과 출판의 현장에서 그들은 어떤책의 미래가능성을 보았을까? 이 책은 그들이 서울을 대표하는 여러 서점과 서점인, 출판인 등을 직접 만나 취재하고 인터뷰한 내용을 엮은 것이다.

서울 사람들이 이 정도로 열심히 다른 나라나 산업을 연구하고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가지고 적극적으로 시도하고 있다는 사실은 책을 둘러싼 환경이 보다 절박해졌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아마도 가까운 미래에 일본에 닥칠 상황과 아주 비슷할 것이다. 물론 책의 미래는 실제로 그때가 와봐야 알 수 있다. 하지만 여행을 하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앞으로 책과 어떤 관련이 있는 일을 할 것인지 미래를 고민해보는 일은 가능하다. 이 책에 《책의 미래를 찾는 여행, 서울》이라고 조금 거창한 제목을 붙인 이유는 이러한 의미에서다.

한국의 서점을 다루는 기사에 반드시 소개되는, 이제는 너무 유명한 서점 '땡스북스'부터 맥주 파는 서점으로 북맥의 선두주자 '북바이북', 30대 시인이 직접 운영하는, 시집만 파는 서점인 '위트 앤 시니컬', 독립출판물만 다루는 한국 독립출판의 중심지 '유어마인드', 오프라인 중고 서점 붐을 일으킨 대표적인 인터넷 서점 '알라딘', 한국 서점의 상징적인 존재인 교보문고 광화문점, 미스터리로 둘러싸인 서점 '미스터리 유니온', 독서모임과 북클럽이 활성화된 '북티크' 등등... 정말 다양한 색깔을 가지고 있는 서점들이 책에 등장한다.

2016년부터 현재까지 서울의 서점과 출판의 현장에서 가장 주목 받고 있는 20여 명의 인터뷰는 책을 사랑하고 서점을 좋아하는 이들에게 너무도 흥미로울 것이다. 게다가 서점들 외에도 개성 있고 새로운 콘텐츠로 승부하는 유유 프레스, 북노마드, 워크룸 프레스, 매거진B, 월간 그래픽 등 다양한 소규모 출판사도 만날 수 있다. 무엇보다 저자인 두 사람이 일본에서 '책에 관해서'라면 누구보다도 뛰어난 현직 출판인이자 전문가라서 질문 자체도 매우 날카롭고 흥미로웠다.

독립서점들은 서울 시내에서 쉽게 찾아갈 수 있는 곳들도 많지만, 요즘엔 지방에도 아기자기한 색깔을 가지고 있는 개성 있는 독립서점들도 눈에 뛴다. 주인의 취향에 따라 책이 진열되고, 뚜렷한 테마를 가지고 있어 더욱 매력적인 곳들이다. 사실 책이야 인터넷 서점을 통해 주문하는 것이 쉽고, 빠르고, 적립금과 사은품 등의 혜택을 받을 수 있어 많이들 이용하고 있지만, 이들 서점의 역할은 단순히 책을 사고 파는데 그치지 않는다. 책을 구입하는 걸 넘어 다양한 취미 활동을 위해 서점을 방문하는 이들도 많고 말이다.

대형서점이 베스트셀러나 신간 위주로 진열을 할 때, 이들 독립서점들은 장소가 협소하고 반품도 번거롭거나 어렵기 때문에, 서점의 개성을 보여주는 몇 종에 구비 도서를 한정시키면서 자연스럽게 큐레이션을 하게 된다. 거기다 강좌나 사인회, 낭동회 등 다양한 책과 관련된 부가 서비스로 차별화를 두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책방인지, 북카페인지 헷갈리게 되는 경우도 있지만 말이다.

 

특히나 요즘은 독립서점에서만 판매하는 책이나 그곳에서만 받을 수 있는 사은품 등으로 뚜렷한 차별점을 두고 있기도 하다. 출판사들이 앞장서서 서점들과 연계해 이벤트를 하는 모습도 출판의 미래를 위해 매우 좋은 현상인 것 같다. 이 책은 실제 한국의 출판 현장을 고스란히 보여주면서, 책이 함께하는 서점이라는 공간 자체에도 주목하고 있어 특별한 것 같다. 전문 포토그래퍼가 작업한 서점의 다양한 공간들과 개성 있는 책들의 모습도 매력적이고 말이다. 새로운 책의 미래와 가능성을 발견하고 싶은 당신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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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이 노는 정원 - 딱 일 년만 그곳에 살기로 했다
미야시타 나츠 지음, 권남희 옮김 / 책세상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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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엌 창으로 보는 전망이 좋은 것도 관계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매일 기분 좋게 부엌에 선다. 마을주민회 어머니부에서 홋카이도 사슴 고기로 만두를 만든 체험도 영향이 있을지 모른다. 음식을 대하는 마음가짐이 조금 달라졌다. 홋카이도 사슴을 쏜다. 피를 빼고 해체한다. 그 고기를 간다. 만두피를 만들고 만두소를 넣어 찌고.

남편이 홋카이도에 한번 살아보는 게 소원이라고 해서 미야시타 나츠와 그녀의 세 아이들은 아빠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한다. 도시에서 나고 자란 남편과 그녀 였기에 홋카이도에서도 대자연속으로, 다이세쓰산국립공원 안에 있는 도무라우시라는 마을로 향한다. 그곳은 가장 가까운 슈퍼까지 산을 내려가서 37킬로미터나 가야 되고, ,중학교는 병설 학교로 현재 학생은 모두 합쳐 열 명, 휴대 전화는 3개 통신사 모두 불통, 텔레비전은 난시청 지역이라고 한다. 과연 그런 오지에서 열네 살, 열두 살, 아홉 살의 아이들이 살고 싶어 할까. 그런데 예상과 달리 아이들은 눈을 반짝거리며 재미있겠다고 찬성이다. 그곳엔 고등학교가 없기 때문에 장남이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일 년 한정으로 가서 살기로 한다. 그리고 미야시타 나츠는 그곳 생활을 에세이로 쓰기로 했고, 이 책은 바로 그 결과물이다.

'신들이 노는 정원'이라 불리는 마을, 도무라우시에서 온 가족이 보내는 봄방학 같은 일 년은 과연 어떨까. 곰과 북방여우, 훗카이도 사슴 등의 야생동물들이 수시로 출몰하고 한겨울에는 기온이 영하 20도까지 떨어지는 그곳, 도시의 속도와 경쟁으로 이루어진 삶에 익숙한 그들이 과연 산골생활에 적응할 수 있을까. 그런데 웬걸, 그곳에서 그들은 반짝반짝 빛나는 즐거움이 넘치는 나날을 보낸다. 우선 집에서 밥을 먹는 횟수가 급격히 늘게 된다.. 도시에 살 때는 일이 바쁘면 외식하는 일도 흔했지만, 여기서는 외식을 하려고 해도 식당이 없으니 말이다. 게다가 산에서 내려가서 먹고, 다시 올라오려면 가볍게 두 시간 반이 걸리니 웬만하면 외식은 꿈도 못 꾸는 생활이다. 산책 길은 매일 같은 곳을 걸어도 날마다 시시각각 다르다. 그리고 처음으로 공기가 맛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맛있는 물처럼 순한 맛, 음표로 말하자면 도레미파솔 같은 맑은 맛이 나는 공기란 어떤 걸까. 5월인데도 하염없이 내리는 눈을 보고 있노라면 크리스마스가 곧 다가올 거라는 착각이 들기도 한다. 하늘엔 별이 쏟아질 듯이 많이 떠 있는 그 곳, 속이 울렁거릴 정도로 별이 빼곡하다니.. 도시의 하늘에서는 꿈도 못 꿀 풍경이다.

 

돌아오는 길, 풍경이 달라졌다. 지금까지는 길가에 난 초록색 풀이라고밖에 인식하지 않았던 덩어리가 자기주장을 시작한다. 왕머루야! 호장이야! 이런 일은 종종 있다. 예를 들면 오보에 음색을 알면 지금까지 들어온 교향곡에서 갑자기 오보에 선율이 두드러지게 들리고, 그 곡이 새로운 얼굴을 갖게 되는 것. 몰랐던 말의 의미를 접하면 문장의 깊이가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울리는 것.

미야시타 나츠는 전작에서도 음악과 자연에 대한 편안하고 감각적인 묘사와 따뜻하고 선한 스토리가 너무 인상적인 작가였는데, 이번 작품에서도 자신의 장기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10월부터 4월까지 내내 눈이 내리는 날씨라니 얼마나 추울까. 게다가 그곳은 한여름에 저체온증으로 등산객들이 잇따라 쓰러졌다는 조난 사건으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초등학교는 물론 중학교에도 교복이 없어 각자 적당한 추리닝을 한 벌 입고 등요하는 학교라니. 근무하는 선생님들 역기 이런 오지로 부임을 자원한 이들답게 모두 괴짜로 아이들을 문화적으로 교육하겠다는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다. 그리고 이곳의 학교에는 불필요한 시험이나 숙제 대신 낚시와 캠핑, 등산 같은 모험이 매일매일 펼쳐진다. 세 아이들에게는 정말 그 어디서도 경험할 수 없는 최고의 학습 환경이 아니었을까. 아이들에게 자연이야말로 최고의 공부가 아닌가. 나도 미야시타 나츠 가족처럼, 가족끼리 꼭 끌어안고 딱 일 년만 이런 곳에서 살고 싶어 졌다.

특히나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 '아이 하나를 키우는 데는 마을 전체가 필요하다'는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는 이곳 산촌 마을의 모습이 너무도 부러웠다. 이곳의 입학식과 운동회, 학예회, 캠핑, 등산과 같은 학교 행사에서 보여지는 풍경이란 낯설지만, 한번쯤 경험해 보고 싶은 그것이었으니 말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엄마의 눈으로 아이들의 성장 과정과 일상을 세심하게 관찰해 내고 있는 이야기라,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에게 더할 나위 없이 멋진 책이 될 것 같다. 이 책은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이야기, 판타지보다 더 환상적인 현실을 그리고 있다. 특별한 사계절을 경험해 보고 싶다면, 평범한 일상의 소소한 행복을 느껴보고 싶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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