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케이지 : 짐승의 집
보니 키스틀러 지음, 안은주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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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화가 끝났지만 레스터는 여전히 주방에 서서 불편하다는 듯 발을 동동 굴렀다.
배럿은 전화기를 주머니에 넣었다. "문제 있나?"
"부사장님." 레스터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셰이 램버트는 좋은 사람입니다.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습니다."
"나도 아는 바야." 배럿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유감이지. 잘못된 타이밍에, 있어서는 안 될 장소에 있었으니까."            p.39

 

도시에서 가장 높은 최신 건물인 마켓플레이스 타워, 일요일이었지만 30층 최상층 두 군데에서 옅은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다. 서로 반대편에 위치해 있는 두 곳 말고는 온통 캄캄했다. 한쪽에는 사십 대 초반의 잘 차려 입은 여자가 있었고, 같은 층 반대편 끝에는 사십 대 초반의 키 큰 여성이 대충 묶은 포니테일과 평범한 복장으로 있었다. 두 사람은 각자 중앙 엘리베이터로 걸어갔고, 문이 스르르 열린다. 두 여자가 엘리베이터에 탑승했고, 곧 문이 닫힌다.

 

그리고 7분 뒤, 911에 신고 전화가 걸려 온다. 전기가 나가서 엘리베이터에 갇혔다는 신고였다.

 

 

다시 불이 켜지고, 엘리베이터가 다시 가동되었을 때 밖으로 걸어 나온 것은 젊은 여성이었다. 두 사람이 함께 탔는데, 한 사람만 살아 남았다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가능성은 단 두 개로 좁혀진다. 자살 혹은 살해. 엘리베이터 안에 남겨진 여성은 총상으로 사망했다. 죽은 사람은 패션업계의 거물 기업은 CDMI의 인사부 총괄 부장이었고, 살아 남은 사람은 얼마 전부터 같은 회사 법무팀에서 일하게 된 변호사였다.

 

살아 남은 변호사 셰이 램버트는 자살 사건을 눈 앞에서 본 목격자로 구출되지만, 점점 상황이 스스로의 무죄를 증명하지 않는 한 살인자로 몰릴 지경에 이르게 된다. 게다가 누군가 그녀를 살인자로 만들려는 듯한 음모까지 뒤에서 벌어지면서, 점점 범인이 되어 모든 것을 잃게 될 위기에 처하게 된다. 그녀는 죽은 여자가 자살했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해낼 수 있을까. 그리고 이 사건을 자살이 아닌 살인 사건으로 만들려는 이의 의도는 뭘까. 무죄를 주장해야 하는 이와 유죄를 증명하고자 하는 이가 팽팽히 맞서는 이 이야기는 충격적인 도입부만큼이나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며 끝을 향해 달려 간다.

 

 

그들이 결국 빈손으로 돌아오면 나는 최대한 설득력을 발휘할 것이다. 내게는 루시를 죽일 수단이나 동기가 전혀 없기에 그녀의 죽음이 자살이 아니라고 결론 내릴 합리적 근거가 없다는 것을 확인시켜줄 것이다.
나는 준비를 마쳤다. 생각을 정리하고 진술할 말을 연습했다. 거들먹거리는 그 여자와 함께 화장실에 갔을 때 찬물로 세수도 했고, 커피 한 잔과 글레이즈 도넛도 받아 들었다. 카페인 수혈을 받고 혈당도 되찾은 것이다. 이제 이 일을 끝낼 준비가 되었다.           p.123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보니 키스틀러는 기업 소송을 전문으로 미국 전역에서 사건을 수임해 성공적으로 활동한 소송 전문 변호사이자 서스펜스 스릴러 소설을 쓰는 작가이다. 그래서인지 이번 작품 역시 자신의 이력을 살려 주인공 변호사가 자신의 누명을 벗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디테일하게 그려내고 있고, 기업 내의 복잡한 법적 문제들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며 긴장감을 만들어 내고 있다.

 

<더 케이지>라는 원제 옆에 국내 버전에는 '짐승의 집'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그 이유는 주인공이 엘리베이터를 짐승 우리(케이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그 안에 갇혔을 때의 느낌이, 딱 '우리'에 갇힌 느낌이었던 것이다.

 

 

사실 이건 제로섬 게임과도 같다. 엘리베이터에는 단 두 명이 있었고, 한 명이 죽었는데 자살한 게 아니라면, 범인은 나머지 한 명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살아남은 사람은 총이 발사된 순간 자신이 그 일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걸 증명해야 할 의무가 생긴 것이다. 그런데 그걸 증명해야 하는 이가 다름 아닌 변호사라면, 법률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이라면 이야기는 재미있어질 수밖에 없다. 이 작품은 그녀의 과거와 현재가 교차 진행되면서 조금씩 드러나는 비밀과 반전들이 교묘하게 맞물리면서 치열한 두뇌 싸움을 탄탄하게 그려내고 있다.

 

셰이라는 인물이 숨겨온 비밀과 회사의 임원들이 감추고 싶어하는 비밀에 대한 궁금증, 그리고 지금 셰이의 현재에 이르게 한 과거 시점의 이야기들이 차곡차곡 쌓여서 거대한 스케일로 만든 다음 그 모든 것들을 폭발시키는 이야기의 장악력이 있는 작품이었다. 사실 제목에서 풍겨오는 이미지 때문에 이 작품을 읽기 전에는 사이코패스 살인마가 등장하는 스릴러가 아닌가 생각했었다. 거대한 기업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범죄와 음모가 난무하는 법조인의 세계를 그리는 스릴러가 궁금하다면 이 작품을 만나 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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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져 가는 음식들 - 우리가 잃어버린 음식과 자연에 관한 이야기
댄 살라디노 지음, 김병화 옮김 / 김영사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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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전 세계에서 길러지는 보리 가운데 인간이 먹는 것은 고작 2퍼센트뿐이다. 그 대부분인 60퍼센트가량은 동물 먹이로, 나머지는 몰트(맥주를 만들고 위스키를 증류하는 재료)를 만드는 데 쓰고, 극히 일부분은 발효시켜 간장과 된장을 만든다. 에머 밀과 아인콘처럼 보리를 음식으로 먹는 곳은 대개 먼 오지이거나 살기 어려운 지역이다. 에티오피아의 고원지대에서는 볶은 보리로 만든 보리차가 전통 음료로 남아 있고, 티베트인은 여전히 고지대의 에너지원으로서 보릿가루를 차로 반죽한 참파를 주식으로 삼는다.           p.125

 

세계를 먹여 살리는 모든 곡물에서 수천 년간 변함없이 유지되어 온 다양성이 사라지고 있다. 우리 삶의 여러 면모가 더 균질적으로 변했고, 온 세계가 사서 먹는 것이 갈수록 더 똑같아 지고 있기 때문이다. 정글과 우림에서, 밭과 농장에서, 모든 종류의 생물다양성의 상실이라는 위기는 지구 전체에서 전개되고 있다. BBC 기자이자 음식 저널리스트인 저자 댄 살라디노는 오랜 시간 인류와 함께 해왔던 수많은 음식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사라지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저자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취재한 결과물인 이 책은 우리가 잊었거나 존재조차 몰랐던 총천연색의 음식들을 소개해주고, 세계화와 대량생산이 가져온 음식의 종말에 대해 놀라운 통찰을 보여준다.

 

 '위기에 처하다, 그리고 멸종 위험이 있다'는 개념은 대개 야생 생물에 해당하는 말로 여겨왔는데, '세계에서 사라져 가는 음식들'에 대한 진지한 접근부터 매우 흥미로운 책이다. 시작부터 632페이지라는 두께가 전혀 부담스럽지 않은 이유는 각각의 음식에 실타래처럼 얽혀 있는 역사,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사연들이 화려한 향연의 풍미 넘치는 만찬처럼 펼쳐지고 있어 지루할 틈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책에 수록된 '위기에 처한 음식들'은 야생, 곡물, 채소, 육류, 해산물, 과일, 치즈, 알코올, 차, 후식의 10가지로 분류되어 있다. 각각의 카테고리에는 2~4가지 정도의 음식들을 만날 수 있다. 하드자 꿀을 얻기 위해 탄자니아의 에야시 호수로 향하고, 베어 보리가 자라는 스코틀랜드의 오크니에 가고, 오히구 대두를 만나기 위해 일본의 오키나와로 가본다. 미국, 인도, 중국, 멕시코, 볼리비아, 대한민국, 영국, 덴마크, 우간다, 시칠리아 등등 그렇게 우리는 이 책을 통해서 전 세계의 곳곳을 여행하며 다양한 음식들과 식재료들을 만나볼 수 있다.

 

 

 

다양성은 바깥 세계에서도 보존되어야 한다. 치즈가 처음 만들어지던 시절 이후로 인간은 자연의 숨겨진 힘에 고삐를 채워 초지에서 암소로, 젖에서 치즈로 옮겨놓았다. 치즈는 인간이 쓰는 이야기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그것은 살아남게 해줄 뿐 아니라 문화를 형성하는 데도 이바지한 음식이었다. 20세기 동안 과학은 모든 것을 더 많이 약속했다. 더 많은 음식, 더 많은 안전, 더 많은 균질성을 기약했다. 이 점에 대해서는 할 말이 아주 많지만, 그 때문에 대체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상실되고 있다. 살레, 스티첼턴, 미샤비너 같은 치즈는 단순한 음식 이상의 존재다.         p.428

 

인간은 야생의 것을 먹는 존재로 태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역사의 거의 모든 기간에 식물을 채집하고, 견과류와 씨앗을 모으고, 동물을 사냥하는 것이 곧 인간의 생존을 의미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오늘날은 지구에 사는 78억 명 가운데 섭취 칼로리의 대부분을 야생에서 계속 얻는 이는 고작 2000~3000명에 불과하다고 한다. 사회가 점점 산업화되면서 우리의 식생활도 달라졌고, 농경사회에 비해 야생 식품에 의존하지 않더라도 온갖 가공 식품들이 우리의 식생활을 대체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문제는 그로 인해 야생의 식물과 동물, 그들의 서식지도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다시 야생으로 돌아가 수렵채집을 하며 살아갈 수는 없겠지만, 왜 야생 식품이 중요한지, 환경적으로 또 물리적으로 현재의 위기를 헤쳐나갈 방법에 대해서는 모두 고민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저자는 말린 카발자 씨앗을 보며 그 밀이 견뎌온 수천 년의 시간에 대해 생각한다. 생겼다 사라진 수많은 제국, 살고 사랑하고 죽어간 무수히 많은 인간, 수천 번의 수확, 이 식물이 그 모든 일을 강인하게 겪어 냈다고 생각하면 어떤 음식도 허투루 생각하면 안 되겠다고 새삼 깨닫게 된다.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보물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뭔가를 잃기 전에는 그것이 소중한 줄 모르는 것이다. 수많은 위기에 처한 음식들을 지키지 않는다면, 결국 그들의 소멸로 인한 결과는 고스란히 우리에게 올 것이다. 이 책에 수록된 위기에 처한 음식들은 현재 우리의 존재를 만드는 데 이바지했다. 그것들은 우리가 어떤 존재가 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음식일 수도 있는 것이다. 아프리카에서 안데스까지, 최고의 음식 저널리스트가 10년 넘게 전 세계를 현장 취재해 소개하는 위기에 처한 음식들을 만나 보자. 하나의 음식을 잃는다는 것은 우리와 세계를 연결해주는 고리를 잃어버리는 것이라는 문구가 소름끼치게 와 닿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될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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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 이즈 홋카이도 - 2023년 최신 개정판 디스 이즈 시리즈
권예나.김민정 지음 / TERRA(테라출판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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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 이후 처음으로 떠나게 된 여행지가 바로 홋카이도가 되었다. 일본 여행으로 여러 도시들을 다녀 봤지만, 주로 아래 쪽에 있는 도시들로 여행을 갔었다. 오키나와, 교토, 오사카, 후쿠오카 등등의 도시들을 다녀왔는데, 위쪽으로 가보는 건 처음이라 무척 설렌다. 홋카이도는 눈이 많이 내리는 풍경으로 더 유명한데, 여름에 가려고 찾아보니 라벤더밭이 너무도 인상적이라 여러 후보지 중에서 단연코 시선을 사로잡았다.

 

특히나 홋카이도는 일본에서 가장 북쪽에 위치를 하고 있어서, 여름철에도 시원한 날씨라고 한다. 덕분에 일본 내에서도 여름철 인기 여행 지역이라고 하니 말이다. 위도 상으로는 블라디보스토크랑 같은 거의 비슷하다고 하니 날씨가 짐작이 될 것이다. 서울의 무더운 날씨에 지쳐 있다가 홋카이도의 선선한 날씨로 떠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처음 가보는 해외 여행지의 경우 가기 전에 가이드북부터 찾아 읽어 보는 것이 습관이다. 이번 홋카이도 여행을 위해서 선택한 것은 테라출판사의 <디스 이즈 홋카이도> 책이다. 보랏빛 라벤더 밭과 핑크빛 하늘이 너무도 예쁜 색감을 보여주는 표지 때문에 선택하게 되었다.

 

<디스 이즈 홋카이도>는 3년 만에 최신 개정판으로 나온 거라, 바로 다음달에 홋카이도 여행을 할 예정인 나에게는 따끈따끈한 최신 정보로 무장한 가이드북이 되어줄 것 같다. 표지부터 시작해 화보집을 보는 듯한 예쁜 사진들이 눈을 즐겁게 해주고,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등장하는 여행작가 ‘쏠트몬’의 귀여운 일러스트 또한 가이드북 읽는 재미를 더해준다.

 

 

분리형 맵북이 따로 수록되어 있어, 현지 여행 중에 떼어내서 가지고 다니기에도 편리할 것 같다. 맵북에는 제일 중요한 지도와 주요 도시 간 열차, 버스, 자동차 소요시간이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표기되어 있고, 시내 중심가와 인근 도시들까지 여행에 필요한 모든 지도들이 담겨 있다. 사실 처음 가보는 도시일수록 현지에서 이동 시에 지도는 필수이다. 구글 맵을 켜고 길 찾기를 하겠지만, 이렇게 얇고 간편하게 들고 다닐 수 있는 종이 지도가 있다면 아주 도움이 될 것 같다. 데이터가 끊기거나 스마트폰 배터리가 없거나 와이파이가 원활하지 않을 때에도 맵북만 있다면 문제가 없을 테니 말이다.

 

홋카이도는 지역이 넓은 편이라 어떻게 다닐지도 고민이었는데, 이 책에는 대중교통 이용법과 렌터카 정보에 이르기까지 교통 길라잡이가 확실하게 되어 있어서 좋았다. 일본 3대 라멘 중 하나로 꼽히는 미소를 베이스로 한 삿포로 라멘을 비롯해 유제품이 유명한 곳이라 각종 소프트 아이스크림과 치즈, 우유 등도 잘 소개가 되어 있고 수프카레와 징기스칸, 게요리와 카이센동 등 주요 음식들에 대해 주문하는 방법과 특징을 단계별로 알려주고 있어 여행 일정 짜는 데도 도움이 되었다.

 

 

삿포로의 맥주 투어, 오도리 공원의 축제, 오타루 운하와 스시, 온천 마을과 유빙 체험 등 홋카이도 여행에서만 만날 수 있는 즐길 거리들이 이 책에 가득해 3박 4일이라는 짧은 일정 동안 어디를 다녀오고, 어디는 다음을 기약해야 할지 고민 중이다. 세심하게 짜여 있는 테마별 추천 코스가 10가지나 되서 나처럼 홋카이도가 처음인 여행자들에게는 좋은 가이드가 되어줄 것 같다.

 

홋카이도의 최대 도시인 삿포로 외에도 오타루, 하코다테, 후라노, 비에이 등 중소도시 19개를 총망라한 정보가 담겨 있어 이 책 한 권으로 홋카이도 여행의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인기 맛집부터 현지인들만 아는 동네 맛집 등 먹방에 관련된 정보가 특히 많아서 여행의 주목적이 현지 음식을 즐기는 것에 있는 나 같은 여행자들은 아주 만족할 만한 가이드북이기도 하다. 먹방 뿐만 아니라 오직 홋카이도에서만 살 수 있는 핫템 쇼핑 정보들도 놓치지 말아야겠다. 디스 이즈 홋카이도 덕분에 내 마음은 벌써 아직 가보지도 않은 홋카이도로 떠나고 있는 듯한 기분이다. 각자의 취향에 맞는 코스로 완벽하게 홋카이도를 즐기고 싶다면, 처음 가는 여행의 든든한 동반자가 필요하다면, <디스 이즈> 시리즈를 만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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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덕질 - 일상을 틈틈이 행복하게 하는 나만의 취향
이윤리 외 지음 / 북폴리오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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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날, 의정부 어느 작은 산 아래에서 한 여자아이가 책을 꺼내 들었다. 아이는 아카시아와 곰팡이에 지배당한 가족들의 집에서 걷는 식물을 처음 만났고 축축한 공기 속에서 공포의 그림자와 흐린 삶이 교차하던 순간을 목격했다. 삶은 가난하고 별것 아니었지만 아이들을 위한 몇 권의 책을 마련하는 작고 소중한 마음이 있었다. 아이는 생명으로 붉게 번쩍이던 표지를 넘겼다. 이것이 내가 SF에 매혹당한 첫 순간이었다.        - 이윤리, 'SF와 나의 이야기' 중에서, p.18

 

<이웃 덕후 1호>에 이은 ‘미래엔 단편 에세이 공모전’. 제2회 수상작품집이다. 이번 제2회 공모전에서는 이전 회보다 늘어난 공모작 수뿐만 아니라 확연히 업그레이드된 글의 수준이나 덕력이 돋보였다고 해서 기대가 되었다. 이제는 사회적 현상이 된 ‘덕질’, 세상 곳곳에 숨어 있는 덕후들의 이야기를 모아 듣기 위해 만들어진 ‘덕후 에세이’ 공모전이라 이번에는 또 어떤 개인의 취향을 들려줄 지 궁금했다. 첫번째 공모전의 수상작은 총 다섯 편이었는데, 이번에는 총 일곱 편이다.

 

SF, 책, 여성 아이돌, 식충식물, 발레, 로맨스판타지, 인형 덕후의 진심이 가득 담겨 있는 글을 만날 수 있었다.  취미보다는 더 깊이 들어가는, 어쩐지 자랑하고 싶은 나만의 취향이기도 한 '덕질'은 삶의 활력소가 되어 준다. 물론 좋아하는 대상에 대한 덕질은 마음에서 끝내는 것이 아니라 가산을 탕진하게 하고, 집 안 곳곳의 공간을 침범해 가족들의 눈총을 받게 하고, 잠잘 시간을 줄여가면서 몰입하게 만들어 건강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그러니 덕질의 대상이 나를 구원하러 온 것인지, 망치러 온 것인지 헷갈리는 순간도 있다. 하지만 그 순간만큼 잠시라도 행복했다면, 그래서 그 시간들을 후회하지 않는다면 그걸로 충분한 것 아닐까.

 

 

 

사람들이 그저 현재에 머물며 꿈을 자꾸 잊어버리는 것 같아 안타깝다. 가을바람에 잎이 떨어지듯, 그대로 시들고 약해져 흩어지지 말고 우리 마음속에 꿈과 희망의 등불을 밝혀 보라고 말하고 싶었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먹고, 좋아하는 것에 관해 이야기할 때 가장 열정적이고 빛나는 사람이다. 발레 덕후로 입덕을 하고 그게 얼마나 좋은지 알게 되었으니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미뤄 두었거나 꼭꼭 숨겨 두기만 했던 좋아하는 일이 있다면 당장 꺼내서 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 강유주, '워킹맘 발레리나의 덕후 권하는 사회' 중에서, p.138~139

 

대상을 받은 작품은 <SF와 나의 이야기>이다. 어린 시절 SF를 어떻게 처음 만나게 되었는지, 문고본 SF 소설을 시작으로 <블레이드 러너>, <그리폰 북스 시리즈>, <네 인생의 이야기>로 이어지며 자신의 삶과 SF 소설을 함께 엮어내는 글이다. 가족사와 개인사가 SF 소설 작품들을 통해 위기를 극복하게 하고, 내일을 향한 기대를 하게 해주며 그렇게 과거와 현재가 연결되는 글이라 흥미롭게 읽었다. 최우수상 수상작은 <이외의 장소에서 만난 의외의 책들>로 나 같은 '책 덕후'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사회성이 부족해서 책 덕후가 되었다는 고백을 시작으로 초등학교 시절, 중고등학생시기를 도서관 단골로 지내며 자원봉사자로 일하기도 하며 책에 집착하며 살아온 나날들을 풀어 놓는다. 기묘한 책들과의 만남에 대한 부분도 흥미로웠는데, 지금은 추억 속으로 사라진 만화방에서 발견한 동인지, 옥중소설, 흑마술 등등 오직 책 덕후만이 공감할 수 있는 대목들이 많아 재미있게 읽었다.

 

우수상 수상작 다섯 편은 덕질의 분야가 조금 더 다양하다. 여성 아이돌을 응원하며 그와 함께 성장한 인생의 여정도 있고, 벌레를 잡아먹는 식충식물의 매력을 전파하고자 하는 식충식물 전도사와 40대의 나이에 발레를 시작한 발레 덕후의 이야기, 웹툰이나 웹소설 장르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로맨스판타지에 관해 진한 애정을 표현하는 덕후, 10년 동안 인형 덕후로 살아온 인형 수집광의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나 역시 뭐든지 좋아하는 그 순간에 진심을 다하는 성격이라 그런지 이 책을 읽으면서 더 공감이 되는 부분이 많았던 것 같다. 이 책을 통해 지금의 나를 기분 좋게 만드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져보면 어떨까. 순수하게 무언가를 좋아하는 마음이 어떻게 행복을 만들어 낼 수 있는지, 매일매일 좋아하는 것을 할 수 있는 삶의 기쁨이 어떤 충만함을 안겨주는지 깨닫게 된다면 소확행이란 것이 멀리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될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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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유산
미즈무라 미나에 지음, 송태욱 옮김 / 복복서가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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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싫어? 이런 물음을 던지며 앞으로 한 달, 두 달, 그렇게 오래 산다면 어떻게 해야 좋을까. 죽지 않는다. 어머니는 죽지 않는다. 집 안은 온통 솜먼지투성이고 빨랫거리도 계속해서 쌓였다. 이마와 목덜미에 난 흰머리를 해나로 염색할 시간도 없이 이미 피로로 몽롱한 채 살고 있는데 어머니는 죽지 않는다. 젊은 여자와 동거하는 남편이 있고, 그 남편과의 일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어머니는 죽지 않는다. 엄마, 대체 언제쯤 죽어줄 거야? 마음속에서 소리쳤을 뿐이지 실제로 소리내서 외쳤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p.256

 

엄마의 죽음이 바로 앞에서 서성거리는 것을 느끼면서, 왜 엄마가 죽지 않을까. 대체 언제쯤 죽어줄 거야..라는 생각을 해야 하는 딸이라니... 이들 모녀에게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현대 일본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작가 중 하나로 손꼽히는 미즈무라 미나에의 장편소설 <어머니의 유산>을 읽었다. 미즈무라 미나에의 작품은 아주 오래 전에 <필담>과 <본격소설>이 국내에 소개되었던 적이 있다. 그리고 십오년 여만에 신작이 국내에 출간되어 반가운 마음으로 읽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 실버타운에서 얼마를 돌려받을 수 있는지를 따져보는 자매의 통화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실버타운의 반환표와 장례식장의 견적서가 놓여 있는 책상 앞에서 언니와 여동생은 엄마가 남긴 돈을 계산해 보는 중이다. 어머니가 마침내 죽었다는 흥분, 어머니로부터 해바오디었다는 기쁨을 만끽하는 자매의 대화는 담백하지만, 어딘가 서늘하다. 어머니에게 휘둘리는 사이에 살아갈 욕망이 눈에 띄게 시들었고, 월경도 불규칙해지는 등 건강도 나빠진데다, 동생인 미쓰키는 남편과의 문제도 있었다. 대학의 안식년 휴가를 얻어 베트남에 머물고 있는 남편이 미쓰키보다 젊은 여자와 연애 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던 거다. 그렇게 미쓰키는 어느 날 문득 자신이 그리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었다. 그런대로 좋은 환경에서 자랐고, 파리 유학도 다녀왔으며, 남편은 대학교수이고, 자신도 대학에서 강사로 일하고 있는 그런대로 괜찮은 삶이라 생각하며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늙어서 무거운 짐이 되었을 때 어머니의 죽음을 바라지 않을 수 있는 딸은 행복하다. 아무리 좋은 어머니를 가져도 수많은 딸에게 어머니의 죽음을 바라는 순간쯤은 찾아오는 게 아닐까... 게다가 딸은 그저 어머니에게서 자유로워지고 싶은 것이 아니다. 늙음의 끔찍함을 가까이서 직접 보는 고통 - 앞으로의 자기 모습을 코앞에서 보는 정신적인 고통에서도 자유로워지고 싶은 게 아닐까. 젊을 때는 추상적으로밖에 알지 못했던 ‘늙음’이 두뇌와 전신을 덮칠 뿐만 아니라 후각, 시각, 청각, 미각, 촉각 모두를 덮치는 것이 또렷하게 보인다. 그것을 향해 살아갈 뿐인 인생인 것인가.            p.491

 

상류사회를 열망했던 어머니는 젊은 시절부터 사치를 좋아했다. 게다가 서구의 귀족 문화를 동경하며 저 높은 곳으로 날아오르기를 꿈꿨고, 그러한 욕망은 딸에게 고스란히 투영되었다. 어머니의 욕망을 그대로 투영한 삶을 충실히 살아온 언니, 로맨스 소설 속 주인공과 자신을 동일시하며 소설처럼 살길 바랐던 외할머니, 그 속에서 이들과는 다르게 살아왔다고 자부했던 미쓰키였지만, 그녀의 삶 또한 그 욕망에서 자유롭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가쓰라가 삼대는 평생 꿈을 꾸며 살아간다. 아름다운 것에 집착하고 고상하고 향기로운 세계를 부나방처럼 좇는다. 분수도, 만족도 모른다. 딸들은 아버지에게 지독한 아내였던 어머니를 싫어했지만, 병실에 갇힌 어머니를 외면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자신의 인생이 끝장났다는 불행에 미쳐 날뛰는 어머니를 보살피고, 받아주는 것 또한 수월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다른 남자를 만나고, 늙고 병든 아버지를 병원에 처넣었던 어머니를 어떤 자식이 이해할 수 있었을까.

 

서로에 대한 원망을 대놓고 드러내는 모녀 관계는 끊어지지 않고 지속됨며 여러 사람을 불행하게 만든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어머니라는 존재가 좀 독특하게 설정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는 내내 늙은 부모를 보살피는 것에 대해, 돌봄 노동과 모녀 관계에 대해 이런 저런 생각들을 하게 되었다. 누구나 언젠가는 '늙음'이라는 짐을 가지게 된다. 미즈무라 미나에는 가족 관계에 대해, 그 중에서도 모녀 사이의 역학 관계에 대해 사실적으로 그려내면서 인간이 늙어간다는 것에 대한 현실적인 이야기를 통찰력있게 보여주고 있다. 그리하여 어머니의 유산이라는 것이 재산이라는 물질적인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서서히 깨닫게 만들어 준다. 누구나 언젠가는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현실이라는 점이 더욱 마음 한 켠을 서늘하게 만드는 작품이었다. 남다른 여성 삼대의 아주 특별한 이야기를 만나 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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